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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오직 믿음은 없다! 이효삼(에임스한인연합감리교회) Not only But also

by 디클레어 2010. 2. 7.


오직 믿음은 없다!

이효삼(에임스한인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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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성경을 100% 믿는다고 말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있다! (요한계시록 22:18-19)


정말 성경을 온전히 그대로 믿어왔는지 확인해 봅시다.

성경을 100% 믿는다고 말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온전히 믿고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성경을 읽는데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 구절들을 그대로 보고 믿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문자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예수는 없다>의 오강남교수는 문자주의자에는 진보적 문자주의가 있고, 보수적 문자주의가 있다고 말하면서 양쪽 문자주의자에 대해 충고를 줍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문자로부터 읽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이상의 생각이나 사고를 가질 수 가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저는 숲을 보고 나무를 보는 또 나무를 보면 숲을 보는 온전한 문자주의자가 되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둘째, 성경을 2문서설, 4문서설, Q문서설 하면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성경을 더 잘 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독자들은 신학교를 가서 성경을 배워야 제대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그렇게 까지 안해도 성경에는 다 짝이 있다는 생각이나 관주 성경을 보아도 충분히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셋째, 이제 성경의 행을 보지 말고 행간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의 시대는 갔고, 행간의 시대입니다. 어떤 이는 행간만을 봐야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행간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행을 온전히 보면 행간이 온전히 보인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이 성경공부는 행을 온전히 보았는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저는 행을 모르면서 행간을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고, 또 한 행에 치우쳐 다른 행들과 행간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행을 온전히 보게 되면, 문자주의자를 벗어나야 볼 수 있는 그 내용과 사상과 의미도 행과 행간에 있음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성경을 온전히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확인해 봅시다. 정말 그렇게 보고 믿어 왔는지 확인해 보자구요.

우선 다음 성경을 믿는데 있어 기본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기준 서너 가지를 열거하겠습니다.

이 중에 걸리는 사람은 성경을 온전히 보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아니면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산상수훈의 첫부분을 보고 말하는 팔복선언이라는 단어입니다. 굳이 숫자로 따지자면, 아무리 봐도 “구복선언”인데 사람들은 팔복이라 해서 너무나 오랫동안 나머지 한가지 복을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해 왔습니다.

성경(마태복음 5:3-12)에 보면 모두 아홉 가지의 “복이 있나니”하며 행복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물론 앞의 여덟 행복한 사람들은 3인칭으로 쓰고 마지막 하나의 행복한 사람들은 2인칭으로 썼지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도 역시 축복선언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을 보면 모두 9개의 “Blessed are...”입니다. 기독교는 핍박으로부터 일어난 종교인데 우리는 이 마지막 9번째 부분을 우리의 사고 속에서 멀어져 가도록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성경은 팔복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도 Eight Blessings (팔복)라고 칭하지 않고, Beatitude (행복선언)이라 부릅니다.

둘째는 대부분의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바울이 “항상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세 가지로 말했다면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바울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하면서 항상 해야 할 것의 첫 번째로서 항상 선을 좇으라 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교리라는 눈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항상 선을 좇으라”는 바울의 말씀을 한국기독교는 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믿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닌가요?

셋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린 좌우에는 강도들도 달렸는데 우편 강도는 구원받고 좌편 강도는 구원받지 못했으니 우리는 우익이 되고 좌익이 되지 말아야 한다 라는 설교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어느 구절에도 우편이란 말이 없습니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지요.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서, 우편을 선호하는 당시 환경에서 우편 강도라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구원받은 강도가 좌편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공평합니다. 좌우편 어디를 지정하지 않고 “행악자 중의 하나가”(누가복음 23:39-43)라고 썼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세가 홍해 바다 앞에서 지팡이를 바다 위로 들었더니 금방 쫙 하며 갈라졌더라 라는 주일학교에서와 같이 재미있게 듣는 풍문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출 15:2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다” 라는 풍문으로 굳어진 생각으로 성경을 이해해선 안 됩니다.

다섯째, 이 공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바울서신에서 “오직 믿음으로”라고들 보시는데, 성경에 “오직”이란 단어는 없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면, 가히 충격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기본적인 시각 중 하나에서 이미 잘못 알았다면 그것이 곧 한국 기독교의 현실임을 직시해서 이 책의 주제와 문제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정말로 성경을 온전히 믿고 살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시각에서 합격한 분은 다음을 테스트해 보면서 성경을 온전히 믿기를 더욱 바라 마지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 사고에 중심을 이루는 것들 중에서 잘못 알았던 것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밑줄 친 성경구절들(요 3:16; 5:24 등)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은 보는 시각이 바로잡혀져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고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한국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기독교를 변화시키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 내가 이책의 에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19)

<테스트> (* 지금 테스트를 해보고, 이 책을 다 읽으셨으면 다시 한번 질문에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 1. 먼저 당신은 성경전체를 보고 믿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좋아하는 성경을 보고 나머지를 믿습니까?

전체를 믿는다( ) 좋아하는 성경 중심으로 믿는다( )

* 2. 당신은 전통적인 교리로서 구원론, 영생론, 천국론, 칭의론을 갖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통해서만 갖습니까?

교리 ( ) 성서 ( ) 교리 + 성서 등 ( )

* 3. 만일에 성서에서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택한다 ( )

따로 따로 생각한다 ( )

연결해서 일치하도록 생각한다 ( )

< 믿음에 관하여 >

1.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믿습니까? (답: 엡 2:8 등)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2. 그렇다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믿습니까? (답: 특히 복음서에서 많이)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3. 한글개역성경은 “오직 믿음”이라고 번역했는데 헬라어원문과 영어 독일어 등 다른 나라 성경에는 “오직” 이란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답: 헬라어와 다른 언어 성경을 보시오)

전 S 신학교 조직신학교수님: 그래요???

현 I 신학교 헬라어교수님: 그래요???

모교단 교육국에서 15년 교재출판한 목사님: 그래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렇다 ( ) 그렇지 않다( )

4. 가장 믿음을 강조했다고 하는 사도 바울도 사랑이 제일이다 했고 믿음과 사랑을 일치시켰으며 또 동등하게 배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답: 성구대사전에서 찾아보시오)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하나님의 자녀됨에 관하여>

5. 당신은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을 믿습니까?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6. 그렇다면 그 말씀 이전에 마태 5:9에서,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씀도 믿습니까?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7. 그렇다면 마태 5:44-45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도 믿습니까?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 영생에 관하여 >

8. 당신은 요한복음 5:24절에서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9. 그러면 바로 아래 요한복음 5:29절에서 선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들어가리라고 말한 말씀을 믿습니까? (답: 5:29)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0. 그리고 그 요한이 전하는 “형제를 사랑해야 영생에 거한다”는 성경본문들도 믿습니까? (답: 요한일서 3:14-16 등, 특히 요한 5:24과 요일 3:14-15의 자자구구를 비교해보시오)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1.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에서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사랑하고 이웃사랑하라고 답하고 있음을 알고 믿습니까? (답: 특히 누가 10:26-38)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2. 또 선행을 하면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하고 영생에 들어간다고 한 말씀들을 믿습니까? (답 마태25:31-46)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3. 또한 사도 바울도 선행을 하면 영생을 주시리라고 말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답 로마서 2:6-7)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 칭의에 관하여 >

14. 당신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말씀을 믿습니까? (답: 로마서 4장)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5.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함 얻는다는 야고보의 말씀도 믿습니까? (답: 야고보서 2장)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6. 당신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약속을 하셨는데, 첫번 후손의 약속에 “이를 믿음으로 받았는데”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창15장) 약속의 아들이 아닌 이스마엘을 낳았고, 두번째 후손의 약속에는 내 앞에서 행위로 완전하라”(창17장)는 하나님의 분부를 받고 나서 그리고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7. 당신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는 시험에서 통과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네가 이같이 행하여”(창22:16)라는 행위에 대해서 칭찬하시며 후손의 약속을 다시 한번 주신 것을 아십니까? (야고보서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8. 의에 반대되는 죄에 관하여 바울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한 사실을 믿습니까? (롬 14:23)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19. 그렇다면 죄에 대하여 야고보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20. 사도 바울이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라고 한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 천국에 관하여 >

21. 우선 당신은 성경에서 ‘천당’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답: 성경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체를 해설하는 총16권 짜리 성서대백과사전에도 천당이란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22. 당신은 ‘천국’이란 용어는 마태만이 쓴 협소한 단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답: 그외에 마가, 누가, 요한, 사도 바울, 야고보, 히브리서 기자 등 모든 성경기자들은 ‘하나님 나라’라고 씁니 다.)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23. 당신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믿습니까? (답: Yes,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직접적으로 선포한 구절은 하나도 없다! 성구대사전을 찾아보라!)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24. 그렇다면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말씀도 믿습니까? (답: Yes, 마태 7:21 등, 성경에 이 구절은 나와 있다)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2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올라가기를 기도하자 라고 말하였나요, 아니면 천국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라고 하였나요? (답: 요한 14장, 마태복음 6:10, 계 21:2,10 등)

천국에 올라가자( )

천국이 임한다( )

26. 당신은 성경에서 천국에 간다(go!) 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들어간다(enter!)라는 용어를 쓴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답: 성구대사전)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 신앙생활에 대하여 >

27. 당신은 하나님사랑을 아가페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헬라어원문에는 이웃사랑도 아가페라고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답: 마태 22:37-40 등)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28.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요일 4:20-21, 창 33:10, 마태 25:45)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29. 당신은 행함있는 믿음이란 선행을 특히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약 3:13, 2:14이하, 요일 3:17-18 등)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30. 당신은 하늘에 보물쌓는 일구제하는 것이라고 말한 말씀을 믿습니까? (답: 눅 12:33-34, 마태복음 19:21-22)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

31. 당신이 종말의 심판대에 섰을 때 주님이 무엇을 찾으실 거라고 성경에서 보았습니까? (답: 마태복음 25:31-46,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이야기, 계 21:8)

오직 믿음을 찾으신다( )

행함을 찾으신다( )

믿음과 행함이 일치한 것을 찾으신다 ( ).

32. 당신은 둘째 사망에 거하는 이유 중에 ‘믿지 아니하는 것’은 여러 이유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답: 요한계시록 21:8)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예배에 관하여>

33. 당신은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이다” 라고 말한 바울의 말씀을 믿습니까? (로마서 12:1)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34.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선행과 서로 나눠주기라고 말한 히브리서의 말씀도 믿습니까? (히브리서 13:16)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35. 아벨이 믿음으로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히브리서 11장)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36. 그렇다면 카인이 선을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그 예물이 열납받지 않으셨다는 구절들을 믿습니까? (창세기 4:4-7, 유다서 11, 요한일서 3:12)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37. 당신은 하나님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을 믿습니까? (요한복음 4:21-24)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38.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드릴 가장 훌륭한 제물이란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이라고 하신 말씀도 믿습니까? (마가복음 12:33, 이사야 1:10-17 등)

그렇다( ) 그렇지 않다( )

아마 귀하께서는 이 질문들을 보고 놀라거나 당혹하거나 혹 무시해 왔던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분은 “내가 성경을 편협하게 읽었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제임스 던의 논리("하나의 정경으로 모든 정경을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대로 성경 66권 전체를 보고 믿습니다. 그래서 귀하께서도 위 질문들과 구원관에 관하여 성경 전체를 보고 답해 주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의롭게 된다, 심판에서 면해진다 고 말했을 때, “정말 그러한가?”하며 이것에 대해, 성경 전체를 통해 확인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하였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우리도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지금은 21세기! 컴퓨터시대! 인터넷성경으로 확인해 보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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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대체 성경에서 누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했나? (로마서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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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성경의 아무도 “오직 믿음”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믿음”이라고 번역한 성경은 한글 성경 뿐입니다!

성경에 “오직 믿음”의 “오직”은 없습니다!

무엇이 한국기독교를 반신불구로 만들었는가요? 이 “오직”이란 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들은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인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일은 여러 가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러한가요?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고 한국 기독교를 형성한 것이기에 그리고 그 형성된 것이 편파적이고 파당적인 것이기에 한국 기독교를 변화시키기 위해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말씀이라고 보여집니다.

한글개역성경을 번역하신 우리의 자랑스런 서기관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서기관들이 없었던들 한국인의 믿음을 형성하는 훌륭한 성경이 나왔겠는가 생각합니다. 참으로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지나치게 강조한 것 때문에 좀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구절들이라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이 구절은 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우리 한국인의 신앙 양태가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번역의 영향력은 정말로 커서 한국인들의 신앙을 한쪽으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번역은 자칫 한국 기독교를 병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직”이란 괴물입니다.

먼저 말하면 “약한 의미의 그러나”를 “오직” 이라고 남용하여 번역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서기관님이 몇 군데에 ‘오직 믿음’(루터가 사용한 ‘오직 믿음=sola fide’의 뜻으로)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오직’이란 단어가 없는 것을 아는가요? 그 ‘오직(only)’이란 뜻의 헬라어 단어는 ‘모논(μονον)’이란 것인데 헬라어 성경에 없습니다.

특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로마서 1장 17절의 구절에 쓰여진 ‘오직’이란 말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오직”이란 말은 성경 헬라어 원문에 없습니다.

라틴어성경인 벌게이트(Vulgate)성경을 번역한 Holy Bible 성경에도 없습니다.

영어성경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킹 제임스 번역 영어성경, KJV (King James Version)에도 없습니다. 또 그 킹 제임스 영어성경을 재번역하여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RSV (Revised Standard Version)에도 없습니다.

