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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카톨릭-바벨론

[스크랩] 카톨릭의 종교 연합 활동상

by 디클레어 2009. 12. 2.

 

 

카톨릭의 종교연합 운동
- 1964년 부터 종교연합 주도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종교연합을 위한 발걸음은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8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되고 있다. 10억 인의 카톨릭을 대표하는 교황이 5월 5일부터 3일간 이슬람 국가 시리아를 방문, 카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의식을 집전할 예정이라고 교회 관계자가 밝혔다. 비카르 이시도레 바티카 대주교는 “이 행사가 첫 카톨릭-이슬람 공동 기도회가 될 것이며 교황과 함께 시리아의 이슬람 성직자 세이크 마흐무드 카프타로가 의식을 주재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6월 23∼27일에는 레오니드 쿠츠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교황이 우크라이나를 공식 방문한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이고리 그루쉬코 우크라이나 외무부 대변인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이처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8년 교황 취임 후 종교연합의 선두주자가 되어 ‘화해와 평화(?)’를 부르짖으며 80여 차례의 해외 순방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작년 7월에는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로부터 “교황이 천장이 금으로 장식된 바티칸 궁전에 살면서 빈민을 걱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천장을 팔아서 빈민을 구제하면 될 것 아닌가?”라는 직언과 함께 ‘창녀의 아들(son of a whore)’이라는 심한 욕설을 들었다. 이런 수난을 겪으면서도 종교연합의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근래 들어서는 그 행보가 더욱더 빨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왜 카톨릭은 종교연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역사적인 연원과 더불어 교황에 의한 종교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개신교는 1948년에, 카톨릭은 1964년에 본격적으로 종교연합에 나서


종교연합(Oecumenismus)은 보통 개신교에서는 ‘교회일치운동’으로 표현하고 카톨릭은 ‘교회통합운동’으로 칭한다. 이 운동은 세속화의 진전과 교파의 분열이 가속화되자 통합이 절실해진 개신교 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910년 ‘세계선교대회(W.M.C.:World Missionary Conference)’를 계기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났다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으로 인해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 후 2차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이르러 전 세계 150여 교회가 정식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World Council of Churches)가 결성되었다. 그렇게 하여 개신교의 구심체 역할을 하며 오늘날 100여 개국에서 330여 개의 교파가 참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로마 카톨릭은 종교연합에 있어 처음에는 극히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1964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에큐메니칼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후 종교연합을 주도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카톨릭은 동방교회 및 프로테스탄트(개신교)와의 대화를 시작하여 1967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와 접촉을 가졌고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카톨릭-정교회 합동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70년대 들어 동방 정교회와의 대화가 본격화됐다 .

 

이러한 일련의 종교연합의 흐름 속에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카롤 요제프 보 이티야)는 거의 종교연합을 위한 사명감에 도취된 듯 전세계 191개국 중 120여개 국을 방문하며 모든 종교와 국가를 초월하여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카톨릭 신자들만의 수장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됨은 물론 카톨릭의 입지를 한층 강화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이는 작년 말에 CNN방송과 USA투데이가 갤럽에 의뢰하여 실시한 공동여론 조사결과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남성으로 뽑혔던 점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종교연합의 장소 지진 피해


교황의 행적 중에서도 그의 제의로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열린 ‘세계평화기도대회(The Day of Prayer for Peace)’는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전 세계에서 150여 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연합이 행해졌던 바로 이 지역에 1997년 10월, 지진이 강타하여 프란치스코의 일생을 28장의 프레스코화에 담은 유명한 조토(1266∼1337)의 벽화가 산산조각이 나는 등 아직도 지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종교연합의 구심체 역할을 한 교황의 행보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을 앞두고 절정에 다다랐다. 1999년 3월에는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과 바티칸에서 만나 이슬람 문명과의 화해를 시도했고, 5월에는 루마니아를 방문함으로 천년동안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던 그리스 정교회(동방정교회)와 화해를 했다. 그리고 10월 24일부터 5일간 로마 교황청의 성베드로 성당에서는 카톨릭,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각 종교의 지도자 200여 명이 모여 종교지도자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10월 31일에는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 이후 478년에 걸친 분쟁을 종식하고 공식적인 화해를 선언했다.


