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음의 성도들이 잘 되고 강건해져야 할 범사(凡事)는 육체적인 건강이나, 풍요한 육신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라 열매를 맺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말씀의 진리(眞理)이자 목적이다. 하지만 아직도 다수의 불학무식한 복술(卜術)의 목회자들은 일점일획도 오점이 없는 성경의 말씀을 오도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육신적인 삶 속에서의 만사형통만을 주입시키는 사단의 하수인(디오드레베와 같은 자)들이 개신교 강단에서 자신의 권위와 권세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러진 날개로 하나님의 말씀을 명분삼아 활개를 치고 있기에 그들을 향하여 이 글을 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이 말씀은 오늘날 다수(多數)의 불학무식하고 거짓된 목회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혼이 잘 되고, 영혼이 잘 되면 물질 문제도 해결받으므로 결국에는 육신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교훈적인 설교를 성도들의 신앙관에 주입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들의 비성경적인 설교를 통하여 말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수많은 성도들이 그와 같은 설교를 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무조건 이 육신의 세상 삶 속에서 건강은 물론이요, 만사가 형통하고 물질의 축복까지 받게 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기록된 요한 삼서의 배경을 먼저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요한 삼서는 사도 요한이 말년에 에베소 지역에 거주하면서 믿음으로 사랑하는 자였던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일부이다. 이 편지에는 가이오와 디오드레베라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때문에 이 두 사람에 대한 사도 요한의 평가를 편지 전체를 통해 온전히 마음을 비운 기도를 통한 믿음으로 유심히 살펴보아야만, 오늘 본문인 2절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장문의 말씀이지만 꼭 읽어 보아야 할 내용이기에 전체적인 글을 올리니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 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요삼 1~12)
위 본문에는 오늘날 믿음의 신앙인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좋아하는 말씀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대로 2절 말씀인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세상에 수많은 불학무식한 거짓 목회자들이 2절의 말씀을 전체 본문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2절 말씀 한 절에만 성도들의 귀(耳)와 시선을 집중케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범사가 잘 되어서 이 육신의 삶 속에서 복을 받고, 인생의 문제들이 형통해지고,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해결받는다는 말씀으로 거짓된 설교로 오도하며, 이해를 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육신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원수 된 정욕(요일 2:15-17)으로 규정하였던 사도 요한이 과연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잘 되고 강건해져야 할 범사를 이 육신의 땅에서의 인생의 복으로, 그리고 만사가 형통해지고 해결되어야 할 인생의 문제로 왜 교훈의 말씀을 하였겠는가? 그러므로 거듭 여러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2절 말씀의 바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의 내용이 들어 있는 본문 전체의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두 부류의 신앙인의 삶의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본문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선한 신앙의 열매'를 결실한 가이오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악한 신앙의 열매'를 결실하였던 '디오드레베' 이 두 사람의 진실적인 신앙과 가식적인 신앙의 행위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가이오라는 사람은 사도 요한의 전도로 인하여 개종(改宗)한 자로 추정되는데, 그가 이처럼 사도 요한에 의하여 칭찬을 받았던 것은 순회 전도자(巡廻 前導者)들을 후대한 그의 선한 행위 때문이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요삼 1:3)
초대 교회 당시에는 순회 전도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초대 교회의 빠른 성장을 사도들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각처의 교회들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수시로 지역 교회들을 돌아보고 그 교회들의 신앙 상태를 사도들에게 보고하였는데, 순회 전도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가이오에 대한 칭찬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만큼 가이오의 선행이 탁월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의 탁월한 선행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서 행하는 온전한 사랑의 행위였다. 그래서 순회 전도자들이 사도들에게 보고하였던 칭찬이란 다름이 아니라, 가이오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대로 온전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또한 가이오가 순회 전도자들을 후대한 행위는 율법의 정신에 충실한 것이었고(참고. 레 19:34, 신 10:9)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참고.마 10:40~42).
그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순회 전도자들을 도와줘야 했던 이유는 그들은 이방인(異邦人)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 어떠한 물질적인 도움이나 보조를 받지 않았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항상 생활이 궁핍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요삼 1:7~8)
이와 같이 순회 복음자들은 복음 사역에 조금이라도 저해가 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떠한 물질적 도움이나 보조를 절대 받지 않았다. 때문에 순회 전도자들이 헌신적인 사랑과 충성의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값없이 전했던 모습은 그 당시 수많은 헬라 지식인들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후에 돈을 요구하였던 일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는 거룩한 복음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순회 복음자들의 여행 경비는 그들이 방문한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접대했으며, 또한 그들이 다음 여행을 위하여 그곳을 떠날 때는 그곳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주는 물질로 여비를 충당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가이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사도들의 명을 좇아서 그들의 모든 삶을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헌신하였던 순회 복음자들을 자신이 가진 진리의 사랑을 따라서 극진하게 대접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는 가이오가 속해 있던 교회의 지도자적인 인물로서 누구보다도 으뜸이 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도 요한의 사도권을 무시하고, 순회 복음자들이 자신의 지역을 방문한 것 때문에 교회 지도자로서의 자기 권위가 실추되고, 자기의 기득권이 상실될까를 염려한 나머지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순회 복음자들을 폄하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형제 접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삼 1:9) 그래서 본문의 내용상으로 유추해 보면, 디오드레베는 그 당시에 순회 복음자를 사칭하면서 거짓 전도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고발을 하는 교회의 박해자들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워서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디오드레베는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고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교회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출교(요삼 1:10)까지 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이 서신을 작성하여 순회 전도자였던 데메드리오를 통해 가이오가 있던 지역 교회에 보낸 요한 삼서 내용을 잘 살펴보면, 두 가지 초점에서 서신의 뜻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 가지는 순회 전도자들을 배척한 디오드레베의 악행이 문제였다. 이런 취지에서 본다면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영혼이 잘 된 지도자라고 자기 스스로 생각을 한다고 할지라도 순회 전도자들을 배척했던 그의 악한 행위로 볼 때에 그의 범사(凡事), 즉 그의 악한 행실의 열매는 그의 영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이오는 선한 일에 더욱더 알찬 열매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범사에 더욱 알차고 선한 열매가 맺어져서 그가 더욱더 강건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뜻으로 서신을 썼던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여기서 '강건'이란 육체적인 건강이나 물질적인 부요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온전한 진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를 맺는 신앙의 견고함을 말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더욱더 선한 일에 증진하도록 하기 위해서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서신을 통하여 간구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가이오에게 있어서 잘 되고 강건해져야 할 범사는 육체적인 건강이나 풍요로운 육신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라 알찬 열매를 맺는 삶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와 같은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각 지역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그 교회들을 해체시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들을 적그리스도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著者)의 생각은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해 본다.