최근에 재번역하여 가장 영향력을 끼친다는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도 “오직”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판 영어성경, The New Testament in Today’s English Version에도 물론 없습니다.

이 성경에도, 저 성경에도 없습니다.

제가 성경전시를 위해 준비하다가 본 1800년대의 성경책부터 시작하여 100여권의 성경책 아무 데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자이신 마르틴 루터께서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해석한 것을, 후대에 아마 루터-칼빈의 개혁 전통에 서신 번역자가 우리 한국 개역 성경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냐 생각됩니다.

자신을 이미 어느 것으로 제한해 놓고 있는 사람은 그외의 것에 대해서는 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오도하기 쉽습니다.

정말 그러한가 아닌가 지금 확인해 봅시다.

성경에서 “오직”이란 말을 살펴보자구요.

구약

하박국 2:4

(개역성경)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 어)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신약

로마서 1:17

(개역성경)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헬 라 어) ὁ δὲ δλαιοs ἐκ πστεωs ζσεται.

히브리서 10:38

(영 어) :as it is written, (없음)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개역성경)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헬 라 어) ὁ δὲ δλαιs μου ἐκ πιστεωs ζσεται.

(영 어) Now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첫째, 신약성서에 사용된 헬라어 원문에는 but이란 뜻의 ‘de(δὲ)’라는 용어를 썼지 ‘오직(only 또는 alone)’이란 뜻의 ‘모논(μνο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데(=δὲ)’라는 용어의 쓰임새는 두 가지이다.

① 앞의 것과 대조할 때 ‘...했으나(not), 그러나(but)’의 뜻으로 사용된다.

② 거의 의미없이 ‘그런데’(and 또는 thus)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앞의 것과 대비하는 대조의 뜻으로 쓰이는 ‘그러나(δὲ)’라는 용어를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오직”, “유일한” 즉 “only”의 모논(μνον)의 뜻으로 해석해 버렸기 때문에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킹 제임스> King James 영어성경 등을 보니 ‘:but’ 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대조의 뜻으로 썼고 로마서에서는 아예 해당되는 영어단어가 나오지도 않고 히브리서에서는 의미가 희박한 ‘Now’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셋째, 최근의 독일어성경<Die Bibel>에서는 구약에서는 대조의 뜻으로 썼으나 신약에서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넷째, 그럼 <한글 개역 성경>을 보자구요. 번역자가 번역한 것 중 제일 먼저 등장한 구약의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는 ‘그러나’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신약(로마서, 히브리서)에서는 오직이라고 바꿔서 습관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한글개역성경을 "변개된 성경"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그럼 최근에 번역된 한글 <표준 새번역성서>를 보자구요.

하박국 2장 4절에서는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했고, 로마서 1장 17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는 아예 “그러나”라는 단어조차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약해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한국인 대다수가 사용하는 <한글 개역 성경>에만 “오직”이란 자를 집어넣은 것은 분명 변개한 것입니다. 그 번역은 신앙을 한쪽으로만 몰고 가고 한국인의 신앙을 편협하게 만들었다는 문제를 분명히 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회 10년을 지나 미국 유학 와서 여러 다른 나라의 성경을 보다가 저는 이 사실을 알았고, 제 과거의 “오직 믿음”이라는 입장에 대해 상당한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만 그러한가?’ 하고 주변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이 물음을 물어 정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충실해야 하며, 현재 상황에 맞추기 위하여 성경 본문에서 벗어난 해석을 하면 안된다고 충고하는 어느 개혁 교단의 목사님과 좋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 교단의 교육국에서 15년 이상 성경 교재를 만들어 출판하는 분이었습니다. 개혁 전통에 서신 그 분을 만나 이 부분을 묻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그 ‘오직’이란 말이 원문, 영어성경, 독일어성경에 없는 걸 아세요? 그걸 목사님은 어떻게 배우셨나요? 제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입니다.”하니,

솔직하신 그분이 말씀하시길, “글쎄요, 나도 그 부분을 연구한 적이 없네요” 하였습니다.

개혁교단의 목사님이 그럴 정도였다니까요?

이번에는 어느 신학교에서 거의 40년간 조직신학 교수를 하시다가 은퇴에 가까운 교수님을 만나 우연히 만나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나는 과거에 신학교에 있을 때, 그분에게 조직신학을 배운 학생이었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그래요, 저 몰랐는데요?”였습니다. 가히 충격입니다. 그분의 반응이 저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다음에는 어느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가르치는 교수님에게 물었다. “그래요???”

여기서 저는 더 이상 이 문제는 제 개인의 성경해석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간의 성경공부에 “또 다시”(신학교에서 먼저 느꼈기에) 속은 감을 느꼈고, 우린 분명히 뭔가 잘못 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어느 개혁장로교회에서 성경공부웍샾을 하며 가르치다가 “오직 믿음의 오직이란 말은 없는 말입니다” 했더니 구약성서 Ph.D 박사과정에 있는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즉석에서 영어성경을 뒤지더니, “어라, 정말 없네!”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담임목사님의 실력을 인정하는 그 교회 장로님도 깜짝 놀라면서 “그럴 수가 있나?”하며 인상이 굳어졌습니다.

충격, 충격, 충격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지고 신앙생활 했는가요?

그저 목사님이 강단에서 믿으라 하면 믿었고 따르라 하면 따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중세기 천주교도 그것 때문에 문제였는데 오늘날도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번역의 정서(Mentality)는 있는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꼭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문에 있는 글도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너무 강조하여 해석하고 게다가 그것이 아니면 틀렸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 ‘오직’에 해당되는 헬라어 ‘데(δὲ)’라는 말을 연구하다가 클레아몬트신학대학원에서 고전어와 신약학을 가르치시는 김찬희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데(δὲ)’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입니까?” 하니 답하시기를,

“‘데(δὲ)’는 but이란 뜻인데, 같은 but이란 뜻의 ‘알라(ἀλλ)’와 비교해서, ‘알라’는 ‘strong connective’(강한 연결어)이지만, ‘데(δὲ)’는 ‘very weak connective’(매우 약한 연결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부분이 한글 성경에 ‘오직’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고 하니,

거의 반평생을 미국에서 보낸 그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잘못 번역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반대의 접속사로서 쓰여진 but도 아닌 약한 의미의 but을 우리의 성경에서는 “오직”이라고 붙임으로써 마치 그것이 아니면 다 아니다 라고 해석하게 만들어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무엇이든 “오직” “오직” “오직”으로 빠뜨린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직 믿음!”의 “오직”은 성경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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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울은 오직 믿음을 말한 사람이다? (고린도전서 13: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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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바울은 “오직” 믿음을 말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바울의 사상은 오직 믿음을 말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요? 확인해 보았나요?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3:27)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4:13)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롬 12: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고후 1:24)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

(고후 8:7)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고후 10:15)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갈 2: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빌 3:9)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딤전 4:12)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그러나 바울에게 아주 중요하게 밝혀진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only=모논)’이란 용어를 그의 말과 서신에서 약 50여 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믿음’과 결부시켜서는 그 ‘오직’(=monon, only, alone)의 뜻을 가진 단어를 한번도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니 ‘그러나’를 ‘오직’이라고 번역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번역한 “오직 믿음”에 대해 더 살펴보자구요.

이 “오직” “믿음”이란 단어를 컴퓨터에 넣으면 다음과 같은 것이 단번에 화면에 나옵니다. 예전에 성도들은 이 단어들을 찾느라 고생하였겠지만 지금 우리들은 한글이건, 영어건, 한번에 전체를 다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롬 1:17; 롬 3:27; 4:13; 12:3; 고후 8:7; 10:15; 갈 2:16; 2:20; 빌 3:9; 딤전 4:12; 히 10:38; 10:39; 약 1:6 등)

찾아보니 ‘오직 믿음’에 해당되는 단어는 영어로 ‘only’가 아니라 ‘not A, but B’ 용법(=‘A가 아니라, B 이다’라는 뜻)의 ‘but’이란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현대인의 영어성경은 ‘but’을 ‘instead’(대신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앞의 것과 대조하기 위하여 썼고 또는 약한 의미로 사용된 이 ‘but’(그런데)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아니 믿음이란 단어가 뒤에 나올 때마다, 아주 강한 의미의 ‘오직’이란 말을 붙인 저의가 무엇인가요?

추측하건대, 번역자께서 루터 전통에 서서 신자 또는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번역자께서는 ‘오직’이란 말을 쓰기 좋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강조가 무엇이 나쁘냐고 항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강조한 것이 진리인 양 생각해서 ‘오직 이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못박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서 보이는 전체적인 의미가 앞의 것 대신에 뒤의 것이지 ‘오직 뒤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 대신에 믿음이지, ‘오직 믿음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했다고 하나요?

성경의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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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울은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고린도전서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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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아무리 그렇다해도 바울은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요?

장 믿음을 강조한 사람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정말 바울이 믿음을 강조했을까요?

그렇다면 바울은 “믿음이 제일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많이 강조했다는 바울도 믿음이 제일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이 제일이다!” 라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그 좋은 “모-든-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다음을 성경에서 확인해 보자구요.

첫째, <사랑이 제일이다!>

(고전 13:2)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 했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

그런데 그 놀라운 믿음을 강조한 바울이 말하기를,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2)라고 합니다. 게다가 믿음보다 사랑이 제일이다(13:13)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믿음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랑 없으면 그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은 믿음을 강조한 사람인데 이럴 수가!

"사랑이 없으면 "모-든-"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믿음보다 사랑이 제일이다."

이것이 믿음을 가장 강조했다는 바울의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항상 사랑과 동일시된다.

둘째, <그 둘(믿음과 사랑)은 서로 하나로 일치되며 하나되어 일한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엡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이렇게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니, '믿음을 겸한 사랑'이니,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니 하면서 믿음과 사랑을 같이 언급하거나 일치시켰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그 둘(믿음과 사랑)은 병행하여 함께 일한다!>

(고전 16:13-1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엡 1:15)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살전 3:6)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살전 5:8)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살후 1:3)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딤전 1:14) 주의 은혜가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딤전 2:15) 그라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

(딤후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

(딤후 2:22) 주를 ...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

(몬 1: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렇게 사도 바울은 그 둘(믿음과 사랑)이 병행하고 일치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말씀들을 강조했습니다.

이같이 바울은 “사랑이 제일이다” 하며 믿음보다 사랑이 더 중요함을 나타냈고, 때로 믿음과 사랑을 병행하면서 또는 일치시키면서 그의 생각을 그 시대에 벌써 피력하였습니다. 그것을 이 시대에 아는 일 또한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믿음으로만의 믿음 제일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 바울서신으로부터 사랑을 학대해 왔고 멸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믿음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지만 사랑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 인 것으로 인식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이 성경 안의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누가 바울에게서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가요?

오히려 성경대로 바울의 생각을 말한다면 사랑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믿음보다는 더 중요한 것, 오직 사랑이 아닌가요?

그러나 사랑은 “오직”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 바울에게서 오직 믿음이라고 보았나요?

바울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바울은 “오직 믿음”이 아니라 “사랑 제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한국기독교의 개혁은 여기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에게서 “오직!”믿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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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믿는 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마태복음 5:43-45; 누가복음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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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믿어라!” “믿어라!” “믿는 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행하는 것 그리고 다른 아무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만 알고 믿는 다면 당신은 성경을 온전히 알지도 믿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는 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평화를 이루는 자가, 원수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받은 그 말씀은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요한복음의 말씀보다 더 먼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나옵니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런데도 우리는 후에 기록된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한 1:12) 라는 말씀만 믿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자는 도덕군자의 한 사람에 불과하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웃, 원수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마태 5:9; 5:44-45; 눅 6:35)는 말씀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누가 이렇게 한국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믿지 못하게 만들었는가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성경을 온전히 보고 믿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구절을 분석해 이렇게 말해 봅니다.

당신은 요한의 말처럼, 믿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것도 있고, 마태나 누가가 말한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말씀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가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왜 이렇게 성경을 갈라서 믿는 것인가요?

누가 이렇게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갈라놓는가요?

누가 믿는 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가요?

이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이 엄연한 성경구절들을 누가 삭제하고 있는가요?

한국 기독교의 병폐는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갈라서 믿도록

누가 쪼개서 믿도록 했나요?

그러나 기독교를 믿음의 기독교라고 하지 않고 사랑의 기독교라고 하는 말을 혹시 들어보았나요?

그래서 혹시 거리에 가면 1/4이 기독교인이지만 감옥에 가면 1/2이 기독교인이고, 썩어 부패한 지도자들의 2/3이 기독교인이라는 조사 통계가 나오던 때가 있던 것은 아니었던가요?

저는 두 분의 대립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똑같이 모태신앙으로 믿음을 갖고 있으며 똑같이 공산군에 의해서 아버지가 납치 살해되었고 그리고 나이도 똑같은 두 분을 알고 있습니다. 한분은 한국인으로 미국장로교총회장을 지낸 이승만목사님이고 한분은 한국의 한 역사적인 교회의 장로님이십니다. 이승만목사님은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했지만, 그래서 지금은 통일을 위해서 힘을 다해 사역하고 있지만, 또 한분 장로님은 아직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야 한다는 반공주의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장로님에게 말했습니다. “(2시간을 통화한 끝 무렵에) 장로님, 장로님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장로님의 집에서 태어나서 자라, 60 평생 이상을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수없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마음에 자리잡은 그 앙금을 예수사랑으로 씻지 못하고 결국은 한탄만 하다가 가야하시나요?” 그 장로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원수사랑이 힘들기는 힘들었던 것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한다면?

