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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숫자로푸는계시록

25. 계시록1장, 그 시작의 충만한 기쁨에 대하여,

by 디클레어 2011. 2. 11.

 

 

 25. 계시록1장, 그 시작의 충만한 기쁨에 대하여

 

 

 사실 계시록1장은 성도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나 아는 그런 글을 새삼스레 다시 나누는 것이 과연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여 해석이나 주석에 관한 것을 올리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나, 이제금 그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어 성도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이 글에 대한 해석을 작성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의 충만함, 그리고 그 신실한 약속들이 성도여러분께 완전히 전달되어 그 복된 소식에 다시 한 번 환희하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 계시록1장에 대해 나눠볼까 한다.

 

계시록은 가리워져 있는 글이다. 이 말이 간직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자 외에는 그 뜻을 정확히 분별해 내는 것이 쉽지 않다, 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도해 보지도 않고 덮어 놓고 보지 않는다면 더욱 더 계시록은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해가 안 되고 어렵더라도 계속 보며 기도하고 열어주시기를 간구한다면 혹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보여주실런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시며 죄인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것을 기뻐하시니 혹시라도 그 맘을 돌이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실 런지 누가 알 수 있겠느냐는 얘기이다.

 

(12) ○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이제라도 너희는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며 내게로 돌이키라.

(13)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이는 그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매우 친절하시며, 돌이키시어 재앙을 주시지 아니하심이라.

(14) 그가 돌이키시고 마음을 돌리시며 그의 뒤에 복을 남겨 두시어, 주 너희 하나님께 음식제사와 술붓는 제사를 드리게 하실지 누가 알겠느냐?-요엘2장

 

하나님의 말씀 특히 계시록은 처음 보는 순간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글이 아니다. 그런 종들도 혹여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대부분은 보고 또 보고, 묵상하고 상고하여 어렵게 어렵게 하나씩 둘씩 깨우쳐 나가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된다고 덮어 버리고 보지 않는 것 보다, 어렵지만 하나라도 알아 나가려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자가 바로 택함을 받은 자도 될 수 있는 것이고, 더욱 더 하나님 앞에 잃어버렸던 양으로 되찾는바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결국 생명책에 錄名(녹명)되어 더욱 높은 상급을 기대하는, 그야말로 잃어버릴 수 없는 구원을 소유한 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성도님들은 이 해석집을 보는 순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주의 성도님들이시기를 간절히 빌며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1)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 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에게 주신 것이요, 그의 천사를 그의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니라.

 

이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을 통해 이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사, 그의 종들이 보고 깨달으라고 이 기록을 남겨 두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모른다고 마냥 덮어둘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깨달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기쁜 소식을 발견해 내야만 하는 것이겠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도에게 주신 그 말씀들이 비유와 상징들로 충만해 있어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고, 풀이해 놓은 것들마저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고백하지만 본인의 경우에도 최근에 이르러서야 겨우 다시 계시록을 펴들만큼 어렵고 난해한 글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단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표현방식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는 방법중에 하나가 그 동안에 말씀하신 비유에 대한 의미와 그 구절들을 연구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과거 구약성서에 나온 글들도 같이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행하심과 말씀하심을 보며 그 분의 마음을 알아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性品(성품)을 알아낸다는 것이 傲慢放恣(오만방자) 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자면 그 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시며, 악인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돌이키길 바라시며, 外貌(외모)보다는 中心(중심)을 보시고, 악인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을 참으시나, 그 노를 발하실 때에는 영혼을 불 못에 던져 버리시고 영영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수도 있는 嚴威(엄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 분은 공의로우시고, 공정한 판결을 하는 자를 칭찬하시며, 과부와 어린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분의 나라를 찾고 원하는 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택한 자들을 위해 그들이 거해야 할 처소, 즉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성을 스스로 직접 지으신 분이시기도 하다. 세상 어떤 주인이 종을 위해 집을 짓는가, 세상 어떤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기고 그에게 수종들겠는가, 세상 어떤 주인이 종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준단 말인가, 이렇듯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의 계획은 택하신 의로운 자들을 위한 것이지 악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님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악한 자들도 정한 때에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악인들의 쓰임도 궁극에는 모두 성도를 위한 것임도 물론이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거기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 때가 가까움이니라.

 

이 예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거기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과거 이스라엘의 회당에서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성도들은 그것에 대한 토론과 풀이를 듣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나눴다. 바로 그것처럼, 해석은 비록 올바로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 기록의 말씀을 듣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복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본인도 무슨 뜻인지 몰랐을 때에는 무섭기만 했었지, 이 기록이 이렇듯 기쁜 말씀일 줄은 몰랐다. 지금도 주위에 계신 분들과 얘기를 해보면 어렵다며 계시록에 대해 아예 손을 놓고 있는 분들도 본다. 그러나 몰라도 봐야 한다. 이 해석이 옳게 보이시던 그르게 보이시던 상관없이 손에 잡으셨으니 일단 끝까지 가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고, 또 결국에 진실을 발견 하실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일곱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은 아버지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며, 그의 보좌앞에 일곱 영은 성령님을 지칭한다. 그리고...

