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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스크랩] 죄의 유전, 대신 속죄, 대표 속죄

by 디클레어 2010. 2. 5.

 죄의 유전, 대신 속죄, 대표 속죄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정통해야할 사항이며, 또한 거듭남의 확신이 없는 구도자들에게, 새로이 믿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크게 유익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된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과 깊이 관련된 속죄의 진리를 정확히 알고 이해함으로서 진리의 기반위에 바르게 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로마서 3- 8장은 모든 성도들이 수십번 읽고 정통해야 할 말씀들입니다. 이에 이 사안들을 함께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죄의 시작 아담의 타락

로마서 5

15 그러나 그 은혜의 사역은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라. 왜냐하면 한사람의 범죄함으로 많은사람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사람에게 훨씬 더욱 넘쳤음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란 곧 아담의 범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범죄함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여 죽지 않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즉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죄유전에 반대하는 분들이 흔히 가져오는 에스겔서 184절 및 20절과 모순됩니다! 에스겔서는 범죄하는 영혼만 죽으리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18절을 보십시오.

18 그러므로 결국 한사람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정죄에 이른 바와 같이, 한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의롭다함에 이르렀느니라.

에스겔서 18장에 의하면 한 사람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한사람만 정죄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 자식들이 태어나면 비록 세상에 죄의 권세가 들어왔느니, 죄 아래 있느니, 하더라도, 죄를 이겨내기만 하면 정죄받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보는 것은 한 사람이 범죄할 때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 정죄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스겔서가 말하는 바를 모르고 있었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서는 자범죄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바울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시작한 사연을 보다 광범위한 시각에서 그 원인부터를 따져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자범죄로 나타난 것을 근거로 이루어질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범죄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형벌받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인류중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의인의 상태에 있었던 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310 

가록된 바와 같으니:<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12 모두가 빗나갔으며, 동시에 쓸모없이되었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으니, 하나마저도 없도다.>

이것은 어떤 인간도 죄없는 상태로 태어날 수 있는 여지를 배제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담에게 처럼 매번 혼을 불어넣고, 그 영혼이 매번 범죄하여서 그렇게 죄인될까요? 그러나 5 14절은 그런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14 그러나 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과와 같은 형태로 죄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군림하였으니, 그는 장차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 이후에 아담처럼 범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즉 아담처럼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18) 이것은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말씀처럼(고전 15:22)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 10절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다음세대의 씨를 허리에 갖추고 있으며 그 다음세대는 그 다음세대의 씨를 허리에 갖고 있어서 줄줄이 알사탕으로 이어져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담이 범죄할 때 아벨과 가인은 아담의 허리에 있었던 것이며, 의학적으로 아담의 정자들의 틀(정소등)은 이미 생산되어 있었고, 하와의 난자들은 이미 생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범죄시에 차후세대도 이미 그들 안에서 범죄에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이것은 다시 창세기46 26절의 야곱의 허리에서 난자들이라는 표현에서도 확인됩니다. 야곱의 아들들 외에도, 야곱의 손자들도 야곱의 허리에서 난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9 왜냐하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들이 된 것같이, 한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인들이 되리라

 

한 사람만 불순종하면 한 사람만 죄인되어야지 왜 많은 사람들이 죄인들이 됩니까? 에스겔서 18 4, 20절에 모순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하면 자범죄는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것이 에스겔서의 설명입니다.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버지의 치아들만 시립니다. 아들의 이가 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서의 가르침이며, 자범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때는 인간들안에 죄가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범죄하면서 그의 안에 죄가 들어왔으며 그것은 영, , 육에 모두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과 혼은 육체를 떠나 존재하거나 공기중에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체를 기반으로 존재하며 영과 혼이 육체를 떠날 때에는 그 육체는 죽은 것입니다. 영과 혼은 육체안에 거하며 혼은 인간의 정체성으로 각개체를 대변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아담의 영은 고장나서 하나님과 교제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죽은 것입니다.

혼은 영이 죽었으므로 영을 좇을 수 없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육을 좇게 되었습니다. 육체 또한 여러가지 유전인자들로 변형되게 되었습니다. 각종 유전병들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죄는 영혼육 모두에 영향을 미쳤으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죄는 특히 혼안에 거하며 다음세대로 전이되는 현상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영과 혼이 새로운 인간의 탄생시마다 하나님에 의해 매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의 창조시에 인간의 새생명이 태어날 때 영과 혼도 자연 형성되도록 창조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에게 아담의 범죄시에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다고 보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로마서 5 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었던 것처럼, 또한 그와같이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으며, 그것을 좇아(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이라.

