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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숫자로푸는계시록

6. 계시록 6장, 봉인재앙

by 디클레어 2010. 12. 31.

6. 계시록 6장, 봉인재앙 

 

 

 

6. 계시록 6, 봉인재앙

 

 

 

 

여러분들은 앞서 11장과 12장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승천을 기점으로, 은혜의 시대이며 교회시대인 일천이백육십일이 개막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본 바가 있다. 그런 장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6장이다. 6장과 11, 그리고 12, 이 세장이 모여 하나를 이룬다. 그런데 이 6장은 많은 해석가들에 의해 曲解(곡해)되어 왔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한 장이니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 장은 영적인 장의 시작이기도 하거니와 복음의 사역과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압축장이며, 계시록의 뼈대를 이루는, 시간과 내용의 시놉시스(개요)라는 것을 해석중에 알게 되실 것이다.

 

 

1) 흰 말을 탄자.

 

(1) 또 그 어린 양이 그 봉인 가운데 하나를 여실 때 내가 보고, 내가 들으니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로 말하기를 "와서 보라." 하기에

(2) 내가 보니, 보라,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가 활을 가졌더라. 그에게 한 면류관이 주어졌고 그는 나가서 정복하고 정복하려 하더라.

 

이 흰 말을 탄자가 關鍵(관건)이다. 이 흰 말 탄자에 대해서는 첫 부분에 잠깐 언급된 적이 있음을 아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이 흰말을 탄 분이 왜 예수그리스도가 되는지를 증명하고, 그 이후에 말 탄자들의 속성을 알아보면서 이 흰 말 탄자를 예수그리스도로 밖에 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른 해석가들이 이 흰 말 탄자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이유에 대해서는 앞에 설명한 그대로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 흰 말 탄분이 예수그리스도임을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성경을 통해 증거를 하겠다.

 

첫 번째,

 

계시록 19장에 주님 재림하실 때 흰말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이 있다. 물론 상징적인 의미이다.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이 말을 타신 분이 바로 재림 주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사탄은 어디에서도 흰말을 타거나 탄다, 라는 것으로 표현된 적이 없다. 그래서 이 흰말을 탄분을 예수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예수그리스도께서 활을 가지셨다는 것도 역시 상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시편에 등장한다.

 

(12) 그가 돌아키지 아니하면 그 분께서 자기의 칼을 가실 것이니, 그 분께서 활을 당기어 준비하셨도다.-시편 7

(12)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돌아서게 하시리니, 주께서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시리이다.-시편 21

 

세 번째,

 

정복하고 정복하려 하더라.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을 주신 예수님의 사역이 제자들과 성도들을 통해 온세상 끝까지 전파되어 간다, 라는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것을 욕심많다고 표현하기도 하나 복음이 땅끝까지 이루어지는 역사는 욕심과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사야 42장이다.

 

(4) 그가 땅에 심판을 세우기까지는 쇠하거나 낙담하지 아니할 것이니, 섬들이 그의 율법을 기다리리라.

 

그리고 이 절을 인용한 12제자중 마태사도의 복음이다. 12.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할 것이며, 연기나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리니, 그가 심판하여 승리할 때까지 하리라.

 

이 두 구절의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결국 뜻하는 의미는 같다. 심판이라 함은 주님께서 초림하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이 땅에 왕으로 다시 재림하신 후에 악의 세력을 심판하실 것임을 말씀함이오, 또 그가 심판하여 승리할 때까지 하리라, 는 마태복음의 말씀은 그의 복음사역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면 그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승리할 때까지라는 말씀과 정복하고 정복하려한다는 말씀은 같은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흰 말을 탄분이 예수그리스도임을 증거했으나 미심쩍은 분들은 다음 해석에 더욱 집중하시기 바란다. 이후 붉은 말을 탄자와 검은 말을 탄자, 창백한 말을 탄자의 해석을 보시면 이 해석에 대한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것이다.

 

2) 붉은말을 탄자

 

(3) 어린 양이 둘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기를 "와서 보라." 하더라.

