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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10-11장

by 디클레어 2010. 1. 20.
계시록 10 장

계시록 7장이 삽입 장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또 하나의 삽입 장을 보게 됩니다. 계시록 8장에서 네 번의 나팔을 불었고 9장에서 두 번의 나팔이 불렸고 그 다음에 쉼이 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 6장에서 경우와 똑같이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린 후 쉼이 있습니다. 계시록 7장이 비록 봉인들이 열리는 기간에 주어지지만 어떤 봉인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계시록 10장도 나팔이 불리는 기간에 해당하지만 어떤 나팔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0장은 계시록 7장처럼 환란 중에 일어나는 특정한 사건을 설명하기 의해 삽입된 것입니다.

계 10:1 또 내가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으로 옷 입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머리에는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으며 그 발은 불기둥 같더니
“구름”은 보통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나타납니다.(계1:7, 행1:9) 힘센 천사는 의심할 것 없이 계시록 1:14-15에서 나타난 천사입니다. 바로 주의 천사인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 10:2-3 그가 펴 놓은 작은 책을 손에 들고 오른발로는 바다를 밟고 왼발로는 땅을 밟고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 큰 음성으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천둥이 음성을 내어 말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록 5:5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불리는데 이 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이것은 환란 중 어느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실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개종하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어느 날 거듭나서“ ”해산의 고통에 있는 여인“이 ”사내 아이“를 낳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회심할 것을 명백히 가르치는 것입니다.(사66:7-8, 미5:3)
바울은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도입니다. 사도행전 9:6에서 우리는 바울의 개종을 보는데 바울은 “때가 지나서” 구원받은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모형도 아닙니다. 바울은 환란 중에 구원받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요나는 이방인들을 향한 특별 사역을 하는데 이 두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구령하도록 임명될 환란 때 구원받는 유대인 남은 자들(144,000명)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요셉은 152절에 걸쳐 그리스도의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요셉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형제들에게 나타내실 때처럼 자신을 그의 형들에게 나타냅니다. 그러나 요셉은 거부되어 팔려갑니다. 그 후 기근이 닥쳤을 때에야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영접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도 처음 초림 때에는 이스라엘에게 거부되었지만 두 번째인 재림 때에는 영접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보고 개종한 것과 똑같이, 요셉의 형제들이 기근 때에 요셉에게 절한 것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란 때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면(겔43:2, 시50:2)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보고 영접하고 회심할 것입니다.
계 10:4 일곱 천둥이 음성을 내어 말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내게 이르기를, 일곱 천둥이 말한 것들을 봉인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정말 까다로운 구절이 있다면 바로 이 구절인데 “일곱 천둥”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기가 거짓말을 가르치고 싶을 때 이런 애매한 구절로 시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에게 요한복음 3:16, 1:12, 3:36, 로마서 10:9-10, 계시혹 3:20, 요한일서 5:10-12을 가지고 속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에게 적용되지 않는 성경 구절을 동원하고 의심스럽거나 복잡하거나 까다로운 구절들을 항상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탄도 성경을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일곱 천둥이 말한 것들은 봉인하고 기록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모릅니다.
이 구절의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절은 시편 29편입니다.

계 10:5 내가 본 그 천사가 바다와 땅 위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바다와 땅 - 몇 개의 바다와 대양이 있는데 계시록 4장의 유리바다와 계시록 21장의 바다(이 두 바다는 같다.)를 제외하고 언급되는 바다는 지중해입니다. 이 모습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발은 팔레스타인 땅에 다른 발은 지중해에 두시는 것 같습니다.

계 10:6-7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 곧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을 두고 맹세하되 더 이상 시간이 있지 아니하려니와 일곱째 천사가 음성을 내는 날들 곧 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같이 하나님의 신비가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천사가 한 발은 땅에, 한 발은 바다에 두고서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낼 때 “하나님의 신비가 이루어지리라”고 선포합니다.
일곱째 천사는 계시록 11:15에서 나팔을 붑니다.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니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문자적이고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세상 나라들을 인수하시기 위해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게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은 분명히 초림 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B.C.4000년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왕국들”을 인수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 세상 왕국들은 현재도 사탄에게 속해 있습니다.(눅4:6, 고후4:4, 요12:31) 계시록 11:15까지 사탄의 지배는 계속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왕들을 통치하기 위해 문자적이고 물리적이며 눈에 보이게 오실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결코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으며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것입니다.

