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계시록관련/성경교제관련

하나님의 本心(본심)

by 디클레어 2012. 4. 5.


하나님의 本心(본심)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때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물로 쓸어 버리셨던 일이나 이 후에도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키셨던 일, 또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시면서 그들에게 줄 땅으로 인도해 내실 때, 피정복국가에 행하신 일들은 실로 그 글을 보는 사람들 눈에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무자비해 보이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행하신 일이나 그분의 명령을 살펴보면 젖먹이나 어린아이나 여자나 남자나 늙은이나 젊은이를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죽이셨거나 또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고 정의하셨던 성경과 背馳(배치)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께서는 당시의 그들을 왜 전혀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성경을 보며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이유를 그들은 깊은 죄에 물들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뒷받침해 주듯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죄가 아직 여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주고 계시기도 합니다.


(13)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분명히 알지니, 네 씨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타국인이 되어 그들을 섬길 것이요, 그들이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겠고

(14) 그들이 섬길 그 민족을 내가 또한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15)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며, 너는 충분히 늙은 나이에 장사될 것이라.

(16) 그러나 사 대만에 그들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인들의 죄악이 아직 다 차지 않았음이라." 하시니라. -창세기15장


여기서 아모리족속이라 함은 이 족속이 모세나 그 이후 여호수아나 또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정복해 나가는 가나안 족속들 중에서는 가장 힘이 세고 또 강력한 족속이었으므로 그들에 대한 代表(대표)격으로 아모리족속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詳考(상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악이 그 당시에 이미 貫盈(관영)했기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 같은 구절들을 찾아 그 원인으로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즉 노아의 시대에 죄를 지었던 자들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악인들은 당연히 진멸당할 수밖에 없었던 족속이었음을 이 구절들을 인용함으로 당위성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도 된다는 것을, 혹은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辯護(변호)하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연구하는 그들은 하나님을 敬畏(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과 고모라에는 분명 선악을 분별 못하는 갓난아이나 어린아이, 그리고 이십 세 이하의 청년들 그리고 여자들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보겠습니다. 먼저 창세기입니다.


(7)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망시키리니, 즉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들이라. 이는 내가 그들을 지었음을 후회함이라." 하시니라.-창세기6장


(24) 그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주께로부터 소돔과 고모라 위에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리셨고

(25) 성읍들과 모든 평지와 성읍의 모든 거민들과 땅에 자라는 것들을 뒤엎으셨더라. -창세기19장


그리고 더불어 가나안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이 취했던 행동들입니다.


(34)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취하고 각 성읍에서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린 것들을 완전히 멸하여 아무도 남겨 놓지 않았으나

(35) 오직 가축과 우리가 취한 성읍들의 전리품은 우리를 위한 탈취물로 가졌느니라. -신명기2장


(1)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들, 곧 너보다 더 크고 강한 일곱 민족인 힛인들과 기르가스인들과 아모리인들과 카나안인들과 프리스인들과 히위인들과 여부스인들을 쫓아내실 때,

(2)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앞에 그들을 넘겨주실 때, 너는 그들을 쳐부수고 완전히 진멸시키고 너는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며 어떤 자비도 보이지 말지니라. -신명기7장


(17)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18)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 둘 것이니라 -민수기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과 고모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나안족속도 이렇듯 거의 殄滅(진멸)시켜 버리셨습니다. 만일에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처럼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을 멸망시키지 말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다시 말하면 그 분을 계시하시고 난 후에 어느 정도 자신들을 돌아볼 시간을 줘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혹은 갓 낳은 아이나 선악을 분별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모두 죽여 버리셨고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여기서 잠깐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린도후서13장입니다.


(11) 형제들아,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라. 위로를 받으라. 한 마음을 품으라. 평안히 지내라. 그러면 사랑과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린도후서13장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하나님을 아느니라.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요한1서 4장


사실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구절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과 화평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전이나 이후 가나안 족속들은 무자비하게 멸망시켜 버린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실진대 어찌된 일일까요. 혹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구약인 그때는 택하신 이스라엘백성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그렇게 하신 것이고, 이제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사랑의 법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냐. 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과거는 잊자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주장은 그 분께서는 신실한 분이심을 忘却(망각)하고 하는 얘기에 불과 합니다.


(9) 그러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알라. 그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과 자비를 일천 대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신명기7장


여기서 信實(신실)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全知全能(전지전능)성과 더불어 처음과 끝이 변함없이 일정하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앞선 그런 류의 주장은 舊約(구약)의 하나님과 新約(신약)의 하나님께서 다르다고 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 그 분조차도 자신께서 하실 일을 몰랐고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해 나가신다고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아다시피 그 분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그 분께서 하신 일을 알고 있고 또 앞으로 하실 일도 알고 계시며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으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피조물의 관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이처럼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 말씀에 기초하지 못한 변명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상고해서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주의 백성들이 깨달아 그 분을 아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24) 그러나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그가 깨달아 나를 알아서 내가 이 땅에서 자애와 공의와 의를 행사하는 주임을 아는 것이라. 이는 내가 이 일들을 기뻐함이라. 주가 말하노라. -예레미야9장


