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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분별/한반도관련

한국인의 기원

by 디클레어 2010. 7. 4.

한국인의 기원-1

 

한국인은 예로부터 평화를 사랑하고, 인정이 많으며, 예의와 도덕을 지키고, 진리를 추구하는 민족입니다.
최근 조사에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지능지수가 높은 것으로 밝혀져
한국인은 지성적인 측면에서도 다른 민족에게 뒤지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불과 반세기만에 전쟁의 잿더미를 벗어나 경제 기적을 이루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다른 특이한 점은 유대인의 습성과 풍습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인과 유대인 모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외출시 얼굴을 가립니다.
양 민족 모두 돌제단을 쌓아서 제사를 지내고, 부모를 "에미","에비"라고 부릅니다.

또한 장례식에서 베옷을 입고 곡을 하며,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합니다.

유대인이 유월절에 문설주에 양의 피를 뿌리듯이 한국인은 이와 비슷하게 붉은 팥죽을 뿌립니다.
한국인은 유대인과 같이 근면하고, 흰옷을 즐겨 입으며, 종교성이 강하고, 장사 수완이 좋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유대인이 미국 흑인 지역에서 하던 사업인 수퍼마켓과 세탁소, 의류사업 등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놓고 볼 때 한국인이 유대인과 비슷한 핏줄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한국인은 홍수 심판 이후 살아 남은 노아의 자손입니다.
노아에게는 셈, 야벳, 함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한국인은 셈의 장자와 차남인 엘람과 앗수르의 후손이고,
유대인은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의 자손 중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인 야곱의 후손입니다.
한국인은 노아의 축복 받은 셈의 자손으로 유대인보다 장자적인 입장에 있는 뜻이 있는 민족입니다.

엘람과 앗수르의 자손은 지금의 터키 지역인 아라랏산 부근에 살다가 바벨탑 사건 이후 동방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조선에서는 신정국가로 하늘에 있는 유일신에게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하나님을 믿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고대사를 기록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불교나 유교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해 진실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진실을 알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1/2 누가 동방에서 의인을 일으켜서 그를 자기 발 앞에 불렀으며, 민족들을 그 앞에 주어서 왕들을 다스리게
하였느냐? 그가 그들을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날아가는 그루터기 같게 하였도다.

이사야 46/11 내가 동쪽에서 굶주린 새를 부르고, 먼 나라로부터 나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를 것이라.
정녕 내가 그것을 말하였으니 그것을 또한 이루어지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의도하였으니 내가 또한 그것을 행하리라.

이사야 55/4 보라, 너는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부를 것이요,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 달려올 것이니
주 너의 하나님 때문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위해서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로마서 10/19~20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그들로 인하여 너희로 질투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인하여 너희로 진노하게 하리라.” 하였으며, 이사야는 매우
담대히 말하기를 “내가 나를 찾지 않은 자들에게 발견되었으며 나에게 묻지 않은 자들에게 나타났느니라.” 하였고

계시록 7/2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동쪽에서 올라오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장을 가지고 있더라. 그가 땅과
바다를 손상시킬 권세를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소리질러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인 그들의
이마에 인장으로 표시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또는 나무들을 손상시키지 말라."고 하더라.

 

* 목차

1. 지능지수 높은 동아시아인  

2. 노아의 자손들

3. 한민족의 원래 종교

4. 한민족의 기원

5. 해상 왕국 가야의 비밀

6. 사도 도마

7. 공자에 대한 오해

 

 

1. 지능지수 높은 동아시아인  

 ‘미국에 사는 백인들의 평균 지능지수(IQ)는 백(100)이고 동아시아인들의 평균치는 이보다 적게는 2∼3점, 많게는 
10점이나 높다.’

과연 그럴까. 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인 리처드 헤른슈타인 하버드대 교수가 명저 ‘종(鐘)모양의 곡선’에서 
밝힌 말이다.

세계 13세 어린이 수학 및 과학경시대회에서 한국 어린이들은 보통 5등 안에 든다. 미국의 50개 주는 매년 최우수 
고교졸업생 2명씩을 뽑는데 거의 매년 한국 학생이 여러 명 포함된다. 미국에는 1만개가 넘는 고등학교가 있는데 
한국학생들이 수없이 수석졸업을 한다. 하버드대가 이들을 다 뽑는다면 주요학과는 이들로 가득 찰 것이라고 한다. 
인종 쿼터 같은 것이 있어서 입학생 수가 제한되긴 하지만.