물론 이 말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제자들에게,

이미 믿고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형제와 화평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성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에 오직 믿음만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말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이미 믿고 있는 마태의 유대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리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이방인을 향한 마태와 누가의 예수님이 그 말을 했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에 있어서,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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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브라함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었다? (야고보서 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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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를 중심한 후기 기독교인이며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로마서 4:1-3; 갈라디아서 3:5-6)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의 친동생이며 초기 유대기독교인으로 형성된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그 말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서 2:20-24)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의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창세기 본문으로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 15: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니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아무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에게 첫번째 후손의 약속을 하셨고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그래서 낳은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 아닌 이스마엘이었습니다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 롬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그러나 똑같은 내용의 약속, 즉 두번째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다음 말씀을 봅시다.

(창 17:1-4)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너희는 양피를 베어라[할례].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시며 약속한 이 두번째 후손의 약속에서 요청한 것은 행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탄생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을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했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움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창세기 22장에서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백살에 낳은 아들 독생자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지시하신 대로 3일 길을 가서 명령받은 대로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리려고 합니다. 거기서 우린 두 가지 아브라함의 말을 통해서 그가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첫때, 그는 사환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이와 함께 ...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5절) 하며,

아이가 죽지 않고 함께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가졌고,

둘째,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는 아들 이삭의 질문에,

그는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하며,

하나님이 번제할 어린 양을 이미 준비해놓고 계신 것처럼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다 마치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봅시다.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여기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 대해 “네가 이같이 행하여” 라고 말씀하심으로 “행함에 관하여” 칭찬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 “네가 이같이 행하여!”라고 행함을 보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가 이같이 행하여!”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1)

예수님과 함께 가족생활을 경험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하는 말이,

이 행함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같이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야고보서 2:24)고 결론을 내리지요.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아래와 같이 역설합니다.

1)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2:14)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할 수 없다. (2:14)

3)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믿음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다. (2:17)

4)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들도 갖고 있다. (2:19)

5)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 (2:20)

6)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 (2:21)

7) 믿음이 그의 행함과 작용을 한 것이다. (2:22)

8)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다. (2:22)

9) 행함 있는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 (2:23)

10)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만 아니다. (2:24)

11) 창녀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 (2:25)

1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영혼)이 없는 믿음(=몸)은 죽은 것이다. (2:26, 결론)

문맥상 보면 야보고는 영혼=행함을 나타내고 몸=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혼이 행함이라니!

요한도 믿음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믿음만큼 행함을 강조하였는데 후기에 갈수록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다음을 보자구요.

(요한복음 5:29) 선을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10:25; 14:11)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일 2:6) 그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요일 2:11) 그의 형제을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29) 너희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 3:10)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이 1: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요삼 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요삼 1:11)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누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하는가요?

예수께서도 “행실이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0) 너희[일차적으로 산상의 제자들]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거장이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분명히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하지 못한다!”(약 2:14). 그 성경에 의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갈라서 행함이니 사랑이니를 믿음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것을 “행함이 없는 믿음”(2:17, 18, 20, 26)이라고 네 번씩이나 말하며 그것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로 선행하는 자들(2:15-16), 행하는 아브라함(2:21-23), 그리고 나그네들을 접대하는 라합(2:25) 등을 야고보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 바울이 말하는 것만, 즉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로마서 4:1-3)고만 말하고 있는가요?

누가?

왜?

야고보가 말한 “믿음으로만 아니라(not only), 행함으로(but also) 의롭다함을 받았다”(2:24)는 말은 믿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요?

이것만, 바울의 것만 성경이고, 저것, 야고보의 것은 성경이 아닌가요?

오히려 그 당시의 교회의 권위로 보면, 이방 땅 갈라디아 다소에서 태어난 로마시민권자의 아들이며,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바울 보다도,

예수님과 육신적으로 친동생이요 동거동락하였으며,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인 야고보의 말씀은 훨씬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한국 기독교에서 칭의(의롭다함을 얻는다)를 말할 때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하고 있는가요?

혹시 그들은 성경을 100% 믿는다고 자칭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구절만을 골라서 편파적으로 믿는 사람들 아닌가요?

안디옥교회의 선교사인 바울이 이방인을 위하여 ‘믿음’을 주장했다면,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이시며 예수님의 젖동생인 야고보는 이미 믿는 유대 기독교인 또는 헬라 기독교인들에게 ‘믿음+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서 전체의 큰 두 가지 맥이라고 봅니다. 뒤의 야고보는 바울의 주장인 ‘믿음으로’에, ‘행함으로’라는 것을 분명하게 피력한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갈라서 한쪽 편만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칭의”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이 나눠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에 나눠지는 것입니다.

바울과 야고보가 갈라지지 않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칭의론의 갈라짐에서 우리는 분명히 믿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칭의에 있어서는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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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 I (누가복음 10: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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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했는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기록자들인가?

성경의 공관복음서에는 “믿음으로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믿으면) 영생을 주십니다.

그렇게 영생에 관한 한 믿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정말로 “믿음으로만!” 인가요?

성경에서는 그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바나연구소에서 제공한 바에 따르면, “믿음이냐 선행이냐?”의 논쟁은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이 수 백년 이상, 아니 신약성서 이후로 계속 고민하고 토론하여 온 것이라고 합니다.

1999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일을 기해 천주교와 루터교가 480년 동안의 긴 “의화논쟁”(義化論爭)을 끝낸다고 합니다.

의화논쟁이란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야고보서 2:21-22 등)는 천주교의 전통적 가르침과 “신앙만으로 구원된다”(로마서 3:28 등)는 루터교 주장이 맞부딪친 교리논쟁입니다.

아니? 흔히 믿으면 다 되는 일을 왜 480년 동안이나 동안 토론하는가요?

그것은 성경에 믿음으로만 이라고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리 논쟁을 절충식으로 종식시키게 되었는데, “의화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롭게 된다“라고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천주교도 바뀌었지만 5백년 동안의 루터-칼빈으로 공고화된 개신교의 신앙과 신학의 흐름에 전환이 생긴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우리 보다 앞서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이 믿음이냐? 선행이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자구요.

미주 <크리스찬 투데이> 1998 1. 10., p. 1.에서 최근의 조사된 바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인의 50% 이상이 “선행으로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아니면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일반인은 물론, 크리스천들 중에도 수 백여 년에 걸쳐 [필자주: 신약시대부터 계속해 왔고 최근 거의 5백 년에 걸친 개신교와 천주교의 논쟁] 전개하여 왔다. 현대인들의 구원관에 대해 바나연구소가 최근 실시한 통계조사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절반 이상이 선행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 전국에 걸쳐 약 6,242명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아래의 질문을 하였을 때, ‘확실히 그렇다’와 ‘그럴 것이다’라고 밝힌 응답자들의 배경을 교단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선한 사람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가?”

하나님의 성회 22%,

크리스천 초교파 30%,

침례교 38%,

장로교 52%,

루터교 54%,

모든 성인 55%,

성공회 58%,

감리교 59%,

몰몬교 76%,

가톨릭 82%.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을 교리로 가지고 있는 루터교인들의 반응입니다.

54%!

아니! 루터교인들까지도 절반 이상이 선행으로도 구원을 얻는다니?

놀랄 일입니다.

대대로 기독교가정에서 자란 이 사람들이 전부 성경을 그릇되게 보고 헛되게 배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하고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 것, 즉 신약 성경 시대부터 주장해 온 영생관(또는 구원관)에 대한 역사를 이렇게 말해 봅니다.

AD 50년경→바울-바울서신 등-믿음(?)으로

AD 62년경→주의 형제 야고보-야고보서-행함 있는 믿음(즉 사랑으로)

AD 70년경→마가, 누가, 마태-공관복음서-사랑의 행함으로

AD 120년경→요한-요한복음-믿음으로

AD 150년경→요한-요한 1, 2, 3서-믿음과 사랑으로

중 세 기→천주교-행함으로

AD 1517년 →루터, 칼빈-종교개혁-믿음으로

AD 1738년 →웨슬리-믿음과 성화(사랑)로

결론적으로 보면 역사 속의 구원관과 영생관은 변증법적인 흐름을 가지면서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16세기 초, 개신교가 태동될 때의 눈으로 보니까 믿음이 중요하지만, 전반적인 성서의 눈으로 보면 사랑과 믿음의 십자가의 신앙으로 귀결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은 수직적인 사랑을, 이웃 사랑은 수평적인 사랑임을 말해 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믿음은 실상은 외쪽신앙, 반쪽신앙, 편협하고 분리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신앙이 아니라 수직적인 신앙만을 갖기 쉽습니다. 또 이웃만 사랑하는 신앙도 옆으로 누운 수평적인 일자 신앙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종적인 믿음과 횡적인 사랑이 일치하는 십자가 사랑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그들 =

하나님사랑 +

이웃 사랑

=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 시대의 종교개혁자들을 참고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자구요.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였는가요?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들인가요?

첫째,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공관복음서를 보니 똑같은 질문(“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을 누군가 하고 있고 거기에 예수님이 대답하신 장면이 보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누가복음 10:25-28)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어떤 율법사(대답하여 가로되):“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어디, 성경에 영생에 관하여 이보다 더 직접적인 질문이 있나요?

영생에 관한 이 정확한 질문에 따른 공관복음서의 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옳도다. 이[사랑]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영생을 얻으리라].”

즉 ‘사랑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영생을 얻는다?

아직도 의심이 많은 이들에게

성경을 온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음을 읽어보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 (마태25: 35-39)]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하시리니,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45-46)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믿음으로가 아니라 선행으로 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 했습니다. 이것을 누가 말했나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아니신가요?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만 가지고는 안되기 때문에 이웃 사랑을 더하고 있는 것인가요???

거의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믿음으로‘만’ 영생을!”이라고 알았던 우리들에게 큰 혼란이 왔습니다. 우리의 신앙사고에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도전일 뿐만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사랑으로 영생을 얻는다!’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합니다.

이상에서 보는 대로 초기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공관복음서(마 22:37~40;막 12;눅 10:25~37)에서는 “영생을 얻는 것”에 관하여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어라’가 아니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했나요?

성경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공관복음서의 말씀대로 한다면,

영생에 얻는 것에 관하여 오직 믿음으로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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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 II (요한복음 5:24; 요한일서 3: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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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했나요?

요한인가요? 그러나 요한이 그것만 말했나요?

요한이 말한 성경에는 형제를 사랑해야 영생이 그 속에 있다고 합니다.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이라고 했나요?

사실, 우리는 ‘만’이라고 하는 설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 나만, 내 기도만, 믿음으로만!

둘째, 사도 요한인가요?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는 초기에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밑줄을 그은 본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밑줄을 그은 구절만을 따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은 “내가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밑줄 그은 것 그 이외의 말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무시해 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들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반대되는 말씀에는 눈감아 버립니다.

생각해 보자구요. 앞의 요한복음의 이 내용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뿐인가요?

아닙니다!

요한 복음을 쓴 사도 요한(또는 그의 학파)이 후에 썼다는 요한일서에서는 그 내용을 수정합니다. 아니면, 보충합니다.

다음 비교표를 보시죠!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다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요일 3:15~16)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영생에 거한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 진다.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

믿어야 영생!

형제를 사랑해야 영생!

믿음과 사랑의 통합 (요한일서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또한 그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할 지니라

--> 믿고 사랑하라!

이제까지 구원에 관계된 영생관에 대하여 믿는 것 한 가지만 알고 있던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비교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편협한 신앙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비교한 후의 결론은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는데, “무엇을 통해서?”라고 묻는다면, 바로 “믿음과 사랑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어야 (요한복음) 형제를 사랑해야(요한일서) = 영생 (요한의 문서)

⇓ ⇓

하나님 사랑하고 + 이웃 사랑해야 = 영생 (공관복음서)

즉 성경의 요한은 오직 믿음으로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는 후기에 갈수록 사랑을 강조합니다.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했나요?

성경을 온전히 보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요한이 말한 대로 영생을 얻는 것에 관한 한, 오직 믿음으로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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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 III (로마서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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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또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했나요?

바울인가요?

성경에서는 바울 조차도 “선행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충격!

가 또 “믿음으로만 영생을”이라고 했나요?

셋째, 사도 바울인가요?

정말 그렇다고 당신은 확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말 그런지 성경으로 말해보자구요.

“영생”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을 살펴보자면,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위에서처럼 사도 바울이 많은 부분에서 믿음을 강조하였지만, 영생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할 때에는,

1) 먼저 선을 “행한 대로” 영생이 주어짐을 말하고(로마서 2:6-7),

(로마서 2:6-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He will give eternal life)”

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들어가며(롬 5:21),

3)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을 말하고 있고(롬 6:22-23),

4)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것으로(갈 6:8),

5)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리고 영생을 취하라(take hold of the eternal life)고 부르심을 받았다(딤전 6:12)고 말합니다.

6) 같은 의미로 참된 생명은 바로 선행을 하는 데에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딤전 6:18-1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take hold of that which is life indeed)”

이와 같이 바울은 “믿음”과 영생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는 않았지만, 특이한 것은 “선을 행함”과 영생은 연결시켰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충격이죠.

다시 한번 보자.

(로마서 2:6-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He will give eternal life)”

불행하게도 이 같은 바울의 말은 개신교인들의 뇌리에서 삭제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을 통해 그가 믿음만큼 사랑을 말했고 또는 믿음보다 더 사랑에 관하여 중요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선행은 영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믿음을 강조했다는 바울이 “믿음과 영생”을 요한복음처럼 연결시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 갑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성경이 아니며 또 저 구절만 성경이라는 말인가요?

