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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9가지 핵심 문제-세번째

by 디클레어 2011. 1. 12.

<요한계시록의 9가지 핵심 문제>

 

세번째, 네 말의 등장과 활동

 

1. 인류의 종말과 네 말의 등장 계시록 5장에서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7인으로 봉함한 책을 취하신 후, 인봉된 그 7인을 떼시는 모습이 6장에 나온다.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은 종말에 성취될 인류의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 문서이다. 이 책이 열리지 않으면 인류의 심판은 말할 것도 없고 사단의 최종적인 심판도 유보된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주의 재림도, 천년왕국의 축복도, 부활의 소망도 유보된다. 그래서 밧모섬에서 이 계시를 받고 있는 사도 요한은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크게 울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사도 요한이 울게 된 이유는 이 책의 인을 떼어 이 책에 기록된 내용대로 집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소망이 끊어지기 때문인데 그런 자격자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이긴 자'만이 이 책의 인을 뗄 자격이 있으며 그 인을 떼는 자만이 심판의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로 중에 하나가 요한을 위로하면서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장면이 새롭게 바뀌면서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 등장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하신 것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심판 권세를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봉함 된 이 책의 인을 떼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마28:18).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시고 율법을 이기시고 심판을 이기시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이제 예수님에 의하여 개봉됨으로 이 책이 다시는 봉인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다(계22:10). 이긴 자 되신 예수님이 열어 놓은 책을 왜 하나님의 종들이 인봉한 채로 노아 두는 것인가? 이 책의 실제적인 개봉은 7년 환난을 전후한 인류의 종말에 있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그 봉함된 책의 내용을 미리 보여 주신 계시이다. 인봉하지 말라는 뜻은 이 계시를 덮어두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는 이미 펴 놓인 책이다(계10:8).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큰 틀안에서 동의합니다.

 

 인류의 종말에 이르러 이긴 자 되신 어린양이 이 책의 인을 떼실 때, 사단의 운명은 끝장이 나며 사단이 다스렸던 이 세상의 권세도 무너지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불로 소멸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왕국이 탄생하는데 그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는 이 나라를 '천년왕국'이라고 말하고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인류의 종말에 이르러 어린양께서 이 책의 봉인을 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봉인은 떼어졌고 그 책의 기록대로 그리고 예언하신대로 역사를 주장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2. 첫째 인에 등장하는 흰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주의 재림이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의 재림에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특히 다니엘서)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한 이레의 언약'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첫째 인의 개봉 시기와 첫째 인을 떼실 때 등장하는 흰말은 요한계시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① 개혁주의 신학의 경우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흰말을 한결같이 예수님이라고 단정한다. 희다는 것과 이긴다는 것과 면류관을 썼다는 말에 근거한다. 근래에 와서 흰말을 적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신학자들도 혹 있지만 그들은 요한계시록 해석에 세대주의적 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흰말을 예수님으로 주장하는 이 같은 해석은 좀 어색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이 흰말은 면류관을 썼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쓴 면류관은 '스테파노스'라는데 주목을 해야 한다. 헬라어 성경에는 면류관에 대하여 두 가지 단어로 구분시키고 있다. 하나는 '스테파노스'요, 다른 하나는 '디아데마타'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두 단어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두고 있다. 먼저 '스테파노스'에 대하여 알아보면 이 면류관은 승리의 화관(花冠)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한 우승자에게 주는 월계관(月桂冠) 같은 것이다. 이 면류관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스테파노스'의 경우,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들에게 언약된 영광스러운 면류관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의의 면류관으로 (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으로 (약 1:12).

영광의 면류관으로 (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의 면류관으로 (계 2:10. 3:11. 6:2. 12:1).