(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앉은 자에게 땅에서 평화를 제거하는 권세가 주어졌으니 그들이 서로 죽이더라. 또 그에게 큰 칼도 주어졌더라.

 

이 붉은 말을 탄자는 사탄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때 잠시 물러났던 사탄은 이제 본격적으로 평화를 제거하고 복음을 허물어 뜨리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며 마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설교중에도 얼핏 드러내신 적이 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10

 

이 칼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바로 사탄에게 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들어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그동안 많은 해석가들은 이 칼을 이러한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듯 일반적인 뜻이라고 볼 수 있는 다툼이나 전쟁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주님오실 때가 되었으므로, 이제 그러한 뜻이 아니고 이렇듯 영적인 실체가 있는 것임을 이 해석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 의미는 예수그리스도이후 칼을 받은 사탄은 이 땅에 화평을 제하고 성도를 넘어뜨리는 권세를 허락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정리 겸 다시 지금까지의 해석을 점검해 하도록 하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이후 그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어 나가려고 한다. 그러자 뒤이어 등장한 사탄은 복음전파의 사역을 방해하기위해 세상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구원을 방해하고 교회의 변질을 꾀하기 위해 갖은 術數(술수)陰謀(음모)를 부리며, 세상을 조종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복음을 접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危害(위해)를 가한다. 성경구절을 바꾸기도 하고 빼기도 하면서 變改(변개)를 시키는 것이다. 또한 迷惑(미혹)魔術(마술)로 성경을 보지 못하도록 땅의 민족들을 속이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사탄이 맡은 역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바로 하늘의 백성들인 교회요 성도들이다. 그래서 그것에 관련한 것들을 계시록에 기록해 놓은 것이지, 성 밖에 있는 자들은 이방인으로 치부할 뿐이시고,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注意(주의)는 끌지 못한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이 붉은 말을 탄자가 사탄이라고 분별해야만 했던 한 가지 주장을 더 하고 이 붉은 말을 탄자의 해석을 마치도록 하겠다.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계시록12

 

이 붉은 용을 사탄이라고 이미 분별한 바가 있다. 붉은색의 용이니까 붉은 말을 탄자가 사탄이라고 주장하는 거냐며 웃는 분이 계실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라, 하고 많은 색중에 하필 이 용이 붉은 용이라고 하실 이유가 뭐냔 말이다. 붉은 색은 영적인 의미로 죄인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체가 사탄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그러한 권세를 허락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성도들을 연단시키기로 결정하셨고, 그러한 결정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또 단련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거기에 관련한 말씀을 한번 찾아보자.

 

스가랴13장이다.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 구절이 어느 때를 뜻하는 것인지는 지금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렇게 연단시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뜻하심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붉은 말을 탄자의 역할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퍼져나가는 가운데 毁謗(훼방)자인 사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박해를 당하거나, 혹은 교리의 변개가 일어난다는, 이러한 그림을 그려나간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또는 성경적으로나 큰 무리없이 올바른 해석을 하는 지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검은 말을 탄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검은 말을 탄자가 드디어 등장을 했다. 많은 해석가들이 해석하듯 이 검은 말을 탄 자가 기아(굶주림)를 몰고 온다, 라고 생각하기에는 뒤에 나오는 칼과 굶주림을 동반한 창백한 말을 탄자의 포스(기세)가 너무 강해서 이 검은 말을 탄자의 형세가 묻혀버리는 해석이 나오게 됨을 보고, 그 해석이 맞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너무 단순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건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한 번 읽어 보기나 하자.

 

(5)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기를 "와서 보라." 하더라. 그리하여 내가 보니, 보라,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가 그의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그때 네 짐승들의 한가운데서 한 음성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밀 한 되가 한 데나리온이요, 보리 석 되가 한 데나리온이라." 하고 또 "너는 기름과 포도주는 손상시키지 말라." 하더라.