다시 말해, 처음의 요한복음의 “믿음으로 영생을!’이라는 주장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인 이방인들과 흔들리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 향한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한국 교회의 교인들도 이방인들이므로 이제까지 ‘믿음으로 영생을!’이 강조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어라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예수 믿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일서 등의 저자들은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 즉 ‘사랑으로 영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 마태, 마가도 ‘사랑으로 영생을!’입니다.

왜?

마태, 마가, 누가 공동체의 복음 전함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잘 믿는 유대기독교인들, 그리고 이미 믿음 속에 이방 기독교인들이 더 잘 믿게 하기 위한 것이며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실천적인 사랑을 닮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라고 말했나요?

성경을 온전히 보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선행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성경 구절들과 그런 단어가 나오면 성경이 아닌 것처럼 외면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것이 바꿔져야 합니다!

바울에게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바울은 “영생을 얻는 것”에 관하여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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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생명에 거한다? (요한일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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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에 거한다고?

후기의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다면 서로 사랑해야 영생에 거한다! 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인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사랑을 더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한번 믿으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요한 일서 5:12-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 합니다.

그러나!

같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이들에게 영생에 거하려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만일 믿는 이들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망에 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5~16)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일지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사망에 거하며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요한의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기껏 믿음으로 얻은(요한복음) 영생을, 사랑하지 않아서(요한일서) 거하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영생에 거할까요?

그것은 초기 요한의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하는 일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다”라고 후기의 요한은 강변합니다.

처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중이 중요하지요.

사랑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덤(보너스)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에 관한 한 믿음의 교리만큼 사랑의 교리도 중요합니다. 물론 사랑에는 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만! 의 교리들’은 재고해야 하며 “믿음과 사랑(행함)이 합일된 교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처음 가정에게 물어본 최초의 질문(특히 where의 질문 두 가지)을 보아도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질문입니다.

아담에게, (창 3:9) “ 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에게 범죄하여) - 하나님 사랑에 대한 질문

가인에게, (창 4:9) “네 가 어디 있느냐?”

(형제에게 범죄하여) - 이웃 사랑에 대한 질문

여기서 우린 믿음(하나님사랑)과 사랑(이웃사랑)의 관계를 알아봐야 하겠지요.

오르띠즈 목사님의 말대로, 믿음은 결혼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된 우리가 결혼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결혼식을 올렸으니 부부로서 결혼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즉 결혼한 후, 즉 부부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진 후 이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이제는 부부로서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깨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없으면 이혼, 결별하게 되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믿음이라는 결혼식을 해놓고도 믿자 믿자 즉 결혼하자 결혼하자 합니다. 이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결혼식은 사랑이라는 결혼생활을 통하여 완성(롬 13:10, 사랑은 율법의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님은 그 부부의 대상으로서 주님대신 이웃 형제를 설정해 주셨고 눈에 보이는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래서 신앙이 일치가 되는 것이지요.

잔잔한 흐름으로 교회개혁을 가져오는 그 오르티즈 목사님은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그 삶에 대해 잘못 생각해 온 것이 있는데, 이때까지 거룩, 믿음, 예배, 성경연구, 기도 그리고 십일조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믿어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사랑도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축해 가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사랑, 그것은 빵을 만들 때 들어가는 밀가루와 같습니다> (두란노서원 刊)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행함은 믿음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구원이요 영생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여……엉……생” 하며 마냥 끝이 없이 긴 생명을 말하는데, 그러나 지옥의 형벌도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종말에서 영원히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이것을 마태복음 25장, 또 요한복음 5장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 25:45~4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가리라”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소유한다고 할 때, 우리는 도대체 영벌과 영생의 둘 중에 어느 영원한 것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가 추구할 영원한 생의 것은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한 일로 사랑을 표현한 영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생의 속성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르띠즈목사님은 계속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차에 비유하면, 예언의 기차, 믿음의 기차, 그리고 방언의 기차들이 다 스쳐 지나가며 결국 종착역에서 멈추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의 기차는 종착역이 없다. 사랑은 결코 끝이 없다고 바울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유일하고도 영원한 요소인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일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 우리가 천년설을 믿기 때문도 아니요, 방언을 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여기 보면 분명,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에 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다른 하찮은 문제에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참으로 해야 될 이 일은 하지 않고 있다고 오르띠즈 목사님은 강변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직접적인 질문이 예수님의 다른 장면에서 또 나옵니다

(막 10:17~2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니라

제자들이 심히 놀라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여기 제자들은 이 부자(청년)의 신앙태도에 놀랐습니다. 이렇게 착하고 선한 부자가 어디 있나요? 그래서 제자들은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것을 아시고도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고, 도둑질하지 않았고, 거짓 증거하지 않았으며, 속여 취하지 않았고, 부모를 공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부자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자로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자에게는 부유한 것이 하나님나라의 복이 되어야 합니다. 부자에게는 부유한 것이 하나님나라의 장애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 그 부족한 것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눠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한가지 부족한 것, 그것은 사랑의 나눔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나눔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요한일서 3:16-17)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그때 제자들이 물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답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하십니다 (Sola Gratia). 우리가 어떤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맞으면 구원 얻고 맞지 않으면 구원 못 얻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도 영생을 주시며(주로 요한복음에서 말함),

이 본문의 말씀과 같이 사랑으로도(주로 공관복음서에서 말함) 영생을 허락해 주십니다.

반드시 사람이 정해 놓은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행위로도 영생을 주시며(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서),

또 세상에서의 고통 하나만을 보시고도 마음대로 구원하시며(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교리로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영생을 주시는 모습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미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위에 적은 대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계명이 무엇이지요?

그의 계명은 종합하면,

(요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생명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믿음과 사랑’입니다.

이 둘은 손바닥과 손등과 같습니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형제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이것 둘이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개혁, 그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님도 사랑, 선행 등을 강조하였다는 사실 명심하자구요.

그분이 쓰신 “사회 속의 그리스도인”이란 논문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관한 글을 묵상하면,

“그리스도께서 내게 행한 것같이 나도 또한 내 이웃에 대하여 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 안에 살지 않고 그리스도나 이웃 안에서 곧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또 사랑을 통하여 이웃 안에서 산다. 그는 신앙을 통하여 자기를 넘어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사랑을 통하여 자기 주변에 와 살며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누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 했나요?

생명에 들어가는 것에 관한 한,

성경의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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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종말의 심판에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 I (마태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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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종말의 심판에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심판에 관한 한 “행한 대로” 라고 말하지,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했던 마르틴 루터님도 당대에 예수님이 올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그의 영향을 받은 추종자(Follower) 마이클 스티펄(Michael Stifel)이라는 사람은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긴 지 16년, 즉 1533년 10월 19일 오전 8시에 예수님이 재림한다 하여 보따리를 싸놓고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열광적인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 예수님을 기다렸으나 오시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어느 날 삼각산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며 3만 명이나 운집했었다고 전해집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한다고 하며 이것을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한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목사가 막강한 위세를 펼치더니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다음해인 1993년 3월에 찾을 저금통장에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고 보도되었습다.

또 얼마 전 샌디에고에서 컴퓨터 천재들로 구성된 「천국의 문」 성도들이 집단자살하여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지구 옆을 지나치는 혜성을 따라 UFO를 타고 천국으로 들어간다나요?

물론 성경에서 예수님은 그 때와 날과 시간까지 이렇게 명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태복음 24: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예수님도 그 날과 그 시는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런 것을 밝혀내려고 하는지, 또 성경에서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을 하면서 무슨 특권이나 얻는 양 생각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나요?

마태 24-25장을 종말장이라 하는데 한번 살펴보자구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4:3~14)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첫째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둘째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셋째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끝으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종말의 징조’의 말씀을 마치시고, 꺼지지 않는 등불을 위해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에 관한 종말의 비유를 말하고, 이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종말에 충성하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에, 종말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의 징조→종말의 열 처녀 비유→종말의 종들의 달란트 비유→종말의 최후 심판

(마 24장) → (마 25:1~13) → (마 25:14~30) → (마 25:31~46)

‘최후의 심판’을 읽을 때에 우선 우리는 성경말씀 그대로에 충실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온전히 보고 믿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보수(保守)라는 말은 말씀을 보존하고 지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껏 보수적인 모습을 보면, 전통적인 것, 교리적인 것을 보수하고 말씀 그 자체는 보수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말하면 전통이나 교리에 맞춘 전통 보수요 교리 보수이지, 말씀 보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최후의 심판 이야기

상황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구분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

심판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1)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2)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4)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5)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6)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1)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2)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4)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5) 병들었을 때와

(6)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유에 관한 의문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1)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2)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4)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5)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6)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1) 주의 주리신 것이나,

(2) 목마르신 것이나,

(3) 나그네 되신 것이나

(4) 벗으신 것이나

(5) 병드신 것이나

(6)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설명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최종

심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 가리라” 하시니라.

“저희는 영벌(永罰)에,

이제 이런 생각을 가지시고 ‘최후의 심판’이라는 제목을 가진 말씀들을 함께 보고 묵상하면,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갖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최후의 심판을 내리지 않고, 사랑의 행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최후의 심판을 내린다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예수 믿으면 영생에, 안 믿으면 영벌에 처하는 것이라 알았건만 이것은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요?

성경이 잘못되었나요? 우리가 잘못되었나요?

왜, 에수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믿음에 관하여 한마디 말씀이 없으십니까?

좀 섭섭하지요.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많은 부분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자구요.

(마 7:19~21)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종말을 준비하려면 산에 가서 기도하고 교회에 예배 출석 열심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태 25장 31절 이하에서 처럼, 더더욱 우리의 이웃, 특히 가난한 이웃, 강도 만난 이웃, 외로운 이웃, 병든 이웃, 갇힌 이웃 등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만 했던 사람을 영생에 들어가는 기준으로 두지 않고 이웃 사랑을 베푼 사람을 영생에 들어가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왜 그런 사람을 원했을까요? 왜냐하면 이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유대인들이요,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기독교인들, 말하자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 부분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 보여집니다.

요일 5:13처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쓴 것입니다.

사랑은 믿는 이들에게 특히 요청됩니다.

그러므로 열 처녀가 준비하려던 기름은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사랑의 기름이요, 달란트를 맡아 가진 종들은 사랑의 행함에 충성을 다하는 달란트를 가져야 했던 것이요, 그것이 종말에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자, 최후 심판의 말씀을 믿는다면 사랑으로 종말을 준비해야겠습니다. 평생 산에 들어가셔서 종말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행한 대로” 라고 말하지,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종말의 심판에 관한 한,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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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종말의 심판에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 II (누가 1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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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두 번째로,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를 통하여 종말에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더욱 배울 수 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한 부자가 있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1.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3.“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4.“모세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부자와 나사로의 이 유명한 이야기는 사람이 죽어 어디로 가며 그곳으로 간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면서의 질문은 왜 부자는 음부에 가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가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그것은 단지 부자는 좋은 것 받았고, 거지는 고난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며(25절),

둘째,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어라는 후반부를 생각하면, 부자는 좋은 것 받았으나 거지와 나누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0~21절).

그것 때문에 하나는 음부에서 고통을, 하나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 받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도 보면 부자의 믿음이라든지 거지의 믿음이라든지의 믿음으로 심판의 기준을 삼지 않고 고난받은 것 때문에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판결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보면,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권할지라도 그의 권함을 받지 아니하고 그 형제들은 그 고통받는 곳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선지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모세로부터 어찌 들을 수가 있습니까?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선지자’는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 율법과 선지자가 무엇이죠?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Do for others what you want them to do for you).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22장 36~40절을 보면 더 명확합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렇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에게 들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결국 부자는 사랑(모세와 선지자)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듣지 못했을까요? 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종말을 준비하면 됩니다.

이렇게 “사랑이 식어지리라”한 종말의 때에 꼭 필요한 것은 사랑의 행함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이야기에서 “행한 대로” 라는 사랑의 행위에 의해 영생과 영벌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위로를 얻습니다.

누가 종말에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했나요?

종말을 준비하는 것에 관한 한,

성경의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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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하나님만 사랑하면 다 된다? (마태 2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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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하나님만 사랑하면 다 된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구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예배드리고 새벽 기도도 드립니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와는 틀리게 때로는 금식기도도 하고 세상과 분리해서 살려고도 합니다. 하나님께 죄사함 받고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형식적인 수치에 따라 만족하기도 합니다. 자, 이 정도면 하나님 사랑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진 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일 4: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뒤집어 말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와 같이 성경은 증언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다’라고 명시합니다.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 할 것입니다. 그러면 되었지 또 뭐가 필요하냐, 우리가 교회만 나오면 되었지 또 뭐가 필요하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사랑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에다 더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보았나요?

(눅 10:25~2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시니.

우리가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것, 그러나 중시해야 하는 것은 ‘또한’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나님만 사랑하라 하면 다 될 텐데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사랑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웃사랑을 더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사랑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웃사랑을 더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사랑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웃사랑을 더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과 다르게 그러나 분명하게 예수님이 언급한 것은 예수께서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에다 더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을 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듭 말씀하거니와, ‘또한’(=and)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기 위하여 교회만 나오면 되겠지가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처럼 이웃 사랑하기 위하여 세상을 섬기는 일이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본문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자!”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서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이천년전의 예수제자 공동체에서는 하나님과 이웃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에 이웃 사랑을 더할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이웃에 대해서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무관심한 채로 매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반쪽 사랑이요 반쪽 신앙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본이고 이웃 사랑은 덤으로, 양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0장 25-27의 본문의 말씀처럼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이것도 해야 합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우리가 구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전한 사랑은 이 둘이 더해져서 하나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 이웃사랑 = 영원한 생명

누가 하나님의 사랑만 있어야 한다고 했나요?