문명의 충돌이라는 설(說)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는 근저 ‘문화가 중요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60년대 한국은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슷했는데 지금 1인당 소득 면에서 20배 이상 앞서게 된 것은 교육열 근면성 기강
등에서 그만큼 앞서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은 60년대 불과 몇 조원에서 지난해에는 515조원으로 늘었다. 최근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
은행이 방콕에서 공동 개최한‘아시아경제의 장래’에 대한 회의에서 마이클 페어뱅크는 과거 30년간한국인의 생산성
향상은 세계 제일이라고 했다.

한국의 제2차 5개년계획(1967∼1971)의 경제고문이었던 어마 아델만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한국인은 보면 볼수록 
유대인과 비슷하다고 했다. 유대인인 그녀는 한국을 수없이 방문한 바 있다. 같이 유대인과 한국인을 비교하는 글을 
써보자고도 했다. 헤른슈타인 교수에 따르면 유대인의 평균 지능지수도 백인보다 높다.

서울대의 어느 교수는 삼국지(三國志)책을 250여 종류나 갖고 있다. 전세계의 ‘삼국지’를 거의 다 사 모은 것이다. 서재 
하나는 이 책으로 꽉차 있다. 이 책이 읽히고 있는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네 나라이다. 젓가락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도 바로 이 네 나라이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이 네 나라를 ‘동아시아 국가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역사 전통 문화에서 서양을 앞선다고 했다. 말하자면 뼈대가 튼튼한 나라라는 것이다. 
서양이 현재 소득수준 기술면에서 다소 앞섰다고 하여 결코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안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과 군사대국으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세계 어느 나라와 언제든지
그리고 어떤 규모의 전쟁을 하더라도 이기게 돼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가히 ‘캠핑’하는 기분으로 동아시아국가의 
하나인 베트남에 전쟁을 걸었다. 결과적으로는 패배하고 물러났다. 일본은 유럽선진국보다 산업화를 100여년 늦게 
시작했지만 70년대 초에 이들을 모두 추월했다.

토인비는 이런 예가 동아시아국가들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세계 역사는 동서양간의 다툼의 역사이며
최근의 그 축소판이 미일간의 경제전쟁인데 이를 모르면 세계 경제나 역사의 흐름을 잘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우리로 볼 때는 미국경제나 일본경제의 흐름 그리고 그 관계의 변화를 모르면 살아가기가 어렵게 돼 있다. 많은 기업들은
매일매일 미국돈 값, 일본돈 값 그리고 그 환율의 변동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서양이 동아시아를 앞서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고 그 이유는 주식회사라는 제도와 주식회사가 마음놓고 
자랄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시스템의 두 가지다. 한 중 일 등 동아시아국가들도이 두 가지를 잘 
활용하게 되자 모두 경제기적을 창조할 정도로 이를 발명한 나라들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주식회사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비록 서양이 발명한 것이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국가들이 이를 서양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엄청난 저력을 가진 한국인들이 수없이 많다. 수많은 한국인들은 개인적으로는 헤른슈타인 교수가 밝힌 
대로 백인들을 능가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다.

한국인은 국가의 지도자를 잘 만나고 나라 차원에서 장기 비전, 시스템 그리고 전략을 잘 짠다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한다.

[송병락교수 이야기경제학-7]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동아일보 2001년 07월 08일

 

 

2. 노아의 자손들

세상에 악이 관영하자 하나님은 B.C. 2458년에 물로 온 지구를 심판하셨고, 당시 의인이었던 노아의 8명의 가족은
방주를 만들고 탐으로써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습니다.
40일동안 주야로 비가 내려 164일동안 온 땅이 물에 잠겼고, 물이 빠진 후 방주는 아라랏산 정상에 다다랐습니다.
지금도 알프스나 히말라야 등의 고산지대에는 조개나 물고기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노아는 아라랏산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노아 가족이 다산하고 번성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함은 네 아들을 낳았으며, 야벳은 일곱 아들을 낳았습니다.
셈의 자손들은 산 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주로 아라랏 산 중턱에 살았습니다.
함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에 정착했고, 야벳의 자손은 주로 섬과 바닷가에 자리 잡았습니다.

셈의 자손들 중 일부는 산에서 내려와 우르 지방으로 내려왔는데 인류 최초로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족이라 불리웁니다.
우리말에서 남자를 뜻하는 '사내' 또는 '사나이'는 '산(아라랏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메르 사람은 인류 최초로 기호로 발음과 뜻을 나타내는 '쐐기문자'를 만들었습니다.
'수메르'라는 말이 '셈'에서 나온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 인정되고 있고, 수메르어는 아담 때부터 있었던 언어로 추정됩니다.

수메르어와 우리나라 말 사이에는 유사점도 많은데 우리말의 '길'이 수메르어로 'gir'이고, 우리말과 같이 님(nim)이란
존칭을 붙이며, 하늘을 'an-ur'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abba', 자신의 아버지를 'abi'라고 부릅니다.
한국어와 수메르어는 모두 교착어로 주격, 소유격, 목적격을 나타내는 조사가 있고, 문장 구조도 한국어와 같은
주어-목적어-동사 순입니다.

