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에 대해
(개혁가님께서 올리신 ‘세례 요한에 대하여’ 를 읽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들을 우리는 교회에서 참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죠.
그래서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비판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의 말인데, 왜 하나 같이 부정적의미로 쓰지?’ 라며, 하도 이상해서 어느 날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의미가 무슨 뜻일까 싶어서 확인했던 일들이 떠오르는군요.
성경사전을 살펴보면, 비판은 ‘사람, 행동, 작품 등을 평가·비평하거나 판단하는 것’ 을 말한다고 기록돼 있죠. 성경에서는 같은 단어가 심판, 판단, 판결, 정죄 등으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비판’ 이란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크리마’ 를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뜻은 ‘비판, 심판, 판단, 판결, 정죄’ 라는 말로 성경에서 쓰이고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영어성경에서도 그대로 반영돼 ‘judge’ ‘judgment’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눅 6:37]라고 말씀하셨죠.
이는 선악에 대해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재판석에서 재판하듯, 다른 이를 심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사람을 정죄(定罪)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판은 주 안에서의 형제요, 자매인 성도들의 행동을 보고 인간인 자기가 ‘입법자요 재판자’[약 4:12]인 것처럼 판단을 하고, 판결을 내리고,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정죄하는 행위까지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죠.
그런데 주님께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비판들은 그럼 스스로의 말씀과 배치되는 상황이 되는 셈인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스스로 그들의 행동에 호된 질책과 함께 비판을 가하셨을까요?
주님께서 하신 일은 분명 비판이라 할 수 있지만, <누가복음>의 비판하지 말라는 비판이 아니라, ‘정죄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는 의미이며, 우리 말 번역에서 뜻이 잘못 전달된 번역이라고 보여집니다. 즉 변개(變改), 변역(變易)이라 볼 수 있겠죠.
교회에서 흔히들 이 구절들을 예로 들어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불평, 불만, 비난 등을 제기하지 말라’ 는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면, 제가 너무 꼬인 걸까요?
저는 지금의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이상한 모습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는 성도들의 그런 비판능력 상실이라고 저는 진단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 카페 역시 분별능력 향상이 목적 중 하나가 아닐까요?
분별하는 능력을 배양하여 무엇이 주님의 말씀이고 아니고를 비판할 능력과 정신을 함양함에 의도가 있는데, 그 기저에는 바로 비판능력 향상에도 중요한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런 비판능력 고양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잘 아시다시피, 국어사전에서 비판이란 용어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힘.
2. 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는일.’
또 철학분야에서도 비판이란 용어에 대해 이렇게 정의해 놓았습니다.
‘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는 일.’
이와 같이, 모두 비판이란 용어는 하나 같이 부정적 표현이 없고, 긍정적 표현만 있다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건전한 비판정신 함양’ 은 교육의 목적 중 하나에도 포함되어 있을 만큼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헤로데 안티파스 Hrod Antipas)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Herodias)를 취하자, 요한은 이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대담하게 지적했죠. 요한은 바로 헤롯의 간음죄를 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처럼 여겨 죽이고 싶었지만,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막 6:20]을 알고 있었기에 죽일 수가 없었죠. 하지만 헤로디아의 간계에 말려든 헤롯은 자신의 경박한 맹세로 인해 결국 요한을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헤로디아의 궤계에 넘어간 헤롯은 요한의 머리를 잘라 소반(쟁반)에 담아 헤로디아에게 주어야 했죠.
헤롯의 간음죄를 지적한 침례 요한의 그런 지적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응당 해야 할 말이었고,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몰아간다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궤변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침례 요한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선 ‘실패한 자’ 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선 ‘성공한 자’ 인 셈이죠. 그래서 저는 성경을 보면서 ‘아름다운 실패의 미학’ 을 알게 됐습니다.
경기를 하는데 있어서 규칙을 어기면 우승을 했다가도 우승을 박탈하는 것이 세상 이치죠. 하물며, 내 소망이 하늘에 있으면 하늘의 규칙에 따라야 함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이 많은 탓인지, 하늘에도 소망이 있고, 세상의 성공에도 소망이 있어서, 소위 양다리를 걸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딤후 2:5]이라고 말이죠.
*글을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가 아는 만큼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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