성경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사랑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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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하나님 사랑”만을 "아가페"라 한다? (마태 2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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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혹자는 하나님 사랑만이 아가페라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 원문에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아가페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모두 아가페인 것이지요.

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때 그 신적인 사랑을 ‘아가페’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설교를 들었고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나오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에 쓰는 "사랑"이란 단어는 그 신적인 사랑 ‘아가페’하고는 틀릴 것 같죠?

그러나 헬라어 성경 원문에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아가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가페하고 이웃을 아가페하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모두 아가페인 것이지요.

어찌 감히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와 이웃 사랑을 동등시하느냐 할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 보니, 하나님을 ‘아가페’(사랑)하고 똑같이 이웃을 ‘아가페’(사랑)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 아가페와 이웃 아가페는 같은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신적인 사랑 아가페의 대상은 하나님이나 이웃이나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 마태가 보고 들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가페에 관하여 더 덧붙일 것은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요한 복음 21장에 나타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물음에 실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수는 예수님은 아가페로 물었는데 베드로는 필로스로 답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아가페를 신적인 사랑으로, 필로스를 인간적인 사랑으로 차별화시킵니다.

그것을 확인해 본 적이 있습니까?

헬라어본문에 가 보았나요?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첫째 둘째는 아가페로 물으셨지만 세 번째는 필로스로 묻고 있습니다.

“네가 아가페 하느냐?” - “예, 제가 필로스합니다.”

“네가 아가페 하느냐?” - “예, 제가 필로스합니다.”

“네가 필로스 하느냐?” - “예, 제가 필로스합니다.”

우선 이것을 보고 “예수님이 다 아가페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다 필로스라고 답했다” 라는 실수를 더 이상 하지 맙시다. 혹자는 그 당시에는 아가페와 필로스가 같은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가페와 필로스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 편에서 보면, 위에서 예수님의 물음은 의미가 달라지고, 베드로의 대답도 달라진다고 보여집니다.

예수님의 질문

베드로의 대답

첫째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 하느냐?”

- 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합니다. (그러나) 제가 주를 필로스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 저는 인간적인 사랑을 할 뿐입니다.

둘째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 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제가 주를 필로스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 저는 인간적인 사랑을 할 뿐입니다.

셋째

“네가 나를 필로스 하느냐?”

- (그렇다면 좋다!) 너는 나를 인간적으로라도 사랑할 수 있느냐?

세번째에 네가 나를 필로스하느냐 로 묻기에,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제가 주를 필로스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 세번째에는 “필로스”로 묻기에, 근심하며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제가 인간적으로는 사랑하시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가페와 필로스를 구분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오히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친구의 위치로 내려오셔서 사랑(필로스)을 묻고 있는 것이 되버립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사랑 필로스를 나누는 친구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13-1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아가페)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사랑만 아가페가 아니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도 아가페입니다.

(요한일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렸듯이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누가 하나님 사랑만을 아가페라고 가르쳤나요?

아가페에 관한 한

성경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사랑만이 아가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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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다른 계명보다 커야 한다? (마태 2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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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구원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큽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러한가요?

(마 22:36~40)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계명의 크기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계명의 크기가 같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2장의 위의 본문에서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둘째는 그(첫째)와 같으니”(=And the second is like unto it)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랑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게명, 명령, 말씀의 크기가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냐구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그 명령의 크기가 같으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렇게 써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구요.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니까요!

예수께서 우리를 이웃으로 알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크기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에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의 크기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에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의 크기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에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의 크기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계명의 크기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의 크기는 같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에 있어서 그 명령의 크기를 같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같다고 하신 것을 누가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누가 우리 이웃을 하나님에게서 끊으리요?

누가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일에서 끊으리요?

누가 우리 신앙인들이 형제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순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사랑이 첫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하라는 계명의 크기는 같습니다.

만약에 우리나라 헌법 조항의 제1조가 하나님 사랑이요, 제2조가 이웃 사랑이라 한다면 1조를 상위법이요 2조를 하위법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이 헌법이며 그 효력도 똑같습니다. 오죽하면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강조하였을까요!

하나님 사랑의 계명 = 이웃 사랑의 계명!

예수님은 마 22:40에서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뜸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 사랑만 명령하지 않고 이웃 사랑을 함께 명령하고 있으며 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명령의 크기가 같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의 크기, 효과의 크기도 같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다는 강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크기가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그렇게 자기를 비어 이웃을 동등하게 비교하면서 ‘동등한 사랑의 위치’에까지 두신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 2:4~8)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를 자세히 기술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직접 생전의 예수님과 지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생애에 관하여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하였습니다. 바로 빌 2:4-8인데, 그의 요지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시나 사람이 되셨고 사람을 사랑하기에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크기와 이웃을 사랑하는 그 크기가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 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 also)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즉 하나님 사랑이 형제 사랑이요, 형제 사랑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주께 받은 계명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생각해 보자구요.

쌍둥이 형제(=민족, 창 25:23)가 원수되어 갈라졌다가 20년이 지나 다시 만나는 광경에서 그 공식이 나타나 있습니다. 얍복강가의 씨름기도를 마친 후에 야곱은 그 장소를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명명합니다(창 32:30). 다음날 형님을 만나서 하는 말이 “형님 얼굴이 바로(=) 하나님 얼굴(브니엘)이군요”(창 33:10)라고 고백합니다.

“형제(민족)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이다”라는 말씀은 이웃, 형제, 민족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누구에게? 믿고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사랑 = 이웃사랑

성경의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그 계명의 크기를 달리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마가는 어떠한가요?

(마가복음 12:28-31)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를 정리해 보면,

서기관: "계명 중에 으뜸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대답: "하나님 사랑+이웃사랑이다.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왜 마가가 본 예수님은 "하나님사랑이 첫째이다.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사랑이 첫째이며 이웃사랑이 둘째이다. 이(두개를 묶어서)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라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만 이야기하지 않고 이웃사랑까지도 포함시킨 다음에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 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사랑만 최고 큰 계명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이웃사랑도 들어가야 최고 큰 계명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다음을 보면 더 명확합니다.

(마가복음 12:32-33)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도다!"하시니.

역시 하나님사랑만을 모든 제물보다 나은 제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웃사랑을 포함하여 모든 제물보다 나은 제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르반”이란 말이 있지요. 하나님께 드림이란 뜻입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부모에게 드릴 것을 가지고 “고르반”이라하여 하나님께 드렸으면 부모에게도 할 일을 다 한 것이라는 생각을 통렬하게 공박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11-13)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부모에게)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다 했다고 해서 부모에게도 다 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부모에게 할 것은 하고 하나님께 할 것은 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계명(부모에게 공경하라)를 어기고 사람의 유전(하나님께 드리면 된다)를 따르는 것을 통렬하게 질책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께 드려라는 사람의 유전을 따랐다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하나님의 계명)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사람의 유전)는 것이 많이 행해지고 있음을 책망하는 모습을 보니, 오늘날 책망 받을 교인들 많으리라 봅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만 있어야 한다고 했나요?

제일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 사랑만 으뜸 계명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사랑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웃도 사랑하라를 포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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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이고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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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이웃사랑은 도덕이고 윤리이기에 하면 좋은 것이지만 구원에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이웃, 형제,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도덕이 아니라 윤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관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웃사랑은 하면 좋고 안해도 별 상관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 이것이 한국 기독교와 한국 사회를 부패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요?

정말 그러한가요? 정말 그렇다고 성경에서 찾아 보았나요?

마태복음을 보자구요.

(마태복음 25:40, 45-46)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0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5절)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 가리라” 하시니라. (46절)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는 바로 주님이시고,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등이라 합니다. 그들에게 행한 것이 예수님에게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함의 결과는 바로 영생과 영벌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이웃 사랑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이미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입니다.

마가복음을 보자구요.

(마가복음 10:17-21)

어떤 사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6계), 간음하지 말라(7계), 도적질하지 말라(8계), 거짓 증거하지 말라(9계), 속여 취하지 말라(10계), 네 부모를 공경하라(5계)’ 하였느니라.”

어떤 사람: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님: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은 이웃사랑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마가에 의한 예수님은 영생에 관한 질문을 받고 십계명중에서 아예 제1 계명부터 제4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의 계명을 생략하셨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더이상 하나님사랑을 말할 필요가 없으셔서 이웃사랑을 영생과 관련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이야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는 어떠한가요?

누가는 10:25-28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같이 언급합니다. 여기서도 영생을 얻는 행함에 이웃사랑은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영생을 얻는 이웃사랑의 예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고 설명하십니다. 비유를 마치고서는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어떠한가요?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하면서 이웃사랑을 강조했고,

그는 후기에 가서 기록하기를, “형제를 사랑해야 그 속에 영생이 거한다”(요한일서 3:14-16)고 결론 짓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믿는 자가 하면 좋고 안 해도 별탈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믿는 자가 하면 좋고 안 해도 별탈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믿는 자가 하면 좋고 안 해도 별탈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달린 문제입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켜라” (마태 19: 16-19)

누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이요, 윤리라고 했나요?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이천 년 전의 예수 제자들, 또 제자들에게 영향을 받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그 당시 교인들은 이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이 사실을 그들은 이미! 이미!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4~16절을 보고 이천년 전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알던 것 세 가지를 확인해 보자구요.

1)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이같이 이 천년 전의 예수믿는 사람들은 형제를 사랑해야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2)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처럼 이 천년 전의 성도들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예수 믿는 자라 할지라도 영생이 그 속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3)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이 천년 전의 교우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주신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이 천년전의 예수교회의 교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첫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 (정말로 믿어지나요?),

둘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 영생이 그 속에 없다는 것 (이것도 믿어지나요?),

셋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심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앞의 둘을 못 믿는 다면 이것도 믿을 수 없지요).

이 세 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생을 얻는 것은 형제사랑이라는 것을 ‘알거니와’, ‘알고’, ‘아는 바’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떠한가요?

바울도 이웃을 사랑하는 선행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로마서 2:6-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He will give eternal life)”

(딤전 6:18-1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take hold of that which is life indeed)”

이와 같이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는 “선을 행함”과 영생을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 믿는 것만 영생에 거하는 것이라고 했나요?

누가 이웃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의 문제요, 윤리의 문제이지, 영생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했나요?

이 천년 전의 예수 기독교가 이것을 알았듯이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이것을 알고 이것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웃사랑은 영생을 가져옵니다.

성경에서는 이웃사랑이 영생의 문제라고 답합니다.

성경에서는 이웃사랑이 도덕의 문제, 윤리의 문제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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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천국은 믿는 자만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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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에수 믿고 천국 갑시다” 합니다.

정말 그러한가요?

성경에서는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천국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라고 알고 있는 것을 성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읽으며 살펴보자구요.

많은 부분에서 그저 넘어가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찾아 확인해 본 적이 있는가요?

아, 그 말 그대로를 찾아보면, 그 직.접.적.인.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말입니다.

아마도!

요한복음 14장 1~3절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때문에 이 말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그 직접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것을 ≪성구대백과사전≫으로부터 전부 인용하였습니다.

1.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나라,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1) 임하는 (곳이 아니라!) 것이다. (눅 11:20; 17:20; 17:21; 19:11; 22:18; 23:51 등)

2) 들어가는 것이다. (마 5:20; 7:21; 18:3; 23:13; 막 9:47; 10:15; 10:24-25; 눅 18:17; 18:24; 18:25; 19:23 등)

3) 가까운 것이다. (마 3:2; 4:17; 10:7; 막 12:34; 눅 10:9; 10:11; 21:31 등)

4) 비유되는 것(천국은 마치...와 같다)이다. (마 13:11, 19, 24, 31, 33, 38, 44, 45, 47, 52; 16:19; 18:23; 20:1; 22:2; 막 4:30; 눅 8:10; 13:18; 20 등)

5) 전해야 하는 것이다. (마 4:23; 9:35; 24:14; 눅 9:2 등)

6) 이런 자들의 것이다 (마 5:3, 10; 19:14; 눅 6:20등, 참고: 큰 자와 작은 자 마 5:19; 11:11; 18:1; 18:4) )

7) 침입하는 것이다. (마 21:43; 11:12 등)

8) 합당하지 못하면 못 들어간다. (눅 9:27; 18:29; 19:12 등)

9) 잔치가 있다. (마 8:11; 눅 14:15; 22:16 등)

입니다.

2. 요한복음서의 하나님나라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3. 사도행전의 하나님나라

사도행전에서의 하나님나라는 전파되고 있고 강론이 되는 나라입니다. (행 1:3; 8:12; 14:22; 19:8; 20:25; 28:23 등)

4. 바울의 하나님의 나라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란,

첫째,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며(롬 14:17),

둘째,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으며(고전 4:20),

셋째, 합당한 자가(골 4:11; 살후 1:5), 유업으로 받는 것(‘곳’이 아니라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이라고 밝힙니다 (유업: 고전 6:9-10; 15:50; 갈 5:21; 엡 5:5 등).

여기 어디에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직접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등이 바로 “예수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예수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를 보자구요.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직접적인 구절은 있습니다!

(저는 지금 믿음과 행함(사랑)의 형평성을 비교하기 위해서 직접적인 구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행함만이 천국에 들어간다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믿음만이 천국에 들어간다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성경에 있는 대로,

믿음으로만이 아니라(not only), 행함으로도(but also)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직접적인 구절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0)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13:41-42)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참고: 마태 13:49-50,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둘(믿음과 의로운 행실)을 종합합니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 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한 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누가 예수 믿음으로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나요?

직접적인 성경구절은 오히려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을 소유하는 특권층 넷을 알아보자구요.