계 10:8 내가 하늘로부터 들은 그 음성이 또 다시 내게 말하여 이르되, 가서 바다와 땅 위에 서 있는 천사의 손 안에 펴 놓은 작은 책을 취하라, 하거늘
이 음성은 천사 위의 하늘에서 나는 음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에도 하늘에서 한 음성이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마3:17)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삼위 일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계 10:9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이 작은 책은 어떤 책인지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계시록 5:1-5에서도 한 권의 책이 나오는데 정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 작은 책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겔2:9, 3:3)

계 10:10-11 내가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은 뒤에 즉시로 내 배가 쓰게 되었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 앞에서 다시 대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이 작은 책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라고 하며 아모스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은즉 누가 대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3:8)“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이 책을 먹었을 때 “꿀처럼 달았으나” 먹은 뒤에 “내 배가 쓰게 되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전3:2에서는 젖(milk), 눅4:4과 요6:35에서는 빵(bread), 히5:14에서는 단단한 음식(strong meat), 시119편에서는 꿀, 잠언에서는 “사과들”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맛이 좋은 음식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는 달콤하고 기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씀을 소화하고 실천하려 할 때는 박해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쓸”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믿고 행동하면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과 손잡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자”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자”라고 배척 당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이상하고 독특하며 눈에 거슬리는 존재로 비쳐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가족들도 “사랑이 없고” “비협조적”이며 “극단주의자”로 배척하며 반대하게 될 것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항상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골고다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식뿐인 “종교”는 오늘 날 세상에서 돈과 섹스 다음으로 위대하며 인기 있고 멋진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항상 관대하였고 권장되었고 인기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결코 환영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요한처럼 이 책을 먹는다면 입에는 달콤하지만(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다!) 소화 될 때는 쓸 것입니다.
계시록 11 장

계시록 11장은 계시록의 중간 부분이며 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장입니다. 계시록 11장은 계시록의 열쇠인데 계시록은 구약의 열쇠이며 구약은 신약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11장은 성경 전체의 열쇠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닌 중요한 장입니다. 계시록 11장을 이해하는 열쇠는 여러분이 읽는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계 11:1 또 그 천사가 내게 막대기 같은 갈대를 주고 서서 이르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이 “막대기 같은 갈대”는 측량하는 막대입니다. 또 측량해야 할 “하나님의 전과 제단”은 계시록 8:3-5의 하늘의 성전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전은 땅에 있는 전입니다.

계 11:2 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이는 주께서 이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셨음인즉 그들이 이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고 이방인들이 42달 동안 짓밟을 이 실제적인 전은 이 땅에 있는 전이고 이 땅에 있는 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전이 세워질 것이며 전 경배가 미래에 다시 재개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준비위원회가 성전 건축과 성전 경배를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다만 성전터라고 추정되는 곳에 회교 사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전 제사를 위한 제단, 물대야, 빵상, 촛대, 향제단, 향로, 기타 모든 집기들을 모두 제작하였으며 성전을 지을 모든 자재도 모두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을 선발하여 제사장 교육을 마쳤으며, 제사장들을 정결하게 하는 제물로 드릴 붉은 암송아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땅위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 땅위에 언제라도 세워 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현재 신문과 매스컴에 보도된 사실들입니다.
이방인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이 전은 A.D.70년에 파괴된 헤롯 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A.D.70년 파괴된 헤롯 전은 뜰이 넷인데 여기 세워질전은 뜰이 하나이며 A.D.70년 헤롯 전은 마흔 두 달 동안 짓밟히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대언하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 - 이렇게 말하는 분은 계시록 10:1,9,11의 천사인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서 마흔 두 달은 일천이백육십 일인데 삼년 반입니다. 성경의 한 달은 삼십 일이며 일년은 삼백육십일입니다.

