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능(全能)과 전지(全知)가 상호 양립할 수 있는가?
“논리학자들은 전능(全能)과 전지(全知)가 상호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신(神)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이 전능을 발휘하여 역사의 경로에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전지하신 신, 미래를 아는 신은 알 수 있을까? 전능함이 미래에 자신의 마음을 바꾸리라는 것을.
- 카렌 오언스 -
가. 전지의 두가지 측면
과거와 현재를 아는 전지 하나님의 속성중에 “전지”라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을 안다"라고 했을 때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 : 현재 사물의 상태나 과거를 아는 것이다.
전지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도 많은 것을 알수 있다. 1달 후에 지구가 태양의 어디쯤에 있을지 안다. 더 정확한 과학으로 계산하면 10년 후에 어디 위치에 있을지도 알 수 있다. 구름의 상태를 보고 날씨를 예측한다. 과학을 통하여 빛과 소리의 속도를 알 수 있고 지금 떨어지는 돌의 위치를 계산할수 있다.
즉 사람도 물질(무생물)의 미래, 즉 상태나 위치는 계산으로 얼마든지 알 수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더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물의 상태를 알고 계신다고 말한다.
“도리어 너희 머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모두 세어 두셨느니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7]
두 번째 : 미래를 아는 전지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면 미래 대비하여 현재를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미래는 바꾸어 진다. 그럼 처음에 알고 있는 미래는 미래가 아닌 것이 된다.
이러한 모순은 뫼비우스띠 처럼 끊임없는 의문을 만들었고, 무신론자들은 창조주에 대한 의문과 잘못된 일들에 비난과 책임을 전가 한다..
전지에 관한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 중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은 “제한된 전능”임을 설명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지도 “제한된 전지”이다.
어떤 제한된 전지인가? 말씀(법)과 자유의지에 반하지 않는 전지이다.
우리는 미래가 2가지 면이 있음을 알수 있다.
1. 의지로 바꿀수 있는 미래
첫 번째로 내가 만드는 미래이다. 내가 내일 학교에 갈 것이다. 라고 맘을 먹는다. 그럼 나는 나의 미래 내일 학교에 가 있을 것을 안다.
내가 내 앞에 있는 전화기를 들 것을 생각한다. 그럼 내가 내 손에 전화기가 들어 있을 것을 미리 안다.
2. 의지로 바꿀수 없는 미래
대표적으로 우리는 내일 날씨를 예보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설사 그 예보가 맞는다 하여도 나는 날씨에 관하여 관여할 수가 없다.
더 가까이 개미가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개미가 어디로 움직일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개미를 누른다고 결정하였다면 이 개미의 미래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수 있다.
즉 미래는 우리의 의지로 관여 할 수 있는 미래와 관여 할 수 없는 미래가 있다. 우리의 의지로 관여 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가 알수도 없고 개입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 관여 할수 있는 미래는 만들 수도 있으며 또한 바꿀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도 관여 할수 있는 미래와 관여 할 수 없는 미래가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사람은 관여 할수 없는 미래를 알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들수 없는 돌은 창조 하실수 없다.” 즉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능하지 못하시다.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아시니까 모두 개입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입할 수 없는 미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손을 마음대로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이다. 또한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즉 “살아있다는 것”은 “의지를 지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생명 즉 자유의지를 주는 순간 그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개입 할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 내가 빵을 먹을지 밥을 먹을지? 오른 손을 들지 왼손을 들지 하나님께서는 개입할수 없으시다. 개입하는 순간 나는 자유를 상실한다. 이것의 종착은 바로 죽음이다.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일종의 도박인 샘이다.
왜냐면 자유란 말 그대로 반란과 죄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알면서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공격하는 부분 중 하나가 아마도 전지이다.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 왜 개입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즉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은 책임이 발생하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하나님께서의 전능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전능 즉 “제한된 전능”임을 설명하였다.
즉 하나님의 전능은 “모순이나 거짓을 수반하지 않는 전능”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신다. 하지만 이것 또한 “모순이나 거짓을 수반되지 않는 전지”이다.