예수님께서는 아예 처음부터 천국을 소유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천국이 주어지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 셋(저는 그들을 천국의 특권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이 있는데,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둘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마 5:10),

셋째, 어린아이와 같은 자(눅 18:16,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고 넷째, 열매맺는 백성(마 21:43) 등입니다.

행한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라구요?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 엄연한 성경구절들!

저는 이 성경을 온전히 의지하고 싶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것(행하는 것 = 하나님나라 생활하는 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오직 믿는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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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천국은 올라가는 곳이다? (마태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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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흔히 “예수 믿으면 하늘나라에 올라간다!” 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천국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자구요.

성경에서는 ‘천국에 올라가자, 올라간다’라고 말씀보다는 오히려 ‘내려온다’, ‘임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물론 예수님도 승천하셨고(사도행전1:9)바울도 삼층천(?)을 다녀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고린도후서 12:1-4).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3:13)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하시면서 (그 나라가 하늘에 있다 하더라도)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중에는 결국 올라갈지 몰라도)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마 6:10) 나라이 하옵시며, 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이다 (눅 11:20; 17:20; 17:21; 19:11; 22:18; 23:51 등).

게다가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이전의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기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게 된다고 묵시합니다.

(계 3:12)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 1-4;)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3절a, 공동번역).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3절b-4절, 표준새번역.“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기보다는 천국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성경은 강조합니다.

둘째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올라가는” 초월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임하는” 내재적인 것임을 나타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신약성서 이전에 거의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정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단수가 아니라 복수] 에 있느니라.”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이 “너희 안에”를 읽고는 “내 마음속에!” 라고 이 본문을 해석함으로써 본문으로부터 한발자국 비켜가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분석하면,

1) 언제나 임하나이까? → 날짜와 시간을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2) 어떻게 임하나이까? → 볼 수 있는 유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3) 어디에 임하나이까? → 여기 저기의 장소를 말하지 않으셨으나, “너희들 가운데”(Among You!)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단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이것도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말이죠. 그것 때문에 제가 그 결정권을 가진 몇분에게 성경 본문을 조목 조목 대면서 없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제가 우리 학생교우들에게 매일 아침 이메일로 보내는 묵상 편지 중에 "너희들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a.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냐구? 너희들 가운데에 있지!"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b.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의 것이냐구?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자의 것이지!"

(눅 18:16-17)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c. "그 하나님의 나라를 어느 정도 받들어야 하냐구? 다른 것보다 먼저 해야지?"

(눅 18:29-30)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세상에서 구하는 것, 즉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위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등의 염려와 생각, 눅 12:22-30>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1) "우리들 가운데에서" 구하고 2) 어린아이 같이 받드는데 3)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해야된다는 누가복음 17장과 18장의 말씀으로 정리되네요. 사실 여기서(우리 가운데서) 주를 믿어 천국같이 사는 사람이 거기서(예수님이 계시는 완성된 나라에서)도 살고, 여기서 지옥같이 사는 사람이 거기 지옥에 사는 것 아닙니까?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아라. 천국은 너희들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다”(롬 14:17)라고 합니다.

김영호박사님의 "작은 천국 살기"를 볼까요?

하나님나라에 가르침 중에 세 복음서 모두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겨자씨 비유'이지요. 누가 13:18-19에서 우리는 겨자씨 천국이 있고 큰나무 천국이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겨자씨 천국은 안보고 늘 큰나무 천국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 요한계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천국)만 보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는 말씀대로 '겨자씨 천국'도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을 작은 천국(Small heaven)이라고 명할 수 있지요. 죽기 전에도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니까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천국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12:28). 그런데 이 작은 천국, 겨자씨 천국,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천국은 시시한 천국이 아닙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한 것처럼 이 겨자씨 천국은 맛이 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문제는 그 아름다운 작은 천국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겨자씨 천국, 작은 천국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으니 먼저 체험하고 그 천국을 가르치고 전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이런 기도로 복음서를 읽다보니 누가 17:20-21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영어성경, among you) 있다"라는 것을 찾았습니다. 아하! 그 천국은 두 세 사람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실현되고 경험되는 천국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같은 하늘, 같은 공기, 같은 건물들, 같은 기계들 속에서 참으로 미국을 알려면, 미국식 삶을 봐야 압니다. 한국을 알려면 한국식 삶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알려면 천국식 생활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마태 5:3)등, 우리 그것을 모두 조사해서 공책에 써 볼까요?

- 김영호, <작은 천국 가르치기> (도서출판 예수살기, 1995) pp. 153ff.

그러므로 우리 또한 궁극적이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나님나라화(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 할 수 있도록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현세의 천국과 내세의 천국이다. 그런데 예수의 내세의 천국은 현세이며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온(has come near) 나라임을 알렸고 그것을 전하며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삶이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소개한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 가운데 있다(눅 17:21, among you) 하였으니, 하나님나라의 삶은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누가 믿음으로만 하늘나라로 올라가자 했나요?

성경에서 확인해 보았나요?

한국기독교는 사랑하는 무리들 가운데 이미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늘나라에 올라가자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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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천당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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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성경에 천당이란 직접적인 단어는 없습니다!

그리고 16권짜리 방대한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천당”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천당! 이라구요?

“천당은 없습니다!”

성경에 ‘천당’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에 관한 신앙은 세 가지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첫째는 천당신앙이요,

둘째는 천국신앙이요,

셋째는 하나님나라 신앙입니다.

그러나 “천당은 없습니다!”

성경에 ‘천당’이란 직접적인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왜 이 말을 강조하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구요.

‘천당’이란 직접적인 단어는 성경에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고, 뿐만 아니라 총 16권으로 한 권에 1천 6백 페이지씩 하는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천당’이란 용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 책상 바로 앞에 놓여진 한영제 편, <기독교사전>에도 천당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천당’(하늘집)을 사전적인 의미로 살펴보면, 첫째, 하늘 위에 있다는 신의 전당을 말하고, 둘째, 죄를 씻은 영혼이 죽은 뒤에 간다는 곳, 셋째, 천신, 성인들이 만복을 누리는 곳, 하늘나라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이숭녕, << 국어사전 >>).

그러면, 이 천당이란 말은 왜 나왔나요?

첫째, 종교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조상신주를 모신다는 사당(祠堂)이나 불교의 불당(佛堂) 그리고 천주교의 성당(聖堂), 교회의 예배당(禮拜堂) 등을 생각하여 나온 말이라 생각됩니다.

둘째, 성경에 유일하게 ‘하늘에 있는 집’이라고 표현한 부분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고후 5:1~4)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장막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이것도 하늘집(천당)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육체(=장막집)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덧입게 됨을 말합니다(톰슨, 하퍼콜린스).

셋째는, 사회적인 배경으로 이것은 우리나라 선교 초기, 일제시대, 그리고 6․25전쟁 등으로 고난받은 우리 백성들이 현실(의 집)이 너무 고달프니 하늘(의 집, 꿈의 집)을 그리는 마음으로 아마 요한복음 14장의 “내 아버지의 집”, 베드로전서 4장 17절의 “하나님 집”(그러나 이것도 하늘집이란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8장 2, 5절 등의 “하늘에 있는 성소” 등을 천당으로 말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천당’을 설파했던 것이지요. 사실 그것 때문에 많이 위로받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대개 현실도피의 소산으로 나온 말입니다.

넷째,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보라!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 먼저다) “이제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계 21:3)고 피력합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이 ‘천당’의 ‘집(당)’신앙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집’신앙 또는 ‘당’신앙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천국’, 즉 ‘나라(國)’신앙을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國)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가르치셨습니다.

나라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사에서는 천국이 천당된 예화로 내려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에 도착한 서양의 선교사가 비장한 각오를 하고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 생긴 서양사람이 더듬거리며 말을 하기에 호기심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들어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믿고 천국갑시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갑자기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서양의 선교사는 "왜 가장 중요한 천국 얘기를 하는데 가느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하늘에도 나라가 있으면 거기에도 임금이 있겠고, 양반과 상놈이 구분되어 있을 텐데 지겹게 거기를 뭐하러 갑니까?”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서양선교사는 집으로 돌아와 한참 동안을 생각한 후에 사람들에게 외쳤다. “하늘 위에 집이 있습니다! 천당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비롯해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남의 집살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모였다.“ 그래서 천당이란 용어가 생겼다나요?

그래서 천당신앙의 문제점은,

첫째, 천당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는 성경에도 없는 것이므로 천당신앙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둘째, 현실도피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셋째, 이타적인 나라(國)신앙보다는 이기적인 집(堂)신앙을 만들게 된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초기 선교 시기에는 예수천당식 선교가 가능했고 그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성경이 ‘천당’을 소개하거나 알려주고 있지 않고, ‘천국’ 또는 ‘하나님나라’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것을 보여주며 깨우쳐 주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천당이란 용어에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천당’이란 용어가 없다고 섭섭해하지 맙시다! 성경에는 더 좋은 의미의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니까요!

누가 "예수천당"이라 말하나요?

한국기독교는 이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천당"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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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천국은 성경의 모든 사람들이 애용하는 용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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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천국은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천국신앙은 초월적인 저 하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천국신앙!

천당이 없다고 섭섭해하지 맙시다. 성경에는 더 좋은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나라(신국, The 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천국, The Kingdom of Heaven)는 동의적인 표현들이요, 동일한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사전적으로 보면, 희랍어의 바실레이아(Βασιλεια)도, 영어의 킹덤(kingdom)도 모두 ‘왕의 나라’을 지칭합니다. 이 개념의 의미가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왕의 나라"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나라’라고 할 때 그것이 기본적으로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영역(장소)이나 범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지배하심, 즉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왕으로서의 통치되는 나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이해되는데,

첫째, 영원하다는 것,

둘째,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땅 위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

셋째, 미래에 그 완성이 기대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놀만 페린, 성서대백과사전≫

그런데 이 둘(천국=하나님나라)은 같은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유독 한 사람만 "천국"이란 용어를 쓰고 나머지 모두가 "하나님나라"라고 사용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만!

그 한 사람이 바로 마태입니다.

마태라는 사람은 천국(하늘나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마가와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좋아합니다.

왜 같은 것을 지칭하는데 이렇게 다를까요?

주의 기도문을 비교해 보자구요.

눅 11:2~4

마 6:9~13

1. ××× 아버지여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3. 나라이 임하옵시며

×××

4.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계속)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3. 나라이 임하옵시며

4.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5.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계속)

이와 같이 마태는 누가(그리고 다른 성서기자)와 비교해 볼 때 특히 ‘하늘’을 좋아합니다. 그가 얼마나 하늘을 좋아하는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을 무려 15번(5:16, 6:1, 7:11, 10:32, 12:50, 16:17, 18:10, 23:9 등)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마가나 누가 등의 복음서에서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을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전도하실 때 하신 말씀을 비교해 보자구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 4:17)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으니(마가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누가 10:9),

여기에서도 역시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태는 유독 ‘하늘나라’(천국)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물론 마태복음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상을 가진 유대인을 겨냥한 복음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같은 말씀을 가진 누가의 평지수훈(눅 6:17, “평지에 서서” 이하)과 마태의 산상수훈(마 5:1, “산 위에 올라앉으시니” 이하)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구요. (참고: 우리는 누가복음의 "평지수훈"은 모르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만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선 평지설교라 하고 마태복음에선 산상수훈이라 하여 말씀 권위에 격차를 두는 발언들이 있기도 합니다).

눅 6:20 (평지수훈 중에서)

마 5:3 (산상수훈 중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신국)가

너희 것(yours)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하늘나라)이

저희 것(theirs)임이요

이것을 비교해 보면 같은 것을 지칭하더라도 마태는 어쩐지 초월적인 하늘에 있는 천국(심령이 가난한 자 the poor in spirit, 저희 것 theirs)을 강조하고 있고 누가(그냥 가난한 자 the poor, 너희 것 yours)와 마가는 임재적인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으로부터 우리는 보통 천국은 하늘에 있다 하며 “장소”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라고 하면 하나님이 통치하며 다스리는 나라라고 해서 장소의 차원을 넘어 어디든 하나님 계시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신앙에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보다 하늘을 강조하는 것 조심,

둘째, ‘여기 지금’(Here and Now)이라는 함께 하는 내재적인 신앙은 소홀히 하고 ‘저기 하늘에’라는 초월적인 신앙만을 갖는 것 조심,

셋째, “천국”이란 단어는 성서 전체에서(마태만이 사용한) 협소한 용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천국’과 ‘하나님나라’ 중에 어느 단어를 더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천국은 마태 만이 사용한 용어입니다. 제자들 거의가 천국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나라라고 합니다. 마가도, 천국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나라라고 씁니다. 누가도, 천국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나라라고 씁니다. 사도 요한도, 사도 바울도, 히브리서 기자도, 야고보도, 천국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나라라고 씁니다. 이렇게 신약성서에서는 마태(딤후 4:18 "the heavenly kingdom" 제외)를 제외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모두 천국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 기자들은 “하늘”이라는 장소를 생각하기 쉬운 용어보다 어느 곳에서나 계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선호한 이유라고 봅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가 마태만 독특하게 언급한 천국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천국”이란 두 글자가 “하나님나라”란 다섯 글자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부르기 빨라서 그렇기도 합니다. 또 유대인처럼 하늘을 좋아하는 우리네 종교심성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의미로 보나, 사용횟수로 보나 하나님의 나라가 더 낫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천국’을 좋아하는 마태 조차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다섯 번(6:33;12:18;19:24;21:31;그리고 21:43 등)이나 사용합니다. 우리는 마태 만이 사용한 이 독특한 ‘천국’이라는 용어보다는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하나님나라’라는 용어를 더 중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 기자들처럼 하늘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늘과 하나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의 연관성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기독교는 너무 많이, 믿음을 갖고 있다가 죽은 뒤에 가는, 그리고 저 하늘 구석 어딘 가에 있는 장소를 설정하기 쉬운, 천(하늘), 천(하늘), 천(하늘), 합니다.