노아로부터 저주 받은 함의 장자인 '구스'의 가문에서 태어난 '니므롯'은 영웅적 사냥꾼으로 바벨탑 문명을 건설한
인물입니다.
함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은 이집트 지역으로 가서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수 많은 우상신을 섬기는 신비주의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함의 넷째 아들인 가나안은 장사꾼 기질이 있어서 그의 후손은 시돈과 두로 지역에 페니키아를 건설하고 무역을
번성시켰으며, 수 많은 우상 신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로써 함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사탄의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론, 이집트, 페니키아 문명을 건설합니다.
이 곳에서는 각각 '인본주의 문명', '신비주의 종교', '물질 만능주의'가 태동되어 이스라엘과 인류를 타락시켰습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장사에 도움이 되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보급하기 위해 아스다롯이란 여신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페니키아 신전에서는 여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사제들이 쾌락을 선사하기 위해 돈을 받고 매춘을 했습니다.
이 가나안의 여신이 수메르 지역에 있는 셈의 자손들에게도 스며들어 '이난나'(Inanna) 여신이 되었습니다.
수메르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주변국의 영향을 받아 점차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신을 섬기며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3. 한민족의 원래 종교

우리 민족은 고조선 시대부터 유일신인 하늘님(하나님)을 믿던 경건한 민족이었습니다.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을 천군(天君)이라고 하는데 천군이 신격화되어 단군이 되었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고려 말에 승려인 일연 김견명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시대의 장군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자료의 수집과 편찬 의도가 불교의 전파에 있었습니다.
불교의 윤회설을 입증하기 위해 인간의 조상이 짐승(곰)이었다는 근거 없는 설화를 끼워 넣었고,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삼국유사의 고조선 편에서는 환웅(하나님의 아들)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굴 속에서 견디라고 했고,
곰이 21일동안 견뎌 여자가 되었으며, 여자는 사람으로 변한 환웅과 혼인해 단군 왕검이란 아들을 낳았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왕인 인종 때에 김부식이 삼국시대에 대해 저술한 가장 오래된 역사책입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신라중심으로 중화사상에 젖어 쓴 역사서로 내용이 딱딱하고 중국과 신라의 역사적 사실이 
과장된 부분이 많습니다.
삼국사기는 불교와 유교적 관점에서 저술해 고조선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단군에 대해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김부식과 일연이 우리 민족의 참된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해도 중국에 있는 우리민족에 관한 역사까지
변질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중국의 고대사는 분명히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숭상한 경건한 민족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후한서에서 예전은: "시월이 되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말씀을 읽으며 밤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無天)이라 합니다."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시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성회가 있는데 이를 동맹이라 했습니다."

삼국지에서 진한은: "성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께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이라고 했고, 그 제잔을
수두라고 한다."

중국의 고대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규원사화'에도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이자 임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675년(숙종 2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규원사화'는 일본의 우리 역사 말살 때에 많은 책이 몰수, 폐기되는 
와중에 무애(無涯) 양주동(梁柱東) 선생이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남창(南倉) 손진태(孫晋泰) 선생이 극비리에 
필사(筆寫)하여 빛을 본 책입니다. 

일제가 고조선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했지만 '규원사화'를 비롯한 많은 고서古書와 중국의 역사책에서 밝혀진 바로는
엄연히 단군조선이 있었고, ‘단군檀君’이란 말은 ‘박달(壇) 나라의 임금(君)’이란 뜻이었던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47대 1,195년간 존속했고, 공자를 비롯한 많은 중국의 성현들도 우리나라(동이 東夷)를 흠모했다는 기록이
있고, 동방삭東方朔(한 무제 때의 사람)은 당시의 우리 민족을 가리켜 ‘태연하게 앉아 서로 범하지 않고, 헐뜯지 않고, 
사람에게 근심이 있으면 서로 구해 주어 선인(善人)이라고 했다’고 기록한 바가 있습니다. 