왜 미래를 알면서 개입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에게는 생명을 주셨다.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생물와 무생물의 가장 큰 차이는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정교한 컴퓨터나 로봇과 생물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측할 수 있는 프로그램된 반응임이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생쥐라도 우리는 그 생쥐가 어디로 갈지 어느 발을 내딜지 알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생쥐의 맘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물질만 창조하셨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 문제가 된다.
생명을 가장 큰 속성중 하나가 바로 “자유의지”인 것이다.
자유의지(freewill)란 단어는 성경에 약 17번 나오는데, 생명체에 이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 생명체는 정교한 로봇에 불과하다해 진다.
[스7:13]내가 칙령을 내리노니 나의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중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자유의지로 원하는 (freewill) 모든 자는 너와 함께 갈지니라.
[Lev.22:21]And whosoever offereth a sacrifice of peace offerings unto the LORD to accomplish [his]vow, or a freewill offering in beeves or sheep, it shall be perfect to be accepted; there shall be no blemish therein.
레22:21]누구나 자기의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나 자유의지로 하는 제사를 소나 양으로 주께 화목제의 희생제물로 드리는 사람은 받아들여지도록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거기에는 아무 흠도 없어야 할 것이니라.
자유가 없는 사람을 무엇이라 하는가. 우리는 그런 사람을 노예라고 부른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한다. 노예가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믿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주인을 미워해도 미워한다고 말할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주인은 채찍으로 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하고 싶을 것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노예가 아닌 자유인인 것이다.
즉 노예 상태에서는 자발적인 사랑과 섬김은 존재할수 없는 것이다.
주인이 노예에게 자신을 정말 존경하는 알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방법 뿐이다.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 노예가 주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그 노예는 주인을 떠나지 않고 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떠날 것이다.
주인이 노예에게 자신을 입증 할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 자유를 주는 것이다.
최초의 자유인 루시퍼(사탄)
먼저 사탄의 탄생을 보자
“너는 완전한 규모와 충만한 지혜와 완벽한 아름다움을 이루었도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웠더니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너는 네가 창조된 날로부터 죄악이 네게서 발견되기까지 너는 네 길에 완벽하였도다.” 겔28:12-15
사탄의 처음 이름은 기름부음(그리스도란 뜻) (하나님의 보좌를) 덮는 “그룹”이였다. 말씀 그대로 그는 완벽했다. 그는 자유로왔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인 것이였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연약하게 하였던 네가 어찌 땅으로 끊어져 내렸느냐!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에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 (이사야14:12-15)
이 루시퍼가 무엇이 부족해서 불만을 가지고 반역한 것인가?
창조주께서는 그에게 최고의 선의를 베푸셨다. 마음대로 할수 있는 자유인으로 지으셨고, 또한 피조물 중에 최고로 아름답고 완벽하게 지음을 받았다.
완벽한 루시퍼에게 자유의지를 없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노예, 정교한 힘센 로봇 아니 자동 판매기와 무엇이 다른가? 그를 완벽하고 아름답게 만든 것은 그가 자유인, 즉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배은망덕”하게 반란을 한 것이다. 즉 “배은망덕” 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다.
즉 루시퍼는 하나님께 반역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그 선택의 이유는 창조주보다 높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였다.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1;15)”
“미리아심”(전지)
먼저 성경에서 “전지”용어는 없고 단어는 “미리아심”(foreknowledge: 미리아심) [행2:23][롬8:29][벧전1:2]는 단어로 쓰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는 방패를 만드실 수 없다.”
이처럼 “자유의지 없이 창조주와 교재할 수 있는 생명은 창조하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오른손을 들지 왼손을 들지 아시는가?
물론 아실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미리아심은 내 “자유의지”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사실 하나님의 미리아삼이 사람의 자유의지 안에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미리아심은 그 당시에는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면 자유의지로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아담이 창조되기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아담이 무엇을 선택할지 아실까?
아담이 있지도 않은데 무엇을 선택할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아담이란 존재는 없기 때문에 선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이 하나님의 전지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피조물이 무엇을 선택할지 알지 못하신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알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맹세 하셨다...
