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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9가지 핵심문제,네번째

by 디클레어 2011. 1. 15.

<계시록의 9가지 핵심문제>

 

네번째, 다시 예언하는 두 증인의 정체1.

 

두 증인의 등장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의 등장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두 증인이 요한계시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려면 이 두 증인과 연관된 다른 성경 구절을 찾아 볼 때 실감 있게 느낄 수 있다. 성 경 나타난 모양 연계된 사건

 

01.계 6:2 흰말의 등장 계 10:11, 11:3

02.계 6:11 순교자의 수효 계 11:7, 14:4

03.계 7:3-4 우리 하나님의 종들 계 11:10, 11:4-5

04.계 10:10-11 요한이 받은 예언의 사명 계 14:4, 11:3

05.계 11:7 순교자

06.계 11:10 두 선지자

07.계 11:12 첫째 부활자

08.계 12:5 여자가 낳은 아들 계 2:16-27, 17:14.

09.계 14:4-5 144000의 자격

10.계 17:14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자들

11.계 19:14 백마 타고 내려온 하늘의 군대 계 2:26-27, 17:14

12.계 20:4 첫째 부활자 계 6:9-11, 11:7. 히 11:36

 

이처럼 '두 증인'이 계시록 여러 곳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이 한가지 문제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해석은 요한계시록 전체에 대단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 원래는 없던 번호를 붙였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의 예시중 두증인과 관계가 있는 절은 02, 05, 06, 07, 10, 11, 12번입니다. 01은 예수그리스도요, 03은 십사만사천이요, 04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많은 성도요, 08도 예수그리스도요, 09도 말씀그대로 십사만사천입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부분이 있어서 한 가지를 잘못 해석하면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고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 네 번째 핵심문제에, 말씀하신 그런 일이 벌어져서 참 난감합니다.

 

① 개혁주의 신학의 견해 그러면 먼저 '두 증인'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보도록 한다. 그들은 '두 증인'을 하나님의 교회로 해석한다.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말론에서는 대개의 경우, 1260일을 신약 시대로 해석하는데 1260일간 예언의 사역을 하는 이들 '두 증인'을 신약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교회로 보는 이유는 이 같은 그들의 견해를 따르기 때문이다.

 

어떤 개혁주의신학자들이 그렇게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옳은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맥상으로 볼 때, 큰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된다. 두 증인이 증거 하는 복음의 내용은 사도 요한이 받아먹은 '작은 책'의 내용인데 이 작은 책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전하는 복음과는 다르다. 이 책을 받아먹은 사도 요한에게 내린 명령은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는 구절이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다시 예언'하는 내용의 복음이 아니다. 이들 두 증인의 다시 예언하는 사역은 인류의 종말에 등장하는 적 그리스도와의 전쟁으로 그들이 순교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건으로 인류의 종말에 있을 사건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예언하는 두 증인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요한에게 내린 명령이라고 하신 그 구절 말씀이, 말세에 두 증인들이 해야 할 사명이라고 주장을 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계시를 받는 그런 사명자는 지금도 없지만, 말세라고 하는 그 시점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증인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말씀대로 살며, 그 분의 신실한 약속을 믿는 일일 뿐 별다르게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특히 선교사명이라는 것을 꼭 해야만 한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야 할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장로급의 신앙자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 신앙자들을 선교에 내보는 것은 옳은 사역이라고 볼 수 없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餘談(여담)입니다만,

