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약의 복 vs 신약의 복
그렇다면 복의 특징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왜 이런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일까? 왜 구약의 복이 주로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인 반면, 신약에서는 복의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근본적 답변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특징지운 종교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종교가 주로 인간의 표면에 치중하는바 형식적이고 외양적인 것이었다면, 신약에 와서는 종교의 핵심이 인간의 중심에 초점을 맞춘 신령하고 내면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물론 구약은 표면적·형식적일 뿐이고 신약은 내면적·영적이기만 하다는 식으로 대조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이 두 면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전자에 신약은 후자에 착념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내면적 차원, 곧 '마음'에 대한 강조는 이미 구약 시절부터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인간 내면의 심층적 변화를 미래의 어느 시점, 곧 새 언약의 시대에서 찾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을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1~33)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갖는 근본적 제약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바울 사도 역시 복음 사역의 차이점을 구약 시대와 대조시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3)
바로 이 시점에서 필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의미 구조의 문제를 도입하고자 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적 주제는 그 의미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용'은 어떤 주제가 속에 담고 있는 영적·내면적 알맹이 혹은 정수(精髓)이고, '형식'은 그러한 주제의 의미를 실제로 발현시키는 가시적·외형적 얼개나 틀을 말한다. 그리하여 구약 시대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요소가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고, 또 내용은 반드시 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복'의 의미에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이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의[내용]는 반드시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물질적 은택(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을 한껏 누렸고, 그렇게 향유하는 물질적 은택은 그가 하나님의 선의를 누리고 있다는 표시가 되었다.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신적 작동 원리였다.
그러나 신약으로 오면서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 사이의 이와 같은 긴밀한 연접 현상은 종지부를 찍는다. 오히려 신약 시대에는 내용(하나님의 선의)만이 극명히 드러나고, 형식(물질적 은택)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약은 신앙의 자태에 있어 내면과 영적 실상을 현저히 드러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형식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내용의 노정을 유도하는 긴밀한 수단이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를 충만히 누리면서도 물질적 은택은 전혀 향유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가 하면, 물질적 은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의와는 거리가 한 없이 먼 삶의 모습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먼저, 하나님의 선의를 심령으로 충만히 누리면서도 외적 번영 조건이 결여된 경우부터 살펴보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0~12)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4)
또 물질적 은택은 상당한 정도로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선의(곧 구원의 은택 및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많이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1)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약 5:5)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노라.” (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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