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말 2:13)
2004년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인 '한미준'에서 조사한 십일조에 대한 통계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개신교도 중 매월 정기적으로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는 교인은 전체의 약 30%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교인의 절대 다수인 70%가 십일조를 하지 못하거나 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물론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본다.
교회 내에서 교역자들이 이 십일조 제도에 대하여 부정적 발언을 하는 것은 거의 터부시 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단 내에서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손봉호 교수처럼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 신약성경이나 초대교회에는 십일조 사례가 없다"라고 소신을 가지고 명확히 입장을 밝히신 분들도 적지 않다.
정말 희한한 점은 툭하면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도 서로 쉽게 갈라서며 교단 분열을 밥 먹듯이 하던 한국의 교회들이 성경적 근거가 매우 희박한 이 율법적인 십일조는 거의 만장일치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 대다수 신자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율법의 무거운 짐을 오직 한국교회만이 일심동체가 되어 반강제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의 귀족 목사들은 교인들의 등골이 빠지든 말든 이 십일조라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아마 한국처럼 이런저런 요상한 명목으로 많은 돈을 챙겨 가는 교회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특히 이 십일조 강요가 초신자나 가난한 교인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지대하다. 다른 무슨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교회 내에서 괜히 위축되고 믿음이 약한 자로 손가락질을 받는 느낌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친척들이나 다른 분들에게 전도를 하면서 교회에 나오기를 권면하면, 제일 먼저 튀어 나오는 말이 "나도 교회에 나가게 되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부담스러운 질문이다. 이보다 더욱 심하게 감정적으로 반발하시는 분들도 있다. "목사들이 십일조 장사를 해서, 자식들 유학 보내거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라는 식이다. 이런 반응들은 십일조 강요가 전도의 문을 얼마나 크게 막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개척 교회가 크지 못하는 데에도 십일조가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상당수의 교인들이 작은 교회 내에서 십일조를 못 내면 너무 표가 나서 불편하기 때문에, 크게 표가 나지 않는 대형 교회로 이동하여 스스로 작정한 만큼의 헌금 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형 교회로의 수평 이동 현상에는 이 십일조와 기타 잡다한 헌금 강요도 크게 일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한국교회 내에는 기복적인 토속 신앙의 영향이 원래 강한데다가, 일부 목사들이 이를 악용하여 이 십일조를 축복의 수단으로 미신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율법적인 십일조 제도에 대한 반론을 간략히 검토하고,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는 허구적인 미신과 십일조 강요의 부당함에 대하여 주로 논하고자 한다.
아울러 십일조의 쟁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다른 분들이 이미 지적하였던 주장이나 논리가 다소 반복되더라도, 이는 처음으로 이런 문제를 대하시는 분들의 체계적인 이해를 돕기 위함이니 너그럽게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또한 일부 목사님들은 십일조가 교회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다른 반론을 내면 마치 이단처럼 취급하며 몰매를 주시기도 하는데, 신앙 양심을 걸고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구약 신정 국가의 십일조는 사실상 세금이었다
원래 구약에 언급된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처럼 일회성인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부분이 신정 국가 체제에서 제사직을 전문으로 맡은 레위 지파를 위한 몫이었다. 그리고 다른 용도로는 절기 행사 비용으로 또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거의 세금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출애굽 이후 땅을 분배받은 나머지 지파들과는 달리, 제사직을 맡은 레위인들에게는 다른 수입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온전하게 내지 않으면, 당장 제사직을 맡은 레위인들과 가난한 자들을 굶게 만드는 아주 심각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십일조를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따르는지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금석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는 모든 신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니 제사직이 더 이상 별도로 필요 없는 신약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누구의 몫으로 드려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목사가 '성직자'이니 목사의 몫이라고 하는데,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는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이다. 오늘날의 목사직은 구약의 성직자인 제사장직이 아니고 신약 성경에 언급된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신자가 다 스스로 제사장의 신분으로 주 앞에 직접 설 수 있는 성직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리적으로 신분상 성직자를 인정하는 가톨릭조차도 현재 율법적인 십일조 헌금을 걷고 있지 않다.