고조선 시대에는 한문이 없었는데 어떻게 단군이란 이름이 생겨났는지는 규원사화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박달임검지역야(朴達壬儉之譯也)'라 해서, '단군이란 박달나라 임금을 번역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박달이라는 말은 옛부터 백달이나 배달로도 불렀고, 나라의 우두머리는 임검이라 했습니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신씨이강어단목지하 이환검신인(神氏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이라 해서 그 뜻을 살펴보면, '신씨천황께서 이미 
박달나무 밑에 하강했고, 환검신인이 다시 단목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단(檀)으로써 나라이름을 
삼은 것이며, 단군이란 단국의 임검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단군을 환검이라고 했는데, 이 환검이 왕검이나 임검으로 변한 것입니다. 
내용 중에 환검신인, 즉 단군이 박달나무 밑에서 인민들로부터 추대되어 임검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자연히 박달이라는
것이 나라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이라는 것은 박달나라의 임검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박달나라의 임검이란 뜻인 이 '박달 임검'은 계속 불려져 내려 왔습니다. 
그러다가 약 2천년 후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불교가 들어올 때를 전후해서 한문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 사가들이 역사를 한문으로 서술하다 보니까, '박달 임검'을 박달단(檀)자 임금군(君)자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 때부터 단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한문이 들어오기 전에는 단군이라는 용어는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병도씨의 '단군이란 건 터무니없는 소리다'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어떤 이는 단군을 탱구리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바로 박달나라의 임검이란 뜻을 번역하다 보니까 단군으로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문헌이 있습니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보면, 세칭 낙랑단궁(樂浪檀弓)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낙랑단궁이라고 한 것은 활이 생산되는 지명이 박달이기 때문에 단궁(檀弓)으로 불렀고, 또 나라이름이 박달나무와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이 유전되어 왔던 것입니다.

단군, 단군임검 또는 단군왕검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박달나라의 임검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입니다. 
시조 단군 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단군은 한 사람일 수 없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후손들도 모두 '박달나라 임검'이라는 뜻으로 계속 단군이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제왕연대력이나 조선사례기 혹은 해동춘추 같은 책을 보면, 처음 국호가 단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규원사화의 신뢰성을 입증하는 '중국 고대기본 사적'과 합치되는 부분이 열군데 이상 됩니다.

규원사화에 보면, 제3세 임검 가륵임검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때마침 하왕이 덕을 잃어 신하들 중에서 몇몇이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식달에게 남국과 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들을 치게 하니, 나라의 위엄은 크게 빛나게 되었다(時夏王失德 其臣有謀逆者 
乃使息達 率藍眞蕃之民 以征之於是國威益彰).' 
여기서 식달은 사람으로 요즘 말하면 국무총리 벼슬에 있던 사람입니다. 
또 단군조선은 나라를 아홉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진번과 남국은 그 아홉나라 중 두 나라에 해당되는 나라입니다. 
위 대목에 보면 그 당시 중국임금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 내용과 부합되는 중국측 사서가 있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보면, '하나라 임검 태강이 덕을 잃어 이인(夷人:동이인, 즉 조선사람)이 비로소 배반하기 시작했다.
(夏后氏 太康失德夷人始畔)'라는 내용이 있고, 그 주(註)에 '태강 예에게 쫓겨 났다'고 되어있습니다. 
하왕 태강이 그 신하 예에게 추방당한 연대가 표준세계년표에 의하면 '태강 19년 신해(辛亥,서기전 2170년)'이므로, 이
연대를 우리 가륵(嘉勒) 임검의 즉위년대수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측 기년(紀年)으로 환산하여 보면 가륵임검 37년 신해
(단기 164년)에 해당하므로 위 사실은 대략 이 무렵에 일어난 것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내용이 부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면 환단고기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15세 벌음(伐音)단군 때의 기사를 보면, '때마침 하왕이 사신을 보내와 도와줄 것을 요청하여 말량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여 구해 주었다. 그 후 또다시 하왕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 무도함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時夏王遣使請援 乃末良興兵進救 後夏王復請兵 儉以其無道却而不許)'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국측 사서 여러 군데를 찾아본 즉, 서기전 77년에서 서기전 6년에 살았던 유향(劉向)이라는
분이 쓴 설원(說苑) 제13권 권모편(權謀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위 벌음(伐音)과 같은 시기에 재위하였던 하왕 계(癸) 52년 갑오(甲午,서기전 1767년)에 '탕이 하왕 걸을 토벌하려고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조선의 군사[九夷之師]를 일으켜서(조선 군사의 힘을 빌어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걸왕에게
사죄하였다(湯慾伐桀 桀怒起九夷之師 以伐之 湯乃謝罪)'라고 되어있고, 그 다음해인 53년 을미(乙未,서기전 1766년)에는
'탕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아니하므로 걸이 다시 조선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군사를 일으켜 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서 걸왕을 토벌하여 남소(南巢)로 추방하였다(湯不貢 桀起九夷之師 九夷不起 
湯乃興師伐之遷桀南巢)'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 기사는 바로 앞서 말한 규원사화의 벌음임검의 기사내용을 뒷바침해주는 것입니다. 위 사실을 우리측 기년(紀年)으로
환산하여 보면, 벌음임검 5년 갑오(甲午,단기 567년)와 6년 을미(乙未,단기 568년)의 2년에 걸쳐서 일어난 사실임이 
뚜렷하다고 하겠습니다.