젊고 패기만만한 선교자들이 자신의 의지보다 앞서서, 또 뭔가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조급한 생각보다 앞서, 누굴 구원해보겠다는 욕심에 앞서서, 자신부터 말씀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나이 드신 사역의 은퇴자분들께서 말씀하시는것을 보면 젊은 날이 아니면 선교할 시간이 없다고 나이 어린 이들에게 선교를 강요하고 또 그 자리를 떠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무모한 도전자만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부적격 사명자를 배출하는 아주 좋지 않은 선례들을 남기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분들은 지금까지 그런 선교사들을 통해서 세계열방에 이렇게 빨리 주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신다면, 믿음위에 굳게 서있는 단 네 사람만 가지고도 동서남북 모든 땅, 모든 나라와 모든 고을에 주의 말씀을 전파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를 쓰셔서 각처에 교회를 세운 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시고자 하시면 능히 이루어 내실 분이라는 사실을 또한 깨달아야 할 것 입니다. 바른 사역자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있다면 그가 세운 한 사람이 또 수 많은 교회를 인도하고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어설픈 많은 사역자보다는 올바른 사역자 한명이 더욱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머릿수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시는 분들께서는, 지금까지 본인이 주를 위해 헌신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한 번 되돌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없으면 이루시지 못할 일들이었습니까, 그 일이 꼭 당신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마 본인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보고 그 약속에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얼핏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로 들릴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그렇게 준비된 성도를 찾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실려고 하신다면 아브람함과 모세앞에 나타나셨듯이 그리고 바울앞에 나타나셨듯이 그의 사역자로 세우시고 일을 맡기실 것이며 복음전파의 사역을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예언을 전하는 사역 기간에 불사신의 몸으로 활동하게 된다.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한다'고 했다. 교회가 복음의 원수들을 입의 불(말씀의 권능)로소멸한다면 이 세상은 1년도 못 가서 살인적인 복음의 불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고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원수들의 핍박 중에 복음을 전했다.

 

이들 두 증인이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한다'고 했는데 교회에는 그 어느 시대에도 이 같은 시대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 이 구절을 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 두 증인이 이런 異蹟(이적)을 보이는 것은 말씀하신대로 어느 시대,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므로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두증인인 교회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이적을 일으킨다고 하는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증인은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교회가 종국적으로 적 그리스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해석은 이해할 수 없다. 교회가 적 그리스도의 핍박을 받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은, 주의 날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지체되는 신부들과 함께 재림하셔서 이 땅에 주의 왕국을 세운다고 하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두증인의 죽음은 성도로서는 자랑스러운, 그러니까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지 않는 성도들이 받는 잠시 동안의 시련이고 고통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흘반후에 이들이 자신의 두 발로 일어나 주님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궁극적인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 두 증인이 죽은지 삼일 반만에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다시 살아나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이 사건을 교회가 부활 승천한다고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적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죽임을 당한 후 다시 살아나 승천한다는 이론은 성경 어디에도 그 근거가 없다. 그뿐 아니라 이 같은 사건 후에도 이 세상에는 인류의 역사가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부활 승천한다는 해석과 모순이 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이 두증인이 사흘반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다시 살아난다고 글을 쓰시고 계시면서 그런 이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이런 해석이 나오는 것은 교회(ecclesia)를 잘못 해석하고 계시기 때문일 겁니다. 교회는 어느 몇 사람이 이루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말세의 교회는 수억명이 됩니다. 그들 중에 몇 천만명이 죽었든 또 몇 억명이 죽었든 그들은 교회이고 성도이며, 또 살아 남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증인이며 또한 교회입니다. 특히나 순교성도들의 믿음은 적그리스도의 어떠한 위협이나 협박에 굴복함이 없이 목숨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켜낸 만큼 가장 값진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육체가 죽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 것쯤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내시면 그만이니까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과 영을 능히 죽이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영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② 세대주의 종말론의 경우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대개의 경우, 두 증인을 모세와 엘리야로 본다. 이들을 모세와 엘리야로 해석하는 이유는 세대주의에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사역이 마치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비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죽은 지 오랜 사람이 다시 살아나 세상에 온다는 것도 비 성경적이거니와 모세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적 그리스도의 손에 의하여 다시 한번 죽는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미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산에 나타난바 있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육신의 몸으로는 다시 세상에 올 수 없는 것이다.

 

엘리야의 경우는 어떤가? 엘리야는 죽지 아니한 몸으로 하늘로 이끌려 올려간 선지자이다. 그러면 그는 지금 어떤 몸을 가지고 하늘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에 있었던 몸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몸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엘리야도 모세와 함께 변화산에 내려왔을 때에 영광 중에 예수님 앞에 나타났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눅9:28-31). 엘리야는 하나님에 의해 하늘로 이끌려 올림을 받을 때, 변화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는 이 세상을 먼저 떠난 성도들의 모형으로 하늘에서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엘리야는 장차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가 영광 중에 살아갈 일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요 그림자가 되고 있다. 인류의 종말에 엘리야가 내려와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거니와 설령 엘리야가 내려온다고 해도 이미 영광의 몸을 가진 그가 어떻게 적 그리스도에 의해 순교를 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2. 두 증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두 증인에 대한 성경적인 분명한 해답을 얻으려면 두 증인의 등장 과정과 그의 활동 상을 면밀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

 

① 두 증인과 사도 요한 두 증인의 근원은 계10장에서 찾아야 한다. 두 증인은 계11:3절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증인은 사도 요한과 근본을 같이하고 있으며 두 증인이 전하는 예언은 실인즉 계10:11절에서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명령한 그 예언이기 때문에 11장의 해석에는 10장의 올바른 해석이 불가피하다.