계 11:4 그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요, 두 등잔대니
두 증인(두 올리브나무)에 대하여는 많은 사사로운 추측들이 난무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첫째 증인은 성경이고 둘째 증인은 외경이라고 주장합니다. 몰몬교는 첫째는 성경이고 두번째는 “몰몬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첫째 증인이 구약성경이고 둘째 증인은 “탈무드”라고 주장합니다. 안식교인들은 성경이 첫째 증인이고 “성경의 열쇠”가 둘째 증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증인”은 “두 증인”이지 책들이나 열쇠가 결코 아닙니다.
스가랴서 4:11-14를 읽어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그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저 두 올리브나무는 무엇이니이까? 하고 또 내가 다시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두 금관을 통해 스스로 금 기름을 비우는 두 올리브나무 가지는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것들이 무엇인지 네가 알지 못하느냐? 하매 내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이들은 두 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로 온 땅의  곁에 서 있는 자들이니라, 하더라.
두 증인은 “두 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이며(현재시제) “온 땅의  곁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현재 시제)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487년 전에 이 땅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스카랴서는 B.C.534-487에 쓰여졌음)

계 11: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들을 삼킬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하리라.
“외경” “몰몬경” “탈무드“을 해치려고 하면 여러분을 삼킬 불이 나올까요?
이 두 의 기름부음 받은 두 증인은 모두 그들의 적들을 불로 소멸합니다.
(민 16:34 -35) 그들 주위에 있던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께로부터 불이 나와 향을 드리는 이백오십 명을 소멸시켰더라.
이것은 모세가 코라, 다단, 아비람 자손들을 불로 소멸시키는 장면입니다.
(왕하 1:10) 엘리야가 오십인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곧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이것은 엘리야가 그를 잡으러 온 군사들을 불로 소멸시키는 장면입니다.

계 11: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그들 중 첫째 증인은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합니다. (예언하는 날들은 11:3절에 의하면 42달입니다. 즉 삼년 반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 거주민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서서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性情)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였고
둘째 증인은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보든 재앙으로 땅을 칠 수 있습니다.” (출4장, 7장을 읽어보십시오.)
이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세입니다.
이 두 증인은 책이 아니며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었습니다.(출33:11-23, 왕상19:9-13) 모세와 엘리야는 그의 적들을 불로 소멸하였습니다. 모세는 재앙으로 땅을 치고 엘리야는 삼년 반 동안 비를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시내산에서 사십 주야를 있었습니다.(출24:18, 왕상19:8)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의 사역을 계승한 사역자들(여호수아와 엘리사)이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둘 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습니다.(마17장)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와 에녹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위의 조건들에 관련이 없습니다.
두 증인이 엘리야와 에녹이라는 주장하는 이유로 엘리야와 에녹은 둘다 죽지 않고 들림 받았지만 모세는 들림 받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모세는 두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실수입니다.
(신 34:5-6) 이와 같이 의 종 모세가 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으니라. 그분께서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그를 묻으셨으나 이 날까지 그의 돌무덤을 아는 자가 없더라.
모세를 장사지냈지만 사람들은 에녹의 흔적을 찾지 못했던 것처럼 모세의 묻힌 곳을 결코 찾지 못했는데 모세는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 9)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며 논쟁할 때에 감히 그에게 욕설로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르되, 께서 너를 꾸짖으시기 원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몸”(혼이나 영이 아닙니다!)이 미가엘과 마귀의 논쟁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무덤에 머물지 않고 죽음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마태복음 17장에서 변화된 예수님과 엘리야와 함께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는 침례인 요한의 모습으로 이미 왔기 때문에 두 번째 증인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을 기록된 말씀 그대로 믿는다면 이것 역시 해결됩니다.
(마 17:9-11)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여쭈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
회복하리라”는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말입니다.(행3:20-21)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엘리야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마 17:12-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 그에게 행하였도다. 사람의 아들도 그와 같이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침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위의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였다고 생각하므로 구약의 예언은 초림에서 모두 성취되었다고 간주하는데 이것은 부주의한 해석입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성취가 아니라 예언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 그러나 “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반박을 보여주는 접속사입니다!
분명히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눅1:17) 왔으나 요한 자신은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네가 엘리야냐?“고 묻자 ”나는 아니라“고(요 1:21)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주의 깊게 성경 구절들을 비교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행2-7장)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돌아오셨을 것이며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행전 7장에서 돌아 오셨다면 구약의 모든 예언은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재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사도행전 7장에서 돌아오실 것을 예견하시고 사도들에게 『그러나 이 도시에서 핍박하면 다른 도시로 도망하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 다니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마10:23)』고 사도들의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 다녔으나 사람의 아들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을 연기하셨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교회시대가 시작되도록 = 교회시대는 구약 선지자들에게는 숨겨져 있었습니다.)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엘리야의 재림도 훗날로 연기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문자적으로 다루는 구절들은 500구절이상입니다. 만약 이 구절들을 초림에 적용하려면 억지로 영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합니다. 초림과 재림 사이에 유일하게 빠진 것은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간 간격입니다. 이 시간 간격이 구약에서 가려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언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벧전1:9-12)사이의 시간 간격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초림과 재림 사이에 주어진 시간 간격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초림 때 재림을 기다렸으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초림 때에 문자적이고 물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왕국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으며 사도행전 7장까지 이스라엘에게 그 분이 주와 그리스도로서 선포되고 맞아들이도록 권장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성령님에 의해 촉구하는 말에 귀를 막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을 때 스데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 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는데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내려오실 수 있는 상황임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7장 이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앉아 계신 모습으로 언급됩니다.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으셨으며 이 시간 간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어 진 물리적이고 문자적이며 눈에 보이는 약속들(500개의 구절들)이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교회 시대후)에 일어 날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열쇠는 바로 11장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두 증인인 것을 확인하였다면 계시록은 열린 것입니다.
다시 확인해 보십시오.
모세와 엘리야만 시내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산에 계셨습니다.(마 4장, 눅 4장) 모세와 엘리야가 40주야를 머물던 그 산에서 예수님께서도 40주야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계셨습니다. 모세는 요단 동쪽 피스가 산에서 죽었고 엘리야는 바로 모세가 죽은 그 산에서 들림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의 사역을 여호수아에게 위임을 하였으며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의 사역을 위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바울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위임하셨습니다.(롬15:16) 모세의 사역자인 여호수아가 그의 사역에서 표적과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자인 엘리사가 엘리야가 행한 것과 같은 표적과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이방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역자인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표적과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롬15:16,18,19 참고.)
모세와 엘리야는 큰 환란 때 이 땅에 돌아 올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말로 들릴 것입니다.

