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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카톨릭-바벨론

[스크랩] 로마 교황의 통치와 그 본색(로마교단의 실체) (2)/김장진 교수

by 디클레어 2010. 1. 22.
로마 교황의 통치와 그 본색(로마교단의 실체) (2)/김장진 교수 |
 

Ⅳ. 로마 교황의  본색

 

1. 로마 교황의 절대적 권위와 무오성 강조 

 

로마 교황은 소위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전 세계의 천주교 신도와 인류를 지배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최대한의 권위를 교황은 소유하고 있다.
교황의 수위권(Primacy)과 무류성(無謬性; Infallibility)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1) 교황의 수위권 강조 
로마 주교의 수위권 확보는 역사적 산물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의 수위권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에서 출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 보면
주교단과 교황 수위권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 「… 주교들의 단체인 주교단은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을 그 단장으로 포함시켜 이해해야만 권한을 가지는 것이고
목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은
전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직책상으로 완전한 최상 전권(全權)을 가지며
언제나 자유로이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주교들은 교도권(敎道權)과 사목행정권(司牧行政權)에 있어서
사도단(使徒團)을 계승할 뿐 아니라,
주교들 안에 사도단이 영구히 존속하므로 주교단은
단장인 로마 교황과 더불어 세계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최고 권한의 주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이 권한의 주체가 결코 될 수 없으므로
로마 교황의 동의 없이는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주께서 시몬이란 한 사람을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 그를 당신의 양무리 전체의 목자로 세우셨고,
베드로에게 맡겨진 메고 푸는 권한은 단장과 결합된 사도단에도 수여된 것이 확실하다. …
이 주교단이 교회 전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최고의 권한은 공의회에 장엄하게 행사된다.
그러나 베드로의 후계자가
공의회를 확인하거나 적어도 공의회로 받아들여야만 공의회가 성립될 수 있다.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며 확인하는 것은 로마 교황의 특권이다.
세계에 산재하는 주교들이 교황과 함께 이 단체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주교단의 으뜸인 교황이 주교들을 단체적 행동으로 부르거나
혹은 적어도 흩어져 있는 주교들이 일치된 행동으로 인준하든지
자유로이 받아들임으로써 참으로 단체적 행동이 되는 경우에 한한다」(p.78-79) ]
로마의 교황은 성직 계급으로
신권(神權)을 서품 할 수 있는 신품권(神品權) 혹은 사제권(司祭權)에 관한 한
다른 주교들과 동등하다.
하지만 재치교정권(裁治敎政權)에 있어서 교황은 전 교회와 그 모든 구성원에 대하여
최고(最高)이고 보편적이고 직정적(直政的)인 권한을 소유한다.
교정권은 교회를 다스리는 교도권, 신품권(사제권), 재체권(사목권)의 총칭인데
교황의 재치교정권은 그의 수위권을 확보해 준다.
교황의 수위권은 그를 선출한 추기경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주장한다.
교황을 모든 교회의 으뜸으로 삼고, 로마의 사도좌를 신앙의 머리로 간주하고 있다.
베드로의 계승을 내세우며 무모한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무류적인 교사요, 교회의 최고 입법자이며, 교회의 최고 재판관인 교황은
나사렛 예수님과 대조되는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한데 모은 인위적인 신의 존재라 할 것이다.
[  교황은 나사렛 예수님의 수제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라 하지만
예수님보다 더 큰 권세와 위엄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이다.
로마 교황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한 독일 언론의 신문 만평은 참으로 깊이 생각하게 한다.
“주님 우회하여 가십시오(Umleitung). 여기는 지나가시지 못합니다.
당신의 대리자(교황)가 사목 방문중입니다.”고 하는 경찰(Polizei)의 저지 장면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
추기경들의 선거로 선임된 한 개인이 천상천하의 전권을 행사하면서
지구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는 사실이 성경적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슈퍼맨으로서의 교황은 천주교에서 창조한 신적 존재이다.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면서 교황은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로마 교황의 무류성 교리 채택
로마 교황의 수위권보다 더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말이
“교황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교황의 무류성(Infallibility) 주장이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70년)에서 공식적인 교의로 채택한 내용이다.
186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Ⅸ,255대/1846-1878)에 의하여 개회된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카톨릭 신앙에 관한 교령, 로마 수위권, 로마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교의 등을 제정하였다.
700여명의 주교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극한 논란이
1870년 3월 6일부터 7월 4일까지 계속되었다.
7월 13일에 실시된 예비 채결 결과
찬성451명, 반대88명, 수정하여 승인하자는 주교가 62명이었다.
마인츠의 대주교 켓테러(Ketteler)외 5명의 주교들은
교황을 만나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제의는 철회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맨닝(Manning)주교와 독일의 세네스트레이(Senestray) 주교는
교황이 그 안을 거절하도록 고무하였다.
드디어 7월18일 정실 채결을 하였는데 찬성533명, 반대2명의 결과를 가져왔다.
반대하던 48명의 주교들은
교황에게 반대 편지를 보내고,
교황은 존경한다는 관례대로 투표에 참여치 않고 떠났기 때문에 반대표가 적었다.
교황은 반대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무류성 교의를 비준하고 말았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정의한 로마 교황의 무류성은 다음과 같다.
“초기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승을 충실히 고수하면서 ……
우리는 로마 교황이 성좌에서
즉, 모든 크리스챤의 목자요, 교사의 직책에서, 그의 최고의 사도적 권위에서,
그가 모든 교회에서 지켜야 할 신앙과 윤리에 관한,
베드로 안에서 그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한 신조를 정의할 때
하나님이신 구세주는
