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분별/세상-세계정부

[스크랩] 음모론의 배후에는 금융왕조 로스 차일드가 있다.

by 디클레어 2010. 8. 4.

 

 

mam.jpg
(로스차일드 가문 대대로 내려온 문장)

로스차일드 가문은 조상 대대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 게토에서 고물상을 하면서, '붉은 방패(독일어로 로트칠트)'를 집 앞에 내 걸었다.

 

그것이 영어식 발음 '로스차일드'의 어원이며, 마이어가 훗날 이것을 성으로 사용한다.

 

아버지인 바베트(생1784.8.29 - 몰년 미상)는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한 마이어를 랍비로 키우기 위해 유대 신학교에 보내 탈무드를 공부하게 했다.

 

하지만 마이어는 12세 때 부모가 사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대인이 경영하던 오펜하임 은행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300년의 번영을 자랑하는 로스차일드 집안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탈무드'와 '은행'은 자못 유대인다운 배합이었다.

 

마이어는 유대 신학교에서 탈무드를 공부하여 중동과 유럽의 역사와 어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던 중 고대의 화폐에 흥미를 느껴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이어는 20세가 되자 오펜하임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화폐수집상이 되었는데 그것이 세계 최대의 금융왕국을 건설하는 첫걸음이었다.

mam_02.jpg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mam_03.jpg

마이어는 고대 화폐의 유래를 설명한 안내서를 만들어 고객이 될 만한 지배층 사람들에게 우송했다. 그리고 흥미가 없는 사람한테는 고대 화폐를 공짜나 다름없이 사들여서, 부유한 귀족들에게 팔러 다니다가 헤센-카셀의 제후인 빌헬름 공과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그즈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한낱 상인에 지나지 않은 유대인 청년이 영주와 귀족을 직접 만나 거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빌헬름 공은 군대를 양성하여 영국 등에 용병으로 빌려주는 장사를 하여 수많은 왕족들이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서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mam_04.jpg
(마이어에게는 빛과 소금의 존재(?) 였던 헤센의 선제후 빌헬름1세  생1743 - 몰1837)

 화폐수집상뿐만 아니라 환전상도 겸했던 마이어는 빌헬름 공의 재정담당에게 줄을 넣기 위해 애쓴 끝에, 런던에서 보내오는 환어음을 현금화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재정에까지 관여하게 된 것이다. 더욱 운이 좋았던 것은 1785년 빌헬름 공이 아버지 헤센-카셀의 제후 프리드리히2세의 뒤를 이어 빌헬름 1세로 즉위하여 그의 자산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섬유의 대량생산이 시작되었고, 프랑스혁명으로 독일에서도 면제품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이에 주목한 로스차일드 상회는 빌헬름 1세가 영국에서 용병대금으로 받은 수표를 단순히 현금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표를 바로 영국에서 구입한 면제품의 지불에 충당했다.

 

또한 다시 주식과 채권에도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기 시작했다.

 

유럽 최대의 갑부인 빌헬름 1세의 제1금고지기가 된 마이어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가문을 위한 일로서 국경을 초월한 통신과 마차 수송 금융네트워크를 구상했다.

훗날 파리의 5남(제임스, 나중에 3세가됨)과, 빈의 차남이 협력하여, 유럽전체를 커버하는 “통신과 마차 수송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며 이 네트워크를 이용한 빠른 정보는 엄청난 이득으로 연결되었다.

 

당시의 수송 네트워크는 오늘날 인터넷에 의한 네트워크 만큼이나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남보다 한발 빠른 정보를 이용하여 런던의 네이선은 금과 통화의 투기로 대박을 터트렸다. 이것은 형제들끼리만이 가능한 제휴 플레이였다.

 

1810년 런던 증권거래소의 지배자 베어링이 죽자 네이선이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 “세계 제일의 금융왕”이 되었다.



mam_05.jpg

마이어의 다섯 아들들 순서대로 암셸, 잘로몬, 나탄, 카를, 야콥)

mam_06.jpg
                      (1826년의 로스차일드 가문사진)

 마이어에게는 암셸, 잘로몬, 나탄, 카를, 야콥(나중에 개명하여 제임스) 등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이 다섯 아들들을 엄격한 유대 교육하에 상인으로 단련시켜, 장남 암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가의 후계자로, 차남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빈, 삼남 나탄은 영국 런던, 사남 카를은 이탈리아 나폴리, 오남 야콥은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로스차일드는 유럽 주요도시에 포진한 다섯 아들들의 견고한 협력체제하에서 19세기 유럽 최강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해갔다.