즉 만약에 예정이라면 나는 반드시 오른손을 들도록 결정되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손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굴종(예정)이 아닌 자유를 주신 것이다.
자유가 있는 피조물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는 순간 모든 미래는 피조물의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심으로 아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관여하실수 없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자유의지로 인하여 전지하심을 제한하신 것이다.
마이너리트 리포터의 하나님
영화 마이너리트 리포터에 보면 예언자가 범죄자가 범죄 할것을 미리 알고 그를 잡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사탄도 처음부터 할 수 있지 않는가?
성경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리인들의 죄를 지을 것을 아신다. 그런데 죄를 지을 것을 아시고 미리 심판하지 않으시고 죄악이 가득 차기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사 대만에 그들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인들의 죄악이 아직 다 차지 않았음이라." 하시니라. [창15:16]”
영화처럼 아모리인들이 죄를 더 짓기 전에 왜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여 멸하시지 않으신가?
또 요나서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타민족 니느웨에 죄악이 가득하니 심판하시겠다고 요나에게 다음과 같이 전파하라고 그를 보내신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외치라. 이는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 닿았음이라." 하셨으나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 하룻길을 시작하고 그가 부르짖기를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라.
그런데 그들이 이 경고에 죄악에서 돌이킨 것이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며 굵은 베옷을 입었으니,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라. . 중략. 그들 각인으로 자기의 악한 길과 자기 손에 있는 난폭함에서 돌이키게 할지니라. 혹 하나님께서 돌이키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우리를 멸하지 않으실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느냐?"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함을 보시니, 그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지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그 재앙으로부터 돌이키시고 그 일을 행하지 않으셨더라. 요3;10
분명히 요나는 40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다.
그런데 이 선포는 돌이켜졌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요나는 이 때문에 하나님께 원수인 니느웨가 망하지 않은 것 때문에 화를 낸다.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조차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분명히 예언대로 40일 후에 멸망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였다. 하나님께서 돌이키신 것이다.
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님은 거짓말장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요나도 이일에 다음과 같이 화를 냈다.
“그러나 그 일이 요나를 심히 불쾌하게 하였으니, 요나가 매우 노하였더라.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성내는 것이 잘한 일이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기르지도 아니하였으면서도, 하룻밤에 나와서 하룻밤에 없어진 그 박 넝쿨을 긍휼히 여겼거늘 자기들의 오른쪽과 왼쪽도 분별할 줄 모르는 십이만 이상 되는 사람들과 많은 가축들이 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는 것이 부당하냐?" (요나서4:1-11)
하나님께서 니느웨가 회개하실 것을 아셨을까? 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니느웨가 40일만에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미래에 일어날 저주의 선포가 회개로 인하여 은혜가 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의지 때문인 것이다.
또 욥의 경우를 더 보면 다른 경우
그때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리이까?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밀어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쳐 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를 정면으로 저주하리이다." 하더라. (욥기1:9)
하나님께서 욥이 사탄의 시험을 당하여도 이길 것을 아셨을까 물론 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에게 내가 미래를 보니 욥은 시험을 이기니 시험하지 말라 라고 사탄에게 왜 말씀하지 않으신가 ?
왜냐면 하나님께서 지금 알고 계신 것은 전적으로 욥의 의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욥이 시험을 실제로 당하여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터의 범죄자들처럼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죄를 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예지만으로 처벌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데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변하기 때문이다.
즉 욥이 고난중에 너무나 힘들어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살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러지 않을 것을 아신다. 하지만 그 아심은 욥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욥의 미래는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욥의 자유의지에 있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은 욥이 그러지 않기를 원하셨고 욥이 그랬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예정하셨다.
악인은 벌하시고 의인은 구원하신다는 등 성경에 수 많은 것들을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정하셨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정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창조하실 때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하지만 그의 미래까지 창조하진 않으셨다.
그의 미래는 자신 사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그 달라지는 선택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하지만 그 선택에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지 않으신다.
