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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십일조를 많이 하면 그만큼 축복을 받는다

by 디클레어 2010. 1. 13.

내가 아는 한 기독교인이 언젠가 이런 질문을 해왔다. 


"저희 교회 목사님이 십일조를 많이 하면 그만큼 축복을 받는다고요,...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분은 평소에도 십일조에 대해 약간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과연 지금의 교회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일이 바람직 한가?


우리는 역사책을 통해 돈을 주고 죄를 사함받는 면죄부는 누구나 다 아는 부패한 암흑시대의 비성서적인 논리를 기억하고 있다. 혹시 오늘날의 십일조도 교회의 강요를 통해 그처럼 암묵적으로 강요받아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약 시대처럼 동물을 산채로 잡아 자신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는 교회는 이제 없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율법이 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왜 교회에서 지금까지 십일조를 지키도록 얘기하는가? 과연 성서에서는 십일조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관련 내용을 정리해봤다.

십일조를 바치는 일, 성서의 견해는 어떠한가?


남아프리카의 한 성공회 교구의 사무관은 걱정이 많다. 그의 교회가 재정난에 빠져 교직자들에게 보수를 주는 것마저 어려운 실정이 된 것이다. 그의 해결책은, 교구민들에게 십일조를 바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십일조란 무엇인가? 일부 사람들은 십일조란 “총수입의 십분의 일”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바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십일조를 계산하는 방법이 종교마다 다르지만, 많은 교직자들은 십일조를 바치도록 적극 권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의 한 가톨릭 사제는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도록 더욱 강조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세계 교회’는 하나님의 벗이 되어서 궁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한 잡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려면, 먼저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 기사는 덧붙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십일조를 바칠 것을 요구하시는가? 그 점에 관해 성서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알면 놀랄지 모른다.


십일조를 바치는 일과 모세의 율법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전체 율법의 일부였다.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고 제사직을 맡은 레위인들 즉 13번째 지파를 부양할 것을 율법으로 요구받았다. 그리하여, 레위인들은 그 민족의 영적인 필요에 전념할 수 있었다. (민수 18:21-24) 이스라엘인들은 농사를 짓는 민족이었으므로 십일조를 현금으로 내는 일이 요구되지 않았다. 오히려, 땅의 소출과 늘어난 가축에서 취하여 십일조를 바쳐야 했다. 만약 소출의 십분의 일을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소출의 가치에 20퍼센트를 더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레위 27:30-33.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중대한 일이었다. 만일 어느 이스라엘인이 실수로 십일조로 내려고 했던 것의 일부를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면, 그는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떻게? 20퍼센트를 더 바치고 자기의 범과에 대한 속가로 동물 희생을 바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레위 5:14-16, 공동번역 참조) 이스라엘인들 모두가 다 제사직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누구나 그 제사직 봉사를 지원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법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요구는 그 고대 민족의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환경에도 적합한 것인가? 더욱 중요한 질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 아래 있는가?


법의 변경


예수께서 부활되신 지 몇년 후,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도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사도 15:5) 그들과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예수의 사도들과 다른 경험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십일조를 포함한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비유대인들을 대하시는 일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경험들이 설명되었고, 그 점이 하나님 자신의 예언의 말씀으로 확증되었다. (사도 15:6-21)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가?


그 회의는 만장 일치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짐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종해야 할 몇 가지 “요긴한 것들”이 있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는가? 영감받아 결정된 사실을 인용하면 이와 같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찌니라.” (사도 15:25, 28, 29) 흥미롭게도,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긴한 것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율법 언약이 예수의 죽음으로 폐지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의문의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형주]에 못 박으[셨느니라.]” (골로새 2:14, 신세 참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법이 변경되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법”이 관련된다는 것이다.—갈라디아 6:2; 히브리 7:12.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법의 변경과 일치하게 생활하였다. 회중을 하나씩 하나씩 설립하는 일에 열심히 수고하였지만, 그는 결코 십일조의 형태로 돈을 바치라고 간청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시간제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하여 기꺼이 자신의 비용을 충당하였다. (사도 18:3, 4) 그는 아주 정직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였노라.]”—사도 20:34.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는 일에 대한 어떠한 지침이 있는가? 얼마나 주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주는 방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관대한 분이셨다. 그분이 세워 놓으신 본은 많은 사람들이 관대하게 행동하도록 고무하였다. 그분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 6:38) 여기에 보면 제한이 있는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관대하게 주라는 격려를 받고 있다. 할 능력이 있다면, 십일조보다도 심지어 더 많이 바칠 수도 있다.—누가 18:22; 사도 20:35.

한편,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아마 사고나 병 때문에 갑자기 돈이 긴급하게 필요한 경우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 봉급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자기 가족의 생필품을 앗아가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런 행위는 비그리스도교적일 것이다.—마태 15:5-9; 디모데 전 5:8.


그리스도인의 주는 일은 자진적인 것이다. 각 개인의 생활 환경이 다르다는 것이 고려된다.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린도 후 8:12.

그러면 독자는 얼마나 주어야 하는가?


그것은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깊이—미리 정해진 십일조 방식이 아니라—에 따라 얼마나 줄 것인지를 결정할 일이다. 성서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바와 같다. (고린도 후 9:7)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제사직을 지원하기 위한 모세의 율법 언약의 마련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바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Watchtower Library 2008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