 

붉은 말을 탄자는 칼을 받았었는데 이 검은 말을 탄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저울이다. 저울은 무엇인가를 재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이 검은 말을 탄자는 무엇을 재겠는가, 돈의 무게를 재겠는가, 아니면 금이나 은의 무게를 재겠는가, 하나님 앞에 이런 재물이 왜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이 이런 물질이나 재물들이었던가? 해서 저울로 무엇을 재나 보니 밀과 보리인 곡식을 재고 있고 그 값을 얘기하고 있다. 한 데나리온이라하면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다. 이것 때문에 기존의 해석은 그 하루 품값으로 살 수 있는 양이 4인 가족 간신히 한 끼 분량의 밀과 보리를 살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식량난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백번 양보해서 이 밀과 보리가 가격이 급등해서 그렇게 비싼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실 아프리카등 貧民(빈민)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왔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그런 현실들은 무시하고 부유한 나라들만 기준으로 해서 대환란 당시에 곡식 값이 비싸질 것이고, 그래서 중진국이상의 국민들도 많이 굶어죽을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我田引水(아전인수)격의 해석이 되지는 않는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계시록이란 것이 소위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의 국민만을 위해 주어졌던가, 아니다. 그렇지 않음을 모든 주의 백성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한 자, 또 고아와 과부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어린 영혼들을 위하시고,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또 그런 자들을 위해 이 계시록을 기록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검은 말을 탄자가 기아를 몰고 오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나 세계역사를 주장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 이 검은 말을 탄자의 해석은 다시 시도되어져야만 한다.

 

성도라면 항상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계신지 알아야 하고, 또 이미 알고 있다. 바로 그 분의 백성인 성도라는 것, 따라서 이 저울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나누는 역할, 즉 성도와 비 성도를 나누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야 함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 한 발자욱 더 진보된 형태의 해석이라면 믿음의 경중을 달아 刑罰(형벌)可否(가부)를 결정짓는 역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 믿음의 경중을 재는데 이 한데나리온의 값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영적인 의미로 주의 지체된 성도를 사신 예수님의 피 값으로 봐야 한다. 그 보혈의 값으로 교회는 세워졌고, 그 교회의 구성원인 지체들 또한, 예수님의 피 값으로 지불되어졌고, 또 그로 말미암아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성도들을 구하신 바 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구원의 의미가 바로 한데나리온의 곡식인 것이고, 곡식과 알곡인 성도를 결정하는 역할이 이 저울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명으로는 다니엘5장에 보면, 이 검은 말을 탄자가 든 저울로 성도를 분류하는 역할을 하듯이 사람의 됨됨이를 잰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살펴보자.

 

(24) 그 분께서 손가락을 보내어 이 글이 기록되었나이다.

(25) 기록된 글은 이것이니,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이라.

(26) 그것의 해석은 이러하니, 메네는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헤아려서 그것을 끝내셨다 함이요,

(27) 테켈은 왕을 저울에 달았더니 부족함이 나타났다 함이요,

(28) 페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대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 함이니이다." 하더라.

 

이 글은 아시다시피 느부갓네살의 아들인 벨사살왕이 연회를 베풀 때,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쓴 글씨를 다니엘이 해석해주는 장면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각자각자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검은 말이 가진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울을 가진 천사에게 명하여, 각 사람 하나하나를 저울로 재어 보시는 가운데 그의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의 남은 생을 끝내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심판의 근거로 쓰일 것이며, 이것이 곧 검은 말을 탄자의 역할임을 다니엘서에서 보여주심으로 알려주시는 것이다.

 

아마도 이 구절이 잘 이해되지 않으실 분들도 계실 줄 믿는다, 그러하다면 이 글을 몇 번 정도 다시 읽어보시면서 이해를 해 주셨으면 한다. 또 이렇게 해석을 해야만 했던 결정적인 증거의 하나는 이 검은 말을 탄 자의 역할을 설명해주는 소리가 하늘의 네 짐승들 가운데에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검은 말을 탄 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이 確實(확실)하다는 證據(증거)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의 의미는 전 장인 두 증인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기름이란 기름부음 받은 종, 택함 받은 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고, 포도주는 기름부음 받은 종과는 반대의 세력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이런 자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판결을 유보하신다는 의미이다. 증거구절인 다니엘11장을 보자.