 

마이어와 다섯 아들들의 눈부신 활약과 사투는 장대한 드라마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격동의 유럽 역사가 될 정도다.

 

나오는 등장인물만 나열해도 나폴레옹, 웰링턴 장군,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 합스부르크 집안, 히틀러 등 역사의 한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mam_07.jpg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 1777-1836)

 마이어의 셋째 아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으로 건너가 솜털실담배설탕 등의 상품 거래에 손을 대어 잠깐 동안에 큰 부를 쌓았다.

 

이 전설적인 사나이는 겨우 몇 시간의 주식 매매로 그때 돈으로 수백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 벌이를 했다.

 

거기에는 큰 비밀이 있었다.

 

1815년 6월 20일, 런던 증권거래소에는 아침부터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몇 번이고 '로스차일드의 기둥'을 보았다.

 

일약 명사가 된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주식을 팔고 살 때 늘 기대어 있는 기둥을 사람들은 '로스차일드의 기둥'이라고 불렀다.

전날인 6월 19일, 대영제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두 나라의 명운을 건 워털루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이 이 싸움에서 이기면 영국 공채는 폭등하고, 만일 나폴레옹이 이기면 영국 공채는 폭락한다.

 

증권거래소에서는 모두 숨을 죽이고 승패의 뉴스를 기다렸다.

 

남보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결과를 알게 되면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다.

 

이때는 무선도 철도도 없었고, 겨우 일부에서 증기선이 쓰이고 있었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남쪽에서 벌어진 워털루싸움의 뉴스도 말을 사용한 파발꾼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워털루싸움에 앞서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패했고 이번에도 형세는 매우 나쁘다는 소식이었다.

mam_08.jpg
             (근세 유럽의 운명을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

그런데 네이선은 로스차일드의 기둥에 기대어 천천히 영국 공채를 팔기 시작했다.

 

"제1작전! 네이선(로스차일드)이 팔았다!" 뉴스가 거래소 안에 일제히 퍼졌다.

 

주는 매도세다! 영국군이 패했다! 추종자들이 뒤따랐다.

 

영국 공채는 대뜸 크게 폭락했다. 네이선은 더욱 투매를 계속했다.

 

네이선의 둥그마한 얼굴은 여느때처럼 무표정했다. 그의 손가락이 팔라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주가는 뚝뚝 폭락했다. 그리하여 값이 극한까지 폭락하여 마지막 한계선까지 내린 순간, 네이선의 손가락은 별안간 바뀌어 대량 매입 신호를 되풀이했다. 한순간, 거래소는 숨을 죽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세차 따먹기인가 추종자들이 조심조심 뒤따랐다.

 

네이선은 사고 또 샀다.

 

대폭락한 공채를 바닥값으로 마구 사들였다. 아무래도 단순한 시세차 따먹기는 아닌 모양 같았다.

 

사람들이 눈치를 챈 것과 거의 동시에 정부 소식통에서 '워털루전투 영국군 대승리'라는 뉴스가 거래소에 들어왔다.

 

공채는 대뜸 폭등이 계속되었다.

 

네이선은 이 모양을 로스차일드의 기둥에 기댄 채 태연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기둥에 기대고만 있었다. 큰 도박을 한 뒤의 승리감을 맛보고 있으면 되었다. 젖은 손바닥을 통해 큰 돈이 연거푸 호주머니 속으로 굴러들었다.

 

만일 영국이 워털루싸움에서 패했더라면 네이선은 한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으리라. 분명히 네이선은 큰 도박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큰 도박이라기보다는 로스차일드 일족 특유의 어마어마한 계산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네이선에게는 큰 도박이라기보다는 냉정한 계산에 의한 승리였다. 워털루싸움에서 이기면 공채는 폭등하고 패하면 폭락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영국 정부측의 정보를 한시라도 빨리 손에 넣으려고 다투었다. 다만 네이선 혼자만 달랐다. 그는 정부를 앞지를 생각이었다.