 

그러면 또 하나의 면류관인 '디아데마타'는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가? 이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과는 달리 '왕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 같은 구분은 계6:2절의 흰말을 해석하는 일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役割)을 하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그런데 이 왕관인 '디아데마타'는 성도들과 연계(連繫)시킨 경우는 한번도 없고 예수님에게(계19:12), 그리고 적 그리스도(계13:1)와 사단(계12:3)에게만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므로 왕관인 '디아데마타'를 쓰셨고, 사단은 공중 권세를 잡은 이 세상 임금으로서 역시 잠정적으로 이 왕관을 썼으며 적 그리스도는 마흔 두 달간, 이 세계를 지배할 왕(열 뿔의 왕)으로 이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디아데마타'는 왕관으로서의 면류관으로만 나와 있을 뿐 그 왕관을 반드시 선한 의미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제한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우에도, 적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공동으로 이 왕관으로서의 면류관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흰말이 예수님이라면 계6:2절에 나오는 면류관은 '스테파노스'가 아니라 '디아데마타'라야 한다. 그리고 흰말을 탄 자가 예수님이 아닌 사실은 그의 싸움에서 나타난다. 6장에서 면류관을 받고 나가는 자는 '이기고 또 이기려는' 싸움에 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이기신 분이시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5:5). 지금 예수님은 이기고 이기려고 싸우시지 않는다. 그 분은 영원히 승리하신 분이시다.

 

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흰말을 탄 자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계19:11절에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내려오시는 모습으로 그 해석의 근거를 삼으려고 하는데 그 백마와 계6장의 흰말은 서로 맥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백마 탄 자는 예수님 뿐만 아니다. 계19:14절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군대들이 있는데 이들이 백마를 타고 예수님과 함께 아마겟돈에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아닌데도 백마를 타고 있다는 점은 계6장에 있는 흰말 탄 자의 존재를 예수님에게만 연결시킬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안타깝게도 이 해석은 면류관이란 단어 한가지에 치우처 큰 줄기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스테파노스와 디아테마타라로 면류관을 구분하신다면 그 해석을 가지고 이 흰말탄자가 예수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온전한 승리는 주의 신부들과 함께 주님의 나라를 이룰 때라야 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흰말을 탄 자는 그 왕국의 완성을 위해 이기고 또 이기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6장의 흰말을 탄 예수그리스도의 면류관은 스테파노스라야 가능하며 계시록19장의 어린양께서 승리한 주의 신부들과 함께 재림하실때는 완성을 이루신 면류관, 즉 디아데마타를 쓰시고 오셔야 한다는 것이 더 바른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흰말탄자에 대한 해석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또 모든 계시록해석의 근간이 이 봉인해석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사실을 여러 사람들의 해석을 봄으로써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짧게 반론을 했지만 이 글의 의미만 이해 한다면 결코 짧은 글이 아님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어린양과 함께 재림하는 주의 백성들도 흰말을 탔다고 표현된 것은 그들 또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고, 어린양이나 주의 신부들이 그 말을 탔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이지 실제로 말을 타고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② 세대주의 신학의 입장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이 흰말에 대하여 한결같이 적 그리스도로 단정한다. 그들에게는 이런 해석에 의의가 있을 수 없다.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흰말을 적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이유는 다음 몇 가지다.

 

ⓐ 7년 환난은 적 그리스도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흰말의 등장은 적 그리스도라는 견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잘못된 견해다. 적 그리스도는 7년 환난 전에 이미 세상에 등장하고 있다. 10뿔의 지배자로서의 적 그리스도의 위치는 7년 환난이 이르기 이전의 일이다. 한 이레의 언약이 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체결되는 것이라면 적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체결 이전부터 세상에서 세계 평화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적 그리스도는 실질적으로는 7년 환난이 훨씬 지난 후, 후3년 반의 마흔 두 달간의 지배자로 등장하는 것이다(계13:5).

 

그렇습니다. 참으로 옳은 견해입니다.

 

ⓑ 흰말이 등장한 후, 연이어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등장하는 것은 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임하는 재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7년 환난 기간에는 재앙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7년 환난 전반부가 되는 전3년 반기간은 두 증인들의 예언 기간으로 이 기간은 오히려 교회를 위해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은혜로운 기간이다. 그리고 흰말 뒤에 재앙을 상징하는 다른 세 말이 등장한다고 하여 흰말까지 그 세 말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주장이라 말할 수 없다.

