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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돈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목사님들

by 디클레어 2010. 8. 27.

돈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목사님들
세속적 복에 명운을 건 한국교회
입력 : 2010년 08월 24일 (화) 09:29:43 [조회수 : 2084] 신성남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모든 부패한 종교의 공통적이며 상습적인 거짓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돈을 바치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그늘 속에서도 가장 오래된 거짓말 중의 하나입니다. 심지어 중세 교회 사제들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돈을 바치면, 이미 죽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다른 가족들의 영혼도 즉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기만을 하였습니다. 

사실 '마음을 다해 자발적으로' 하는 헌금은 매우 소중하며, 건강한 교회 운영을 위해서 꼭 필요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울러 적은 사례비에 연연하지 않고, 검소하게 사시며 묵묵히 교회를 섬기시는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도 이 나라 구석구석에 절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틈만 나면 성경을 왜곡하며 돈을 바치라고 신도들을 압박하는 극히 세속적인 목사님들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자 된 도리를 망각하고 한 여름 상한 고등어보다도 더 심하게 변질된 이분들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속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을 거두고 있습니다. 

맘몬을 따르는 목사들

이런 목사님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성경을 객관적이며 종합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과 실제 처신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목사님들이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하며 신도들에게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헌금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왜 재물을 땅에다 쌓고 있는지요. 전혀 공감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의 설교가 옳다면, 스스로 과소유한 재물을 털어서 교회에 바치거나 가난한 이들을 돕거나 하여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이 아닌가요. 왜 자신들은 은행이나 부동산에 돈을 쌓아 두고 고가의 주택과 고급 승용차를 즐기며, 교인들의 평균 수준보다도 더 사치스럽게 사시는지 속 시원하게 해명을 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의 지적처럼, 입으로 하는 설교와 삶으로 보여 주는 설교가 너무 딴판입니다.

심지어는 "십일조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인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아예 논할 가치마저 못 느껴서 생략하고자 합니다. 다만 현재 세계에서 십일조를 실제 제대로 하고 있는 신도는, 가톨릭을 포함하여 아무리 크게 보아도 전체 기독교인의 5%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유일한 '십일조 왕국'인 한국교회와 미국의 극히 일부 교단 교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매우 사이비한 주장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제일 복 받는 믿음이 무언지 아는가. 바로 헌금이다. 뭐니 뭐니 해도 헌금이다"라는 말도 하더군요. 성경 어디에 이런 선동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지 필자는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여기서 '제일'이라는 단어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도 이런 진부한 속수가 복을 좋아하는 순진한 신도들에게는 의외로 잘 통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반찬 값을 절약하거나 아이들 학원비를 줄여서 어렵게 바친 교인들의 가슴 어린 헌금이, 거룩한 예배를 통하여 담임목사님 자녀의 해외 유학비나 고급 승용차 관리비 등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이적도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인위적인 헌금 유도를 통하여 신도들이 실제로 복 받을 일은 별로 없겠지만, 대신에 상당수 목사님이 돈 복을 크게 받으시고 지나치게 잘 먹고 잘살게 된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매우 궁금한 점은 그렇게 '헌금을 잘 바쳐서' 제일 좋은 복을 많이 받으셨다면,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아예 나머지 재산도 다 바쳐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복을 몇 배로 더 확실하게 받으실 것이지, 왜 남은 십 분의 구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꼭 쥐고 계시냐 하는 것입니다. 계산이 단순한 필자에게는 그 점이 언제나 큰 의문입니다.

반면에 감리교의 스승 웨슬리 목사님은 수입의 십 분의 구까지도 선교와 구제에 사용했고, 마지막에는 거의 빈손으로 생을 마치셨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꼭 그렇게까지 따라 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요즘 가식적인 귀족 목사님들의 분수를 모르는 처신과는 하도 수준 차이가 나서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돈이나 받고 복을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이 너무 부족하셔서 할 수 없이 미천한 인생들과 돈으로 거래하실까요.

돈을 바쳐야 사업이 잘되고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저속한 사상은 '맘몬의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성황당 미신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를 따라 나누고 돕고 고난받는 '제자 된 삶'이 아니라, 편함과 안일만을 따르는 '이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타락한 솔로몬 왕이 천 명의 처첩들을 거느리고 이방 신을 좇으며 호의호식한 것을 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돈이나 재물 그 자체는 축복의 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바치고도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도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리새인들보다 십일조와 기타 율법들을 더 잘 지킨 무리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큰 화를 입어 멸망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는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참혹한 오명을 얻었을 뿐입니다.