 

두 증인의 근원은 계시록7장의 14만4천 이후에 나오는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서 온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정확한 의미의 14만4천은 이 두증인에 포함되어 있지만 특별히 선택받은 성도라고 보는 것이, 계시록12장의 한때와 두때와 반때의 여인이나 빌라델비아교회에 주신 약속으로 봤을 때, 더욱 합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이후는 같은 말의 반복이라 넘어갑니다.

 

ⓐ 계10:1절에 등장하는 힘센 다른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다시 예언하는 사명을 주는 명령권 자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의 모습으로 보아 예수님으로 볼 수 있다(구름을 입고 = 계1:7.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계4:3. 얼굴은 해 같고 = 계1:16. 발은 불기둥 같으며 = 계1:15.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 계5:1. 계6:1).

 

이 힘센천사를 예수그리스도로 보는 것에는 동의를 표합니다.

 

ⓑ 사도 요한이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가지라'는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계10:8). 이 명령은 두 증인에게 그들이 증거 할 '다시 예언할' 예언의 내용을 알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 사도 요한은 이 명령에 따라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두 증인이 다시 예언할 사명을 받기 위해 주님께 간구하는 모습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깨닫는 하나님의 종들(계11:10 = 선지자)은 이 같은 영광의 사명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게 되며 주님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나오는 이들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 쳐주심으로 예언의 사명을 주신다. 사도 요한이 달라고 할 때 갖다 먹어 버리라고 하는 말씀은 순교적인 사명자로서의 확실한 각오와 자세를의미한다. 두 증인들은 이 책을 먹었을 때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것인 줄 알게 된다. 달다는 말은 사명의 기쁨이요, 쓰다는 말은 순교의 쓰라림이다.

 

ⓓ 이 권세 있는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것은 곧 두 증인의 활동과 연결되며 계6:1-2절의 횐 말의 '이기고 또 이기려'하는 싸움의 출발의 신호이다. 두 증인들이 1260일간 예언하는 그 예언의 내용은 다시 예언하라고 명령하신 예언인데 이 예언은 곧 사도 요한이 받아먹은 펴 놓인 작은 책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의 예언은 일반적인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곱 인으로 봉함 된 책의 내용을 주님이 인을 떼심으로 펴시게 되었는데 바로 그 책의 내용으로 종말에 성취될 종말적인 사건의 예언의 말씀이다.

 

ⓔ 계11:1절에서 힘센 그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면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령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명령을 내린다. 여기서 '지팡이 같은 갈대'란 상품의 길이를 재는 잣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척량하는 잣대를 상징하며 두 증인이 다시 예언하는 예언의 사역을 의미한다. 이 두 증인의 예언의 사역이 신앙적 척량의 잣대가 되어 교회 안에서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를 갈라낸다.

 

위의 글들에 대한 반론은 먼저 올린 글들로 대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처녀비유중 문이 이미 닫혔다는 것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수가 이미 찼다는 의미로써 슬기로운다섯처녀와는 달리 이 남겨진 다섯처녀는 주님의 왕국에서 바깥어두운곳에 거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바깥 어두운 곳은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주의 백성들이 거하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나머지 땅들을 얘기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스가랴14장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이 상황은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고 예루살렘에는 주의 백성들이 거하고, 믿음에 올바르게 서지 못했거나 미지근한 믿음을 소유했던 자들은 바깥쪽에 거한다는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들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18절이나 19절에 애굽에 거한다고 하는 자들이 그런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중함과 경함이 있다고 늘상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비교적 경한 죄를 지었던 자들이 살아서 바깥어두운 곳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 계11:3절에 나오는 '두 증인'은 난데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계10장에서 '다시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는 분명 사도 요한이다. 그리고 계11:1절에서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하나님의 교회를 척량하라는 명령을 받은 대상도 사도 요한이다. 그러면 3절 이하에서 이 같은 예언의 사역을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두 증인은 누구인가? 그도 사도 요한인가? 물론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나 세대주의 신학자들이나 그 누구도 이 두 증인을 사도 요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이들은 사도 요한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이 두 증인의 사역은 사도 요한에 의해 실행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약 시대의 교회일 수도 없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힘 센 천사의 손에 있는 펴 놓인 작은 책을 받아먹은 하나님의 종들이 다시 예언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 같은 두 증인의 사역이 인류의 종말에 되어질 일임이 분명한 것은 그들이 사역을 마칠 때에 적 그리스도에 의해 순교를 당하기 때문이다.