 

이것이 네이선의 비범한 점이다. 그는 영국 정부보다 빨리 전황을 알기 위해 정보 네트워크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았다. 이 일화에 대해서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네이선이 영국군 정보원을 매수 한거로 나왔는데, 그건 워털루 전의 전투(즉 블뤼허가 후퇴한)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일화를 잘못 기술했거나, 다른 사건과 오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정보력을 바탕으로 영국 정부의 국채를 몇 시간 일찍 무더기로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무려 1억3500만프랑의 이익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이때부터 로스차일드가의 무자비한 이윤추구 방식,정경유착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다섯 아들은 모두 유럽의 중심국가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는다.

 

작위를 받으며 5발의 화살을 쥔 손이 그려진 문장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그 뒤 형제에게는 ‘5발의 화살’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mam_09.jpg
(로스차일드 5형제를 상징하는 문장)

 

나폴레옹 전쟁 뒤 로스차일드 가문은 사실상 ‘유럽의 숨은 지배자’가 된다.

 

전쟁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가 하면,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한 영국군의 자금 조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네이선은 영국을 겨냥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뚫고 영국 상품의 비밀교역을 주도했다.

 

결국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재정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네이선이 사실상 좌지우지하게 됐고, 막내 제임스도 프랑스에서 국왕 루이 필립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는 지위에 올랐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느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고대 유대인은 단지 한명의 왕에게 복종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왕들이 한 유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어느 정도 비약은 있겠지만, 불과 2대전의 선대만 해도 고물상을 운영하는 가문이 엄청난 발전을 한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mam_10.jpg
(잘로몬 마이어 본 로스차일드 1774-1855)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을 발명하자 영국에서는 철도의 장래성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철도사업이란 미친 짓이며 네이선 같은 사람도 마차보다 나은 수송 수단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네이선의 예상과는 반대로 영국에서는 철도가 순조롭게 발전해서 그 장래성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벌써 그때는 네이선이 영국 철도에 손 내밀 기회를 잃은 상태였다.

 

네이선에게 정보를 얻은 잘로몬은 즉시 이 아이디어를 검토했다. 그러나 무슨 일에 대해서도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말 없는 탈것' 이야기는 엉터리 정보라 보고 있었다.

 

철도 소문을 들은 일이 있는 지식층도 철도는 악마의 강철기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철도사업을 추진하려면 세상의 몰매를 맞을 것은 뻔 한 일이었다. 더욱이 유대인이 하려 하다니. 잘로몬은 조용히 진행시켰다. 영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철도사업을 기술과 금융 면에서 검토시켰다. 운수사업에 침투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여러 곳의 역마차 사업을 매수했다. 운송 노선 예정지들을 도보로 조사시켰다. 한편 신문에 철도에 관한 계몽 기사를 계속 연재했다.

mam_11.jpg
                     (최초의 증기기관차)

 

이와 같이 5년 동안의 신중한 준비 기간을 거쳐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 빈에서 보호냐 까지 100킬로미터에 걸친 유럽 대륙 최고의 대규모 철도건설 사업을 신청했다.

 

이미 메테르니히 재상에게는 충분히 사전 교섭을 했으므로 잘로몬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황제로부터 면허를 획득했다. 그러나 계획이 발표되자 잘로몬에게 심각한 비난이 쏟아졌다. 빈의 신문들은 잘로몬의 반대편에 섰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신중한 준비를 파산으로 전락시킬 것 같았다.

 

빈의 신문들에는 의사와 전문가들의 투고가 계속되었다. 더 큰 문제는 오스트리아 금융업자들이 외국인의 철도투자는 위험하다고 강조하면서 잘로몬을 적대시하는 일이었다. 잘로몬은 메테르니히 재상은 물론 오스트리아 정부의 고위층과도 친밀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한 번에 중앙 돌파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잘로몬은 먼저 부드러운 방법으로 여론의 반대에 대처하였다. 주식의 인기를 부추기는 일이다. 그는 철도건설 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주식을 1만 2000주 발행하여, 8000주를 로스차일드 집안이 보유하고, 나머지 4000주를 선착순으로 모집하였다.