아니 할수 없다. 왜냐면 그는 자유의지를 지니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데 “모든 것을 뚫을 창과 모든 것을 막는 방패는 창조할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이 회개할수 있는가?
약간은 위험한 가정을 해보자.
만일 사탄이 여전히 자유의지가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사탄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유영철과 같은 살인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이 불가하다고 생각하는가?
니느웨 12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을 하였다.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외침으로 회개했다
지금 어느 누구나 심지어 사탄마저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킬 수 있다.
하지만 죄를 앞으로 않짓는다고 여지것 지은 잘못과 심판이 사라지는가? 아니다.
즉 사탄은 이미 설사 돌이킨다 해도 이젠 늦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감당해야 한다. 즉 정죄가 선고된 사람에게는 회개가 소용없다.
즉 죄의 댓가는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졌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그리스도가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내 죄를 가지고 죽고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고 주로 영접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다.
하지만 기회는 죽기 전까지 만이다. 죽고 난 후에 회개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자신이 감당할 일만 남은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회개한다고 생명나무를 먹을 기회가 주어지는가?
노아의 홍수가 나고 나서 배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들 아무 소용없다.
사탄은 자신이 선택한 열매를 거둬들여한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예언서인 계시록에 보면 사탄은 하나님의 천사들과 대적한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 항복할 자유의지가 없는가?
아니다 그는 그 자유의지를 꺽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신 것이다.
하지만 위험한 생각일수도 있다. 그래도 사탄은 의지를 가지고 항복 할수 있다.
고 생각한다.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사탄은 항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후회
성경에서 최초의 후회를 누가 하는지 아는가?
[창6:6]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셨으니, 그 일이 그의 마음을 비통케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 후회란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아는데 어떻게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 “나비효과”를 보면 미래를 알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 선택을 바꾼다.
그런데 그 결과는 더욱 엉뚱하게 일어난다. 왜냐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관계 즉 자유의지 안에서 상황이 예측하지 못한 쪽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성경에 누구는 구원받고 지옥갈것이고 누구는 천국 갈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이름이 적혀 있지 않는지 이상할 것이다.
왜 악인은 심판받고 의인은 상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등 원칙만 나와있는지...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다고 주권을 가지고 막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짓고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한다면 내버려 두신다.
거짓교리를 믿고 이단교회로 가고자 한다면 가도록 내버려 두신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한다면 그 길을 막지 않으신다.
왜 전지전능하신 분이 원하시는 것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생명나무를 선택할 것을 기대하시고 창조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이후 아담의자손들이 악보다는 선을 선택할 것을 기대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를 만들면서 그들이 회개하고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의 고향을 떠나라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 지키를 바라셨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딤전2:4]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만 하실수 없는것 (아니 안하시는것)이 너무나 많다.
인간이 생각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절대 원하는게 있어서는 안된다.
원하는게 있는 하나님 바로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많은 오해가 있다.
앞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전능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넘어서 아무것도 안하신다. 아니 못하신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선택을 알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현재의 사람과 같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미래를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그 미래는 지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선택한 미래를 알고 계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선택할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 죽이셨다. 정확히 말하지만 그 아들은 바로 이 세상을 같이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골1:16)
왜 창조주 성자 하나님을 보내셨겠는가?
하나님께서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모든 것을 막는 방패”와 “모든 것을 뚫는 창”처럼 서로 모순된다.
공의는 죄를 지은 사람은 그 댓가를 받아야 한다.
사랑은 그 죄인을 사랑한다.
죄인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이 죽으셔야만 했다.
왜 나를 만드셨는가
무신론자들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을 조롱했다.
왜 선악과를 만들고, 왜 사탄을 만들고, 왜 죄를 짓는 나를 만들었냐고..
이 모든 창조의 책임과 죄인을 사랑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죽음으로 공의를 대신하셨고 또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할수도 저주할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도 모두 멸망시키시고 다시 시작하실 수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창조의 책임과 사랑 때문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이 되셔서 죽으셨다.
“너희가 생명의 창시자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들이라. [행3:15]
- 은혜의 시작 -
출처 : 성경을 찾으라 (Search the scrip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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