"이 더럽고 추악한 개만도 못한 사단의 새끼들아! 지옥으로 떠나갈지어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일 2:18)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靈)은 거룩하지만, 육(肉)은 악하고 추하며 무익하다고 주장을 했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육신의 땅에서 육신적인 삶은 악하고 추하며 무익한 육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영이 깨끗해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궤변을 각 지방교회 안에 퍼트렸고, 그 결과로 인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육체의 일에 방종하게 만들어 극심한 불경건을 조장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상황들이 각 지방 교회에서 벌어지자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궤변에 맞서서 성도들의 삶이 영∙육간에 균형 잡힌 교회와 성도들의 발전을 도모해야 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나서 영혼이 잘 되었다면, 육신적인 삶도 거룩해야 하고, 항상 선한 일을 철저히 행해야 함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는 것'은 이 육신의 삶 속에서의 인생살이에 있어서 부자가 되고, 성공을 하며, 모든 문제들이 잘 해결함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도 요한이 바랐던 것은 이 육신의 세상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단절하고 버려야 하는 대상이었지, 조금이라도 사랑하고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서신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도 요한의 이 서신 내용의 의도는 영혼이 잘되면 반드시 육도 거룩한 행실의 열매를 결실해서 영∙육 간에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지, 영은 거룩한데 육은 방종하고, 영은 거듭났는데 행실의 열매는 결실하지 못하고, 말씀은 받았다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영혼이 잘된 성도들은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여져서 이 육신의 세상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이 육신의 세상 욕심을 따르지 않고, 이 육신의 세상 죄악을 멀리함으로써 거룩한 신앙의 열매를 반드시 결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심령 속에 내재하고 있는 진리(요삼 1:3)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그 진리의 열매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범사에 알찬 열매로 결실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실제 신앙의 삶 속에서 삶의 열매가 온전하게 결실되는 진리만이 참된 진리이며, 생활과 분리된 진리, 그리고 삶과 일치하지 않는 진리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이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한 믿음을 바탕으로 선행의 풍성한 열매를 맺은 영혼이 잘된 자였음을 우리들이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 하였느니라!" (요삼 1:5~6전)
가이오는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베풀었으며, 그들을 대할 때 항상 신실한 마음을 가졌다. 여기서 가이오가 신실하였던 '무엇이든지'가 바로 '범사'라는 뜻으로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선한 행실이 계속되기를 격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요삼 1:6후~8)
바로 이와 같은 선행의 삶이 사도 요한이 간구하고 있는 잘되고 강건해야 될 범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야 하는 것은 이 육신의 세상적인 부요의 삶이나, 세상적인 성공의 삶, 그리고 세상적인 명예의 삶, 또한 세상적인 칭찬의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는 열매를 맺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온전치 못한 성도들에게 불학무식하고 거짓된 목회자들이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반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혼이 잘되어 구원도 받고, 또한 덤으로 범사에 물질의 축복도 받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들이 간구하는 모든 꿈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거짓 주장을 반복한다. 이들 목회자들은 그러한 설교를 통해서 더욱더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나타내는 어리석은 목회자인 셈이며, 오히려 이러한 설교로 성도들을 더욱더 세속화시키는, 성령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고 하는 요한삼서 2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반드시 행함으로 그 믿음, 즉 영혼이 잘됨이 온전해져서 범사, 즉 무슨 일에서든지 온전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전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 해석에서 나온 바른 설교라는 사실을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어느 말씀 한 구절만 논하며 전체적인 성경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오도하는, 진리를 모르는 목회자들은 요한삼서 1장 9절에서 10절에 등장하는 '디오드레베' 같은 오만한 자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성도들을 혼란케 하거나 내어쫓지 말고, 가이오나 데메드리오처럼 행하여 온전한 말씀의 본질을 진실한 믿음으로 먼저 깨달아 그동안 거짓된 영에 사로잡혀 행해 왔던 거짓된 삶을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 살펴보며, 앞으로는 망령된 거짓 목회자의 탈을 쓰고 마이너스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온전한 종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 그대로 플러스해서 전하는 정직한 목회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니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단 2:9)
윤요셉 / 벧엘교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