성경은 분명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되었다고 말하고있지 모든 사람이 각자가 범죄하여 죄인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7

9 또한 말하자면, 십일조를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십일조를 냈느니라. 10 왜냐하면 멜키세덱이 그를 만났을 때 저는 조상의 허리에 아직 있었음이라.

 

어떻게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낼 때 레위가 십일조를 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낸 것은 아브라함이 낸 것이며, 레위가 내야 할 것은 레위가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에 익숙해야 합니다.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죄가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 모두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5 19)

 

(2)      죄의 유전을 부정하기 위한 전제와 부정의 결과

죄의 유전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혼이 다음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실제 혼의 형성은 두뇌세포의 형성에 크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은 비록 무형의 비가시적 실체이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할 것입니다. 혼이 인간의 운영체계라면 죄는 그 운영체계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들입니다. 그 운영체계는 다음 세대의 육체에로 기본 형태가 전이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늑대처럼 행동하지 않고 인간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운영체계인 것입니다. 그 운영체계가 바이러스에 오염된 채 다음세대에 전이된다는 것이 로마서 3-8장 특히 5장의 가르침이라고 저는 해석 분별합니다.

그런데 죄의 유전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앞선 세대의 혼과 차후 세대의 혼이 전혀 별개로 형성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인간이 태어나는데 육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육체를 기반으로 그 육체를 지휘하는 혼 또한 부모를 떠나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늑대나 어린양의 혼을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그 부모 세대의 혼들에 의해 조합되어진 혼의 체계를 갖고 태어난다고 보아야 하며 그 혼안에 바이러스처럼 기생하는 죄 또한 전이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의 시각입니다.

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분이 태아가 태어날 때 혼 없이 태어난 다음, 하나님이 매번 태아가 생길 때마다 찾아가 혼을 불어 넣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간의 혼의 단절을 위해 새생명이 태어날 때 혼없이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이므로 죽은 채로 태어난 다음 하나님이 아담에게 혼을 불어넣어 주셨듯이 매번 엠브리오가 태어날 때마다 혼을 불어넣는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수정란 (엠브리오)가 혼이 없는 육체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점입니다. 즉 흙으로 빚어 만든 아담처럼, 아직 혼을 받지 못한 아담의 몸이 진흙(흙먼지) 상태였던 것처럼, 무생물의 죽은 상태로 태아들이 태어난다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매 인간마다 혼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면 혼없는 육체는 죽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담의 경우 혼을 불어넣기 전에는 그 육체는 살아있지 않았으니까요. 세대간의 혼의 단절을 위해서는 이런 이론을 부득이 주장해야 하는 측은함이 있습니다! 세대와 세대간에 혼은 단절되지 않습니다. 자식 세대의 혼은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요소들의 결합, 조합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또한 다음세대에 전이되는 것입니다!

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결과는 인간이 죄없이 태어나며, 다만 죄의 권세 아래 있다든가, 죄아래 있다는 말로 대신하여 죄가 세상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죄가 마치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없이 태어나지만 공기중에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죄의 지배 원리가 세상에 (어디에 있다고 명확히 말하지않지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인간안에 있다면 그것 또한 원죄와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인간안에 있지않다면 그것은 마치 공기 중에 있어서 공기전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유전의 부정은 인간이 조금만 노력하면 죄를 안지을 수 있는 것처럼 믿게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의를 행할 수 없으며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수없이 가르칩니다. 인간이 조금만 노력을 더하면 의인될 수 있고 의를 이룰수 있다면 구원자가 필요없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전의 부정은 구원얻은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가진 원래부터 있던 죄의 뿌리, 원죄가 없으므로 우리가 죄를 안짓기만 하면, 조금만 노력하면 의를 이룰 수 있을 것처럼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계속 열심히 노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노력하게 만들며 그리하여 행위노력에 의한 성화를 추구하고, 성령님을 좇아감으로 성화를 이루는 것을 가르치기를 약화시킵니다.