그의 교회에 신앙과 윤리 관한 교리를 정의하는 권한을 부여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무류성을 지녀야 하고,
따라서 로마 교황의 그러한 신앙 정의는 교회의 동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이 계시된 신조임을
우리는 가르치고 선언하는 바이다”
고 하였다.
말하자면 사도로부터 전승되는 신적 계시이므로
교회가 믿는데 그 계시의 내용 중 신앙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정의할 때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신적 계시를 수호하기 위하여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에게 오류를 범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신학자 뮐러(Mohler)는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교황의 무류성 교리 정착에 힘을 쓴 것 같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형상 아래 감춰져 있는 교회 안에서
진실로 역사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교회에는 신적인 측면과 인간적인 측면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상호간의 특성을 교환한다.
신적인 측면인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은
교회 안에서 결코 오류가 없는(無謬的) 요소이고 영원토록 확실하다.
또한 인간적인 측면도 무류적이고 확실하다.
왜냐하면 신적인 것은
결코 인간적인 것과 분리되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직접적인 역사 섭리를 왜곡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류한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황만을 오류가 없는 자로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교황의 무류성을 주장하는 천주교에서는 무류성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교황도 인간이기에 죄를 지을 수 있고, 고백성사를 받는다고 하면서도
교황은 무류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설정하는 한계는 4가지 국면이다.
 ① 교황이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직책상, 성좌에서 말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는 것
 ② 교황이 신앙과 윤리에 관한 교의를 정의할 때에만 무류성을 지닌다는 것
 ③ 교황이 계시의 전 내용을 포함하고 사도 바울이 말한 신앙의 유산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무류성을 지닌다는 것
 ④ 교회는 반석이요, 천국의 열쇠를 지닌 교황이 전 교회를 향하여 의도했을 때
무류성을 지닌다는 것
결국 교회가 무류성을 지니므로
교회의 으뜸이요 대변자인 교황은 무류성을 지니게 되고
그의 인격은 어떻게 되었던 간에 죄를 범할지라도
신앙과 윤리 문제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오류가 없다는 주장은
비 성경적인 논리이며 억지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황도 개인의 인격을 가졌으면 인격과 직책이 분리되어
오류가 있고 없는 양면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교황 무류 교리가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채택되었을 때
전 유럽은 대단한 반발을 하였었다.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은 더욱 심하였다.
독일의 경우 비스마르크(Bismark) 재상을 중심으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권 강화에 강력한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문화 논쟁 운동(Kulturkampf-편주:1870년대 독일의 로마교 억압정책)을 전개하였다.
특히 뮤니히 대학에서 47년간이나 교회사를 강의하였던
저명한 신학자 될링거(J. J. I von Dollinger) 교수는
강력하고도 계속적으로 교황의 무류성 교의 채택을 반대하다가 출교당하기도 하였다.
[ 그의 저술에 다음과 같은 교황 비난 내용을 담고 있다.
“내게 있어서 교황의 주권과 무류성에 관한 모든 교리 체계는
궤휼과 기만과 폭력에 의한 것이다.
그 모든 교리들은 5세기 이후에 널리 유포된 위조문서와 조작된 전설에 근거하여 꾸며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한다”,
“교황들 중에서 양심 있는 교황들은 교황의 역사를 알고, 교황의 도덕성을 잘 알기 때문에
교황의 무류성 교의에 크게 반대하였다.
비질리우스(Vigilius,59대/537-555), 인노첸시오3세(Innocentius III, 176대/1198-1216),
클레멘스 4세(Clemens IV,183대/1265-68), 그레고리 11세(Gregorius XI,201대/ 1370-78),
하드리아노 6세(Hadrianus VI,218대/1522-23), 바오로 4세(Paulus IV, 223대/1555-59)등이다”
고 하였다. ]
천주교 내부에서의 반대는 교황권의 강화 추세에 밀려 조용해지기 마련이었다.
강력한 개신교회의 교황 무류성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12월 8일까지 계속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다시 한번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주교의 교도권과 무류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신 구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결정할 때에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교회에 허락하신 무류성(無謬性)은,
교회가 거룩히 보존하며 충실히 설명해야 할 계시의 유산의 범위와 같이 광범한 것이다.
주교단의 으뜸이신 로마 교황이 모든 신도들의 최고 목자와 스승으로서
형제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결정적으로 선포할 때에,
교황은 직무상의 무류성을 향유한다”
고 하였다.
계속하여 말하기를
“그러므로 교황의 결정은 교회가 동의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개정될 수 없는 것이라 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베드로 안에서 이미 교황에게 약속된 성신의 도움을 받아 선포된 것이므로
이 결정은 그 누구의 승인도 필요치 않고
다른 판단을 요구하는 어떠한 상소(上訴)도 있을 수 없다.
그럴 때에는 로마 교황이 개인 자격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교회 자체의 무류(無謬)의 은사(카리스마)를 특별히 지니고 있는
세계 교회의 최고 스승으로서
카톨릭 신앙의 교리를 설명하고 옹호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교회에 약속된 무류성은
주교단이 베드로의 후계자와 더불어 최상 교도권을 행사할 때에도
주교단 안에 존재한다”
고 하였다.
이는 모든 사람은 무조건 믿고 순종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주교회의 교황 절대화를 볼 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진 기독교가 아니라,
베드로의 열쇠와 반석을 구심으로 하여
2천년 역사의 전승을 결합시킨
그리고 역사의 과정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을 창출하여 믿고 따르는
견고한 기독교적 인본주의 혼합 종교라 해야 할 것이다.
한 생명을 지닌 인격체가 성령만이 할 수 있는 신앙과 윤리의 문제로
오류 없는 판단과 교도, 그리고 선언을 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2.  로마 교황의 신학적 오류들

