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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스크랩] 순종을 가장한 체념 신앙

by 디클레어 2010. 3.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죽음 앞에 초연한 할머니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이 큰 폭풍우를 만나 언제 침몰할지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모든 사람들이 곧 닥칠지 모를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새파랗게 질려 떨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할머니가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태연히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이제 살만큼 살았기에 죽음에 초연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대답인즉 이랬다. “맏딸은 죽어 천국에 가 있고 둘째 딸은 미국에 살고 있다. 만약 배가 침몰해서 죽으면 첫딸을 만날 것이요, 다행히 죽지 않고 미국에 도착하면 둘째 딸을 만날 것이니까 나로선 이래저래 다 기뻐다. 어느 쪽이 되었든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다.”

많은 신자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도무지 거역할 수 없다고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고 만다. 자기 운명은 이미 하나님이 다 정해놓으셨기에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능력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오히려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일종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다.

신앙이 어느 정도 성숙된 신자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자신의 뜻과 계획은 인간적 교만, 탐욕, 죄로 찌들어 있기에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불신앙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이뤄지도록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은 전부 비워서 내어드려야 한다고 믿는다. 신자의 완전한 자기 포기를 아주 좋은 신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두 손 두 발 다 내려놓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어느 쪽이든 인도하겠지 식으로 흐르면 안 된다.

그렇다고 그 반대의 적극적 긍정적 신앙을 장려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예컨대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거나, 적극적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이 큰일을 이뤄 주신다거나, 항상 긍정적 사고로 반응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권면 말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사조이긴 해도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다르다.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고 해서 진리가 되는 법은 없다.  

물론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미리 정해 놓은 계획이 있다는 것과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그분께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신자가 알고 따라야 할 영적 진리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도무지 거역할 수 없다. 당연히 자기 뜻을 버려야 한다. 또 무슨 일에든 간절히 기도하며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그분에게 쓰임 받기를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신앙적 자세와 행위를 하고 있는 가운데도 신자의 마음 상태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는 틀렸고 다른 하나가 옳다는 것이다. 나아가 대부분의 신자들은 틀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둘은 바로 숙명적 신앙과 순종적 신앙이다.  

숙명의 실체

숙명과 순종에 공(共)히 적용되는 전제는 하나다. 신자를 향해 미리 계획해놓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따라 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다면 그분에게 반응하는 자세는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야 한다.

그럼 어차피 변경 불가하니까 체념하고 따르는 것이 숙명이며, 이왕 그럴 바에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적극 동참하는 것이 순종인가? 결과적으로만 따지면 맞다. 그러나 이 구분은 숙명과 순종의 차이를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숙명은 한 마디로 정해진 운명이 나쁘거나 마음에 안 들어도 한 마디 불평도 하지 못하거나 않고서 무조건 따르는 것을 뜻한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실제로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은 뜻은 변경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들어도 따르면 하나님에게 잘못의 원인이 귀속될 수 있고 나아가 잘못을 능동적으로 만들어낸 주체가 되어버린다. 하나님이 선과 의를 드러낼 때도 있지만 죄와 악의 근원이자 창출자도 될 수 있다. 또 선과 악이 교차되니까 필연적으로 인간에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경질적인 하나님이 된다. 일관된 원리나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아주 잘 봐줘야 선악 간에 중립적인 하나님이다. 다른 말로  인간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에 따라 하나님의 성격이 달라진다. 자연히 시대와 지역과 인종과 문화에 따라 하나님이 각기 달라진다. 상대적인 하나님이자 상대적인 신앙이다. 신경질적 혹은 상대적 하나님이라는 인식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갖고 인간사를 판단했기 때문에 생긴다. 다른 말로 먹고 마시는 현실적 형통과 안락만 목표로 할 때는 필연적으로 이런 신앙관으로 흐르게 된다.  

그런 하나님에게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하나님의 뜻이니까 무조건 숙명으로 받아들일 것만 같은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뜻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꿀 방안만 찾는다. 아니면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스스로 창출해서 믿는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신경질적인 태도를 누그러트리려 노력하게 된다.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게 하는 가능성을 가능한 줄이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서 바치려 든다. 제물, 희생, 선행, 공적, 믿음 무엇이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 최선, 최대의 것으로 드리려 노력한다. 그러면 반대급부로 좋은 것으로 주리라, 아니면 나쁜 일을 최대한 줄여줄 것이라고 예상, 기대, 생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상대적 신앙과 기복적 신앙이 사실은 숙명론적 신앙에 선이 맞닿아 있다는 것이 말이다. 처음 출발은 하나님의 계획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쁜 일도 자꾸 생기니까 제발 그것만은 막자고 덤빈다. 나쁜 일을 막는 그만큼 좋은 일이 더 생기리라 믿거나 최소한 자기 원하는 일만은 아무 방해 없이 하고 싶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부려 먹거나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도 되겠다는 것이다. 결국 아담의 원죄에서 하나도 개선된 것이라고는 없다.