규원사화의 내용 중에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단군이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내고, 교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고, 도를 이뤄 행하게 한지 몇해 동안의 백성들이 모두
감화되어 악은 없어지고 천하는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는 창세기에서 노아가 홍수 심판 후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8/20 노아가 주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가운데서 취하여 제단에 번제를 드리더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교시하는 내용은 성경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 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져도 새지 아니한다.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 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 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중국 고대사와 규원사화를 통해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믿는 민족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나 유교를 전통종교로 생각하고,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인식하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귀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은 유일신을 믿는 민족이었습니다.

 

 

4. 한민족의 기원

인본주의적 사학자들은 인류가 한 곳으로부터 전파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는 
병행발생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놓고 볼 때 인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흩어졌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라. 
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9)

성경은 B.C. 2357년경에 노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대적해 바벨탑을 쌓자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
서로 알아 들을 수 없게 한 뒤 온 세상에 흩으셨다고 명시합니다.
국내 사학자들이 터키 아라랏산 지역으로부터 중앙 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만주에 이르는 여정을 탐사한 결과
민족 이동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셈족의 특징인 환저형 토기와 생활용기가 발견되었고, 우리 말과 같은 SOV형 교착어를 사용하며,
아라랏 산에만 있는 흑요석 공구를 사용하고, 대홍수와 까마귀에 대한 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중국의 이벤허 박사가 조사결과를 중국 북경 대학에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므로
북경대학도 한 민족의 민족 이동설을 인정한 것입니다.

아담의 탄생은 B.C. 4114년이고, 대홍수는 B.C. 2458년에 일어났으며, 바벨탑 사건은 B.C. 2357년에 일어났습니다.
고조선의 건국이 B.C. 2333년이므로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24년만에 만주에 도착한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셈족이 이동이 자유로운 유목민이었고, 조사단이 볼가강 하류의 아조프 박물관에서 바퀴 달린 집을 발견함으로써 
이동속도가 빨랐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의 왕검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천재단이 있는데, 천제단의 방향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쪽에서 섬겼던 하나님께 경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3600개의 고대 암각화 중 70%가 수메르나 셈족의 것으로 추정되며, 가고시마현의 거석에 새겨진 
수메르 양식의 고대 선박도 이를 입증합니다.

 

 

5. 해상 왕국 가야의 비밀

중국 한(漢) 나라 때 광무제의 박해를 피해 동이족이었던 수로(首露)라는 사람은 A.D. 42년 동료들과 함께 한반도
김해에 상륙해 변한 족장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을 세우고 김수로 왕이 되었습니다.(김유신의 12대 조부)
김수로 왕의 가락(가야)국에서 제철산업을 크게 일으켜 해상을 통해 중국과 일본 등지로 철을 수출하는 상선 500척을
보유한 해상왕국을 세웠습니다.

수로가 가락에 도착한지 6년 후인 A.D. 48년에는 지금의 인도 지역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왕옥이 신하 두 내외와
20명의 선원을 데리고 배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허왕옥이 불교를 전하기 위해 파사(페르샤)의 석탑을 가지고 온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허왕옥은 가야에 도착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자신이 온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금년 5월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함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 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지라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곧 이곳을 떠나 그리로 가라 하시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상제(上帝)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허왕옥이 가야에 도착한 A.D. 46년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가 선교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도마를 비롯하여 시몬, 다대오 등 사도들이 활동하던 선교 중심지였습니다.
외경인 '도마행전'에는 사도 도마가 인도에 들어가 처음 전도하여 침례를 준 사람이 인도의 공주이며, 왕과 왕비도
침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파사의 돌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의 릉

허왕옥의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을 가야 사람들은 '주님의 포구'라는 뜻에서 주포(主浦)라 불렀습니다.
삼국유사를 쓴 김견명이 말한 파사의 석탑은 실은 가공한 돌이 아니라 평범한 자연석 6개를 쌓아 놓은 것일 뿐입니다.
허왕옥이 자신의 배에 돌 여섯 개를 싣고 온 이유는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갈릴리의 배 만드는 기술자였던 사도 도마의
충고를 받아 들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해에 있는 수로왕 릉의 납릉 정문에는 석탑 모양의 그릇을 가운데에 두고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은 갈릴리의 오병이어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와 같은 형태입니다.
허왕옥과 결혼한 수로왕은 국호를 가락국에서 '가야'로 바꾸었는데 , '가야'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물고기는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 사이에 사용된 암호였습니다.
헬라아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말의 이니셜이 물고기 즉 "익투스(ichthus)"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려 2000년 전에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가야의 김수로 왕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현재도 경상도 사람 중에는 인도 공주 허왕옥의 일행의 핏줄이 섞여 서구적인 외모를 갖는 미남 미녀가 많은 편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도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데 딸은 인도 사람처럼 생겼고, 아들은 서양 사람(인도 사람과 백인은
야벳의 후손으로 같은 유전적 형질)처럼 생긴 집안이 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유전적 형질이 수십대가 지난 뒤에도 보존되 있다가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 5대 왕인 파사(婆娑) 이사금이 수로 왕을 매우 존경하여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초청해 자문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금이 자신의 왕호를 굳이 페르시아를 의미하는 파사로 바꾼 이유는 아마도 허왕옥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석재 십자가와 영남 대학교 박물관 지하실에 보관된 양을 품고 있는 석상 등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합니다.