 

천주교회의 주장대로 로마 교황이 무류성을 지닌 초월적 존재라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무죄성과 무류성을 구분하고,
무류성도 교황이 신앙과 윤리에 관하여 성좌에서 전 교회를 향하여 정의하고 말할 경우에 국한하고 있지만 석연치 않다.
도덕적 연약은 개인적이라 해도 공인으로서 로마 교황은 역사적으로 과연 무류한가?
결코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과오투성이의 역사를 볼뿐이다.
교황의 무류성 교리가 1870년 7월 18일에 비준되었는데
교황이 무류하다는 교리가 왜 그렇게 늦게 발견되었는지 이상하지 않은가?
진실을 진리라고 해야지 억지로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교황의 무류성을 주장하므로
무류하지 않은 사실을 증거로 제시해야 그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에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잘못된 교리적 판단의 오류들
 ①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 36대/352-366)의 오류 :
이단으로 알려진 아리우스(arius,250?∼336?) 편을 들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를 파문하였다.
 ② 교황 조시무스(Zosimus, 41대/ 417-418)의 오류 :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를 정통으로 옹호하였다.
 ③ 교황 비질리우스(Vigilius, 59대/537.-555)의 오류 :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별개의 두 인격을 주장한 이단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용납하였으나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는 네스토리우스( Nestorius ?∼? )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④ 교황 호노리노 1세(Honorius I, 70대/625-638)의 오류 :
단의설을 주장하므로  680년, 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교황 레오 2세( Leo II, 80대/ 682-683)에 의하여 유죄 선고가 확인되었다.
교황이 오류가 없다면 한 교황이 어떻게 다른 교황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수가 있는가?
 ⑤ 교황 복자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Ⅲ,167대/ 1145-1153)의 오류 :
결투를 승인하였으나
교황 율리오 2세(Julius Ⅱ,216대/ 1503-1513)와 교황 비오 4세(Pius Ⅳ, 224대/ 1559-1565)는

이를 금지시켰다.