 

잘로몬의 계산대로 철도에 반대하던 자들도 막상 로스차일드 집안이 나섰다고 하니까 서로 앞 다투어 신청하였다. 잘로몬의 철도건설에 반대하던 금융업자들도 몰려들어 응모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4000주의 공모에 8배 가까운 신청이 쇄도하였다.

 

이 대성공의 그늘에는 은밀히 잘로몬의 눈에 보이지 않은 황금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꼭두각시를 써서 주식에 응모하게 함으로써, 주식의 인기를 최대한으로 부추겨 올렸다. 물론 세상은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성공으로 반대운동은 약간 수그러들었지만,반대파의 힘은 아직 가볍게 보기 어려웠다. 교섭의 천재 잘로몬은 절묘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오스트리아 황제를 받들어 모시기로 한 것이다. 그는 황제에게 빈―보호냐철도의 정식명칭을 '페르디난트 황제 북방철도'로 하는 허가를 얻었다. 이것이 역전의 아이디어가 되었다. 유럽 최초, 최대 철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면 자신의 이름은 영원한 것이 된다. 지도, 역, 차량마다 모두 페르디난트 황제의 명칭이 붙는 것이다.

 

'페르디난트 황제 북방철도'라는 명칭은 마치 로스차일드 집안의 철도에서 오스트리아제국의 철도가 된 듯 한 인상을 주었다. 아무도 이 황제의 명칭을 받드는 철도건설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4년 뒤 철도 일부가 개통되고, 오스트리아는 당당하게 유럽 다른 어떤 제국보다 앞선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금화가 소리를 내면 욕설은 조용해진다." -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유훈 

mam_17.jpg
                  (수에즈 운하의 당시 건설 모습)

또한 1835년 파리의 3세(다섯째 아들 제임스)는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개발권을 획득하였고, 러시아의 바크유전이권획득, 석유회사“로열 더치 쉘”등 정보 .교통. 에너지. 귀금속 등 당시 첨단 산업중심으로 팽창하였다.

 

1814년 동인도회사의 인도무역 독점권이 폐지되자, 그 이권을 지배하였고, 1862년에는 나폴레옹 3세와 금융 제휴하였고, 1870년에는 바티칸에 융자하여 카톨릭을 금융으로 지배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1871에는 프랑스를 꺽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이 전쟁배상금 50만 프랑을 2년내 상환토록하는 불리한 조약을 강요하였으나, 제임스가 이 돈을 프랑스정부에 대부하여 독일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내게 하였다.

 

1875년에는 영국 정부의 수에즈 운하 주식 매입에 개입, 매입자금을 공급하여 영국정부는 물론 유럽왕실과의 유착을 강화하였다.

 

수에즈운하 1859~1869 프랑스외교관 레셉스가 건설하였는 데 운영권은 프랑스와 이집트가 공동소유하고 있었다. 이중 이집트의 몫(1/2)을 프랑스 몰래 사들여 아세아, 아프리카로의 진출 해상통로를 확보함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식민지 정책의 기반을 조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에즈운하 보호 명목으로 결국 이집트를 보호국화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영국은 1918년 오일로드를 확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고, 이후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수에즈운하를  비밀리에 매입하는 일을 추진한 영국 재상은 유태인 "벤자민 디즈레일리" 였다.

 

1880년에는 세계3대 니켈자본인 “르 니켈”를 창설하였고, 1881년에는 아연.납.석탄 발굴회사인 “페나로야”를 창설하는 등 스페인. 프랑스. 이태리. 유고슬라비아. 북부  아프리카. 남아프리카로 사업을 확대하였다.

 

1888년에는 세계최대 다이아몬드 신디케이트인 “데비아스”사를 창설하였다. 오늘날도 남아프리카 저개발국의 내전에는 전쟁자금 즉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잔혹한 살상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회사들은 독점을 통한 수급조절로 값이 하락하는 것을 막고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1917년 벨푸어선언도 로스차일드가 출신 라이오넬이 제언하여 영국정부를 움직여 성사시켰다. 벨푸어선언이란 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양도하여 유대국가를 건설키로 한 약속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건국시 파리가에서만 7천만 프랑을 건국자금으로 지원하였다.