깨달아 알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성경을 읽으면 누구나 저절로 알아진다는 말씀이 아니고 읽고 나서도 黙想(묵상)과 詳考(상고)를 통해 그 분의 본심을 알아내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정확히 일치하는 비유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자식을 낳아 기르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아주 미워 죽겠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액면 그대로 그 말만을 받아들이면 그 아버지나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그 자식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에 反語法(반어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또 순간적인 마음으로 미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부모에게는 당연히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찾아보면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천지창조목적을 알고 성경을 보면 그 분의 마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천지창조목적은 결론인 계시록까지 해석해 냈을 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구약성경에서 하신 그 분의 행사를 보면 그런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요. 바로 그것에 대해 이 글은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달을 필요도 없이, 그 분을 알고 싶어 성경을 상고하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쉽게 계시하셨다면 굳이 깨달아 알라고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본다 해도 하나님을 깨달아 안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오류들이 교회 안에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오류를 퍼뜨리고 있는 사탄은 하나님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도록 갖가지 편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戰爭(전쟁)이나 亂離(난리), 3S (sports, sex, screen), 경제적 어려움, 정의롭지 않은 재판과 정치로 말미암은 정신적 고통, 또 결정적으로 교회안의 잘못된 누룩(교리)등을 투입함으로써 엉뚱한 곳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제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 몹쓸 누룩 중에는 대표적으로 原罪(원죄)론과 세대주의가 있습니다. 그것을 교회로 끌어들여 온 것은 사탄이 행한 일중 가장 성공적인 작전으로 자부할 만 할 것입니다. -그것에 관한 반대의견은 이미 쓰여진 글들이 있으므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중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절시켜버리라고 한 이유 중의 한 가지를 원죄론에서 찾으려고 하는 분들도 있기에 그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니 아무쪼록 그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데 왜 구약에서 하신 일과 신약에서 하신 일이 다르신 걸까” 라고 생각하고 그런 부분에 갭(gap)을 줄이고자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바로 그 분이 구약의 여호와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말이 어려우시면 三位一體(삼위일체)(TRINITY)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우시면 이사야9장입니다.


(6)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으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놀라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

(6)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The everlasting Father, The Prince of Peace. -KJB


그런데 아시다시피 육신을 입고 땅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어린아이를 어여삐 여기시고 그들과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심하지 아니하고 또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18장


(13) ○ 그때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주께 데려오니, 이는 주께서 그들에게 안수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람이라.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더라.

(14)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고 하시며 -마태복음9장


혹시 이 句節(구절)을 보시면서 이스라엘의 어린이들과 가나안의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같으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거의 모든 아이들은 편견만 버린다면 다 똑같이 예쁘고 귀여우며 그 부모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의 귀한 아이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주님께서는 바로 천국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분께서 구약에서는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과 고모라에서나 가나안땅에서는 그 어린아이들조차 불쌍히 보시지 않고 진멸시켜 버리셨으며, 또 어여삐 보지 말고 멸망시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구약에서의 이런 무자비한 하나님으로 보이는 점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主權(주권)과 神性(신성)과 選擇的(선택적) 權限(권한)만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담겨있는 이성과 양심은 모두 팽개쳐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 壓倒的(압도적)인 權威(권위), 無條件(무조건)적인 무게를 두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오직 아버지께 있음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절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良心(양심)과 理性(이성)이라는 것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람의 本能(본능)안에 담아주신 것이라는 것인데, 그 이성과 양심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능과 이성 그리고 양심에 대해 알기 위해 먼저 욥기서39장을 보겠습니다.


(14) 타조는 땅에 알들을 버려두고 흙으로 따뜻하게 하다가

(15) 발로 밟아 으깨거나 들짐승이 깨뜨리는 것을 잊어버리느니라.

(16) 마치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제 새끼들에게 무정하게 하여 그녀의 수고가 두려움 없이 헛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그녀에게서 지혜를 박탈하며 명철을 나눠 주지 않음이라.


타조에게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어버리고 밟아 깨뜨려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일반적인 다른 조류들이나 동물들은 타조와 같지 않습니다. 그 안에 慈愛(자애)적 본능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신이 낳은 새끼나 알은 보호하도록 하신 것이 일반적인 동물들에게 넣어두신 習性(습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사람에게는 그것과 더불어 良心(양심)과 理性(이성)을 담아 주셨습니다. 그 양심과 이성이 저절로 생겨났거나 배워서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본능적인 습관이나 思考(사고), 책임감, 이성, 母性愛(모성애), 父性愛(부성애), 그리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담아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사람에게 죄를 짓고자 하는 습성까지도 넣어 두셨습니다. 그것을 넣어두신 이유는 그런 본능이 너에게 있기는 하나 너는 그것을 이겨내라는 뜻에서 담아두신 것입니다. 원죄론 때문이 아니구요. 창세기4장입니다.


(7)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니라.


죄의 욕망은 가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현 세태에서의 예를 들면 학생들 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문제나 또 순간적인 창피함이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 내 출세를 위해 다른 사람을 貶毁(폄훼)하는 일, 화가 났을 때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공격본능, 입으로 하는 온갖 욕설, 음담패설, 뒷담화등 하나님보시기에 그리 거룩해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너는, 즉 모든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다스려 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습성이나 반항심들이 없다면 어떻게 악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악이나 죄는 하나님께서 만들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 분의 絶對性(절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글들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든 것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착하고 순진해서 어수룩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 불의를 이겨내고 지혜와 의지를 가지고 거짓된 것에 속지 않을 수 있도록 주의 백성들을 단련시키고 가르치고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연단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창조목적이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을 계획하고 행하시는 하나님자신을 합리화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라고 부가해서 말씀드린 바도 있습니다. 


지면관계상 첫 번째는 이것으로 마치고 하나님의 본심 두 번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