누가 오류가 없는가?
 ⑥ 교황 식스토 5세(Sixtus Ⅴ,227대/1585-1590)의 오류 :
라틴어 표준역 성경을 편찬하고 그 서문에서 책의 무오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3천군 데나 수정하였다.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 231대/1592-1605)는
다른 성경을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⑦ 교황 하드리아노 2세(Hadrianus Ⅱ,106대/ 867-872)의 오류 :
비종교의식 결혼이 유효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교황 비오 7세(Pius Ⅶ, 251대/ 1800-1823)는 무효하다고 정죄하였다.
 ⑧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us Ⅳ,207대/1431-1447)의 오류 :
아코(Ark)의 요한(John)을 살아 있는 마녀란 이유로 불태워 버리라고 선고하였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 258대/1914- 1922)는
그녀를 성인이라고 선언하였다.(요한=잔 다르크, Jeanne d'Arc 1411?∼1431)
 ⑨ 교황 바오로 5세 (Paulus V/ 233대/1605-1621)의 오류 :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기존의 천동설을 부정하자
시편 93:1을 근거로 1616년 정죄하였다.
그 說을 취하거나 가르치거나 변호가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1632년 그는 책(“천문대화”)을 출판하였으므로 투옥된 후 1642년 죽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전설도 있지만  1835년 금서가 해제되었을 때
케어주교의 말이 더 재미있다.
“지구는 움직여도 좋다는
교황(그레고리오 16세 Gregorius XVI,254대/1831-46)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
그래도 교황은 무오한가?
차라리 교황의 무류성 교리가 없었다면 로마 카톨릭의 진실이 돋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 주는 진실은 너무나 냉정하여
교황이 무류하다는 주장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다.

 

(2) 결정의 번복이 보여주는 오류들
① 스테파노 6세(Stephanus VI, 113대 교황/896-897)를 중심으로 한 오류 :
로마 교황의 무류성 교리를 반대한 주교 요셉 스트로스마이에르(Strossmayer 1815-1905)는 카톨릭 백과 사전에서
교황 스테파노 6세가 전임 교황 포르모스(Formosus 111대/891-896)와 어떻게 대립하였는지
특별 진술하였는데 매우 흥미롭다.
스테파노 6세는 전임 교황의 죽은 지 8개월 된 시체를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보좌에 앉히고 재판하였다.
죽은 포르모수스 교황에게 교황의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웠으며
썩어 문드러진 뻣뻣한 손가락에 홀을 쥐게 하고 재판정에 앉혀 놓았다.
대답이 없는 그 시체는 정죄를 당하고 교황복이 벗겨져서 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마차 뒤에 매달아 로마의 길거리를 끌고 다니다가 티베르 강에 던져 버렸다.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그런데 스테파노 6세의 계승자인 교황 요한 9세(Joannes Ⅸ, 116대/ 898- 900)는
강에서 포르모수스의 시체를 건져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큰 영광을 드리며 재매장하고,
스테파노 6세의 판결을 파기시켰다.
그리고 포르모수스가 내린 명령들이 유효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세르지오 3세(Sergius Ⅲ, 119대 교황/ 904-911)는 로마의 한 종교회의에서
포르모수스를 단죄한 스테파노 6세의 결정에 찬동하였다.
교황들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교황의 무류성 교리를 포기케 한다.
 ② 성 빌로메나(Philomena) 사건을 중심한 교황의 오류 :
1802년 나폴리의 사제가 빌로메나의 성골(유골)을 발견한 바 있다.
그 밑에 있던 두 수녀의 꿈을 통해 받은 빌로메나의 생애와 기적에 관한 계시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래서 교황 레오 12세(Leo ?, 252대/1823-1829)는 그녀를 성녀(聖女)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레고리 16세(Gregorius XVI, 254대 교황/1831-1846)는 그 화상을 축복하였고
비오 9세(Pius Ⅸ,255대 교황/ 1846-1878)는 기념 성무일과의 미사를 정했다.
1928년에 시성(諡聖)된 「뀌레다르스」도 찬성하였다.
하지만 이 어찌된 일인가?
「성녀 빌로메나」는 실재하였던 인물이 아니었다.
가상적인 인물로 판명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3) 기타 교황의 무류성을 묻는 질문들
로마 카톨릭의 주장이 억지이지만 비판적인 질문에 대하여 교묘히 피해 간다.
개인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여도 교황의 무류성과는 무관하다는 대답이다.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은?
 ① 베드로가 무류성을 지녔다면 어떻게 그는 구세주를 부인할 수 있었겠는가?
 ② 인간이 어떻게 무류성을 지닐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만의 속성이 아닌가?
 ③ 무류성을 지닌 교황은 그의 관면권(寬免權)을 잘못 사용하지는 않는가?
 ④ 로마 교황들[니콜라스 1세 (Nicolaus I,105대 /858-867)등]은
    위령집(僞令集)으로 알려진 문서로서 통치하지 않았는가?
 ⑤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 196대/1316-1334)는
    구개의 천국을 가리키며 한 천국은 구원받은 신자의 것이고
    다른 천국은 미리 예정된 자를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어떻게 무류한가?
그 외에도 얼마든지 따질 수 있다.
교황의 무류성을 주장하기 전에 그
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은혜를 가르침이 더 급선무였을 것이다.
 