 

(5) 신실한 증인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첫째로 나시고,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기시고

(6) 하나님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신 그 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거다. 三位一體(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그 동안에 들었던 알고 있는 선상에서 이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끔 樣態(양태)론이나 三位一神(삼위일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렇게 알고 있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행위로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정상참작을 받을 것이다.

 

(7)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시리니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그대로 되리로다. 아멘.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고, 곧 대지진으로 회복된 땅위에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의 내려오심을 볼 것이다. 그것은 믿는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공통적으로 맞게 될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는 기록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어려웠던 대 환란을 견뎌낸 성도들에게는 기쁨의 시간이 될 것이며, 기독교를 否定(부정)하거나 敬遠(경원)했던 자들에게는 쓰라린 후회의 날이 될 것이다.

 

(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주, 곧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분이 말하노라.

 

다시 한 번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하나님되심을 확증적으로 말씀하시는 거다.

 

(9) 너희의 형제이며 환란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하여 팟모라고 하는 섬에 있었느니라.

(10)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으며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내 뒤에서 들었는데

 

여기 나온 주의 날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오신 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일이라고 주장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것은 당시의 성도들이 주께서 부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주의 날에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을 보여주며, 성경의 기록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행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전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그리고 또 한 가지, 혹시 구약의 안식일을 지금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2)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세자에게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를 거역함이니, 거역하는 그들은 스스로 저주를 받게 되리라.-로마서13장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일요일만을 쉬는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풀이가 가능하겠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세상의 권력에 순응해 나가는 것도 지혜요, 하나님의 명하신바 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25)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시더라.

-누가복음20장

 

바로 이 말씀이 가진 의미 또한 성도들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권력이나 법률에 형식적으로라도 순응해야 한다, 라는 것이며, 더불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라는 것임을 알고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보다 세상권력을 위에 놓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임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 행위에 있어서 구별되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軍隊(군대)에 가지 않으려 하거나, 수혈등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성도들은 나라의 부름에 응답해야하고 법에 順應(순응)하며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복 받은 일인가는 두 말하면 잔소리다.

 

(11)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스머나와 퍼가모와 두아티라와 사데와 필라델피아와 라오디케아에 보내라."하시더라.

 

이 일곱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앞선 4절에서 알아본 바와 같다.

 

(12) 나에게 말씀하신 그 음성을 보려고 돌아서니 일곱 금촛대가 보이더라.

 

촛대는 교회이며 그러므로 일곱 금 촛대는 세상의 모든 敎會(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13) 그 일곱 촛대 사이로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발까지 닿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으로 만든 띠를 둘렀더라.

 

일곱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은 성경의 이 구절을 충족한다.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18장

 

이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 바로 敎會(교회)이고 그 교회중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교회를 주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이다.

 

(14)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눈처럼 희어서 양모처럼 하얗고,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

(15)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졌고 또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이 나오며,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해 계시록8장의 네 번째 나팔의 상징을 해석하였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17) 내가 그를 보자 죽은 것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려지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나에게 말씀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

 

항상 주님은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대하셨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들어 갈 때도, 즉시 그 분의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건져 내셨고, 다니엘도 그의 앞에 엎드러져 기운이 빠져 잠들어 버리자 그의 몸에 손을 대사 용기를 일으켜 세우시고, 이 요한에게도 그가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자 오른손을 얹고 말씀 하시는 등, 직접 당신의 손을 내밀어 위로하시는 그 자비하심과 인자하심 말이다. 그 분의 본질은 사랑이시요 겸손이시며 인자하기가 끝이 없으신 분인 것이다. 이런 분이 우리의 왕이 되시며 주가 되시는 분인 거다.

 

(18)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졌노라.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들과 현재 있는 일들과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라.

 

계시록의 기록이 1장부터 3장까지, 특히 일곱 교회까지는 네가 본 것들이고, 4장 이후부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록한 것이다, 라고 몇몇 학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해석 한다. 그리고 또 6장봉인 재앙부터의 상징이 7년 동안에 모두 벌어지는 환란이라고 풀이를 한다. 만일에 그렇다면, 즉 앞으로 될 일이 7년 환란 기간만이라면, 中世時代(중세시대)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 시대의 역사들은 하나님께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라는 결과를 도출하게 되는 것이겠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장해 나가시는데 말세의 그 짧은 한이레동안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얘기인가, 그렇게 계시록은 쓰여 졌는가, 말이 되는가, 세상에 그런 해석이 어디 있는가, 처음과 끝이시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처음하고 끝만 주장하시는 걸로 믿는 그 황당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그런 해석을 듣는 순간 이건 아니다. 라는 느낌이 確固(확고)하게 들던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더군다나 그것을 전파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런 해석을 듣는 사람들도 그 해석을 진리라고 믿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제위께서는 남자 일천명중에 한명을 발견했다고 하는 솔로몬의 전도서7장의 그 말이 무슨 뜻임을 알고 계시는가 모르겠다.