십일조의 변절과 부활
바리새인과 랍비들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한 십일조는 로마 제국 시대와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변절되어 갔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의 대상에 '토지의 소산'만이 아닌, '모든 소득'에 대해 십일조를 적용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십일조를 잘 내면, 악한 자가 지옥에서 받는 열두 달 동안의 형벌에서 면제된다"고까지 황당하게 부추겼다고 한다. 이런 엽기적인 선동은 "십일조 안 내는 자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큰 소리 치는 한국의 어느 목사님을 연상케 한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이 멸망한 후인 신약 초대교회 시기에는 십일조를 잘해야 한다거나, 또는 잘했다는 기록이 없다. 기독교가 박해 시대를 거쳐 황제에 의해 공인되기 전인 4세기 초가 될 때까지도 십일조가 헌금의 일종으로 바쳐지지 않았다. 특히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일조라는 것은 할례보다도 구속력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세가 확장되고 교권력이 강화되면서 십일조 복원이 시도되었다. 이때부터 암브로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십일조를 거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동방 교회들은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고, 서방 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심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밀고 당기다가 결국 한참 후대인 A.D 585년에 가서야 마콘(Macon) 교부 회의에서 십일조가 채택되었다.
이때부터 십일조는 점차로 강제성을 지니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다른 교부 회의들도 십일조들을 속속 채택하였고, 결국은 A.D 800년 경 샤를레망(Charlemagne) 대제 때 비로소 십일조가 정식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그런데 13세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십일조의 대상이 구약의 가르침 그대로 주로 '토지 소산물'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일조 창고'를 따로 만들어 둘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를 즈음, 십일조의 대상이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에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는 바리새인과 랍비들의 십일조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1,000년 이상 지난 후에 다시 부활시켜 적용한 셈이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교세가 커지고 교권과 이권이 거대해질 때 십일조가 머리를 들고 나타났다. 즉 십일조가 하나의 엄청난 기득권이나 치부의 수단으로 자리 잡는 곳에서는, 반드시 종교 지도자들이 십일조를 교묘하게 가로채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말라기 시대, 신구약 중간 시대, 중세 시대, 그리고 오늘날에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1세기 초대교회에서 폐지되었던 십일조 제도는 한참 후대의 중세 가톨릭 시대에 슬며시 나타났다가,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면서 다시 대부분의 유럽 교회에서 폐지되었다. 어떤 분은 이런 과정을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몽둥이를 맞고 비실거리다가 19세기를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 교회 부흥이 일어나, 교세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머리를 들게 된 것이다"고 평하기도 했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 동안 막대한 십일조 수입으로 온갖 비리를 저질렀던 가톨릭조차도 이제는 그 십일조 제도를 버리고 자율적인 헌금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가톨릭을 개혁한 루터와 칼뱅을 지지한다는 한국의 개신교가 이제 와서 오히려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오직 한국교회와 미국의 극히 일부 교단 교회들을 제외하면 십일조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명확히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 준 외국 여러 나라의 교회들도 거의 하지 않는 십일조를 한국교회가 목소리 높여 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모습인지를 잘 보여 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치 십일조 강요가 바리새인들이나 중세 가톨릭 주교 등 교권주의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변절 역시 교회 내의 막강한 교권과 기득권을 지닌 귀족 목사들에 의하여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십일조 강요와 한국교회의 변절은 모두 교권 남용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변절된 시대에는 반드시 십일조 강요가 왜 나타나는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 세계에서 왜 유독 한국교회만이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동서양을 합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국교회만큼 단기간에 교세가 급격히 성장한 곳도 매우 드물고, 동시에 이처럼 빠르게 예수 따르는 길을 벗어나 변절된 교회도 드물기 때문이다.