 3. 로마 교황의 이교적 요소들

 

1989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된
제44차 세계성체대회(Covenyus Eucharisticus Internationalis)는
한국 기독교의 각성을 촉구한 대회였다.
진리의 분별력이 없는 일부 개신교도의 영적 혼란을 가져왔지만
TV로 중계된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의 참 진리를 넘어선 의식적 행사임을 깨닫고,
기독교 본래로 되돌아갔던 종교개혁의 이유를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행사를 집전하는 장엄한 사제들의 행렬과 교황의 휘장, 복식 등은
성경을 믿는 기독신자에겐 이교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⑴ 칭호 상에 나타난 이교적 요소
교황이란 뜻이 아버지를 나타내는 파파와 다리를 만드는 자라는 폰티브임을 알고 있다.
이 칭호는 어디서 왔는가?
맥밀란사의 백과사전에서
고대 로마의 최고 사제, 즉 로마의 다리 건설의 최고 책임자에게서 따 온 것이
최고 사제 “폰티브”라고 설명하고 있다.
파파란 칭호는 카톨릭 백과사전의 미트라 예배에서 보면
그 분파의 수장사제 “파테르 파트룸” 즉 “아버지 중의 아버지”에서 나온 것으로 알 수 있다.

미트라 종교의 아버지가 로마의 종교를 지배하였고
기독교와 혼합되어 로마 카톨릭의 파파로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종들 중의 종이 교황이요, 아버지 중의 아버지가 교황이다.
그를 향하여
“교황 만세”라고 환호하는 카톨릭 신도들과  “교황 성하”라고 존경하는 사제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이 든다.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중보자는 그리스도시요,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는 성령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을 교회의 “보이는 머리”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라고 믿기 때문이 아닌가?
좀더 뿌리를 설명해 보자.
고대 바벨론의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바그다드에서 바스라까지 달리는 철도가 멈추는 곳이 바벨론의 도시였다.
“바벨론 멈춤, 승객을 위하여 기차는 여기서 정지”
(Babylon Halt, trains stop here, to pick up passengers)
라는 표지가 그 사실을 말해 준다.
"니므롯"이 바벨론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니므롯으로부터 바벨론 왕과 바벨론 신비 종교의 수장들의 계보가
벨사살 왕 때까지 계속되어 내려왔다.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단 5:4)고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바벨론의 종교 축제였다.
그들이 마신 술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금, 은, 기명이었다.
왕은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술을 마시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멸망의 전주곡이었다.
그 나라는 망했으나 그들의 종교는 로마 제국에 스며들었고,
바벨론 종교의 대제사장 “폰티펙스 막시우스”제도가
로마 집권자 줄리어스 시저(B. C. 47)때부터
A. D.376년 그라티아누스 황제(재위:375-383) 이전까지 사용되었다.
378년 무렵 로마 주교 데마수스 1세(Damasus I,37대 교황/366-384)가
최고 승원장으로 선출되어 로마 카톨릭의 교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바벨론 종교와 기독교의 혼합이었다.
바벨론의 신비 종교와 기독교의 혼합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가?
순수 기독교와 이교적 혼합은
콘스탄틴 대제(재위:306-337)의 기독교 개종과 연관시켜 살펴보아야 한다.

 