그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그리고 어디든지 왕으로서 계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믿음과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을 위시한 성서기자들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하늘에만 계시다고 했는가요?

성경에는 하늘 나라를 말하기 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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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천국에 가자? (마가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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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Heaven)이란 용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대기권의 sky)이나 천체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하늘(우주공간의 space)과는 틀립니다. 우리가 만일 “저 가정은 천국 같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sky나 space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Heaven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하늘나라)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sky나 space에 Heaven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합니다.

우리 한국인의 신앙은 내재적인, 동행하고 함께하는 하나님나라신앙은 소홀히 하고 하늘 어디쯤 있을 초월적인 천국신앙에만 빠지기 쉽습니다.

자, 여기에서 ‘천국에 가자’(go!)라는 말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늘 어디쯤 있을 장소로서만 천국을 생각하니 성경에도 거의 쓰이지 않는 “천국가자!”(go!) 하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성경원어를 살펴보면, 천국에 ‘가자’(go)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은 ‘완전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면서 그 길을 가자’(go!)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때까지 인생의 가는 모든 역정을 참아내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천국은 ‘가는 것’(to go)이 아니라 ‘들어가는 것’(to enter)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항상 들어간다고 씁니다.

가는 것과 들어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다’라는 말을 쓸 때는 멀리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나 ‘들어간다’라는 말을 쓸 때는 가까운 방(房)이나 문(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어느 단체에 가입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생명교훈이 담겨있는 공관복음서 안에만 보더라도(더 이상 볼 것 없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마 23:13),

둘째, 범죄한 자(막 9:47)요,

셋째,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막 10:15;눅 18:17),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자(마 18:3),

넷째,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마 7:21),

마지막으로, 재물이 있는 자(눅 18:24), 부자(막 10:25;눅 18:25;마 19:23)는 들어가기가 힘들어!

천국은 멀리 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 가까이 있으므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멀리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안에’(Among You, 복수) 있다고 했습니다(눅 17:21). 예수님은 항상 “천국은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마다 얻는다” 하였고 “천국이 너희 것이다 했습니다.

천국은 가까이 있다!

들어가는 것(곳이 아니라!)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운 것입니다. (마 3:2; 4:17; 10:7; 막 12:34; 눅 10:9; 10:11; 21:31 등). 우리는 천국은 멀리 있는 곳(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나라(천국)는 가깝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까이 올 것이다’라는 미래형(will come near)이 쓰지 않았습니다. 또 ‘가깝다’라는 현재형(comesnear)도 아닙니다. ‘이미 가까이 왔다’라는 완료형(has come near)을 썼다고 함을 유의해야 합니다(물론 헬라어의 어법에도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복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라는 지시 대명사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복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영호박사님이 교회교사강습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 왔다. '이 복음'을 믿으라" (마가 1:15)고 하면서 바로 “이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복음'입니다"하고 설명하니까, 어떤 교사가 "그 말씀이 안 믿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그러면 "믿어질 때까지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세요!"하셨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다 마쳤는데, 한쪽 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믿지 못하겠다던 그 교사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사가 일어나더니 "목사님, 이제 믿어져요. 이제 믿어져요!"하면서 울며 외쳤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머지 다른 교사들도 함께 울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가르치는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회개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천국이란 장소를 설정해 놓고 가는 태도인 “가자!”(go) 라는 용어를 쓰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바로 가까이 임한 그리고 우리 안에 형성되는 천국에 “들어가자!”(enter) 라는 용어를 씁니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즉 믿음으로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 임하는 것(!)을 더욱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간다”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들어간다(enter)라는 용어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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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도는 예수 이름만 전하면 된다? (행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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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재미있는 사실은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나라’(천국)라는 용어를 한 번도 쓰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나라 사상은 구약성서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나요?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에 이것이 처음으로 선포되었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 때문에 오셨고,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이것 안에서 사셨고, 이것을 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항상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도들이 한결같이 “하나님나라를 전했다”는 사실이 참 우리에게 와 닿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예수님만 전해 왔거든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1)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전도: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전하셨고, 특히 부활하신 후에는 사십일 동안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 4:23; 9:35; 24:14; 눅 9:2; 행 1:3 등).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2) 제자들의 하나님나라 전도 (행 8:12; 19:8; 20:25; 28:23; 28:31 등).

(행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특히 사도행전에서의 하나님나라는 전파되는 나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나라를 강론하고 권면하고 증거하고 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성령행전, 전도행전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행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행 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 28:23)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28:31) 바울이 온 이 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그렇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전파되고 전도되어야 하는 나라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만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나라도 전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강론하고 권면하고 전도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만 전도했지 그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나라는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제부터 예수 이름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강과 희락이 뜨겁게 넘치는 하나님나라를 살면서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소개한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 가운데 있다(눅 17:21) 하였으니, 하나님나라의 삶은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righteousness)와 평강(peace)과 희락(joy)이라

한국 기독교는 이제까지 예수님 이름만 전하고 그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나라는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 이름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나라를 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수 이름만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으로 사는 천국, 하나님 나라까지를 전하였습니다!

누가 예수 이름만을 전도하라 했나요?

성경에서는 예수 이름만 전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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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믿음으로만 예배드려야 한다? (히브리서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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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믿음으로만 에배드리면 된다구요?

그러나 사랑을 담지 않은 예배는 열납 하지 않으신다! (마태복음 12:7-8)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알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동네의 어느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남남(南男)이신 예수님께서 북녀(北女)인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막힌 것(“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을 열고 사랑의 대화를 나눌 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이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 힐카누스에 의해서 자신들의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계속 자신들의 제의를 위해서 북부 팔레스틴의 이 그리심산을 이용했습니다(BC 128년경). 서로의 적개심 때문에 나라가 갈라지고 예배 처소가 갈라지고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소를 가리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이 그때이다”하며, 상종치 않는 원수된 자를 만나시며 대화를 나누며 하신 말씀, “아버지는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적개심으로 제각기 성전을 가지고 제각기 예배하는 것보다 막힌 것을 풀고 함께 예배해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웃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남아 있는 한 신령과 진정의 영의 예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으므로 그 마음으로 예배드린들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는 제사를 성경에서 모두 찾아 살펴보면, 제사 그 자체보다 순종을, 상한 심령을, 선행과 공의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비를, 선행과 나눠주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 (시편 51:16-17)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3) 그래서 예언서에서는 제사를 잘못 드림에 대해 무섭게 질책을 합니다.

그 질책의 내용은 남을 억압하고 남을 억울하게 만들고, 즉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사랑한다 하며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은 위선이어서 주님이 받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이사야, 아모스).

(사 1:10~17)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4)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렇다면 이웃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은혜 받은 마태는 이것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5)-a. “제사보다는 긍휼을!”

(마 9:10~13)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하시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죄인과 의인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난데없이 제사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왜 그럴까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안식일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휼이 없는 한 그 제사는 주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마태 12:8)으로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예배를 찾으십니다.

5)-b. “제사보다는 자선을!”

(마 12:1~7)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제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둘째, 바울이 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는 히브리서에 가면 “선행과 나눠주기”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 오직 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아, 여기서도 선행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란 선행과 나눔이란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지요.

셋째,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모든 제물보다 더욱 원하시는 산 제사의 제물은 바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마가복음 12장 28~34절을 보여 주시니 이 모든 것이 잘 정리됩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하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전체로 드리는 헌금과 번제물과 기타 제물들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예배란 우리의 사회에서 사랑을 나누고 직장에서 사랑을 행하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예배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제사보다 순종(하나님께)을 강조했다면 (그래서 주님은 예배(제사)에 관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강조하셨다.),

이렇게 신약에서는 제사보다 자선(이웃에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 사랑이란 것이 예배에까지 영향을 끼치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의 제사와 예배를 흠향하신다는 것입니다.

한국기독교는 바로 이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란 바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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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카인은 믿음으로 예물을 드리지 않아 열납받지 못했다? (창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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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하나님께서 왜 카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지요? 창세기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였느냐”며 선행을 하지 않아서 열납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듭말하거니와, 이웃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남아 있는 한 신령과 진정의 영의 예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으므로 그 마음으로 예배드린들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그 예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제사를 드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잘 나타납니다. 우선 “제발 성경을 한쪽으로만 보지 말자!”라고 또 한번 강조하면서 그 이야기를 성경 전체에서 해석해 봅니다.

창세기 4장의 아벨과 카인에 대한 성경 자체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물론 학자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이 가진 유목문화와 이방민족이 가진 농경문화와의 충돌에서 유목문화를 택하였다는 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서 11:4의 본문만을 보고 이 제사의 성격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강조합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더욱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본문을 보십시오.

(창세기 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기보면, 제물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4:4)이라 해서 먼저 아벨이라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그 마음)을 받으시고 and 그의 제물을 받으셨고, “카인과 그 제물”(4:5)이라 해서 카인이라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그 마음)을 받지 않으시고 and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구요?

첫째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아벨) 입장의 해석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예물을 드려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설입니다. 히브리서의 해석은 카인은 믿음 없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벨은 첫 열매(처음 것)를 드렸는데, 카인은 첫 열매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카인의 것은 열납 받지 못했다 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을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둘째는 창세기 4장 자체의 선행(카인) 입장의 해석입니다. 카인은 아벨의 제물은 열납 받으시고 자기의 제물은 열납 받지 못하자, 하나님께 분노를 표시합니다. 그러자, 그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왜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창 4:5-7)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였느냐? 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참고: 약 4:17,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창세기에서 최초의 “죄”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그 죄의 정의는 선을 행하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은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자체의 해석은 선행을 하지 않으면서 제사 드리는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 창세기의 해석은 유다서와 요한일서에서 입증하고 있습니다.

요한 일서 3장 12절은 결국 카인이 제사 드린 문제로 아벨을 죽이게 되었는데, 카인은 악하였고 아벨은 “그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아벨은 행위로 의로운 사람으로서 제사를 드렸고, 카인은 그렇지 못하여 하나님께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서는 악한 행위로 가는 것을 “가인의 길”(11절)이라고 말합니다.

(요일 3:12) “어찐 연고로 아우를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왜, 창세기 4장의 본문 가운데에서 의미를 더 찾으려고 하지 않고 멀리 가려고 할까요? (두란노서원에서 발행한 인물별 성경공부에서는 창세기 4:6-7의 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묵묵합니다.) 특히 히브리서의 믿음이라는 차원에서만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선행의 차원에서 본 창세기 자체의 하나님의 말씀과 유다서와 요한일서의 해석도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히브리서가 정말로 “믿음으로만” 제사를 드리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이건 정말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선행”이라는 차원은 제사(예배)하고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피력합니다.

앞서말한 히브리서 13: 16을 다시 보면,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구구절절히 언급하면서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히브리서에서의 제사와 제물에 대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선행과 나눔이다!”

이래도 오직 믿음으로만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하겠습니까?

야고보는 말합니다.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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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면 구제해야 한다! (누가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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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은 참 알아듣기가 힘든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제시해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렇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행위는 바로 구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헌금은 구제에 사용되어야 하늘에 보물을 쌓게 됩니다. 그래서 “제사보다는 자선을”이란 말은 자선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느냐 마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1장에서도 바리새인에게 십일조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십일조도 해야 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네, 결국 십일조는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일조의 정신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하여 성경은 두 가지 정신을 가질 것을 말합니다.

하나는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는 정신이요,

하나는 십일조를 제대로 쓰는 정신입니다.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쓰임새도 중요합니다.

(민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4, 26, 28; 느헤미야서 등).

(신 26:12~13)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비슷한 성경구절: 신 12:11-12; 12:18; 14:28-29 등)

하나님이 율법으로 제정해 주실 당시의 십일조는 레위인과 과부와 고아와 객을 위하여 베푸는 데 그 쓰임새가 있었습니다. 특히 삼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는 제사가 끝난 다음에 반드시 다음 사람들에게 베풀어져야 했는데, 레위인 뿐 아니라 전적으로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구제 봉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갈수록 그 정신이 쇠퇴해져서 결국 종교권력을 잡은 레위인들에게만 국한하게 되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교회는 이 십일조의 의미를 새겨서 바르게 구제선교에 사용해야 할 줄 압니다.

한국기독교는 바로 이 길에 나서야 합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하늘에 보물 쌓는 길을 분명히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구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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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경건은 교회생활 잘 하는 것이다? (약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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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성경에서 그러한가? 확인해 보자구요.

사회봉사없는 경건은 경건이 아니다! (야고보서 1;27)

성경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경건이란 첫째 사회봉사, 둘째 자기성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부산에서 출발한 어느 교단은 한때 내면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외모로도 경건함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들고 다닐 때도 허리에 대거나 그냥 건들건들 들고 다녀서는 안되었습니다. 반드시 가슴에 성경을 품어야 했습니다. 걸음도 종종걸음해서는 안되고 양반걸음이라는 팔자 걸음을 걸어야 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기침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하며 박수를 친다든가 하는 것들은 경건한 신앙인이 해서는 안되는 것들이라고 못박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그것은 경건의 일부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인지, 아닌지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요 9:31) 하나님이 ...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유 1: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들은 모두 경건함의 결과나 경건해야 할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이란 무엇이냐?” 할 때에는 다른 성경에서 찾기가 힘들고, 야고보서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니까, 경건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야고보는 경건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으며 이 정의는 성경에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합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것을 쓴 야고보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의 젖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주 예수를 진정으로 알았고, 가정에서의 경건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정말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정생활을 하면서 육신적으로 피부적으로 예수님의 경건을 깨달았으며 부활하신 후에 영적인 경건함의 의미를 더욱 잘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후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야고보가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고 정결한 ‘경건’이란

첫째,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봐야 하는 이웃 사랑(구제)을 말함이요,

둘째,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하나님 사랑(기도)을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경건이란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입니다.