만일 필자의 말에 동의를 못하시겠다면, 지금이라도 한국의 귀족 목사들만큼 사치스러운 목회자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직접 확인을 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한국처럼 대부분의 교단 선거에서 돈을 주고받는, 더럽고 타락한 목회자들이 많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시라. 아울러 한국교회처럼 세습이 일반화한 나라가 있는지도 살펴보시기 바란다. 또한 한국처럼 교회가 세력과 이권을 키우기 위해 서로 큰 예배당을 짓겠다고 단체로 몸부림치는 나라도 있는지 둘러보시라. 이들은 천사의 얼굴로 양들을 속이고, 그저 먹기를 탐하는 자들일 뿐이다.
율법적인 십일조가 지금도 유효한가
많은 목사님들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십일조를 만고의 진리처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으므로, 그 시점에서는 십일조가 유효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당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다른 율법인 할례와 안식일도 지키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명령하시기도 하셨다. 즉 율법의 마침이 되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다른 율법들을 지키셨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에 의하여 십일조가 폐지될 것임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구절이 있다. 그것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십일조는 성전에서 드려져야 하는데,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드릴 방법을 하나님이 스스로 제거하신다는 뜻이다. 또한 성전이 제거되면 레위 지파의 임무도 종결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기서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킬 성전이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전도, 안식일도, 할례도, 제물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따라서 율법에 의한 십일조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신약성경 속의 초대교회를 보면, 일반 헌금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즉 '십일조의 정신'인 '사랑'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인 연보'는 했지만, '율법적이며 강제적인 십일조'를 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에 할례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할례당'은 있었으나, '십일조당'은 전혀 없었다는 점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 및 관례는 전적으로 폐지하면서, 오로지 십일조만을 예외로 적용시켜 강요함은 상식에 어긋나는 논리이다.
바울 사도도 '연보'에 대하여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만일 당시에 십일조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연보를 따로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십일조의 본래 목적이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성직자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분의 지적처럼, 기타 다른 신약성경 어디에도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고 꾸지람을 받은 교회가 없고, 반대로 십일조를 잘 했다고 칭찬을 받은 교회도 없다. 요즘 한국교회의 완고한 주장을 고려해 볼 때 십일조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바울의 서신들 속에서 한두 번이라도 꼭 언급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책망하는 부분에서도 십일조를 도적질했다는 책망이 반드시 나왔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요한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순교를 당했다. 이들이 생명을 걸고 우리에게 전하여 준 가르침에는 이 십일조란 단어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도들은 십일조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들과 함께 폐지된 것을 당연시했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그토록 중요했다면, 사도 바울을 비롯한 다른 사도들이 이를 경시했을 리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구태여 밝히자면, 앞서 언급한 '십일조의 정신'은 살아 있으나 '율법적인 십일조'는 다른 율법에 명시된 성전, 제사, 안식일, 할례 등과 함께 동시에 폐지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사도들에 의해 전파된 기독교는 결코 유대교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가 유대교 율법의 하나였던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십자가를 거스르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헤롯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라 확신한다. 또한 안식일도 지키고, 성전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고, 할례도 하자는 억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신정 국가 시대가 아닌 현대를 사는 신도들은 이미 국가에 상당 수준의 세금을 내며 살고 있다. 여기에 추가로 획일적인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이중과세나 다름이 없다. 한국교회는 거기에 별도로 주일헌금, 감사헌금, 건축헌금, 그리고 선교헌금 등 일일이 다 외우기도 힘든 수십 종의 헌금 명목을 만들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요하며 온통 돈타령만 하고 있다.
이는 결국 교우들을 대상으로 교묘하게 경제적인 착취를 하는 행위이며, 비판자들로부터 '현대판 농노 제도'라는 비난을 들어도 떳떳하게 반박하기 어려운 실정인 것이다.
십일조의 정신
그러나 사실 원칙을 따지자면,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겠는가. 우리의 생명, 가족, 친구, 재산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닌가. 따라서 구약의 단순한 '십분의 일'이 아닌, 우리 자신을 전부 '산제사'로 주님께 드리는 '경건한 삶'이 신약 시대의 '온전한 십일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신 말씀이 참조가 될 것이다.