⑵ 기독교와 이교의 공통점 모색
 

콘스탄틴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개종자로 알려져 있다.
300년 동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사실상 종결되는 조치였다.
이 칙령은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한 종교로 선언하지는 않았으며
이방 종교를 금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를 단순히 묵인한 311년의 갈레리우스가 행한 법률보다 높은 것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내에 있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법률 앞에서 동등한 발판을 얻게 하였다.
제국의 보좌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사람이 앉았다.
황제는 교회를 박해하는 대신에 호의의 소나기를 내렸다.
기독교의 성직자는 시민들이 꺼려하는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 신자에게 많은 하사금을 주었으며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지에 거대한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주일 성수를 위하여 주일의 모든 작업을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기독 신자란 이름이 죽기 위하여 태어난 순교자들이 아니었다.
이제는 로마 사회에서 승진의 수단이 되었으며 정치적 군사적 특혜의 신분증이 되었다.
큰 물질적 이득을 향유하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수백만의 이교도들이 다투어 교회와 합류하며 기독 신자가 된다 하였다.
교회에는 양적인 폭발과 함께 타락의 홍수가 엄몰해 왔다.
진리의 기준은 없이 명목상의 신자화 운동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기독교의 순수성이 침해되었다.
300년의 박해를 견디며 자라 온 순교자의 피가 이교도의 의식과 종교적 전승과 혼합되어
중세 암흑기의 긴 터널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장본인이 황제 콘스탄틴 대제이다.
그가 306년 영국에 있는 로마 군대를 향해 선전포고를 한 후,
이태리와 북 아프리카를 다스렸던 막센티우스(재위:306-312)와 적의에 찬 대결을 하였다.
로마성 북방 10마일 지점인 사카 루브라에서 두 황제의 군대는 접전하게 되었다.
그 군대 사이에 타이버 강이 있고, 그 강을 가로질러 밀비안 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에서 3일을 대치하였다.
미트라 종교의 신봉자였던 콘스탄틴은
군인의 신중 최고의 신인 미트라에게 예배하며 전쟁의 결과에 대한 점을 치게 되었다.
에스겔 21장 21절의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란 말씀을 보면 점치는 관습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틴은 점을 쳤으나 패배한다고 점괘가 나왔다.
그런데 전쟁 전날 서편에 지고 있는 태양위에 한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 표시 안에 나타난 글자는 “이 표시 안에서 정복하라”는 정복의 표징이었다.
다음날인 A.D.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틴의 군대는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따라 진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십자가를 숭상하게 되었다.
이교 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콘스탄틴이 개종했다.
하지만 그 신빙성은 의심된다.
그는 기독교와 미트라 종교를 혼합시켜 로마 제국의 힘을 강화하려고 했다.
두 종교의 유사점을 찾아 투쟁 대신 화합의 제국을 다스리려 하였다.
핍박은 끝났으나 타락은 시작되었다.
순수 기독교와 미트라 종교의 혼합으로 로마 카톨릭 종교가 탄생했다면
그에 따른 혼합의 요소를 증거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최고 수장 사제의 로마 교황에게로의 전승 속에 남아 있는 이교적 상징들이
지금도 사용된다.

 

⑶ 교황과 관계된 상징의 이교적 기원
① 베드로의 열쇠와 야누스의 열쇠
로마 교황의 권위는 열쇠로 상징된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는 말씀을 근거하여 로마 교황의 권위를 강조한다.
마치 인간 베드로와 자칭 그 후계자들에게
천국과 이 땅에서 교회의 전권이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오해이다.
열쇠를 준다는 말씀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서 이해할 때 권한을 위임한다는 의미이다.
일차적으로 베드로 개인에 대한 약속으로
그가 오순절 이후 말씀 운동, 예수 복음 전파의 장본인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교회의 참 사역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닻을 좇아 교회를 간접적으로 치리 할 권리를 주신 것으로 해석된다.
열쇠로서 맨다는 것은 금지, 열쇠로서 푼다는 것은 허용을 의미한다.
이 치리권을 사도직의 계승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를
미트라 종교에서 사용하는 권위의 상징인 열쇠와 결합시킨 데 있다.
로마 종교들의 최고 사제를 갈대아 명칭으로 페트르(Peter : 비밀들의 해석자)라 하였다.
로마 종교의 대 해석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를 연결시킨 것이 드러난다.
“니므롯”은 비밀과 신비를 열어 보이는 자로 신격화된 인간의 맏아들인데
출애굽기 13장 2절의 “초태생”이 히브리어로 페테르이다.
신들의 후계자요, 맏아들이요, 최고 수장사제로 받들어진 로마황제에게는
“열쇠” 두개가 권위의 상징물로 주어졌다.
로마인들은 1000년 동안이나 남신 야누스와 여신 키벨레의 “신비 열쇠”를 신봉하여 왔다.
페르시아의 신비 종교인 미트라교에서도 태양신은 열쇠 두개를 가지고 있다.
황제가 사용하던  최고 수장사제의 칭호가 378년경, 로마의 감독에게 사용되었을 때
신비한 열쇠의 소유자는 로마의 교황이 되었다.
교황은 이 신비 열쇠를 소유한 지 50여년 후인 A. D.431년에,
이 열쇠가 바로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과 땅의 열쇠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것은
야누스가 두 얼굴을 가지고 여러 문을 여닫는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신성한 수탉을 가지고 있는데
이 수탉을 베드로를 회개시킨 닭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요18:27).
베드로 사도와 비밀 해석자 페트르,
야누스의 수탉과 베드로에게 들린 닭 울음,
야누스의 열쇠와 베드로의 열쇠를
교묘히 일치시킨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② 교황의 주교관과 다곤의 어두관
교황은 때때로 주교관을 쓰고 수갑을 끼고 화려하게 장식된 법복을 입고 나타난다.
주교들이 쓰는 골무의 모양을 한 주교관은
물고기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주교관은 직무의 표시, 즉 교황, 주교들, 대수도원장의 직무를 나타내는 관이다.
고대 유대 대제사장의 공식적 머리 장식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나
그 기원을 다곤신에게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레이야드는 “바벨론과 니느웨”란 책에서 주교관과 다곤의 어두관을 동일시 하였다.