이런 문제는 신자 가운데도 많다. 입술로는 분명 하나님을 찾고 또 믿고 있다. 교회에 출석하여 똑 같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기에 그 뜻대로 따르겠다는 아주 선하고도 신앙적으로 분명 옳은 생각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쁜 일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얼마든지 기복신앙으로 바뀔 소지가 있다.  

아니 반대로 기복신앙을 감추기 위해 숙명적 신앙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말로는 “모든 게 하나님 뜻이지요.”라고 순종하는 듯해도 속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으니 체념한 것이다. 전혀 수긍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것이 전혀 아니다. 사실은 하나님 그분마저 체념, 포기한 것이다. 남은 것이라곤 일상적 종교행위 뿐이다. 매사에 그저 하나님 뜻이라는 말을, 사실 속으로는 푸념하고 있으면서, 입에 달고 다니는 자가 많다. 그것도 믿음이 좋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말이다.  

순종의 실체

순종은 숙명과 정반대여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숙명도 하나님 뜻이라고 그대로 따르는 결과적 모습은 동일하다. 그러나 순종에는 하나님 뜻을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악한 것은 단 하나도 나올 수는 없다는 확신이 반드시 전제된 것이다.

지금 당장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분은 절대로 선하기에 그 일을 두고 불평, 불만, 불신을 할 수 없다. 아니 참 순종이라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 일의 배경에 있는 그분의 동기에 대해선 때로는 불만과 의아심을 가질 수는 있어도 말이다.

따라서 신자가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은 그분의 뜻을 그대로 따를지 여부가 아니라 그 뜻 자체다. 그렇다고 그분의 뜻을 알아야만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순종하는 것은 이미 확정된 너무나 당연한 기정사실이다. 단지 더 온전한 순종을 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또 그 뜻을 전혀 몰라도 그분께 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성경에서 졸지에 가장 큰 불행을 당한 욥의 경우를 보라. 먼저 자식과 재산을 몽땅 잃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1,22)  

주신 자도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그 이름을 찬송 한다고 했다. 이 모든 일에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나님이 단지 모든 일을 주관만 하는 분이 아니었다. 생명과 재산을 주는 일만 아니라 취하는 일도 아주 선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절대로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격심한 고통을 겪게 되어도 여전히 욥은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 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2;10)

마치 욥이 하나님을 나쁜 일도 적극적으로 만드는 분으로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단지 현실적 관점에서 힘들어서 재앙일 뿐이다. 욥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선하다고 확신했다. 만약 그런 일을 일으킨, 아니 묵인하신 그분에게 나쁜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여겼다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할 리가 없다. 그 다음에 전개된 욥기 내용이 하나님의 동기를 찾는데 집중되었지 않는가?

예수님도 뭐라고 했는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19:17) 선한 이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면 다른 모든 것은 악하거나 덜 선한 것이다. 반면에 그분에게는 오직 선뿐이며 악과는 절대 공존(共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 모두가 선이며 선만 100% 있는 곳에서 악이 나올 리도 없다.  

예의 할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 다른 뾰족한 수가 없으니 순순히  따르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죽어도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고 죽지 않아도 좋은 일이 있었다. 양쪽 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충만했기에 어느 쪽이 되어도 자기는 감사와 기쁨으로 기꺼이 따르며 누리겠다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는 어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극렬한 풀 무불에 타죽을 것을 알고도 거절했다. 하나님이 건져 주실 줄 믿었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금 신상에 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했다. 다른 말로 우상숭배를 하느니 기꺼이 불에 타죽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굳건한 믿음으로 순교를 각오했다고 이해하고 그치면 많이 부족하다. 이제 가능성은 하나님이 건져주거나 타 죽게 버려두거나 둘 밖에 없다. 그런데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믿음으로 이겨내야지 정도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건져 주지 않아도 그분의 의로움과 선하심에는 단 한 치의 하자도 없음을 확신했던 것이다.

물론 풀무 불에서 건져짐으로 인해 이방국가의 왕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과 우상숭배의 죄악을 명백히 드러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께 끝까지 충성한 종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도록 방관하시는 무책임한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죽도록 두신 그 자체에도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우선 쉽게 짐작할 수 있기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존하는 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을 드러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데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그분의 뜻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뜻은 오직 선하신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라 당연히 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로 변함  없으며 오직 당신께서 당신의 방식으로만 드러낸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보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 불에서 건져지면 당연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타 죽어도 천국에 가게 되니까 좋은 것이다. 할머니가 폭풍우에서 살아나면 미국에 사는 딸을 만나고, 죽어도 먼저 죽은 딸을 천국에서 만나니 둘 다 좋다고 말한 의미와 같다.