 

(41) 그가 또 영화로운 땅에 들어갈 것이요 많은 나라를 패망케 할 것이나 오직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에돔과 모압과 암몬자손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자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자들이 패망케하는 자의 손에서 피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역시 이들의 심판은 하나님 선()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內包(내포)하고 있는 구절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6절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들이나, 혹은 그렇지 않고 죄가 밝히 드러난 죄인들은 따로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거나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이런 구절들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디모데전서 5

 

...

(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이런 말씀만으로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이 단순하게 千篇一律(천편일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사람은 단순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것이 사람에게는 가장 복잡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먼저 速斷(속단)하거나 判斷(판단)하는일은 止揚(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4) 창백한 말을 탄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가 다시 나타났다, 이 자가 바로 한이레의 약속을 받고, 하늘에서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내려온 적그리스도이며 사탄이다. 확인해보자.

 

(7)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와서 보라." 하더라.

(8) 이에 내가 보니, 보라, 창백한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요 지옥이 그 뒤를 따르니, 그들이 땅의 사분의 일을 다스릴 권능을 받아 칼과 굶주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이더라.

 

이 자가 바로 용이며 사탄인 적그리스도이다. 붉은 말을 탄 자와 동일인물이란 뜻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보라, 칼과 굶주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이다. 이 무기들을 가지고 후 삼년반이고 마흔두 달이며 그리고 사흘 반 기간 동안 두 증인을 죽이고 성도들을 환란에 몰아넣는 것이다.

 

그리고 땅의 ()()()에서 ()란 후 삼년반에 죽는 성도의 수를 얘기한다, 즉 네 교회가 그 기간 중에, 곧 후 삼년반에 殉敎(순교)를 하게 되는데. 그 수가 ()()명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 사분의 일인 일억 명의 성도를 적그리스도가 죽이게 된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삼억 정도의 성도들은 어떻게 순교하게 된다는 얘기인가, 그건 계시록9장에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은 넘어가자.

 

이 자에게 주어진 것은 칼과 굶주림과 사망(온역, 질병)과 땅의 짐승들이다. 제위께서는 앞에서 칼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바 있다. 그리고 그 칼은 땅에서 평화를 제거하는 권세이다. 그런데 이 용이 자신이 받은 그 권세를 누구에게 주게 되는가를 알아보자.

 

(2) 또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자리와 큰 권세를 그 짐승에게 주더라.-계시록13

 

이렇듯 용(사탄)은 자신의 능력과 큰 권세를 짐승에게 준다, 그리고 바로 이 짐승이 후 삼년반에 자신을 드러내게 될 다니엘7장의 넷째 짐승이며, 하나님의 명을 어겨 무저갱에 갇혀 있었던 천사들, 곧 네피림인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그것 말고도 주어진 것이 또 있다. 무엇인가 보자, 굶주림과 사망이다. 굶주림(기아)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세와, 인위적인 질병을 만들어 성도들을 죽일 수 있는 권세(사망=온역), 그것에 덧붙여 땅의 짐승이라고 표현된 1311절에 땅에서 올라와 힘을 합치는 거짓선지자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막강한 것들이고, 이러한 것들을 도구로 삼아 성도들을 죽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 때문에 주님의 증언을 지키고자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들이 양산될 것이며, 이 짐승들을 무기로 땅에 피바람을 일으킬 권세가, 적그리스도가 가진 도구인 것이다. 이는 결국 이 땅에 대 환란이 올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날들이 감해지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육체가 없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큰 患亂(환란)일지는 그저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로써 네 종류의 말을 탄자에 대한 分別(분별)을 모두 마친다. 同意(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은 앞으로도 이것이 옳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 나갈 것이다. 그동안 들어왔던 계시록 해석은 잠시 잊으시고 이 해석을 처음 본다는 기분으로 연구하시다보면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5)다섯째봉인, 제단아래 죽임 당한 자들의 혼들