 다곤신의 어두관을 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다곤신은 고대 블레셋과 후에 베니게의 농업의 신인데 반신반어의 모양을 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조각에 나오는 다곤의 모자와 교황의 어두관이 거의 같다.
그래서 아이론사이드는
“교황이야말로 바벨론 신비종교의 대사제의 직계 후계자이며 어신 다곤의 신하이다”
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교황이 우상 숭배하던 전임자처럼 옷을 입고 어부의 반지를 끼고 있음을 지적했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Ⅵ, 262대/ 1963-1978)가 미국을 방문하여
“평화”에 대한 메세지 낭독의 모습에도 분명히 드러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264대/1978-2005)의 분주한 세계나들이를
상징하듯 주교관이 곧 현대 국제 정치의 외교관임을 풍자한
어느 신문의 만화도 어두관을 보여준다.
③ 교황의 어깨에 걸치는 영대(領帶)
교황 혹은 주교, 신부 부제들은 카톨릭 교회의 의식때에 영대를 목에 건다.
  a. 영대의 색깔 … 영대는 흰 양털로 만들지만 의식에 따라서 색깔이 다르다.
미사 때에는 미사 제의의 색깔과 같다.
사제가 입는 공식 제의의 색깔은 다섯 가지인데 실제로 일곱 색깔을 사용한다.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176대/1198-1216) 교황 때에 결정된 다섯 가지의 색깔은
흰색(결백, 기쁨의 상징), 붉은 색(피, 열, 사랑의 상징),
녹색(생명의 희열, 희망, 영생의 상징), 자주색(참회, 보속의 상징), 검은색(죽음의 상징)이다. 이 외에 장미색 혹은 자주색과 흰색의 중간색이 사용된다.
영대는 또 영세, 기타 축성, 강복식 때는 희색을 메며,
죄를 사하는 사죄권의 행사 때는 자색을 멘다.
  b. 영대 메는 법 … 세 종류의 성직에 따라서 메는 법이 다르다.
주교는 영대를 목에서 기다랗게 그대로 내린다.
사제는 원칙적으로 영대를 십자형으로 메고,
부제는 왼쪽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비스듬히 멘다.
이를 멜 때는 친구(親口 : 경의를 표하거나 사랑과 평화를 나누기를 위한 입맞춤인데,
물건에 親口함은 속죄, 회개 기원을 의미한다)하면서 사제는 이렇게 기원하다.
「주여, 원죄의 타락으로 잃은 불사불멸의 영대를 도로 내게 주사,
주께 봉헌하기에 합당치 못하오나 내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옵소서」
  c. 영대의 상징적 의미 … 사제들이 미사나 기타 성무를 집행할 때
목에 걸쳐 무릎까지 늘어뜨리는 영대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어떤 권위 혹은 권한을 상징한다.
신품 성사를 받은 사제의 권한과 품위를 나타내므로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의 메는 법이 다르다.
고백소에서 영대를 멘 사제는 사죄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 외에도 의식을 집행할 수 있는 사제의 권위와 품위를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또 다른 의미는 영대가 성직자의 성덕(聖德)을 나타낸다고 한다.
사제로서, 지도자로서의 영적 덕행을 상징하면서
대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직의 거룩함을 뜻한다는 것이다.
밝고, 옳고, 크고, 착하고, 빛나고, 아름답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나 행실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덕성을 가진 상징으로 보아서 그 권위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d. 영대의 이교적 기원 … 영대는 6세기에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기원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옛날 유대인들이 망또를 입을 때 땀닦는 손수건에서 유래했다는 설명과,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귀족들이 착용하던 화려한 허리띠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랄프 우드로우는
“영대는 기독교 이전에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 사제가 입는 제복”에서
기원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영대를 로마의 성 아그네스 교회당에서 축복 받은 두 마리 양의 흰털로 만들어
교황 직무의 충만함을 나누는 상징으로 주교들에게 보내는데,
베드로의 무덤에 밤새도록 놓아두는 관습이 이교 관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④ 성 베드로의 의자와 청동상
성 베드로의 성당 안에는
베드로의 청동상과 베드로가 앉아서 강론한 베드로의 의자,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성 베드로의 상이 그려져 있다.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베드로의 무덤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의 청동상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tius VIII,193대/1294-1303)의 위촉을 받아
1300년에 캄바니오의 아르놀프가 제작한 작품이다.
그 동상은 로마 카톨릭 신자의 지극한 존경의 대상으로서
앞으로 뻗은 오른발이 많이 닳아버린 상태이다.
많은 순례자들이 존숭한 나머지 입을 맞추고 손으로 만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려고 할 때 이러한 행위를 하게 된다.
출애굽기 32장 1-6절의 사건을 생각게 한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 형상의 신을 만들어 섬기는 행위이다.
교황의 권위를 베드로에게 기원케 하니
자연적으로 베드로의 동상은 숭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의 의자도 그렇다.
베드로가 실제로 앉았다는 의자는 몇 년이 된 의자인가?
1968년 7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262대/1963-78)가 임명한 한 과학위원회는
의자의 어떤 부분도 베드로 시대의 것으로 보기에 족하리만큼
오래된 것이 없다고 보고했다.
탄소 연대 측정법과 여타 방법들에 관한 보고서는
銅 의자가 9세기 이상 더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카톨릭 백과사전은 또 베드로 의자 전면 판화에
헤라클레스의 고역과 함께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동물들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바벨론의 헤라클레스와 성경의 니므롯이 대비된다.
성 베드로의 의자는 기독교적 기원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성 베드로의 동상에 입 맞추는 행위도 비기독교적이다.
바알숭배의 전형적인 형태가 금송아지 형상에 입 맞추는 것이었다.(왕상19:18, 호13:1-3)
⑤ 교황의 운반 행렬
브리태니카 사전 22권 교황항을 보면, 교황의 운반행렬에 대하여
‘엄숙한 의식들이 진행될 때
교황은 높은 등받이가 있는 적색 우단으로 만든 이동식 의자인 세디아에 앉아서 운반되고,