 

다 좋은데 전삼년반기간이 두증인들의 예언기간이고 구원의 마지막 기회로 보는 것은 옳은 해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구원의 기회 같은 것은 딱 잘라 말해 없습니다. 지금 받아 들이지 않으면 그들은 어떤 기적앞에서도 주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신다고 하는 때는 노아 때와 같은 시기라는 것을 묵상해 보십시오. 노아도 홍수로 멸망할 것이다,라고 세상사람들에게 1년 넘게 외치고 다녔지만 미치광이 소리를 들었고 결국 그들 식구외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일견 이것은 전삼년반에 말씀하신 두증인들이 예언하는 사역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람들의 완악한 심성은 그들 앞에 멸망이 실제로 일어나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두증인으로 인해 흰옷을 입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될 것이라는 것은 꿈같은 얘기일 뿐이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 흰말의 흰 색깔은 사단의 위장된 색깔이며 말에 탄 자가 활은 가졌지만 화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적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활이 있다면 그 활에는 자연히 화살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정상적인 판단이다. 사단은 광명한 천사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곳에 나와 있는 흰 색깔은 사단의 위장된 색깔이란 아무런 힌트도 없다. 오직 흰말일 뿐이며 손에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는 싸움에서 승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 이 흰말이 적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그가 쓴 면류관이 '스테파노스'가 아니라 '디아데마타'란 사실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사단이나 적 그리스도가 '스테파노스'란 이름의 면류관을 쓰고 나오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왕관을 상징하는 '디아데마타'를 쓰고 나온다.

 

네, 알겠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③ 흰말을 탄 자의 정체는 누구인가? 우리는 네 말의 등장이 7년 환난 중에 일어날 모든 사건의 주체들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잠깐, 흰말을 탄 분이 예수그리스도라고 해석을 했고 그렇게 알고 계시는 성도들이라면 이 흰말의 등장시기는 예수그리스도부활승천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라는 것을 알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 흰말이 네 말 중 가장 먼저 등장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 흰말은 그의 생김새나 그의 활동 면으로 볼 때, 하나님 편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흰말'은 희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해 준다. 그리고 성도들과도 연계된다(계6:11. 7:9,14. 19:14). 계6장에 등장한 흰말에는 사단과 연결시켜도 좋을 그 어떤 허점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말이 결코 사단 편에서 나왔다거나 사단의 위장된 가면이라는 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가 쓴 면류관이나 이기고 이기려는 모습은 선한 싸움의 승리를 상징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류의 종말에 왜 이 흰말을 등장시킨 것일까? 그것은 앞으로 닥쳐 올 무서운 대 환난 중에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에서이다. 앞으로 인류들은 '붉은 말'에 의한 재앙, '검은 말'에 의한 재앙, '청황색 말'에 의한 무서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재앙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10일 동안의 환난'(계2:10)이라고 하셨고 '시험의 때'(계3:10)라고 하셨으며 '뜻밖에 덫과 같이 임할 그 날'이라고도 하셨다(눅21:34).

 

계시록2장10절의 10일 동안의 환란은 완전한 환란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계시록3장10절의 시험의 때는 그렇게 작정하셨다는 뜻이며, 누가복음 21장34절의 그날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 자들에게 임할 날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주예수그리스도의 권고의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혹시 무심히 넘어가실까봐 걱정이 돼서 한자 적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대 환난에서 그의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한 역사로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의 백성들에게 경종 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말씀해 주신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는 말씀이 그것이다(암3:7). 흰말의 등장은 바로 이 같은 의미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아모스3장7절 말씀의 의미는 주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 종 선지자들이라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말세에 어떤 사명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그 비밀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앞선 글들에서 처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혹시 그런 사명을 받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계시록의 예언들을 읽고 이해한 많은 분들이 바로 그 사명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명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 먼저 이 흰말을 탄 자는 '면류관을 받고 나갔다'고 말씀해 준다. 받았다고 했으니 누구에게 받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이 면류관이 어떤 면류관이냐에 있다. 성경에 사단의 종들에게는 면류관이 없다. 다만 사단과 그의 대리자가 되는 적 그리스도에게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쓴 면류관은 왕관을 의미하는 '디아데마타'이다. 사단은 세상 임금으로서의 왕관을 그가 최종적인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갈 때까지 쓰게 될 것인데 그 왕관이 '디아데마타'이다(계20:10). 적 그리스도도 역시 그의 왕권자로서의 사역 기간인 42달간 이 면류관을 쓰게 되는데 42달이 차게 되면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불붙는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게 된다(계19:21).