요컨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라는 말이 단순히 믿음을 가장, 과장, 포장한 말이 결코 아니었다. 자신들의 믿음을 의지적으로 견고하게 복 돋우는 맹세, 결단, 선언도 아니었다. 그 안에 의심, 불만, 불신, 분노, 실망, 절망 등은 단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온전한 순종이었다.  

인도와 지도는 다르다.

잠언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5,6) 신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말씀인 것 같지만 따져볼 부분이 많다.

가장 먼저 신자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믿고 아뢰어 기도하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해결을 의뢰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자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기자는 분명히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했다.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인정하는 것이지 그분의 능력만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범사(凡事)에 그를 인정하라”고도 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정도가 아니다. 그 정도도 안 믿으면 아예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본 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 보다는 힘든 일도 하나님이 일으킨다는 점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신자에게 허락하신 일이라면 그분만의 의로움과 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또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다. 네 길이 틀리고 올바르지 않을 수 있으므로 그분의 바로 잡으심을 따르라는 내용이 이미 함의(含意)되어 있다. 네 길을 지도(指導)하는 것은 단순히 인도(引導)하는 것과는 다르다. 전자는 잘 모르거나 틀린 자를 바르게 이끄는 것이고, 후자는 이미 정해진 길을 그 길을 잘 아는 자가 앞장서서 간다는 의미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할 때는 이미 목적지가 같을 때이고 그렇지 않다면 지도하시는 것이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 또한 네 명철이 틀렸을 수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 것이지 않는가? 네가 계획하는 것을 고집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는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고 계획한 것을 기도로 아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먼저 구해야 한다. 최소한 자신의 뜻을 언제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 그런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기도다. 처음에는 당연히 자기 뜻을 아뢰는 것부터 기도가 시작되지만 그것으로 그치면 자기 뜻을 포기할 수 있는 즉 하나님께 순종은커녕 숙명으로 받아들일 태세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신자가 기도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뜻을 쉽게는 알 수 없다. 예수님마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또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이라고 가정법 표현으로 기도했다. 또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둘 중 하나의 확답을 받지도 못했다.  

대신에 그분이 기도 중에 얻은 응답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뿐이었다. 그런데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이라고 기도할 때만, 즉 지금 내가 바라는 것과 다를 때만 아버지 원대로 따르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구할 때도 그렇게 고백했다. 기도 제목대로 응답되는데 구태여 자신이 순종하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사실상 예수님은 이미 혹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기꺼이 죽겠다는 헌신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기도에는 앞으로 겪을 극심한 고통과 또 십자가 사역의 중요성에 대한 격정적인 심정을 토로하는 의미가 더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을 감수하면서 그런 죽음에 내모는(?)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고 선하시다고 확신하셨다. 아니 하나님의 뜻에 불완전함이 개입된다고 생각 아니 가정하는 것조차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 뜻과 계획과 그분의 것이 달라도 당연히 그분의 것이 훨씬 아니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고 선하다.    

물론 육신의 죽음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은 누구라도 너무 낯설고 두렵기 짝이 없다.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미루어주셨으면 싶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나, 예의 할머니도 하나님이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그분은 의롭고 선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죽음의 과정과 그 후에 일어날 일도 마땅히 의롭고 선할 것이라고 믿어졌던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하나님은 선하다는 확신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지 단순히 천국이 좋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국 신자가 힘든 일들을 하나님께 아뢰어 해결 받고자 할 때에 가장 먼저 얻을 응답이 무엇인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니까 당연히 순종해야지가 아니다. 그것은 순종을 가장한 체념이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고 완전하므로 기꺼이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디로 인도, 아니 지도할지 전혀 몰라도 말이다.

순종은 범사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지도 받기를 원하는 믿음이다. 숙명은 코에 고삐 낀 것처럼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 어쩔 수 없이 간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신자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모든 면에서 선하고 의롭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코가 끼는 것이 싫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꾸만 열심, 정성, 희생, 수고, 믿음을 긍정적 적극적으로 바쳐 조금이라도 자기 유리한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고 싶다. 또 그러는 것이 좋은 믿음, 최소한 틀린 믿음은 아니라는 착각이 솔솔 든다.

순종을 가장한 체념을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데서부터 기인한 것이다. 말하자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지라 나로선 도저히 어쩔 수 없으니 그 힘을 아주 잘 믿고 싶고 또 이용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똑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겠다고 시작한 믿음이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하겠는가? 아니 우리 모두 자주 체험하는 일이 아닐까?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나라
글쓴이 : 광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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