즉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의 '문자적인 율법'은 폐지되었으나, 그 '율법의 정신'은 오히려 더욱 완성된 의미로 지켜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강요적인 십일조'를 폐지하고, 율법의 정신에 따른 자발적인 '사랑의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 율법의 정신이란 요약을 하면,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겠는가.
일부에서는 십일조가 없으면 교회 재정 수입이 줄어 교회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변명을 하시는데, 진리가 아니라면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의 '강요적인 십일조'가 꼭 있어야 하고 '자발적인 헌금'만으로는 운영을 못할 교회라면, 그런 교회는 그냥 문을 닫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건강한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주의 사업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헌금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우리에게 이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가 또 다시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입이 너무 적어 생활이 매우 어려운 분들은 백분의 일을 헌금해도 상관이 없고, 때로는 헌금을 못하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필요하면 교회가 이분들을 경제적으로 도와드려야 할 것이다. 반면 1년에 10억 원이나 벌면서 1억 원만을 떼어 헌금하고,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주해서도 곤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은사이든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은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십일조를 포함하여 어떤 헌금도 강요해서는 안 되며, 헌금은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보더라도 성경을 왜곡하며 십일조와 수십 종의 헌금을 강요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간판만 개혁 교회이지, 실제로 하는 행동은 루터와 칼뱅을 벗어나 중세 가톨릭만도 못한 행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 많은 귀족 목사들이 마치 제사장이라도 된 듯 자신들의 권위를 치장하며, 스스로 성직자 행세를 하는 것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헌금은 흰 봉투 하나면 족하다
아울러 교인들의 주머니는 한정되어 있는데, 이런 저런 잡다한 이유와 이름을 붙인 수십 가지나 되는 헌금 항목들도 모조리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매 주일 자신의 능력과 여건에 따라 정성껏 주일헌금을 하면 되는 것이지, 도대체 왜 이런 복잡한 분류가 필요한가.
예를 들어 생일 감사는 꼭 감사 헌금 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따로 구별해서 헌금해야만 하나님께서 알아보신다는 말인가. 그냥 무기명으로 주일헌금에 합쳐 넣으면, 무슨 복잡한 문제라도 생기는가. 헌금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하는가.
신약 초대교회에서도 이렇게 세분화한 헌금 분류를 사용했다는 말은 들어본 바가 없다. 또한 이런저런 구실로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공개한다거나, 예배 시 감사 헌금자를 호명하며 별도로 기도를 해 준다거나 하는 행동은 지극히 세속적인 처사라고 분명히 경고하고 싶다.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이런 행위는 개혁 교회답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이런 행태들을 그저 돈을 더 뜯어내려는 극히 인위적이며 세속적인 잔수로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하여튼 한국교회 귀족 목사님들은 잔머리를 굴리며 쓸데없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데는 올림픽 금메달감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또한 모든 헌금을 무기명으로 하여 앞으로 순결해야 할 주님의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냈다고 어깨에 힘주거나, 반대로 헌금을 많이 못해서 위축되는 일이 제발 없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목회자가 헌금자를 은근히 공개하여, 돈 많이 낸 사람들이 득세한다거나 더 좋은 대접을 받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있을 수 있는 저질적인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한국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율법적인 십일조'에 대한 반론을 간단히 요약해 보았다. 만일 십일조에 대한 필자의 부족한 이해가 명백히 오류라는 것을 다른 분들이 구체적으로 잘 지적해 주시고 설명해 주신다면, 이후에 언제라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도 아울러 밝혀 두고자 한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
어찌 되었든 어떤 분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열심히 하는 것을, 구태여 따라다니며 말리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적이 매우 미신적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다. 즉 세속적인 출세와 복을 위하여 십일조를 바치는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마치 무속인이 천신굿을 할 때 돈을 바치듯, 매우 기복적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최근에 만난 어떤 분은 "십일조를 하면, 큰 복을 받는다"는 친척 목사님의 말을 굳게 믿고 십의 이조까지 바쳤다고 한다. 그랬더니 정말 놀랍게도 사업에 대박이 한번 터져 수년 전에 아주 큰돈을 버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맛에 신바람이 나서 나중에도 열심히 십의 이조를 해 오셨는데, 실망스럽게도 근자에는 사업도 잘 안 되고 거의 약발이 떨어진 모습으로 한숨 속에 지내시고 있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 일부 교인들의 의식 수준을 잘 보여 주고 있는 하나의 삽화라고 생각된다. 즉 '십일조의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세속적인 복만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하고 하시며 웃어넘기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의외로 십일조를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시는 순진한 분들이 제법 많다. 모두 귀족 목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감염된 탓이다.