 

 

6. 사도 도마

도마는 쌍둥이, 인도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 
도마는 아마 갈릴리의 한 가난한 어부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이름 도마는 시리아어로 '쌍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에서는 그를 디디무스(Didymus)라고도 불렀다. 
그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한 인물로 흔히 말하여지지만 오히려 경험적인 것에 천착하는 매우 이성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서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을 때 도마는 주님께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질문한 바 있다. 
이 때 주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이런 문답은 도마가 회의적인 인물이어서 물은 것이라기보다 그가 명확한 것을 좋아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그는 후일 베다니(Bethany)로 가는 길에서 과단성 있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으나 주님의 손과 발을 만져 보고 창자욱을 만져본 후에는 즉시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 고백은 주님의 신성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제자들 중 최초로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한 
것이었다. 
영지주의 문서 중 하나인 도마행전(The Acta Thomae)에는 도마의 선교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인도에서의 행적이다.

이 책에 의하면 도마는 유대인으로서 인도선교를 요청하는 주님의 부름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반(Abban)이라는 인도의 한 부분을 통치하던 상인에게 나타나 도마를 그의 종으로 팔았다고 한다.
도마는 인도에서 목수로서 일하며 한 궁전을 짓도록 명령 받았다. 
그러나 자기 주인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궁전을 짓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20개의 은 덩어리를 다 
소비해 버리고 말았다.

왕이 돌아왔을 때 그는 도망치려다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때 왕의 동생이 죽었는데 그는 하늘에서 도마가 왕을 위해 아주 멋진 궁을 짓는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다시 지상에 돌아가도록 허락되어 왕에게 도마가 궁을 짓던 그곳을 사들이도록 권하였다. 
왕은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 도마를 석방하였고 도마에 의해 회심하였다.

도마의 전도로 말라바(Malabar) 해안선을 따라 기독교인들이 증가했고 그 지역에 일곱 개의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도마는 72년경 마드라스 근처의 빅 힐(Big Hill)이란 곳에서 창에 맞아 순교하여 밀라포르(Mylapore)라는 곳에 뭍혔다.
인도의 교회들 중에는 도마 교회가 지금도 있다. 
인도 특히 케랄라(Kerala)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성 도마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한다.

1522년에 포루투갈인들이 도마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한 무덤을 발견했는데 유해를 밀라포레에 있는 '성 토마스 
대성당'에 안치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유해 중 일부는 4세기에 에데사(Edessa)에서도 발견되었고 '도마행전'에 의하면 그 유해를 인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옮겼고 아브류찌(Abruzzi)에 있는 오르토나(Ortona)에 최종적으로 안치했다고 한다.

2002. 1.27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

 

 

7. 공자에 대한 오해

사람들은 명절 때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그 원류가 공자의 유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는 했지만 죽은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마치 불교에서 석가가 자신에게 불상을 만들고 절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석가를 신으로 모시고 천배씩 절하듯,
유교의 많은 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공자의 가르침과는 상관 없이 만든 것입니다.

고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요(堯)와 순(舜) 임금입니다.
공자(孔子)의 서경(書經)에 의하면 요, 순 임금은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드렸으므로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순임금 때부터 중국인들은 여름에는 북쪽 끝에서,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끝에서 국경제사를 상제에게 드렸습니다.
요,순 시대부터 상제에게 제사를 드렸던 제사문이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아직도 남아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극히 오래 전 태초에 공허하고 흑암의 큰 혼돈이 있었사옵니다. 다섯 행성은 아직 운행되지 않았었고, 태양도 달도
빛을 발하지 않았었습니다. 거룩하신 신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셨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셨사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이 지음을 받았사옵니다."