그러나 원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자아가 날때부터 죄인이었으며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랴( 7:24) 처럼 더 이상 자아를 바라보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성령님을 좇아 행하게 합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5 16-24절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죄의 유전의 부정이 행위구원, 행위 성화에 이르게할 가능성은 많이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인간이 죄를 깨닫기 시작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죄를 한번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원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범죄한 이후에 다윗은 자기의 간음과 살인에 대하여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범죄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은 날때부터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시편 51). 그가 날때부터 살인했을까요? 그가 날때부터 간음했을까요? 그는 스스로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중에 자기를 잉태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원천적인 죄를 갖고 태어났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는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차츰 생각해보면 그러한 범죄행위는 수많은 일들과 삶의 연속으로 연결되고 얽혀 있음을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었던 범죄행위는 우리가 갖고 있던 전체 죄덩어리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깨닫고 자아가 죽는 것밖에는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 하게 되며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사망의 몸이 생명을 얻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몸은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고 못박혔음을 재확인하며, 이제는 새생명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사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죽노라(고전 15 31)를 날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원죄라는 것이 없고 자범죄만 있다고 생각하면 항상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됩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죄를 안짓는데, 만일 실수하여 죄를 지었다면 회개하고 다시 노력합니다. 이것은 유교나 도덕에서도 가능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깊이도 다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생명인지에 대해서는 주님이 판단하실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끝까지 견디는 믿음인가? ( 24:13) 에 대해서는 의문시됩니다. 회개의 깊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곧 잡힐 듯하고 이룰 듯한 의를 향해 자유의지를 사용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노력을 끝없이 하도록 오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은 죄를 안고 태어나서 죄인나무와 같으며 죄인나무가 죄를 열매맺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 죄인나무가 행할 수 있는 최초의 선행은 바로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로 접붙임 받는 것입니다. (11:17-24)

(3)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인간은 완전히 부패하여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말한점에서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예외가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즉 인간은 죽은 시체 처럼 아무것도, 아무런 선행도 할수 없지만 단 한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던지는 구원의 밧줄을 잡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잡을 능력이 없으면 하나님은 도와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16:31) 는 말씀에 순종하여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겠다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것이라고 칼빈주의자들은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믿게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안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믿도록 예정하였다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안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미리 안믿도록 예정해놓고 그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고 침례를 받으라 말할 수 있겟습니까? 안믿도록 예정된 사람들은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지 않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이 예정해놓았다면 믿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아돌프 히틀러는 수많은 살육을 하도록 하나님이 정해놓으셨을까요?

결국 예정론은 1%의 믿는자들에 대한 설명은 잘되지만 99%의 안믿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적합합니다.

 하나님이 아돌프 히틀러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수백만 유대인들을 살육하도록 예정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는 사람들을 살육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섬길 수 있는 자유의 선택이 주어졌으나,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자기 운명을 예정했다고 불평할 수 없으며 그는 자기가 선택한 길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구원얻지 못하도록 예정해놓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을 아시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들의 자유 선택에 의하여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 믿는 자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로마서 4장의 가르침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것을 인간의 의를 강조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와 다릅니다. 믿기로, 순종하기로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의한 의와 구분되어야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여럿 있음은 이미 밝혀드린 바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른 누구에게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그분의 구원계획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기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에 막지 못하셨습니다. 만일 막았다면 하나님의 세계의 확장은 즉각 포기되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을 창조하신 다음 그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유 의지의 신이 되는 것은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진리를 좇는 삶을 연습하며 행사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그 첫 시험에서 실패하였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아시고 그 대비책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이 모든 죄를 사함받게 하였다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4)      알미니안과 죄유전

한가지 주목할 일은 칼빈주의에 항상 대립되어 온 알미니우스의 알미니안주의에서도 인간은 선한 행동이나 선한 생각이나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며, 구원에 이르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알미니안주의의 5개항 중 제 3항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ART. III. That man has not saving grace of himself, nor of the energy of his free-will, inasmuch as he, in the state of apostasy and sin, can of and by himself neither think, will, nor do anything that is truly good (such as having faith eminently is); but that it is needful that he be born again of God in Christ, through his Holy Spirit, and renewed in understanding, inclination, or will, and all his powers, in order that he may rightly understand, think, will, and effect what is truly good, according to the word of Christ, John xv. b: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http://www.ccel.org/s/schaff/encyc/encyc09/htm/iv.vii.cliii.htm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고, 배도와 죄의 상태에 있으며 진정으로 선한 것을 생각할 수도 행할 수도 없다.