 

이글에 대한 반론도 앞서 했으므로 넘어갑니다.

 

이들이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 작은 책의 내용이 회개에 관한 것임을 암시해 준다. 이것은 계7:14절과 마25:1-11절과 연관된 것이다.

 

ⓗ 이들이 예언하는 기간이 1260일로 나왔는데 이 1260일은 결코 신약 시대를 의미하는 상징적 기간이 아니다. 계12:6절의 1260일, 14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계13:5절의 마흔 두 달, 단7:25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단9:27절의 한 이레의 절반, 단12:7절의 한 때 두 때 반 때 등의 표현은 그 날수가 실제적이란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두 증인이 이 기간 동안 예언을 하고 난 후, 적 그리스도에 의해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이들이 순교를 당한 후에 적 그리스도에 의해 주도되는 둘째 화와 셋째 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두 증인이 예언하는 1260일은 한 이레의 전반부가 되는 전3년 반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모든 글들에 대해 한꺼번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미 앞에 적었던 것 들이라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전체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일단 11장의 두증인과 12장의 여인은 일천이백육십일동안의 동일한 날짜를 갖습니다. 그런데 이 일천이백육십일이 전삼년반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되면 계시록12장의 하늘의 전쟁이란 영적인 전쟁이 사라져 버려야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일천이백육십일과 한때와 두때와 반때사이에는 하늘에서 사탄과 미가엘의 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날짜들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가장 먼저 일천이백육십일(교회시대, 은혜시대) 그리고 한때와 두때와 반때(전삼년반), 마흔두달(후삼년반, 사흘반), 이 순서를 알지 못하셨기 때문에 일천이백육십일이 전삼년반으로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한때와 두때와 반때, 그리고 마흔두달은 분명히 그 날수가 실제적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일천이백육십일은 11장과 12장의 두증인과 여인이 같은 기간에 존재했음을 보고, 12장의 남자아이가 예수그리스도임을 파악했다면 이 기간이 교회시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다가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의 근간이 되는 계시록12장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② 두 증인과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 계11:4절에서 두 증인에 대한 해석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씀해 준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그 배경이 구약의 스가랴 서에 근거하고 있다.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을 발리운 자 둘을 의미하는데 스가랴 서에서는 이들을 여호수아와 스릅바벨로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전을 재건하는 일에 하나님의 신의 권능을 힘입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슥4:6).

 

그리고 두 촛대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해 주는 표현이다(계1:20). 그러면 이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들 두 증인은 성령의 권능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예언 사역을 하는 기간에 그들이 행한 이적적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실질적으로 성령의 권능을 받는 역사가 계7:3절에서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두 감람나무를 두 촛대와 연결시킨 것은 이들 두 증인(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교회 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144000이니'란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 증인이란 말의 둘이란 수효는 숫자적인 두 명을 의미해 주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들이 적 그리스도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에서 적 그리스도 한 명과 두 증인의 두 명과의 투쟁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님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증인의 활동 무대와 그들의 죽은 후의 시체의 위치로 보아 전세계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계11:7-9).

 

몇몇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두증인이 단 두명이 아니라고 보시는 것은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 또 계11:10절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두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다. 선지자란 말은 하나님의 종의 구약적인 표현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경종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예언했던 것처럼 이들 두 증인은 종말적인 심판을 전파할 사명을 받아 다시 예언하는 사명자로 선택을 받게 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1260일간 이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적인 사명자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선 글들로 대신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