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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성경교제관련

믿음과 행위

by 디클레어 2012. 7. 17.

믿음보다 행위가 우선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중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이만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17장


이 말씀에 대입해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겨자씨만한 믿음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겨자씨의 크기는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깨알만한 것도 있고 그보다 작은 것도 있다. 그런데 주님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의 믿음이 그 겨자씨 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열 두 제자들과 비교해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 혹시 제자들을 뛰어넘는 그런 수준일까?   많이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믿어 왔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윗 구절 말씀을 해석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겨자씨 만큼이건 아니건 있고 없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고, 또 산을 옮기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며 사실은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애써 축소시키려고 한다. 그 학자는 듣고 해석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만약에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리킨다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다면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것이요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들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통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믿는다고 자고(自高)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맹랑한 일인가를 가르쳐 주시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다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자. 믿음은 구원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런 사람들중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확실하다고 하는 이들이 가지고 오는 말씀중에 대표적인 구절이다.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사도행전16장


여기서부터 생각해 보자. 초기에는 당연히 믿어야 할 주체가 있어야 하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해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보려면 그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 성경전체의 기준에 대입하고 비교하면서 살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몇 구절 혹은 몇 장만 가지고 읽고 이해하고 끝내버린다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간에도 다툼이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믿음이란 행위를 동반한 믿음이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자는 바울처럼 믿음을 강조한다. 어쩌면 그와 다르게 믿음 소망 사랑중에서 가장 큰 것이 믿음이라고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보다 사랑을 더 강조한다. 그러므로 필자가 강조하는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믿음을 얘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성경전체로 봤을 때 거부감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분을 믿고 있다고,  더군다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따라서 그런 선상에서 사도바울의 글도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의 서신 모두를 옮기기는 버겁고 추려서 살펴보도록 하자.


(17) 이 복음 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으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1장


자고로 믿음이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그 분께서 만유의 하나님, 곧 절대주이심을 드러내는 구절말씀이다.


(27) 그러므로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에 의해서니라.

(28)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


율법보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 그러나 결론적인 31절을 보면,


(31)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3장


그는 사랑의 행위뿐 아니라 율법도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는 로마서4장,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게 되었다면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

(5)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 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

(22) 그러므로 그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니라.-로마서4장


이 구절과 상대되는 말씀,


(21)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그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22) 믿음이 어떻게 그 행함과 더불어 작용하였으며,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음을 네가 보느냐? -야고보서2장


그러므로 이 구절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믿음은 어떠한 이방신들도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창조주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가 말하는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것으로 이해하면 성경전체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하던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렀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라.-로마서9장


역시 신은 한 분 하나님밖에 계시지 않음을 알리고 그 분만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 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1)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이를 행하는 사람은 그 안에 살리라."고 하였느니라.

....

(21) 그렇다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르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율법이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주어진 것이었다면 진실로 의도 율법에 의하여 되었을 것이라.

(22)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 있다고 단정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려는 것이라.

(23)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서 감시를 받았으며, 나중에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갇혀 있었느니라.

(24) 그리하여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선생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더 이상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3장


바울당시에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다. 물론 호흡이 없는 신들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가운데에서 바울은 진짜 신인 하나님을 전해야만 했다. 호흡이 없는 신을 믿는 이방인들이 바울은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그래서 강조하는 것이다.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말이다. 따라서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을 전하는 역할을 한 것이고 여타 다른 모든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재에 곡해되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믿음은 구원의 한 방편(方便) 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런 불충분한 믿음으로는 하나님앞에서 인정받기 극히 어렵다는 얘기이며 구원 또한 요원하다는 것이다. 초기에 이방인들에게 전파된 “믿음으로” 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고 그 하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도 더불어 선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믿음을 강조했던 바울은 후에 행위가 없는 자들에게는 믿음이라는 단어조차도 붙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일 뿐이고 오히려 가증한 자라고 증언한다.


(16)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나니, 가증한 자요, 불순종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들을 배척하는 자들이라.-디도서1장


이렇게 해석을 해야 성경전체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려는 의지와 사랑의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이 과연 믿음이겠는가 말이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2장


요사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양심에 의거한 판단을 하지 않으며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도덕심과 양심, 윤리의식을 저버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그러므로 그 믿음으로 인해 의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자신은 의인이고 그 의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안도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자들일 뿐 믿는 이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는다고 하면서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런 굽은 판결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결코 공의롭지 않은 판단이나 행위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너희가 언제까지 불공평하게 판단하며 언제까지 악인들의 낯을 용납하겠느냐? 셀라.

(3) 가난한 자와 아비 없는 자를 보호하고 고난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라.

(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해 내고 그들을 악인들의 손에서 풀어 주라. -시편82편


(28) 그들은 살찌고 윤택하도다. 정녕, 그들은 악인의 행실들을 눈감아 주며, 그들은 송사, 곧 아비 없는 자들의 송사를 판단하지 아니하는데도 그들은 번영을 누리며, 또 그들은 궁핍한 사람들의 권익을 판단하지 아니하는도다.

(29)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 일들을 감찰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마음이 이같은 민족에 복수하지 아니하겠느냐? -예레미야5장


목사라고 하고 장로라고 하며 집사라고 하고 권사라고도 하며 스스로 자고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은 외로우시기에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러므로 나처럼 천하보다 귀한 사람은 버리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위인들, 또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어떤 악한 행위를 해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전체를 통해 말씀하시나니 행위가 올바르지 않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보다 훨씬 엄격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13) ○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모든 의무니

(14) 이는 하나님께서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임이라.

-전도서12장


하나님께서는 그 분을 아는 자이건 모르는 자이건 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자이건 이슬람을 믿건 불교를 믿건 힌두교를 믿건 지방신을 믿건 간에 상관없이 오로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물론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두려워하여 그 분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 심판을 면할 수 있다. 그런 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릴 것이며, 하나님앞에 그 죄를 가리운 자들이다.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32편


모든 사람은 죄를 짓는다. 그리고 죄를 지은 모든 사람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행위를 포함하여 온전히 믿은 자들은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니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릴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차이점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옳고 그른 행위에 상관없이 무조건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면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믿음에 의한 심판이 아니고 각 사람의 행위로 인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12) 오 주여, 자비도 주께 속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각자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시편62편


단순히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아무리 행위가 온전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不知其數)다. 그동안 저의 글을 보신 분들은 이 두 가지 다 틀렸다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이처럼 말씀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의 종으로 매여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명제로 인해 고민한 번 해보지 않으신 분들이 있는가? 그럼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 이들에게 이 글은 그저 흩어 지나가는 바람과 같을 것이다.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0장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행위가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따라서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도 아니다. 비유의 결론은 이렇다. 불쌍한 자를 돌아 본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심판때에 그 자비를 베푼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며 칭찬도 받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고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그 행위가 없었던 레위인과 제사장은 가증한 자들로써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39) ○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으니, 이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니라.

(40) 주와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 몇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주께 말하기를 "우리도 소경이란 말인가?"라고 하니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소경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나 이제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다.'고 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고 하시니라.-요한복음9장


이 말씀의 뜻은 이런 뜻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하나님을 안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냥 남아 있느니라.”

역시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훨씬 가벼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결론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행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니 상관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하나님을 전해야만 한다. 엉뚱한 전도는 하지 않음만 못하니 도리어 신폐(神弊)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잘못된 복음전파는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앞선 글들에서도 말했지만 사랑의 하나님을 전도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것이라고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전했을 때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직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에 맞춰 살라고 종용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그 양심에 맞춰 올바르게 산다면 좁은 문이신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오,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생명을 소유하신 그 분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