계 11:7 그들이 자기들의 증거를 마칠 때에 바닥 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죽일 터인즉
7절에서 짐승이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이 짐승은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옵니다. 이 짐승에 대하여 “부활한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많은 경건하고 훌륭한 기독교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짐승”은 “부활한 로마제국”이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짐승의 통치가 열 명의 왕들과 함께 통치하는 것을 말할 때 짐승을 부활한 로마제국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이 짐승 자신을 말할 때에는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사람입니다.(로마제국이 바닥이 없는 구렁에서 올라올 수 있을까요?)
(계 13:18) 지혜가 여기에 있으니 지각(知覺)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the number of the beast)를 세어 볼지니라. 그 까닭은 그것이 어떤 사람의 수(the number of a man)이기 때문이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그 짐승”의 수는 “어떤 사람”의 수인 것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짐승”은 “사람”입니다! 이 “짐승”은 다니엘 7장에서도 “사람”인 것이 확인됩니다.
(단 7:17) 그 네 큰 짐승은 네 이니 곧 땅에서 일어날 자들이라.
짐승은 사람이고 왕이며 바닥 없는 구렁에서 올라옵니다!

(계 9:11) 그것들에게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곧 바닥 없는 구덩이의 천사라. 그의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 아바돈이나 그리스 말로는 아폴리온이라 하더라.
이 왕은 천사이며 히브리어와 헬라어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짐승은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계 17:8)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요한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없으나(지금은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습니다) 앞으로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이 짐승을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그대로 요약해 보십시다.
1. 이 짐승은 사람입니다.
2. 이 짐승은 바닥 없는 구덩이의 천사입니다.
3. 이 짐승은 바닥 없는 구덩이의 왕입니다.
4. 이 짐승은 히브리어(아바돈)와 그리스어(아폴리온)로 된 두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5. 이 짐승은 파괴하는 천사이며 사망과 지옥이 의인화 된 인물입니다.
6. 이 짐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요한의 시대에 살았었고 지금은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으며 큰 환란 때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올 것입니다!
이 “짐승”에 대하여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밝힐 수 있을까요? 이 “짐승”은 “부활한 로마 제국”이라는 가르침은 사사로운 해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계시록 13장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전에 있었던 “짐승인 사람”에 대해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밝혀 보십시다.
(요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을 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내가 지켰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 중의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니이다..
이 구절에서 “멸망의 아들”은 분명히 가룟 유다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 것이 예언된(슥11:12-13) 바로 다음에 언급된 사람이 적그리스도인 것을 유의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슥 11:15-17) 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한 어리석은 목자의 기구들을 네게로 취할지니라. 이는,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켜 세울 것임이니 그가 끊어진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어린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잠잠히 서 있는 자를 먹이지 아니하며 오히려 기름진 것들의 고기를 먹고 또 그 발굽들을 갈기갈기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그 양떼를 버리는 “우상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임하리니 그의 팔이 완전히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완전히 어둡게 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가룟 유다의 배반에 뒤이어 “우상목자(the idol shepherd)"인 적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보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 의해서 ”멸망의 아들(요17:12)“이라고 불립니다.
(살후 2:3)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背敎)하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라.
위의 구절에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이 땅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인 사악한 자(살후2:8)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2에서 “멸망의 아들”은 “가룟 유다”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마지막 “짐승”으로 나타날 적그리스도인 “멸망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른다면 소경이거나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70-7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선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그가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배반하여 넘겨줄 자이기 때문이더라.
이 말씀은 너희 중에 하나에게 마귀가 들어가 있다가 아닙니다. 마귀가 변신해 있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니라”라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그대로 믿음으로서 밝혀 진 것입니다. 무오한 성경을 통해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주시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각자가 심판석에서 해명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 말씀에 한 점, 한 획, 한 단어만 빼거나 더 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여 믿을 수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더 하거나 빼거나 바꾸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깨달았다면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입니다.(계22:18-19)
이 마귀인 가룟 유다는 죽어서 지옥이 아닌 “자기 자신의 처소(his own place)"로 갔는데 가룟 유다는 그곳의 왕입니다.
(행 1:24-25) 그들이 기도하며 이르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택하셨는지 보여 주사 그로 하여금 이 사역과 사도직을 맡게 하옵소서. 유다는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가고자 하여 범죄함으로 그 직분에서 떨어져 나갔나이다, 하고