 

즉, 돈으로 유대인 2천년 역사의 한을 풀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 자금은 주로 서유럽에 거주하던 스파라디계 유대인이 제공하였다. 당시에는 15% 정도인 스파라디계 유태인이 더 잘 살았고, 아슈케나지계는 러시아 폴란드에서 궁핍과 박해에 시달렸다. 유대인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는 시오니즘은 아슈케나지계가 주도하였다(벤구리온, 골다메이어 등).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러시아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 사회보장제도 등 사회주의 요소는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로스차일드가는 20세기 들어와서도 비철금속 석유 금 우라늄 등 지하자원 확보에 치중 거대한 첨단기업연합체로 부동의 기반 을 조성하였다.

 

이스라엘 인구는 460만으로 세계인구의 1/1200 이지만 미국 대외원조의 1/5이 이스라엘에 간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워싱턴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만들어  진다는 말은 유태인의 역량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만약 유태인이 유럽과 미국에 없었더라면 근대자본주의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만큼 유태인의 이윤추구 방식은 자본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며, 자본주의가 점령한 현 세계의 헤게모니 속에 녹아 있다. 돈벌이 자체가 善인 유태인에게 자본주의, 더구나 인종.종교의 장벽이 없는 미국은 놀고는 싶은데 마당이 없던 유태인에게 날개를 달아 준것과 같았다.

 

유태인에게 비즈니스는 돈벌이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들 민족과 종교가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금기시하는 고리대금, 징세인. 국왕 귀족의 재산관리인. 유통업 등 직업으로 세인의 반감과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비밀리에 돈을 움직이는 기술로 실력자의 비밀을 장악함으로서 배후에서 국가를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정경유착 탈무드는 유태인이 구약성서 보다 더 중시하는 경전이다  탈무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법은 오직 智力과 財力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특히 기독교권 문화에서 예수를 박해한 유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재력은 그들이 생존하기 위한 절대조건이었다.

mam_12.jpg
                    (로스차일드 빌딩)

 

전세계의 금융, 정치권을 비롯한 소위 지도층 사이에서, IMF는 세계은행과 함께 브랜트우즈 협정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금융자본의 꼭두각시 기관이며, 이러한 기관은 모두 소로스나 로스차일드 등의 유태인의 밑에 있는 것 이라는 음모론이 퍼지고 있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시기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역으로 조지 소로스를 꼽았었다.

 

아시아 위기가 금융파생상품 헤지펀드 등을 앞세워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소로스의 손에 의해 연출됐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대장성의 전직 관리는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것은 세계 핫머니 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헤지펀드들의 작전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 관리(사사키 바라)는 세계 헤지펀드 시장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가 한국 금융시장 교란을 겨냥한 작전을 벌였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주장을 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을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인도네시아에 빌려준 돈이 가장 많은 곳이 한국은행들이고 그 대부분이 단기 자금이기 때문이라고 소로스가 설명했다는 것 이다.

 

당시 홍콩회의에는 한국대표단도 참석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소로스의 모의'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한국의 정치지도자들과 경제 관료들은 세계경제를 너무 순진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세계경제를 둘러싼 대형 사건들은 바로 이 같은 유태계 거대 자본이 소로스를 앞세워 실행하고 있는 세계지배 전략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소로스의 모의’의 저자는 소로스 혼자의 힘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배후가 있다는 이야기다.

 

배후는 다름 아닌 유태계 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미 19세기에 전 유럽에 걸쳐 신속한 정보망을 갖추고 영국과 나폴레옹의 전쟁을 기회로 시장조작 수법을 이용 천문학 적인 부를 손에 넣었다.

 

막대한 부를 얻은 유태 자본은 유럽의 각 왕실에 돈을 빌려주면서 왕실과 결탁하고 왕실의 신임을 얻어 사회적 신분을 높이는데 성공한다.

 

그 끈끈한 관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태계 자본의 지원을 받는 유럽왕실은 식민지를 통한 무자비한 영토 확장과 세계 곳곳의 수탈을 통해 이미 천문학적인 부를 스위스 은행에 넣어놓고 세계인류를 움직이려 하는 것 이다.

mam_13.jpg

         (로스차일드 가문과 7대왕실의 세계 경제 지배도.) 

 

초지배계층이라고 불리 우는 유럽의 7대 왕실과 로스차일드는 막대한 부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세계를 지배해 보겠다 라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 이들은 일명 “(New World Order 뉴 월드 오더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고 행하기 시작 한 것이다.