깃털로 된 큰 두개의 부채 파벨리로 호위 받는다’고 묘사하였다.
실로 장엄한 행렬이다.
교황이 운반되면 사람들은 교황 앞에 머리를 숙이며 경의를 표한다.
교황을 호위하는 부채의 위풍도 대단하다.
화려한 사제의 복장을 한 그의 거동은
성경적인 빛을 상실한 일반적인 성도들에게는 흠숭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러나 이 행렬은 기독교의 독창적인 의식이라기보다도
고대 바벨론 종교의 우상이 옮겨지는 모습이나
이집트 등지에서 왕이나 사제가 운반되는 행렬과 유사함이 드러난다.
헤스탐의 ‘종교 윤리 백과사전’의 형상과 우상들의 항목을 보면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기원전 15세기에 바벨론의 사랑과 다산의 여신 이쉬타르의 상(像)이
바벨론에서 이집트로 운반되었는데
그 화려한 의식과 교황의 행렬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운반되는 우상의 행렬에 대하여 복음의 선지자 이사야는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사46:6-7)
고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우상의 행렬이 왜 하필이면 교황에게 적용되었을까?
사실상 교황은 천주교 신자에게 구원까지 베푸는 권한을 소유하는 존재로 군림하지만
성경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교황의 행렬의 기원이 될 만한 사실을
히스롭은 ‘두개의 바벨론’이란 책에서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3000년 전, 이집트에서의 왕이나 사제의 운반 행렬과
오늘날의 교황 행렬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
군중 사이로 12명의 운반자가 이집트의 사제, 왕을 어깨에 메고 운반했다.
깃털로 만든 대형 부채도 나타난다.
권위와 위엄을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운반행렬은 지금도 시행한다면 그 기원은 이교적이라 할 것이다.

 

- 맺는 말-

 

이러한 로마 교회이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개혁된 교회는 참된 교회를 강조했고, 그것을 널리 교육하였다.
거짓된 교회와 구분되는 참된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증거 되는 교회이다.
성경에서 제시한 성례가 정당하게 시행되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권징이 있어 삶의 전 영역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원리로 하여
이신칭의의 구원 진리를 내용으로 삼아 성경적 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 개신교는 너무나 다양한 색깔로 분산되고 말았다.
강력한 단일 세계 조직체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격에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불교가 힌두교를 개혁하였지만 지금 인도에는 불교가 쇠퇴하였다.
프로테스탄트가 본래의 종교 개혁의 정신을 되살리며,
칼빈주의(개혁주의) 신앙으로 무장하되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럴 때 주의 나라가 임하고, 주의 뜻이 이뤄지게 될 것이다.

 

Bibliography

 

 

출처: 한국 칼빈주의연구원

(http://www.johncalvin.co.kr/cyber_lecture1.asp)->
사이버 강의 1. 정치-> 6.교황 통치와 그 본색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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