이 것은 제자들이 주님께 가룟 유다를 대신 할 사람을 ‘보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가룟 유다는 마귀였으며 사람처럼 걸어다녔고 말했으며 음식을 먹었고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룟 유다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으나 가인처럼 “사악한 자(wicked one)에게서 나왔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에서도 적그리스도를 사악한 자(Wicked)라고 부르는데 이 인물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마귀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모방하여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증거들을 종합해 보십시다.
1. 이 땅에 “짐승”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올 것입니다.
2. 이 짐승은 “남자”입니다.
3. 이 사람은 전에 요한의 시대에 이 땅에 살았었고 지금은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는데 이 사람은 사탄에 의해 잉태되어 육신이 된 마귀였습니다. 이 사람은 죽어서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갔습니다.
4. 이 사람은 “멸망의 아들”로서 적그리스도와 동일시 됩니다.
5. 이 사람은 죽어서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갔는데 그 곳은 지옥이 아니라 “바닥 없는 구덩이”입니다.
6. 이 사람은 지금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는데 그 곳의 천사이며 왕입니다.
7. 이 사람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이며 헬라어로 아폴루온인데 그 의미는 “파괴자” “멸망”입니다.
8. 이 사람은 “자기 때에” 바닥 없는 구덩이에서 나와 사탄이 직접 그 사람으로 육화할 것입니다.
9.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지성소에 앉아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며 인간 제물을 요구 할 것입니다.(계6장)
10. 이 사람(짐승)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증인이 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 앞에서 증거했던 것처럼, 엘리야와 엘리사가 아합에게 증거했던 그대로 두 증인이 나타나서 이 “짐승”에게 증거할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성경의 열쇠가 계시록이며 계시록의 열쇠가 계시록 11장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여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주신 위의 사실들을 믿을 수 있다면 성경의 대부분은 열린 것입니다.
계 11:8-9 그들의 시체가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리니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또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에서 나온 자들이 그들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구경하며 그들의 시체를 무덤에 두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들의 시체가(their dead bodies) - 두 증인들의 죽음을 표현하는데 죽음(dead)이라는 표현으로도 두 증인의 죽음을 표현할 수 있는데도 “그들의 죽은 몸들(their dead bodies)"이라고 특별하게 표현한 이유는 몸이 목과 분리되어진 것을 나타내기 위한 신중한 표현입니다. 계시록 6장에서 환란 때 죽임 당한 자들의 죽음은 계시록 20:4에서 목 베임 당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증인의 시체는 몸과 목이 분리 된 목베임 당한 죽음인 것을 특별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엘리야와 모세는 이 땅에 돌아와서 목베임을 당해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죽지 않고 들림 받았던 엘리야가 죽을 것임을 말하며 비스가산에서 죽었던 모세가 또 다시 죽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한 구절을 모순처럼 보이게 합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들이 두 증인이 엘리야와 에녹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구절을 교리로 붙들고 에녹과 엘리야는 결코 죽지 않았기 때문에 환란 때 돌아와서 죽음으로서 히브리서 9:27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27은 한번의 죽음을 말하는 절대 확실한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계시록 20장에서 “두 번째 죽음(second death)"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두 번 죽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지만 다시 늙어 죽었습니다.(요11:39-44) 이외에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7:11-15) 야이로의 딸(마9장, 막5장, 눅8장) 도르가(행9장) 수넴성 여인의 아들(왕하4장)등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나 두 번째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번 죽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9:27은 사람들에게 한번의 일반적인 죽음이 있다는 것을 비교하기 위한 것입니다.
(히 9:27-28)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as),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so)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헌물로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 문제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이 구절은 “한 번 죽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인류)에게 정하신 것처럼(as)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한번의 죽음이 있는 것을 비교한 것이지 절대 교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많은 사람이 두 번 죽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모세도 이 사람들처럼 두 번 죽을 것입니다. 에녹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유형입니다.(전혀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이 사람들이 고전15:55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 환란 때 예루살렘은 더 이상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음란하기는 소돔과 같고 세상의 유형인 이집트 같다고 합니다.(렘23:14, 겔16:46 참고) 그러나 이 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다시 “거룩한 도시”가 될 것입니다.
사흘 반 - 계시록 11:2, 3, 9, 11을 읽어보십시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카톨릭의 전통을 따라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 9장에서도 적그리스도가 그 주의 중간(three and a half)에 약속을 깨뜨리는 것을 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의 중심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셔야 했습니다.(마12: 40) 예수님께서는 그 주의 중간에 죽으셨는데 그 때는 수요일 정오입니다.
마가복음 11장부터 16장까지 살펴보면 종려주일 아침(첫째 날 즉 일요일)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셔서 수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히실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저녁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후 다음 날(화요일) 이틀 후면 유월절(막14:1)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다음 날인 목요일이 일반적인 안식일이 아닌 절기 안식일인 유월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흘 낮과 사흘 밤이 지난 후인 일반적인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난 후 일요일에 부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중심 속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면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변경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반 후에 못 박혀 죽으셨고 두 증인도 사흘 반을 죽는데 두 증인도 땅에 “사흘 반”을 죽은 채로 누워 있을 것입니다.