이는 '돈 놓고, 돈 먹기'인 투기꾼의 심보이며, 성황당에 물을 떠 놓고 손바닥에 불이 나게 비비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필자는 이런 분들께 분명히 알려 드리고 싶다. 십일조를 바쳐서 어쩌다 부자가 될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대로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구조를 다 바쳐도 깡통을 찰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언급한 말라기서의 핵심 주제는 단순히 '돈을 내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이며 탄식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가증한 일에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즉 십일조를 아무리 잘해도,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하고 성공한다"는 일부 목사들의 달콤하고도 무지한 설교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성경대로 충실하게 살아도, 지지리 고생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세상에서 큰 상을 받은 자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작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거나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부자에게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으나, '나를 따르면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신 적은 결코 없으셨다.
거짓된 목사들이 이런 사실은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성경의 앞뒤를 다 잘라 낸 후 단순하게 "십일조를 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십일조를 철저히 잘하기로 따지자면, 아마 바리새인들보다 더 잘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들이 복을 받았나. 오히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책망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요즘 많은 목사들이 시대적인 상황이 전혀 다른 신정 국가 시대의 말라기서를 자세한 배경 설명이 없이 단순히 인용하며,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거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라고 강조하는 것은 십일조의 참된 정신을 왜곡하는 날조이며 기만인 것이다.
말라기서의 주제는 '십일조와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구약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십일조 관련 내용 역시 백성들 보다는 오히려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제사장들이 도적처럼 십일조를 떼어먹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제대로 나누어 주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말라기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신정 국가 백성으로서의 '책임'과 '특권'을 강조한 '온전한 십일조'인 것이지, 세속적 축복을 받기 위한 '도깨비 방망이' 같은 그런 십일조가 아니다. 즉 "복 나와라! 뚝딱!"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백성 된 책무인 온전한 십일조를 잘 바치면 비로소 참된 복을 받는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이런 '섬김과 책임'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거짓된 목사들이 단순히 "돈 내면, 복 받는다" 는 식의 미신적이며 주술적인 기복 신앙만을 상습적으로 떠벌리니 교회가 굿판처럼 매일 복 타령이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사업 번영, 자식 출세, 무병장수, 호의호식만을 꿈꾸게 되고, 이에 안주하는 복쟁이들이 되어 교회가 병들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양심을 가진 목사라면, 이웃을 섬기는 것이 복이고,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복이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복이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고, 억울한 자와 함께 우는 것이 복이고, 낮아지는 것이 복이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이 복이라고 증거해야 하지 않는가.
아울러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복이고, 남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고 사는 것이 복이고, 사회의 소금이 되어 녹아지는 것이 복이고, 그리고 예수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가다가 때로는 눈물 나는 고생을 하는 것도 참된 복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닌가.