“나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반대학을 다닐 때, 보수합동측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술 담배 입에 대본 적이 없었고, 새벽마다 Q.T(Quiet Time, 경건의 시간)를 2시간씩 하면서 가두전도, 축호전도, 버스전도, 그리고 전철전도까지 하였고 네비게이토,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등등을 거치기도 했다. 나는 참 경건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그런 것은 경건의 일부에 속하는 것이요, 진정한 경건이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란, 첫째로 사회봉사와 둘째로 자기성찰이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Religion that is pure and undefiled before God and the Father is this: to visit orphans and widows in their affliction and to keep oneself unstained from the world.”(KJV 그리고 RSV성경에 따른 야고보서 1:27)

영어성경에서는 밑줄친 부분과 같이 경건을 ‘종교’(=Religion)와 동일시하였습니다. 영어성경을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종교란’ 등과 같이 생각됩니다. 즉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사회선교 하고 사회봉사 하는 것이 종교(=경건)요, 자기 스스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기도 생활하며 자기를 지키는 것이 종교(=경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까지 반쪽만 경건했고 반쪽만 종교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야 비로소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가끔 욕을 먹고 비난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종교성을 생각하면 으레히 일차적으로 사회봉사 하는 것을 경건성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서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린 반쪽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기독교와 교회는 재정은 늘고 있는데 왜 교회에서 선교가 안되나요? 왜 교회에서 선교(사회봉사+전도)가 먼가요? 그것은 우리가 경건치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니면 절름발이식으로 한쪽으로만 경건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연구팀이 전국의 7백 94개 교회를 표본 조사했는데 교회는 자체 내 유지하기에 급급한 소비성 집단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평가에서 예외인 교회도 있지만 많은 교회들이 가난과 청빈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영권으로 가득 차야 할 교회가 금권으로 치닫는 수가 많았습니다. 세속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스스로 가난해지고 스스로 지키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것이 종교(=경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중에 호화 호텔 모임 중지, 대중교통 이용, 교회와 목사의 재산 공개, 교회 예산의 30%를 사회 선교비로 쓰자 등등을 결단하며 ‘교회가 해마다 10%씩 가난해지자’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모 교단의 선교 50돌을 기해 마련된 “교회 재정 지침”을 보면 교회 재정의 20%는 자선사업비에 써야 한다고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그 뒤 60여 년이 지난 어느 해, ‘바른목회실천협의회’는 말하기를 “우리의 교회가 성장에 몰두하여 이웃의 아픔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였음을 회개하고 나누는 교회로 거듭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교회 재정의 4.5~7%에 머물고 있는 사회선교비의 비중을 25%에 이르도록 개선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경건해야 합니다.

경건이란 이웃사랑 하나님사랑입니다.

누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경건하다고 했나요?

성경에서의 경건의 정의의 첫째는 사회봉사입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사회봉사하지 않는 한 경건하지 못합니다.

경건과 종교와 선교는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스스로 가난해지고 스스로 지키는 것도 선교요 종교요 경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건하지 않아서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꼭 맞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사람 하나를 소개합니다.

바로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입니다. 그의 경건한 삶을 보면 경건이란 구제와 기도라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합니다.

(행 10:1~4)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이방인이지만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많은 구제와 항상 기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의 경건은 야보고가 말한 사회봉사(구제)와 자기성찰(기도)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사도행전 10장 1~48절 전체를 고넬료에게 할애하면서 구제와 기도를 계속 강조하였습니다.

(행 10: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또 한 사람 경건한 여제자를 소개하면,

(행 9:36~40)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여제자 도르가는 그의 사회봉사라는 경건한 행위 때문에 베드로를 감동시켰고 그 베드로의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으로는 예수에게서 친구라 불린 나사로가 있었고 ‘달리다굼’ 하면서 일으키신 야이로의 딸이 있었고, 울고 있는 한 과부의 젊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도 두란노서원에서 강론을 듣다가 떨어져 죽었던 유두고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는 영광스럽게도 바로 이 도르가가 유일하게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르가! 그녀는 모든 과부들을 감동시키고 베드로마저 감동시킨 경건한 제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사회봉사와 자기성찰입니다. 즉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가 더욱 경건해지기를 위해 우리는 구제에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 기도만이 경건한 생활이라고 했나요?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움이 없는 정결한 경건으로 먼저 사회봉사(구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기도, 말씀, 얘배 등의 생활만을 경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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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구원은 이루라! (빌립보서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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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원은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구원에 가까왔다,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이루라, 자라라, 진보하라, 온전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라 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받아서 '젖'을 먹는 믿음으로, 자기가 해서 '밥'을 먹는 믿음에 이르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음을 보시면 구원의 확신이 있는 바울도 말하기를 "나는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을 얻었으니 다 되었다"가 아니라(결코 결코 결코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확신을 가지고서도 "구원에 가까왔다!" "구원을 이루라!" "믿음을 온전케 하라!" "믿음의 진보를 이루라!"고 했습니다.

그런 구절이 얼마나 많은 지!!!

구원에 가까왔다! 구원을 이루라! 믿음의 진보를 이루라! 사랑안에서 자라라!

1) (롬 13:10)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또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왔다!

2) (히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구원에 가까웠다!

3) (딤전 5: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 6:21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 처음 믿음을 버린 자는 심판받는다!

4)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5) (살전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라!

6) (빌 1: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 너희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이 내(바울의) 구원을 이룬다!

7) (빌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 믿음이란 진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8) (딛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 믿음을 온전케 하라!

9) (빌 3:12-16)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 바울처럼 "온전히 이룬 자들"도 이루어가는 도중이다 라고 생각하자!

10) (고전 13:2)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온전케 만드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11) (고전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아직도 젖(믿음)만 먹지 말고 밥(믿음=사랑)을 먹어라! (젖은 받기만 하고 혼자 독차지해서 먹지만 밥은 손수 지어서 나눠먹어야 하거든요)

12) (히 5:12)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찌니라

-> 다시 그리스도의 초보로 돌아가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라!

13) (엡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를 이루어 사랑 안에서 자라라!

14)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 그리스도가 구원의 일을 이루신다!

15)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도록 하는 도중이다!

16)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사랑이 온전하게 한다!

17) (골 4:12)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 하나님의 뜻 안에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라!

18) (딤전 4: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을 구원하리라!

19) (딛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 믿은 것이 행위로 부인되면 안 된다!

20) (야고보서 2장 14절 이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하지 못한다.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 믿음은 행함이고 행함은 믿음이다!

우리에게 매우 도전적인 말씀들입니다.

예수십자가의 강도가 가진 (열매 없는) 죽기 직전의 '믿음으로'부터 바울의 (부름의 상이 있는) '온전에 이르는 믿음에 이르는' 우리가 됩시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자!” (딤전 6:12)

위 본문들은 우리의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롬 1:17) 과정에 살고, 우리의 구원도 "구원으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 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울과 그 이외의 기자들은 “오직 한번의 믿음으로 다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믿음에 “오직”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령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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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제3의 종교개혁의 물결!

16세기에 종교재판을 받은 세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지구는 평지이다, 네모형이다, 또는 음직이지 않는다!“라고 생각했을 때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있다!“고 했다. 지구 중심적인 사고에서 태양 중심적인 사고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그의 논문은 로마교황청의 제지로 19세기말까지 발행되지 못했다.

중세기 구교가 부패의 극을 달릴 1517년, 종교개혁의 일단의 분위기 속에서 독일의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나는 이 길이 확실한 길이라고 믿는다”하며 1500년 동안의 기독교역사에 일대 획을 긋을 전환을 단행하였다. 인간의 행위중심에서 믿음중심으로의 전환이었다.

얼마후 이탈리아의 갈릴레아는 로마교황청의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하며 과학뿐만 아니라 기독교역사를 확실하게 전환시켰다.

그렇다. 전환이다.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식 전환이라고도 하고 혁명이라고도 하는데, 이렇듯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를 향한 전환이 요구된다.

그러나 지구만 도는가? 태양만 도는가?

지구와 태양은 같이 돌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가?

오늘의 제3의 종교개혁 이것이다.

20세기 마지막 종교개혁일(1999년 10월 31일)을 기해 천주교와 루터교가 480년 동안의 긴 “의화논쟁”(義化論爭)을 끝낸다고 발표했다. 의화논쟁이란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천주교의 전통적 가르침과 “신앙만으로 구원된다”는 루터교 주장이 맞부딪친 교리논쟁이다.

그 내용을 보면, 천주교도 바뀌었지만 그동안 5백년 동안의 루터-칼빈으로 공고화된 개신교의 신앙과 신학의 흐름에 전환이 생긴 것이다.

“지구도 돌고 태양도 돈다”고 하는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5백년전의 루터는 거의 사도 바울의 서신만을 독파했으며, 바울식 주장과 전통에 매였으며, 공관복음서를 소홀히 했으며 예수의 동생이 썼다는 야고보서와 같은 서신은 지프라기 서신이라 하여 혹독하게 홀대하였다. 성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편독을 하고 편애를 하였던 것이다.

이웃사랑이라는 것도 상급을 얻기 위해 행하는 것 또는 도덕적, 윤리적인 문제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은 “예수 믿음”(하나님 사랑)이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아니듯이 “이웃 사랑”도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의 차원임을 여기 저기서 증거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는 하나님사랑(믿음)만 말하지 않고 꼭 이웃사랑(선행)을 나란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영생과 연결시켰다. 하나님사랑뿐만 아니라 (not only), 이웃사랑 하면(but also)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믿음이 영생의 기초라면 사랑은 영생의 완성이다.

솔직히 말하면 우린 이 말이 믿어지기 힘든 개신교 전통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성경이고 저런 말씀은 성경이 아니란 말인가?

지구도 돌고 태양도 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시대의 개혁이다. 루터-칼빈의 종교개혁의 사상은 지난 5백년 동안 훌륭히 행사해 왔지만 그 당시에 적합한 종교개혁으로서 오늘날은 더 성서적이고 더 시대적인 개혁을 요청하고 있다. 바로 루터의 믿음차원의 종교개혁은 이제 사랑차원의 종교개혁으로 완성되며 결국 믿음이 사랑이요, 사랑이 믿음이라는 성서적 종교개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구교의 “의화논쟁”에서 결국 “의화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다!”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의롭게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합의하게되였다. 하나님의 선행은총 앞에 인간의 믿음도 내놓고 선행도 내놓은 것이다. 이렇듯 오늘 이 시대는 전환된 개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not only by faith (믿음만 아니라), but also by love(사랑으로도)" 이다.

지구도 돌고 태양도 돈다는 이 전환된 신앙체계는 우리의 한국의 현실에서 절박하다. 우리의 내면적-보수적 하나님사랑의 신앙은 사회적-진보적 통일이라고 하는 이웃 형제 사랑의 신앙과 함께 돌아야 한다.

“Not only 하나님사랑, but also 이웃사랑"이 바로 공관복음서에서, 요한의 분서들에서, 그리고 바울의 서신들에서 말하는 성서의 전체적인 통전적인 증언이다. 게다가 이 둘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지구도 돌고 태양도 도는 신앙체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하신 과제는 바로 통일이다. 하나(一)의 큰 줄기(統)를 갖는 것이라 해서 “통일”(統一)아닌가. 분단된 신앙을 극복하는 것이 민족통일을 위한 길이요, 민족통일을 위한 신앙이 바로 하나님사랑의 신앙임을 보이는 신학이 통일신학이고 그 교회는 민족교회이다.

이제 우리의 기독교가 루터식 부분식 전환이 아니라 21세기의 온전한 전환으로 가기를 바라면서 통일신학에 복무해야할 시점이다. 그러므로 통일신앙과 신학을 교회 안에서 대중화시키자.

많은 교회들이 한쪽 신앙체계인 개인 신앙을 강조하였고, 그 여파로 사회적 신앙을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시하여온 결과로, 민족분단의 문제를 극복하기 어렵게 만들어 왔는데, 바로 전쟁과 분단으로 말미암아 생긴 적대감에 의해서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체계는 왜곡되고 뒤틀어져 왔기에 사랑의 기독교로 바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상에서 본 성서에서의 믿음과 사랑의 일치의 통일신앙은, 신앙으로 민족으로 분단되어 있는 한국 상황에서,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생각해야할 바로 하나님이 한국 기독교인에게 주신 과제이다. 그리고 통일신앙이야말로 한국 기독교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통전적인 신앙을 이루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계 사이의 신앙의 괴리를 없애고 다리 놓기 위해서는 대중적 작업인 통일신학의 성서이해와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들은 분단된 신앙과 분단된 민족을 통일하는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교회에 의해 도전 받고 있는바, 21세기 한국 민족교회의 신학은 교회와 세계에 대해 변증법적인 기초를 두고 있는 “통일신학”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통일신학의 대요(大要)는 교회개혁(신앙통일)이 곧 분단극복(민족통일)이라는 맥을 갖고 있는데, 앞으로 신앙통일로 말미암아 온전한 민족통일을 이루는 시기가 하루속히 앞당겨 지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