계 11:10 이 두 대언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라 - 이때가 크리스마스를 말하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 할 수 없으나 충분히 가능성은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지중에 성경의 표현을 빌려옵니다. 세계적으로 기뻐하며 선물을 보내는 때는 유일하게 크리스마스 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은 결코 아닙니다. 12월25일은 바알의 생일이며 이집트의 이시스여신의 아들 생일입니다. 12월 25일은 태양신과 아스타롯, 달의 여신인 “하늘의 여왕”의 숭배의 날로 오래 전부터 지켜 온 날입니다.(자세한 것은 “두 개의 바빌론”을 읽어보십시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중 누구도, 초기 기독교의 폴리캅이나 이그나티우스의 사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지켰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생일”을 지키는 것은 바알 숭배자들의 관습 중에 하나입니다.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어느 곳에서도 단 한번도 어떤 사람의 생일을 기념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부정하게” 태어나며 죄로 죽은 아담에게서 태어나는 것을 기뻐하고 기념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에 의해 영이 거듭난 날은 기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다면 성경에 명확히 밝히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일을 밝히시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여러분의 구세주로서 기억하고 증인이 되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을 추정한다면 장막절(Tabernacles)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육신을 장막(tabernacles)이라고 하며(고후5:1-4)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tabernacled)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양들이 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월 25일 탄생하셨다는 최초의 언급은 3세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의 “조직”(stromata)에서 나타납니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의 학파를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에게 인계하여 준 사람입니다. 바로 이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에 의해 이혼증서(Biblion Apostasion)인 “바티칸 사본”이 완성되었으며 이 사본에서 ASV와 RSV등이 만들어졌습니다.(개역 성경도 이 사본에서 나왔습니다.)