 

이들은 항상 비밀의 베일에 싸여 있었으나, 1954년 5월에 회견 자리를 만들었으며, 네덜란드 오스텔벡에 있는 빌더 버그 호텔에서 모였다고 해서 ‘빌더 버그 그룹’ 이라고 칭하였다.

 

이들은 여전히 매스컴의 차단 후 인류의 운명을 결정 하였으며, 기자가 출입을 하여도 절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는다고 한다. 이들은 후에 자원의 고갈로 세계가 멸망이 되는 것을 두려워서 만든 것으로서 이들이 세계 통일 국가를 구축 후 다스린다는 것이다.

mam_14.jpg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런던의 로스차일드은행은 잉글랜드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 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프랑스의 최고급 포도주 가운데 하나인 보르도의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등을 생산하는 포도원도 이 가문의 소유이다.

 

현재 표면적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10명이 약 15억달러 자산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 자산은 그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가문의 국제적 명성과 신용은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1940년 당시 로스차일드 일족은 약 5천억달러(당시 미국 전 자산의 2배, 전세계 부의 50%를 지배)를 보유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자산에 접근자체가 불가능하다.

 

재산을 철저히 베일 속에 감출 수 있는 것은 세계유명금융기관(FRB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영국. 프랑스의 중앙은행. 신용평가사 무디스 등)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재산을 비밀관리하는 것은 마이어암셀의 유언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정치권력으로 부터 불필요한 공격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 재산은 쉽게 주인을 알 수 없는 펀드나 채권등의 형태로 운용된다고 한다.

 

지금 전 세계 국가들은 부채에 시달리고 있고 그 빚의 주인이 미국이라고 주장하는 데, 정작 미국 역시 수조 달러의 부채를 떠안고 있다.

 

미국의 세금 모두를 몇년간 모아도 빚의 이자도 못 갚는다는 것이다.

 

세계가 안고 있는 부채의 주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꼭대기에는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등 유대 가문이 있다.

 

세계는 미국이 미국은 유태인이, 유태인 뒤에는 로스차일드가문이 있다.

로스차일드는 오늘날에도 유럽과 미국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에서, 전쟁과 혁명, 경제공황, 내란을 이용하여 부를 팽창시키고 있다.

 

입맛이 쓰지만, 로스차일드가의 존재를 무시하고  21C 지구의 전쟁과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없다.

 

한때 로스차일드가는 미국진출의 시기를 놓쳐, 1.2차 대전후 영향력이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여전히 프랑스. 런던 스위스를 거점으로 미국에 안착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시 딕체니 부통령, 국제금융계 큰손 조지 소로스, 금융재벌 J.p모건도 로스차일드가문의 핵심人士이며, 세계적 소프라노 살롯 드 로스차일드는 런던가의 직계 손녀이다.

mam_15.jpg
(로스차일드 5형제의 막내 제임스 마이어 로스차일드)

 

그러나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이래로 8대에 이르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초기의 활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관련해선 2가지 정도의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1800년대 후반 정세 판단을 잘못해 미국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진출에 대해선 ‘5발의 화살’ 형제 가운데 3남인 네이선 못지않게 사업을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 5남 제임스가 자신의 장남이 낸 미국 진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지나친 유럽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둘째로, 세대가 내려갈수록 선조들만큼 뛰어난 경영인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관련해선 조심스럽게 가문 내부의 근친결혼 관련설을 거론하는 의견도 나온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파리상회의 창업자 격인 제임스가 조카딸과 결혼하고 그 딸이 다시 사촌과 결혼하는 등 근친결혼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mam_16.jpg

(썩소 날리고 있는 너대니얼 로스차일드. 이제 가문의 운명은 그에게 달려있다.)

 

 2007년 3월 8일 뉴욕타임스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 영국 지부의 4대 후계자인 제이콥 로스차일드의 아들 너대니얼 로스차일드 회장이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헤지펀드 운영업체인 아티커스캐피털 공동 회장인 그는 최근의 성공적 투자를 바탕으로 과거 어느 후계자보다도 많은 부를 거머쥐게 될 것이라고 이 신문은 전망했다.

 

너대니얼 회장이 처음부터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아니었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기피해 온 가문의 전통 때문에 많은 것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청년기에 그는 뉴욕과 파리, 런던을 오가며 화려한 파티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자주 포착됐다.