위 내용을 창세기의 내용과 비교하면 매우 흡사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25~27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또 다른 국경 제사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았나이다. 상제(上帝)시여, 인간도 만물도 모두가 당신의 사랑으로 이 낙원에
살게 되었나이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선하심으로 지음 받았사오니, 그 축복은 당신으로 말미암음이옵니다.
오 주시여, 당신만이 이 모든 만물의 참 어버이가 되시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기독교 이외에 위와 같은 기도문은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인이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노아의 후손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인은 얼굴은 동양인이지만 언어나 생활(입식), 식생활(고기, 기름) 등에서 서양인과 가깝습니다.
옛 중국인들의 시신을 발굴해 보면 금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은 노아의 셋째 아들인 아벳의 후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셈족인 동이족이나 몽고족과 피가 섞이면서 지금과 같은 동양인적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들 역시 진시황이 진나라를 세웠던 B.C. 200년까지 무려 2000년 동안 유일신인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상제(上帝)의 중국식 발음은 '샹따이'인데, 유대인의 하나님 칭호 중 하나인 '엘 샤따이'와 유사합니다.
현재 중국어로 된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상제라고 부르고 있으며, 중국인들이 쓰는 문자인 
한자 역시 창세기를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노()나라 사람인 공자(孔子, B.C. 552~B.C. 479)는 유교의 창시자로 은()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으며,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사회는 철기 사용으로 인한 농업혁명으로 인해 풍요로웠지만 물질주의로 도덕이 땅에 떨어졌고,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제후들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
)으로,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덕(
)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자의 인은 사람다움을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절을 갖추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음악을 잘 연주해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공자의 관심은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道)인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낮추어 '짐승 같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공자는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는데,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신적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예(禮)를 통해 인(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바른 정치이며, 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우선 ‘바른 명분
(名分)’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명분은 오늘날 ‘핑계, 공리공론’의 의미로 잘못 인식되기도 하지만 공자가 말한 명분은 ‘지도자의 도덕성과 솔선수범’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덕치주의(德治主義)’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공자는 인간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고 여러 곳에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소인은 자신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이로움이 될 만한 일을 보면, 먼저 그 일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또 소인은 남들과 같아지기는 잘하지만, 남들과 어울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남들과 어울리되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남과 같다면 자신의 존재 의미는 없습니다. 
자신이 참다운 가치가 있다면, 자신의 역할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야 합니다.

군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반대로 소인은 누구라도 그 사람을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남들과 참답게 어울린다는 것은 사람이 주체가 될 때만 가능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고 주체를 잃고 남에게 얽매인다면, 그것은 참답게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군자는 다스리는 계층, 즉 군주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배 계층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의 의미를 지배 계층이 아니라 덕을 쌓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공자는 사람다운 사람 위에 다시 성인을 두었습니다. 
사람다움의 완성이 성인인 것입니다. 
논어 '옹야'편에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가 나옵니다.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찌 사람답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요순도 오히려 그렇지 못할까봐 항상 근심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결과적으로 내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지지 말고, 오직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라는
것이 공자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옳다면, 비록 그 일을 하다 해를 입을지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사람다움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동양의 사상과 윤리와 도덕의 토대를 완성한 공자조차도 모든 것을 안다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습니다.

"神에 관해 이야기 해 주십시오."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神에 대해 논하겠느냐?"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관심이 신이나 죽음에 있지 않고 사람과 삶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는 스스로 자만하지 않고 자신이 인간에 관한 문제를 알기에도 벅차다는 것을 인정한 셈입니다.
결국 공자가 인간의 삶에 대해 얻은 해답이 인(仁)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교는 죽음에 관한 종교라기 보다는 삶에 관한 윤리 도덕이나 사상과 철학이라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공자가 태어나기 전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중국 대륙의 역사는 우리 민족인 동이족과 중국 민족인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중화 사상을 가지고 있는 하화족을 중국인들은 화하(華夏)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본래 황하의 상류 지역에 있는
임분(臨汾)에 살았습니다.

동이족에 속하는 소호(少昊)족은 산동의 곡부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 수가 하화보다 많았으나 하화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동이족의 정신적 중심은 산동의 태산이었고, 태산 정상에 있는 천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았습니다.

하화의 첫 임금은 요(堯)였는데,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만한 인재를 찾지 못하고 동이족의 순(舜)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순은 다시 하화에서 우(禹)라는 인물을 찾아 자리를 넘겨 주었고, 우는 동방 장군들의 협력을 얻어 황하의
치수에 성공하였으며, 하화는 임분에서 화산(華山) 지역으로 진출했습니다.

우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고, 14대에 이르러 걸(桀)이라는 폭군이 나타나, 동이족의 탕(湯)이 걸을 제거하고
은(殷) 나라를 세웠습니다.
은 나라는 '정인'이라는 기도 집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국사를 결정하는 신정국가였습니다.