계 11:11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영께서 그들 속에 들어가시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더라.
생명의 영(Spirit of life) - 계시록 4:5에서는 하나님의 일곱 영, 계시록 3:13에서는 영(Spirit)으로 언급됩니다. 성령에 대한 이러한 호칭의 변화는 이 기간이 교회시대의 기간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영(Spirit)"이나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으로 불리지만 신약에서는 “성령(Holy Spirit)" 또는 성령님(Holy GHost)으로 불려졌기 때문입니다. 환란기간에는 다시 구약의 율법이 다시 지켜지기 때문에 “영(Spirit)"이나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으로 다시 불려집니다.
11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영”이 두 증인에게 들어갈 때 두 증인의 목이 잘린 시체가 일어서고 그들의 머리가 불쑥 나타나 몸에 붙는 것은 무섭기도 하고 만화 같은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런 장면을 ”구경하는 자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는”것은 당연합니다.

계 11:12 이 두 대언자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 큰 음성이 나서, 이리로 올라오라,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
이 구름은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 마태복음 17장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나타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 때, 계시록 14:15-16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름”을 휴거 당하는 “사람들의 떼”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휴거”를 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휴거”는 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휴거가 아니며 살아있는 성도들이 “눈 깜짝하는 순간에” 들림 받아서 아무도 볼 수 없는 휴거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9-11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눈에 보이게 하늘로 들림 받아 올라가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휴거”입니다. 이 휴거는 신약 성도들의 휴거가 아닙니다. 이 휴거는 환란 성도들의 휴거입니다. 이 구절의 문맥이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실 때”인 계시록 11:15의 “이리로 올라 오라”의 문맥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휴거는 “이 세상 왕국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는 때”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는 때는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낼 때인데 이 때는 환란의 끝입니다. 초림 때에는 어떤 왕국도 우리 와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환란 후 휴거는 그 성격과 목적이 “이스라엘”이 대상이지 교회의 휴거가 아닙니다. 이 휴거는 마태복음 24:31에서도 언급되는데 이 휴거는 분명히 환란 후에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24장,25장은 큰 환란 때의 문맥인데 많은 교회들이 교회시대에 적용시켜서 개인의 구원과 연결하여 가르치는 실수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성결교나 감리교에서 가르치듯이 사람의 삶의 끝이 아닙니다. 사사로운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삶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 읽습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 “어떤 시대의 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는 마태복음 24:21, 29에서 “그 때에 큰 환란이 있으리니” “그 날들의 환란 뒤에”라고 설명하며 그 시대가 어느 때인지를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간은 환란이라고 불리는데 이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왕국 복음(gospel of the kingdom)이 전해집니다.(마24:14) 그리고 환란 때에는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습니다.(마24:13) 이 왕국복음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마2:2, 27:11,37)으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복음인데 이 복음에는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와 이적이 포함되며(마4:23. 9:35) 대상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마10:5-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 번의 휴거는 계시록 4:1을 참고하십시오.

계 11:13 바로 그 시각에 큰 지진이 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더니 지진으로 죽은 사람이 칠천이더라. 그 남은 자들이 놀라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환란 끝에 가서 구원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땅에 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휴거 되지 못했지만 의롭게 된 사람들인데 마태복음 25:1-10에서 완벽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꺼진 등불을 위해 기름을 사라고 듣는 사람들과 구원을 얻기 위해 일하는 종들과 일하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자들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선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환란 때의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천년왕국에서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시대에는 행위와 무관하게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큰 환란 때에는 믿고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습니다. 천년왕국 때에는 믿음이 없이 행위로 산상 설교를 지켜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지 않는다면(딤후 2:15) 재림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재림을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에 마태복음 24장,25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는 신약에서 매우 어려운 책들입니다. 이 책들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의 내용으로만 믿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의 복음으로부터 신약으로의 전환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문자적인 왕국으로부터 거듭난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왕국”까지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신약 교회시대에서 환란으로 들어가는데 이 환란에서 하나님은 “영적인 유대인들”이 아닌 “히브리인들”, 실제적인 유대인들과 교제를 새롭게 하십니다.