 

유럽의 재벌 자녀, 수많은 톱모델 및 영화배우와의 염문을 뿌렸고 1995년에는 런던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리던 애너벨 닐슨과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다.

 

“가문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수군거림이 잇따랐다. 후계자로 지목됐던 그의 친척들이 잇달아 호텔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하거나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요절하면서 부정적인 전망은 커졌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1995년 아티커스캐피털의 티모시 배러킷 회장과의 만남이었다. 배러킷 회장이 새로운 헤지펀드 설립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들은 그는 피우던 담배를 황급히 비벼 끄며 “함께 일하자”고 구애작전을 펼쳤다.

 

이후 그는 사교계의 난잡한 생활을 정리하고 일에 몰두했다. 술을 끊었고 부인과의 이혼에도 합의했다.

 

너대니얼 회장이 합류한 아티커스캐피털의 헤지펀드는 연간 30%대 성장을 거듭해 규모를 20억 달러에서 3년 만에 140억 달러까지 늘렸다.

 

그는 2005년 8000만 달러의 성공보수금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그 이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침체에 시달렸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흥에는 이런 그의 성공이 뒷받침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5대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평도 많다.

 

너대니얼 회장의 측근들은 그가 아버지만큼 야심과 능력을 보여 줘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낀다고 전했다.


로스 차일드 가의 잔재기업

셀 석유, 로스차일드 은행(금 가격 결정),  골드만삭스 증권, 로이드보험 . 필립모리스 담배,  필립스 전기, 레슬러 식품, 프랑스 최고급 포도주의 하나인 “샤토 무통”의 제조사인 “베이론 필립페”. 파리안과 평원.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터,  윌스트리트저널, 로이터통신, ABC. CBS 그 외 삭슨 자딘 기네스 . 세계 첫 분자생물학연구소인 “제네바 아돌프 로스차일드 재단” 등이다.

세계 정복을 위한 5가지 전략

1. 세계최대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의 지배 
   - 즉 미국의 지배 그리고 미국은 세계를, 미국은 유태인이 지배한다.

 

2. 세계 에너지시장의 지배 
   - 로얄 더치 셀(로스차일드) 
   - 엑슨. 모빌. 스탠다드(록펠러) 
   - 텍사코(노리스가) 
   - 영국의 브리티시-페트로리엄(영국 유태자본)

 

3. 세계 식량시장의 지배 
  - 정기적으로 곡물을 수출하는 나라는 미국.캐나다.아르헨티나.호주, 이들 세계 식량공급 5개 메이저
     대부분을 아슈케나지 유태인이 장악 
    . 콘티넨탈-그레인. 카길. 루이-드레픽스는 우월 유태계임 
      콘티넨탈 그레인과 카길사에서 미국 곡물수출의 85%를 담당하고 있다.

 

4. 세계 금융시장의 지배 
   - 미국 최대 5개 은행 중 체이스맨하탄, JP모건 유태인 직영

   - 뱅크 오브 아메리카(B0A)는 영국 로스차일드와 전략적 제휴 
   - 그 외, 메린린치, 솔로몬-브러더스, 모건 - 스탄
     제이, 파스트-보스톤, 골드만 삭스 등 유태인이 경영 
   - FRB, IBRD, IMF 등은 유태인이 배후에서 지배 
   * FRB는 록펠러가 지배하고 있으나 그 배후에 창설자인 로스차일드가문이 있다 
   * 세계금융시장은 의문의 여지없이 유태자본이 장악

 

5. 세계 정보 통신망의 지배 
   - AP, UPI통신, IBM(세계 컴퓨터시장 50%점유)

로스차일드가는 영화 패션 각종연구소 학술에 공헌 하였으나, 비즈니스가 국제정부기관. 각국의 왕실. 국제보도기관. 국제첩보기관 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특히 군수기업과 유착) 비난을 받고 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무기. 탄약을 판매하는 무기상(죽음의 상인)의 상당수는 로스차일드와 관계가 있다
 

전쟁있는 곳에 로스차일드가 숨어 있다.

 

나폴레온 전쟁이후 유태인은 전쟁을 비즈니스로 취급하고 있다.

 

 

출처 : peacemaker
글쓴이 : Peacemaker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