 

그렇습니다.

 

그러나 흰말을 탄 자가 받은 면류관은 왕관인 디아데마타인 것이 아니라 충성된 종들에게 주시는 '스테파노스'인 것이다. 이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씀해 주신다(의의 면류관으로 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으로 약 1:12. 영광의 면류관으로 벧전 5:4. 상급의 면류관으로 계 2:10. 3:11. 6:2. 12:1). 이 면류관은 두 증인들과 연결된다. 두 증인은 1260일간 '다시 예언'하는 사역을 하다가 예언이 끝날 즈음, 적 그리스도에 의하여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이들은 '부활 승천'하는 상급(계11:11-1)과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 하는 축복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스테파노스'에 해당하는 면류관의 상급이라고 볼 수 있다(계20:6).

 

감사합니다. 훌륭한 설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첨언을 하자면, 일천이백육십일동안 사역을 하는 자들은 계시록11장의 두증인과 그리고 계시록12장의 여인으로 표현된 교회입니다. 이 둘은 모두 일천이백육십일간, 즉 예수그리스도 부활 승천이후의 교회시대, 은혜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2장에서는 광야로 도피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11장에서는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하고,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같은 표현으로써 바로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지키고 인도하신다는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장의 두증인과 한때와 두때와 반때의 여인은 전삼년반기간까지 같이 이 땅에 있다가 한때와 두때와 반때의 여인은 그 전삼년반끝 무렵에 들림을 받아 시온산에 있게 되고, 들림받은 한달후인 마흔두달시작에 두 증인은 적그리스도의 군대에 의해 순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시 사흘반 끝에, 곧 후삼년반(마흔두달) 끝에 두 발로 일어나 승천을 하게 된다는 것을 계시록11장11절,12절에 기록한 것이구요, 이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헷갈려 하시기에 다시 한번 설명을 드렸습니다.

 

ⓒ 이들은 지금 활을 가지고 '이기고 또 이기려고'하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말씀이 새 번역 성경에는 '이기면서 나아갔고 또 이기려고 나아갔습니다'로 언급되어 있다. 이 같은 표현은 결코 적 그리스도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술책이 아니다. '이기고'란 말씀은 현재적인 승리를 의미하고 '이기려고'란 말씀은 미래적인 승리를 위한 계속적인 투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같은 표현은 하나님 편에서 나온 종말적인 사명자들이 사단과 싸우는 처절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멋진 해석이십니다. 그런데 종말적인 사명자라는 표현보다는 말세의 성도라고 보는 것이 오해가 없을 듯 싶습니다.

 

그러면 7년 환난 초기에 하나님 편에서 이 같은 싸움을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는 계11:3절 이하에서 두 증인에 의해 1260일간 적 그리스도와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 환난에서 건져내기 위한 싸움에서 이기고 있으며 또 이기려고 계속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들은 결국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적 그리스도에 의해 순교를 당하게 된다. '이기고 또 이기려는' 싸움은 바로 이들의 '다시 예언하는' 사명을 위해 전3년 반기간에 활동하는 '두 증인'의 예언의 사역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7년환란초기 전삼년반은 성도의 때로서 누구도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는 후삼년반인 마흔두달기간에 드러나고 따라서 전삼년반에는 그의 존재를 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그와 싸울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천이백육십일을 전삼년반으로 알고 계신 것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숨은 뜻은 모든 사람들뿐 아니라 성도들조차도 7년환란시대로 진입을 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바로 지금이 전 삼년반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의 등장은 후삼년반시작에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을 들으시다보면 현재에 살고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시기에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바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그래서이고, 이 때에 받아 들이지 못하면 믿음이 깊어질 시간적여유가 충분하지 못해서 그들의 계략과 모략에 넘어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때가 가까운줄 알고 주님께 헌신할 종들은 더욱 더 말씀을 깨달아 아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