이것은 바로 완전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Humans are naturally unable to make any effort towards salvation (see also prevenient grace).

http://en.wikipedia.org/wiki/Arminianism

인간은 천성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노력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칼빈(1509-1564)이 죽을 무렵 태어난 알미니우스(1560-1609)의 가르침을 대부분 수용한 도르트 공회(1618-1619)에서 확인된 믿음의 주장들로,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살육에 중요 역할을 한 반면 알미니우스나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여러면에서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200명이상의 알미니안 목회자들이 축출되기도 하였고 여러명이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유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나라를 스페인으로 넘기려한다는 그릇된 염려에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완전부패를 인정하면서도, 그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믿고, 영접하든지 여부에 관하여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며 인간들은 그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낸데 있어서 크게 옳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선의 시작, 계속, 완성임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알미니우스와 알미니안 주의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오해되는 면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그들도 죄의 유전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완전부패한 상태로 태어남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아직까지 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본적이나 들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생각하면 죄유전의 부정이 로마서 3 5장에 모순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에스겔서 18 4 20

 

에스겔서 18장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다루는 장이 아닙니다. 그 장에서 심판과 보응을 말하는 것은 자범죄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며, 아담의 범죄로 죄가 이미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각각 개인들이 저지르는 자범죄에 대하여 각자가 자기 책임하에 죄값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장 어디에도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고 있으며 그 장에서 다루는 죄들은 모두 자범죄들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6)       왜 의는 유전되지 않는가?

    죄가 유전된다면 ( 자범죄가 유전되는 것은 아니지만)왜 의는 유전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죄의 유전에 대한 반론중의   

      하나였습니다.

저는 이 반문에 접하는 순간 이 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과연 구원을 얻었는가? 하는 의문에 봉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거듭나서 구원을 얻고 의인이 되더라도 죄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십니까?
거듭나면 인간의 모든 죄가 없어집니까? 로마서 7장은 바울이 거듭나고 수많은 전도여행을 마치고 막 로마를 향해 마지막 여정을 떠나기 전에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그가 7장에서 내 속에 거하는 죄(7:17)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사망의 몸이라 말합니다. 왜 의인 안에 죄가 동거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다시 20절에서 자기가 원치 않는 바를 행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고 변명합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으로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6:9) 그러한 그도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번제 희생을 드렸던 것입니다( 8:20) 그는 구원의 방주, 썩지 않을 몸의 상징,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전나무로 만든 방주안에 들어갔으며 그 방주는 역청(코페르-대속)으로 역청칠(카파르-대속하다 동사)하였습니다.

 

대속이란, 모든 죄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덮어두는 것이요, 가리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바라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님을 좇아 생활하는 삶이 바로 의인의 삶입니다.

 

나중에 세상 끝에 부활하면 새로운 몸을 입을 것이며 ( 고전 15:43-44, 54, 48-52), 사망도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20:14) 그때는 죄라는 것이 온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의인안에도 죄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새 생명이 날마다 자라갑니다. 이 생명은 말씀을 먹고 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입니다.(고후 4:16)

 

의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죄를 없애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죄는 덮이는 것이며 그 덮인 상태가 전이되지 않는 이유는 그 의자체가 믿음으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인이라도 죄가(원죄) 그대로 있기에 그 원죄가 다음세대로 전이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 것입니다.

 

(7)      34 7, 20 5

죄유전을 반대하는 분들이 이 구절들을 지적하여, 왜 하나님이 죄 값을 영원히 찾지 아니하시고 3-4대만 찾는가를 말합니다. 우선 이 구절들은 죄가 3-4까지 유전된다고 말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응이 거기에까지 미친다고 하신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죄가 3-4대까지만 유전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죄는 대대로 우리가 동일한 육체를 입고 있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범죄는 유전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3-4대는 죄에 대한 형벌 내지는 대가 지불의 문제입니다.

