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경적 근거 없는 ‘삼박자 구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상기 성구는 형통 신학을 토착화한 신토불이 용어 ‘삼박자 구원’의 근거 구절이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경우 '영혼이 잘 되는 것'(영적 성숙)은 필연적으로 '범사에 잘 되는 것'(경제적·사업상 번영) 그리고 '강건한 것'(신체적 건강)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항목으로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요삼 1:2의 내용을 잘못 나누었다. 이 구절은 흔히 생각하듯 세 부분이 아니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영혼이 잘 됨”이 한 부분이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이 또 한 부분이다. 또 삼박자 구원에서는 후반부의 내용과 관련해 “범사에 잘 되고”와 “강건함”을 별도의 사항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정당한 처사가 아니다. 오히려 “잘 되고”와 “강건함”은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
둘째, 본문에 대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조금 전에 설명했듯 “잘 되고”와 “강건함”이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면, 이 부분으로부터 경제적·사업상 번영과 신체적 건강이라는 별도의 두 내용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범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전반을 지칭하는 단어이지, 꼭 경제적이거나 사업상 번영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또 “잘 되고”와 “강건함” 역시 각각 물질적 번영과 신체적 건강으로 대별해서 이해하기보다는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중복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은 마땅히 “신앙생활의 전반적 면모가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에 있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삼박자 구원은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의 전형적 예이다. 만의 하나 이 내용들이 삼박자 구원의 주창자가 주장하는 대로라고(즉 필자의 첫째와 둘째 비판이 틀렸다고)해도, 이 구절에서 “삼박자 구원”의 교리를 도출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아다시피 이 구절은 가이오라는 개인(요삼 1:1)에 대한 간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게 되기를 바란다”[간원]와 “~해야 한다”[당위]나 “반드시 ~하게 된다”[필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논리적 간극이 존재한다. 이처럼 요한삼서 1장 2절은 그저 '바람'의 차원이기 때문에 삼박자 구원이 요구하는 당위나 필연의 차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유행하는 '삼박자 구원'은 실상 성경적 근거가 결여된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기복신앙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 이러한 신앙의 경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 폐해는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에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삼위 하나님께서 그리도 중요시하시는 구원의 복(특히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이 복을 주시고자 하셨는데)을 값싸게 여기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구원의 복을 등한시하면 이와 긴밀히 연관된 여타의 신앙적 면모들(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 고난 중 즐거워함,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감)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현저히 약화되고 급기야 자취를 감추게 된다.
본질적인 복은 '구원의 복'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복을 마다하면 곧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항목들(주로 경제적 번영, 세상에서의 성공, 사업의 번창, 안락한 삶 등의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 은택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cf. 약 1:17) 그러나 이것들은 복의 핵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이런 것에 마음 뺏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처럼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또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런 신앙의 패턴에 노출될 때, 우리는 탐심의 노예가 되며 이 세상 신이 군림하는 신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 왕국의 건설에 분주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기에 바쁠 것이다.
기복신앙 극복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이 비극적이고 비참한 개인적·공동체적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경적 개혁의 기치를 들 수 있을 것인가?
첫째, 복과 관련하여 올바른 성경 해석과 적용이 있도록 줄기차게 가르치고 순종의 마음으로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한다.
둘째, 배우고 이해한 참된 복의 내용이 실제로 우리의 심령에 내면화되도록 힘써야 한다. 구원의 복이 의미하는 신앙 내용(하나님의 자녀됨, 영생, 하나님을 앎, 성령님의 내주,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음, 주님과 친밀히 사귐 등)으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에 변화가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복의 문제와 관련하여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회개하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참된 복의 내용을 배우고 내면화했다 할지라도 실제 삶의 상황에 들어가서는 시험을 받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빈번하다. 그때마다 그 속에 질펀히 앉아 있지 말고 즉각 회개하고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방침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해당되지만, 특히 신앙의 공동체 내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그들의 가르침과 모범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복신앙,
그 내력과 연조가 워낙 깊어진 바람에 극복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좌시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 극복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요는 우리 각 개인(특히 지도자)과 공동체에 수시로 각성의 계기가 마련되느냐 하는 것과 이 거대한 내면의 적에 대해 지속적으로 투쟁의 의지를 발휘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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