 

(28) 그러나 그것은 내 혼이 찾으나 얻지 못한 것이니, 내가 일천 명의 남자 중에서는 한 명을 얻어냈지만 모든 여자 중에서는 한 명도 얻지 못했느니라.-전도서7장

 

이 구절에 나오는 일천 명의 남자는 肉的(육적)인 자를 얘기하는 것이고, 그 천 명 중에 한명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거나 받을 수 있는 靈的(영적)인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남자들 중에서도 많지 않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지혜롭다고 여기실 수 있는 자는 보기도 어렵고 찾기도 어렵다는 것이 되겠다. 아무리 얘기를 하고 설명을 해도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계시록의 14만4천이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혹시 그런 사람들이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성경해석을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것은 결국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선생이라 불리지 말라, 라고 하셨는가 보다. 잘못 가르치는 자들의 받을 형벌은 꽤나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차라리 자신이 보이는 바대로 믿는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겠으나, 잘못된 이해를 가진 그런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다가 그를 실족케 하면 그의 받을 刑罰(형벌)이 혹독하니 주의하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니,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성경말씀은 討論(토론)으로 나누는 것이고, 서로 의견이 다르면 調律(조율)하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해 나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며, 역할인 것이다. 지금처럼 한사람에 의한 일방적인 설교나 가르침은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혹여 잘못 가르치는 자들에게 처참한 형벌을 안기게 될 것이고, 또 잘못 해석된 그것을 듣는 자들을 失足(실족)케 할 수 있는 危險性(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니 극도로 자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현실세계에선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없을 것임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聖徒(성도)들중에 아무쪼록 敎會(교회)에 관한 정의를 church가 아닌 ecclesia로 보는 분들이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구한다.

 

⁂church [tʃəːrtʃ] n.

(보통 기독교의) 교회(당), 성당. 영국에서는 국교의 교회당을 말함.

 

ecclesia [iklíːʒiə,-ziə] n. (pl. -siae [-ziìː])

고대 아테네의 시민 회의; 기독교. (교회의) 회중(會衆), 성도의 모임

 

(20) 네가 본 것은 나의 오른손 위의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의 신비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

 

개역성경에서는 이 별을 使者(사자)라고 번역을 했고, 마치 교회의 牧師(목사)가 그 교회의 천사인 것 마냥, 성도들을 糊塗(호도)했다. 계시록을 해석하는 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개역성경은 운율은 훌륭하지만 참으로 몹쓸 번역으로 보인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도 아직 개역성경만을 보시거나 개역개정을 보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글 킹제임스성경과 같이 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완벽한 번역이어서가 아니라, 그나마 개역보다는 이해도 쉽고, 삭제된 부분도 없고 해서 말씀전체를 이해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한때는 본인도 성경하나 온전히 보존 못하시면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믿는 때가 있었다. 그것이 어떤 성경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자의 誤解(오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감동했다고 할까, 그것을 계기로 더욱 더 그 분을 사랑하는 始發點(시발점)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분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일곱 교회는 하나님의 완전한 수인 일곱에다 교회이니 세상의 모든 교회를 가리킴은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택한 자들을 깨우시기 위해 일하시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은 항상 지금이 다섯 번째 나팔시대로 생각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 종이 주인이 늦게 올 걸로 알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 닥친 주인 때문에 책망을 받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쫒긴 것을 알고 있으시다면,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차라리 마음편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욥도 사탄에게 試鍊(시련)을 당하기 전에도 항상 그 마음이 편하지 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한다.

 

(25) 이는 내가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내게 임하였고 내가 무서워하는 것이 내게 임하였음이라.

(26) 나는 안전한 가운데  있지 않았고, 휴식도 가지지 않았고, 편안치 않았는데도 고난이 임했도다." 하더라. -욥기3장

 

주의 택한 자들은 이렇듯 항상 이 세상에서 安寧(안녕)을 구하기보다 스스로 추스르고 가다듬고, 혹시라도 하나님앞에 범죄하지 않았는지, 죄 가운데 있지 않는지 돌아보며 온전하고 거룩함에 거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겉으로는 그 모습이 아무리 자유롭고 편안해 보일 지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시니, 어찌 한 시라도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그 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분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한다. 아니 그 분의 사랑을 너무 흠모하기에 스스로 자신을 강제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다. 그 분을 사랑하고 또 그 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다. 그것을 알고 깨달아 나가시는 성도님들이길 바라며 이상 1장 강해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