은 나라의 30대 주(紂) 왕은 우상을 섬기고 무도하므로, 하화의 발(發)이 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 나라를
세워 무왕이 되었습니다.
주의 무왕은 신정국가였던 은 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명분을 찾기 위해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였습니다.
조상 귀신을 모시는 '종묘'와 농사의 신을 섬기는 '사직'을 모든 지방 관청에 만들게 하고 왕궁에도 세웠습니다.

은이 멸망할 때 두 명의 위인이 있었는데, 한 명은 고조선으로 가서 요동 지역에 땅을 얻어 살았던 '기자'이고,
다른 하나는 무왕에게서 은나라 도읍 근처의 땅을 봉지로 받아 은의 유민과 함께 살았던 '미자'인데 그 땅을
송(宋)이라 했습니다.

공자의 증조부 공방숙은 바로 그 송나라 사람이었습니다.
공자는 죽기 7일 전에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자와 그의 조상은 하나님을 섬기던 은나라 사람이었고, 공자는 우리와 같은 민족인 동이족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귀신을 섬기던 주 나라가 멸망하고, 천하가 어지러울 때 공자가 태어났습니다.
공자 사상의 기본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경천애인(
)이었습니다.
공자는 요, 순과 하, 은, 주에 이르는 역사 상서(尙書)를 기록해 바른 역사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바빌론과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 진(秦) 시황제(始皇帝)
였습니다.
그는 동이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태산에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동이족 창해역사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시황제는 동이족의 포섭을 단념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3년 후인 B.C. 215년에 27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그는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주된 이유는 동쪽의 고조선을 막아 놓고, 산동의 동이족을 박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B.C. 212년부터 동이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공자의 사상을 박해했는데, 공자의 책을 모두 수거해 불태웠고,
공자의 제자 460명을 땅에 묻어 죽였습니다.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책을 불태움, 坑儒:공자의 제자들을 땅 속에 묻음) 사건을 통해 공자의 원래 사상은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논어는 공자가 직접 저술한 저작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논리에 맞게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공자가 가졌던 정확한 사상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시황제의 아들 호해를 제거하고 진을 멸망시킨 사람은 하화족인 한(漢)의 유방(劉邦)이었습니다.
그는 동이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자의 학문을 복원하겠다고 선언하고, 공자의 책들을 기억나는대로 복원하게 하였으나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주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삽입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을 공경했던 공자가 귀신을 섬기던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공자 시대에는 종이가 없어서 대나무를 깍아서 글을 썼고, 올챙이 모양의 과두문자를 썼습니다.
그러나 한나라가 만든 공자의 책은 종이에 예서로 쓴 것이므로 그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하고, 그것을 만든
학자를 어용(御用)학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용학자들 가운데 양심선언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논어의 술이(述而) 편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 공자는 괴이한 일과 난잡한 귀신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즉, 공자가 조상 귀신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자 같이 수준 높은 사람이 가장 저급한 종교이며 무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인 귀신숭배에 빠졌을 리가 없습니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제사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 의식들을 통해 사람이 상제(上帝)를 섬기느니라."

결국 모든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공자는 말한 것입니다.
이런데도 사람들은 명절 때마다 명백한 우상 숭배인 조상 귀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것이 유교나 우리의 전통인것처럼
이해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미 죽어 심판에 처한 영혼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며, 다른 잡다한 악령들만 불러들일 뿐입니다.

 

이상으로 공자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공자가 죽음을 앞두고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의미인 '조문도 석사가의'(
道 矣)라는
유언을 남겼듯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4~500년 전에 동양의 공자와 서양의 플라톤과 인도의 석가가 인생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고,
예수님이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주어지지 않으면 답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소중함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 민족과 중국 민족은 무려 2000년동안이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던 민족이었는데, 왜곡된 역사로 인해 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불교나 유교가 전통종교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원래 하나님을 믿던 민족이었고, 노아의 장자인 셈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구한말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민족인 된 것입니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부흥되고 꽃을 피웠지만 그들은 현재 하나님을 버리고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들어 도덕적 타락과 마약 중독 등의 문제에 휩싸여 있고, 영적 황폐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인 마지막 때 역사는 해 돋는 동방에서 일으켜야 하며, 온전한 진리의 빛을 전 세계에 비추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큰 부흥의 역사를 일구어야겠습니다.

 

이사야 11/9 그들은 나의 모든 거룩한 산에서 해치거나 파괴시키지 않으리니 이는 마치 물들이 바다를 덮음같이 세상이
주의 지식으로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박국 2/14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땅이 주의 영광의 지식으로 가득 차리라.

 

* 참고 서적

1.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김성일, 신앙계)

2. 성경은 신화가 아닙니다. (김정주, 갈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