에스겔서 18장에 의하면 자범죄는 일반적으로 그 범법자에게만 하나님은 형벌하십니다. 그러나 출 20 5절에서 우상숭배가 언급되었듯이 중대 범죄들은 그 자체 파장이 커서 그 여파가 3-4대까지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누가 성령을 훼방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고 합시다. 그의 죄는 비록 자범죄이지만 중죄이며 하나님은 그 죄값을 그의 3-4대까지 찾아가 보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범죄일지라도 원죄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그 본인의 행위가 후세대에도 영향을 미치는 예입니다. 만일 그 중죄자의 아들이 아비가 잘못된 것을깨닫고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사과하며 속죄하려 하면, 하나님은 그런 형벌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자비 베푸시며 사유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손이 속죄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런 형벌의 굴레를 벗어날 수없음은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짜여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대개 이러한 중죄들은 우상숭배, 배도의 죄, 성령훼방죄 모두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구절들은 죄의 유전을 말하기 보다는 형벌의 연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형벌을 다음세대까지 연장하시는가? 이것 또한 그 조상이 범죄할 때 그 후손은 그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과 상관이 있고 반대로 하나님이 믿는 인간을 축복하실 때 3-4대 이상 축복하시는 것에 대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세대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부모는 형벌을 받아 저주받은 상태에 놓입니다. 그 가정에 태어난 사람이 축복받은 삶을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형벌이 교훈, 교육용이라는 주장 이상의 관계에 대한 형벌입니다

이것이 원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구절은 결코 아닙니다.

(8)       죄의 유전을 부정함이 구원여부에, 성화에 영향을 미치는가?

저는 죄유전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고 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사람은 행위 구원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개의 깊이가, 원래부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아니하고 인간의 의지로 노력할 여지를 남겨놓습니다. 성화의 과정 또한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사람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원천적으로 있는 죄의 사람을 깨닫지 못하고 행위만을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의지하거나 자아에 어떤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죄악이요, 헛수고일 뿐입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6:28-29)

이렇게 자아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철저히 자아를 부정한 사람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의 구원간증을 들어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일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간증에서 죄유전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구원얻지 못한 사람들일 수도 있기때문입니다.

자아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없는 사람은 144,000은커녕, 천년왕국에도 못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릇된 신학체계는 많은 손해를 입힐 것입니다.

 

(9)      예수님의 육체

죄의 유전을 반대하는 분들은 죄가 유전된다면 예수님도 죄를 갖고 태어났느냐?” 하고 반문합니다. 이점에 대해서 저는 상당히 소수에 해당되는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성결의 영으로 태어나셨으므로 죄가 없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은 마리아의 몸의 일부인 난자에도 죄가 있었을 것이므로 죄의 유전을 부정하지 못한다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육체의 어떤 부분도 물려받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별도의 글로 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마리아는 대리모였을 뿐이지 생모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생모의 모습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인간들은 시험관 아기도 출생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몸을 갖고 계셨으며 예수님의 몸을 따라 인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어떤 육체이든 입고 오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 문제는 별도의 글로 다루는데 다음에서 제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1)를 한편 올린다음 다룰 것입니다.

대표속죄와 대신속죄의 문제 또한 예수님의 육체를 다루면서 함께 논의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인간들과 똑같은 몸이었다, 그것이 바로 롬 8장 3절에서 말하는 죄있는 육체의 모습이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인류를 대표하여 죽으셨다 - 이것이 대표속죄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몸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와 같아서 인간들의 몸과달랐다, 그 몸은 흠없고 죄없는 몸이었으며 그 몸을 예수님이 드리며 피흘리심으로 인류 모두의 죄를 떠맡으시고 대신하여 죽으셨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못박혀 죽으셨다. - 이것이 대신 속죄, 대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서의 대표속죄는 아주 잘못된 이론입니다. 그것을 위의 죄의 유전을 반대하시는 분들이 들고 나왔기에 반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육체에 관하여 다루면서 함께 다룰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한다면 아담의 죄는 인간들에게 전이되고 유전되었습니다. 그것이 각자에게 원죄로, 죄의 뿌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원죄가 바로 모든 죄의 행위들의 출발점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다스리는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 십자가에서 모든 죄, 자범죄와 원죄 모든 죄가 심판받고 정죄받았으며 예수님이 그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새생명은 그 진리를 믿는 믿음에서 살아갑니다. 날마다 이 진리에 복종하는 삶을 익혀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것은 날마다 십자가를 경험함으로 더욱 강화되고 분명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일을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분께 감사할 일입니다. 아멘

 

다음 글 :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1)

출처 : 쉐카이나 코리아
글쓴이 : 하토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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