세속적 복에 명운을 건 한국교회

한국 보수 교단의 대표적 개혁 신학자이신 박윤선 목사님은 '교회는 십 분의 일이라는 숫자의 법령적 제재를 받지 않으며, 헌금의 수량 문제는 신자들 개인이 각기 정할 일이다'라고 하시며, 일찍이 '자발적'인 헌금의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한 국제신대 이승구 교수님도 '십일조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강요하거나 표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십일조와 연보의 참된 정신'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저 '복'이라는 사탕으로 유혹하며 돈만 거두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정신을 따라 나누고 섬기고 절제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모으고 쌓고 누리고 흥청대는 것이 복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계 교회사 어디에 헌금 종류가 무려 85가지나 되는 이상한 교회가 있었던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복' 비즈니스 덕분에 영세한 미자립 교회들은 급격히 위축되고, 중대형 교회들로 갈수록 돈과 사람이 넘칩니다. 이와 함께 목사들의 교만과 탐욕도 태산을 찌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몸소 져야 할 십자가는 단지 장식으로 만들고, 그저 '사람의 일'로 북적거리며 분주할 뿐입니다.  

거룩함과 순수함으로 위장한 대부분의 교회 프로그램들이나 행사들 역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갈급함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저 돈과 사람과 세력을 모으기 위한 삼류 이벤트로 전락하고 있으며, 겉으로 요란한 눈가림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아마 지구촌 어디에서도 한국교회보다 더 행사를 좋아하고 여기저기에 떠벌이는 교회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남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약하고, 실패하고, 가난하고, 낙심하고 그리고 병에 지친 사람들은 점차 구석으로 밀려나 조용히 소외를 당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복을 많이 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잘나고, 부유하고,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중요한 직분들도 이들이 대부분 다 차지합니다.

그런 이유로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가난한 장로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오늘날 세례 요한이 다시 와서 저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도, 아마 그 허름한 '약대 털' 옷 때문에 평생 서리집사 이상의 직분은 받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들은 그 초라한 옷이야말로 세례 요한에게 매우 소중한 큰 복이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세인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가난해서 지지리 고생하거나, 몸이 아파서 고통받는 삶은 모두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란 일반적으로 물질적이며 현세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서 세속적인 복이 무조건 필요가 없다거나 나쁘다고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을 추구하는 목적과 우선순위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본질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복이고, 애통하는 것이 복이고, 온유한 것이 복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이고, 마음이 청결한 것이 복이고, 화평케 하는 것이 복이고,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를 따른다는 신자들에게 이것보다도 더욱 크고 귀한 '다른 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어디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제일 좋은 복'이라는 저속한 논리가 끼어들 틈이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복채에 눈먼 무당처럼 더 이상 '복'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들이 전심으로 전하여야 할 복음은 '돈을 바쳐서, 복을 받아라'가 아니고, '마음을 다해서, 서로 사랑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길은 결코 푼돈으로 산 복권이 대박 난 것처럼 편리하고 안락한 길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걸을 수 없는 '무거운 길'임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 신자들은 이미 '신령한 복'을 넘치게 받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추가로 무슨 대단한 복이 더 필요해서, 허구한 날 '세속적인 복'을 노래하며 허탄한 일에 인생을 지나치게 소모해야 하는지요. 잘 먹던지 못 먹던지 또는 잘살든지 못살든지, 그에 관계없이 신자들은 이미 '충분히' 복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어떤 경우든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분위기를 조장하여 인위적으로 압박하거나 강요하는 헌금은 비성경적이며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바쳐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자 된 삶 그 자체가 바로 복입니다. 이제 옛 사람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면, 돈과 허세로 어두워진 세상과는 그래도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사랑으로 모여야지, 돈으로 모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돈이라는 음란한 우상을 내려놓고, '돈이 없어도 다닐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 운영을 위해서는 약간의 헌금 강요가 불가피하다거나, 또는 교회 재정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고 구차한 변명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헌금 강요나 다른 불의한 수단으로 돈을 걷어야만 운영할 수 있는 교회라면, 오히려 간판을 내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꼭 목회가 소명이라면, 차라리 자비량 사역을 각오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이 크거나 가진 자들만이 나서서 설치는 쇼 무대가 되기보다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가난한 형제들도 편안하게 동참하고 나눌 수 있는 '쉴만한 물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 주며 아무런 선입관과 차별이 없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와 사랑을 마음껏 공유하며 누릴 수 있는 '복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들의 모임이지, 의인들만을 모으는 수도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을 당하고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찌 돈이나 재물이나 세속적인 출세 따위가 감히 우리가 간직한 '하늘의 소망'과 '신령한 복'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것'을 복이라 하며 삶을 허비할 수 있을까요.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겔 13:7)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