교황의 참회, 종교연합을 위한 제스처


거의 모든 종교와 연합을 꾀한 카톨릭의 남은 문제는 유대교와의 관계였다. 종교연합을 표방하고 그 선두 주자로 활약한 교황으로서 유대인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작년 3월 12일에 ‘성스러운 해 2000년을 위한 참회의 날’로 규정하였다. 이날 교회사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그 유명한 교황의 참회문을 발표하였다. 파킨슨 병으로 인해 덜덜 손을 떨어가면서 부정확한 발음으로 아주 고통스럽게 지난 2천년 동안 카톨릭이 인류에게 범했던 과오를 털어놓음으로써 그동안 카톨릭이 저지른 죄악상을 인정했다.

 

바티칸은 이날 용서를 구한다는 ‘용서의 날 미사(The Day of Pardon Mass)’를 진행하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성직자와 청중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황은 자주색 제의를 입고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보인 불신과 적의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날, 교황을 비롯한 5명의 추기경과 2명의 대주교들은 7개 항에 대하여 죄의 고백과 참회를 했다.그 항목은 일반적인 죄, 진리를 추구하는 명목으로 저지른 죄, 기독교인의 단결을 해친 죄, 유대인을 박해한 죄, 사랑·평화·인권·타문화와 종교를 업신여긴 죄, 여성의 존엄성과 인류의 단결을 해친 죄, 인간의 기본인권과 관련된 죄에 대한 참회였다.

 

각 주최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세계사 혹은 교회사에서 논의된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각종 종교전쟁, 피정복 원주민에 대한 강압적인 개종 요구, 마녀사냥을 포함한 종교재판, 성차별 및 인종차별 등을 함축하고 있다고 CNN, BBC, AP통신 등 외신들은 분석하여 전했다. 특히 카톨릭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이 “역사상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을 돌이켜볼 때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이어 교황도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유대인을 박해한 사람들의 행동을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라고 밝혀 참회문 중에서도 유대인과 카톨릭 사이에 흐르는 악감정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유대인과의 화해에 무게를 둔 것은 정치 경제 등 세계 주요 분야에서 중심세력인 유대인과의 화해 없이 정치 종교적 평화를 모색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의 반성


바티칸의 참회문 발표에 이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도 작년 12월 3일 근대 이후 현재까지 200여년 간의 과오를 반성하는 문건 ‘쇄신과 화해’를 발표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천년 역사에서 잘못한 점에 대해 용서를 청한데 따른 후속 조치로 교황이 전 세계에 용서를 구한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소극적인 사과였다.

 

천주교는 문건에서 구한말 외세에 의존해 교회를 지킨 점에서부터 해방 후 냉전체제를 일방적으로 옹호한 점 등 모두 7개항에 걸쳐 반성했다. 이 문건은 “세계정세에 어둡던 박해시대에 외세에 힘입어 교회를 지키고자 한 적도 있었으며, 일제의 식민통치로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는 병인양요 당시 외세에 의존하고 안중근 의사 의거를 살인으로 규정하며, 독립운동을 홀대한 과오 등을 우회적으로 인정했다. 물론 한국천주교의 참회도 교황의 참회와 마찬가지로 철저성과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교황의 발언은 일체의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라는 ‘무오류설과는 달리 카톨릭은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교황, 종교연합으로 입지 강화

 

카톨릭의 역사를 반추해 보면 538년에 교황권을 확립하여 1260년 동안 중세시대를 장악하는 종교암흑시대를 지나 1798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 의해 교황권이 몰락했다가 1929년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스트 정권과 라테란 조약(정교조약)에 의해 부활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처럼 1600여 년의 영욕(榮辱)의 역사는 로마 카톨릭으로 하여금 세계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읽어내는데 뛰어난 안목을 지니게 해주었다. 따라서 카톨릭은 오늘날 정보통신이 발달하여 카톨릭의 입장에 배치되면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하는 극단적인 수단이 통했던 중세 시대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어느 단체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화해(?)라는 미명의 슬로건을 내건 종교연합의 카드를 통해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즉 안으로는 카톨릭의 입지를 공고히 하여 다시는 교황권이 몰락하는 수치를 당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종교를 대표하여 모든 종교 및 국가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연합이라는 카드에 힘을 싣고자 참회문을 통하여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는 입장을 내세웠으면서도 작년 10월에는 “로마 카톨릭이 다른 교파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기독교회 통합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식의 배타적 선언을 한 점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일이다. 현 교황이 81세의 고령인데다 파킨슨 병을 앓고 있어 언제까지 종교연합을 위한 발걸음을 계속할 지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http://blog.daum.net/hyodoza/9734269

출처 : 바른교회 바른신학 바른믿음
글쓴이 : 푸르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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