사람이 만든 올무
십일조 강요는 결코 성경적이 아니며, 현실적으로도 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전도의 문을 크게 막고 있다. 또한 많은 교회에서 은근히 조직적이며 지능적인 십일조 강요로 인하여, 초신자들이나 가난한 교인들이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있다. 이는 복음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올무이다. 말라기서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탐욕스런 교회 지도자들은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는 행위를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신자들에게 다시 율법적인 십일조를 강요하는 행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십자가를 역행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가 마치 국세청을 대신해서 추가로 세금을 더 받겠다는 것과 비슷한 월권인 것이다.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위선적인 십일조로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결국에는 큰 재앙을 만나게 된다. 정복자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세운 왕조인 북쪽의 셀류쿠스 왕국과 남쪽 프톨레미 왕국 사이의 그 유명한 '150년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운데에 두고, 양측 군대가 오르내리며 지긋지긋하게 벌린 이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완전히 초토화하고 처참한 고통을 겪게 된다. 당시에 얼마나 이들 군대의 겁탈과 약탈이 심했으면 귀중품을 밭에 감출 수밖에 없었을까. 예수님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 관습을 근거로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하고 가식적인 제사와 십일조를 바친 결과를 이스라엘의 역사가 생생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개혁 교회는 이제라도 현재 가톨릭에서조차 시행하지 않는 이 십일조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잡다한 명목의 헌금들도 자발적인 '무기명 주일헌금'으로 단순화하기를 부탁드린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큰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결단코 버리는 것이 옳다. 이는 주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당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바쳐진 온전한 '사랑의 헌금'만을 가지고,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소모적인 논쟁 이젠 끝장내자
이렇게 십일조 폐지를 교회와 교단에 강력히 건의하지만, 사실 이분들의 답변에 큰 기대는 안 하고 있다. 십일조 강요는 한국교회의 변절에 기인한 것이고, 교회의 변절은 교단을 장악한 교권주의자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마음을 열고 들을 리 없는 것이다. 또한 진리 문제를 단순히 다수결로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찬반이 팽팽하여 결론이 나지 않는, 필요 이상으로 소모적인 논쟁은 아무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끝도 없이 연구만 하고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실천을 하자는 것이다. 누구나 스스로 신앙 양심에 따라 이번 주일부터라도 자신의 교회에서 율법적인 십일조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십일조의 정신'에 따른 사랑이 담긴 주일헌금을 하면 될 것이다. 구태여 교회에서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집사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보수 교단 소속의 어느 중형 교회에 출석하시는 이분은 대학 시절부터 늘 무기명 주일헌금만을 고집하여 왔다. 하루는 나이 드신 교회 여전도사님이 다가오셔서, "아무개 집사님도, 앞으로 십일조를 좀 하시지요" 하고 부드러운 충고를 주셨다. 그때 이 집사님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변을 드렸다고 한다. "저는 원칙적으로 십일조뿐만 아니라 그 어떤 기명 헌금에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제 신앙양심에 따라 무기명 주일헌금을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얼마 뒤에는 담임목사님이 같은 권고를 주셨다. 물론 동일한 답변을 드렸다고 한다. 다행히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는 누구도 이분의 십일조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장로가 되지 못한 것 외에는 교회 생활에 별 다른 불이익도 없었다고 한다.
혹시 십일조나 감사헌금 실적을 높여서 담임목사의 인정을 받고 장로나 권사 등의 직분을 서둘러 받고 싶으신 분들이 아니라면, 이 집사님의 소신 있는 처신도 약간의 참고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이분이 때로는 힘에 벅찰 정도로, 많은 헌금을 하고 있다는 점도 추가로 알려 드리고 싶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라
여섯 번에 걸쳐 20년 이상 추방을 당하면서도 정통 '삼위일체론'을 끝까지 고수했던, 4세기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아타나시우스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는가, 그러면 나도 온 세상을 반대하노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필요하다면 담임목사나 교권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의 신앙 양심을 반대하는가, 그러면 나도 그대들을 반대하노라." 또한 이 말도 추가하고 싶다. "나는 율법적인 십일조 강요가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토록 하고 싶으면, 그대와 그대의 후손들이나 열심히 해서 그토록 좋아하시는 복을 대대로 받으십시오!"
한국교회의 십일조 강요는 명백하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퍼트리는 일이며, 사도들이 결코 전하여 준 바가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 개혁은 십일조 폐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이미 복을 넘치게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무슨 복이 그렇게 더 필요해서 허구한 날 복 타령만 하며 십일조를 노래 부르나.
마지막으로 보수와 진보를 따지지 말고 여러 교단의 뜻있는 신학자들도 중립적인 침묵으로 세월만 보낼 것이 아니라, 진리의 파숫군답게 명철한 지혜를 가지고 이 율법적인 십일조 강요에 대하여 분명한 나팔소리를 들려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 11:4 )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