 

이제 다섯 번째 봉인에서는 대환란의 중심인 후삼년반의 초반에 성도들을 학살하고 난 이후 그 중반에 들어와 있다. 이 때에는 우리가 앞서도 알아봤지만 그에게 주어진 도구들, 즉 칼과 굶주림과 사망과 짐승들로 인해 죽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類推(유추)해낼 수 있겠다. 그렇게 됨으로써 대환란 기간중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證人(증인)들의 혼을 하나님의 寶座(보좌), 祭壇(제단)아래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다.

 

(9) 어린 양이 다섯째 封印(봉인)을 여실 때 내가 보니, 제단 아래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10) 그들이 큰 음성으로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여,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을 심판하시어 우리의 피를 갚아 주실 날이 얼마나 남았나이까?" 하더라.

(11) 그러자 그들 각자에게 긴 흰 옷을 주시면서, 그들의 동료 종과 형제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가득 채워질 때까지 잠시만 더 쉬라고 말씀하시더라.

 

이렇듯 이들은 갖은 모욕과 핍박, 고통가운데 순교하였음을,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伸寃(신원)케 해달라고 함으로써 그들의 입으로 증거하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成火(성화)에 주님께서도 잠시 기다리라고 하신다. 이제 주의 震怒(진노)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다섯째 봉인이다. 바로 이들이 후 삼년반 시작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그래서 사흘 반 동안 죽어있게 되는 두 증인이다. 그리고 먼저 죽임 당한 이들 말고도 두 증인의 남은 자들은 지상에서 계속 순교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동료 종과 형제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가득 채워질 때까지 잠시만 더 쉬라고 말씀하시더라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장면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로 보여주는 일들 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봉인재앙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한 일들을 압축하듯, 그리고 전체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미리 보여주는 예시재앙인 것이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6)여섯째 봉인, 하나님의 진노 (곧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의 진노대접)

 

(12)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여섯째 봉인을 여실 때, 보라, 큰 지진이 나며 해가 머리털로 짠 천같이 검어지고 달은 피처럼 되었으며

(13) 하늘의 별들이 마치 무화과나무가 강한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무화과가 떨어지듯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같이 말려서 쓸려가고 모든 산과 섬도 각기 제자리에서 옮겨졌으니

(15) 땅의 왕들과 위대한 자들과 부자들과 대장들과 힘 있는 자들과 모든 종과 모든 자유인이 각자 토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서

(16) 산들과 바위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위에 떨어져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기라.

(17) 이는 그 분의 진노의 큰 날이 임하였으니 누가 감히 설 수 있으리요?" 하더라.

 

17절의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바로 후 삼년반이후 이 땅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이 진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후 펼쳐질 일곱 번째 나팔재앙에서 다루기로 하고, 일단 이것으로 첫째봉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정복사역 시작으로부터 사탄의 방해, 그리고 천사의 저울질로 믿음의 경중이 달리는 상징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전 삼년반의 대 환란 준비과정, 그리고 짐승의 때인 후 삼년반 대 환란때 두증인의 순교와, 여섯째 봉인인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장면까지 전체적인 진행과정의 시놉시스를 짚어 왔다. 아직까지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리인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말 한마디도 무심코 넘기지 마시고 되짚어 보시면서 따라 오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서에서도 보면 아시게 되겠지만 句節(구절)하나에도 전 삼년반, 후 삼년반 그리고 진노까지 칠년이 넘는 세월을 담으신 적도 있다. 접속사하나에도 몇 년의 세월이 담기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감당 못할 것이 너무나 많다. 천년이 하루 같으신 분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일이겠지만,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이기에 그 분의 單語(단어) 한마디라도 소홀히 보면 안 되고, 또 봐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계시록은 소설책처럼 쉽게 읽어 나갈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앞으로도 그 이유를 더욱 확실히 알게 되실 것이라 믿으며 이 글을 읽는 성도여러분께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