계 11:14-15 둘째 화는 지나갔으니,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임하는도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니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나라들을 영적으로 영원히 통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된 적은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초림 때에 일어 난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는 이 세상의 왕국들(한국, 일본, 중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소련, 브라질, 멕시코 등등)이 AD33년부터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들이었으며 지금도 한국, 일본, 중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소련, 브라질, 멕시코를 통치하고 있으며 또 영원히 통치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주어진 것은 사실입니다.(롬13:1) 땅과 사람과 짐승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보이는 자에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십니다.
(렘 27:4-6) 그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주군(主君)들에게 말하게 하기를, 만군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너희 주군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라. 나는 나의 큰 권능과 나의 펼친 팔로 땅과 지면에 있는 사람과 짐승을 만들고 나 보기에 합당한 자에게 그것을 주었노라.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내어 주었고 또 들의 짐승들도 그에게 주어 그를 섬기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유대인을 죽이고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성경을 거부하는 느부갓네살도 하나님께서 “내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귀적인 인물들에게도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권세를 위임하시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뜻 안에서 세상을 지배하는데 느부갓네살, 네로, 히틀러, 교황 바울, 메리 여왕 같은 사람들에게 그의 권세를 넘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이 세상 통치자”(요12:31)와 “이 세상 신”(고후4:4)이라고 부르며 이 세상 왕국들은 마귀에게 넘겨져(눅4:5-6)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마귀와 그의 수하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에서 명예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마귀에게 복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눅 4:5) 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보여 주며
위의 구절에서 마귀는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의 왕국”이나 “천국”을 보여 준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문자적이고 물질적이며 정치적인 눈에 보이는 왕국들을 말한 것입니다.
(눅 4:6)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권능과 이 왕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 까닭은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내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줄 것이기 때문이니
마귀에게 “넘겨 진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닙니다. “천국”도 아닙니다. 마귀에게 넘겨 진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왕국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왕국들”은 결코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시고 이 세상 왕국들은 인수하시기 전까지는 마귀에게 넘겨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 분이 ”영원 무궁토록 통치하실 것“입니다. 이 통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통치가 아닌 실제적이고 정치적인 눈에 보이는 통치입니다.

계 11:16-17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스물네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이르되, 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께 우리가 감사를 드림은 주께서 친히 주의 큰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셨음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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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절에서 환란은 끝나고 15절에서 천년왕국 기간으로 이동되었습니다. 그리고 16-17절에서 천년기간의 통치가 언급되고 18절에서 흰 보좌 심판이 언급됩니다.
주의 큰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셨음이니이다 - “스물 네 장로”가 말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뒤돌아보고 있습니다.(시제를 유의하십시오.) 11:15절에서 천년 통치를 시작하시고 11:17절에서는 천년 왕국의 통치는 과거로 언급이 됩니다.
계 11:18 민족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이르고 죽은 자들의 때가 이르렀으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요, 또 주께서 주의 종 대언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려 하심이요, 또 땅을 멸하는 자들을 멸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더라.
민족들이 분노하매 - 이 구절은 계시록 20:8-9에서의 반역인데 천년 왕국후에 이 마지막 전쟁은 천년 동안 갇혀 있던 사탄이 감옥에서 잠깐 풀려났을 때 있는 민족들의 반역입니다.
주의 진노가 이르고 - 이 구절은 계시록 20:9인데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내려와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삼켜 버립니다.
죽은 자들의 때가 이르렀으니 - 이 구절은 계시록 20:11-12인데 흰 왕좌 심판석입니다. 이 흰 왕좌 심판석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아닙니다.(롬14:10. 고후5:10)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판이지만 흰 왕좌 심판석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창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심판 받으며 “주의 종 대언자들과 성도들이 보상”을 받는 심판입니다.
주께서 주의 종 대언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려 하심이요, 또 땅을 멸하는 자들을 멸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더라. -
이 보상들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 “주의 이름을 믿는 것“도 ”거듭나는 것“도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것이 환란 복음입니다.
(계 14:6-7)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선포할 영존(永存)하는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환란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환란 때 구원받는 사람들은 흰 보좌 심판석에서 심판 받는데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보상받고 또 환란 성도들의 죽음은 구원의 일부입니다. 환란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었습니다.” 환란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두려워” 하였으며 “끝까지 견디었기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환란 성도들의 구원이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요소가 포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란 시대의 성도들은 행위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시대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행위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갈2;16, 엡2:8-9)

계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전이 열리니 그분의 전 안에 그분의 상속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들과 음성들과 천둥들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다시 환란의 상황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일들은 계시록 6:12-14과 계시록 16:21에서 환란의 끝을 묘사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