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밟기·십자가 묻기, 과연 성경적인가?
대림감리교회 이인규 권사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협력상담위원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 카페 운영자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는 유명한 선교단체에서 땅밟기(Walking pray)를 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책들도 서점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온 감리교의 A목사라는 사람이 소위 영성집회, 부흥집회를 인도하면서 금가루가 뿌려지고 금이빨로 변하는 집회를 하더니, 이제는 무속적인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A목사가 주장하는 것은 land work(땅작업)이라고 부르는데. 땅이 저주를 받았으므로 그 저주를 풀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목사는 땅밟기는 물론이고, 나무십자가를 땅 위에 세우거나 땅에 묻어야만 저주에 묶인 땅이 풀린다고 주장한다. 이 저주를 풀기 위해 소금도 뿌리고 벽을 붙잡고 기도하기도 한다. 문과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성수를 뿌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이렇게 무속신앙화 되고 있을까? 물론 성경은 땅밟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큰 모순에 빠질 수 있다.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 밟는 모든 땅 사람들로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신 11:24-25).
본문에서 땅을 밟는 대로 소유가 된다는 의미는 장차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의 사방 최대 경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것을 크리스천들이 현재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매우 이상한 해석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이 밟는 땅은 모두 기독교인의 소유가 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땅밟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여리고성의 사건을 인용한다. 만약 여리고성을 돌았던 땅밟기가 땅의 저주를 푸는 방법이 되고, 어떤 주술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면, 왜 다른 성경과 신약에는 땅밟기로 저주를 풀었던 경우가 없는가? 만약 여리고성의 사건을 그대로 적용시키려면, 여리고성을 돌았을 때에 불었던 나팔도 함께 불어야 하고, 언약궤도 뒤에서 따라야만 하지 않는가? 또 큰 소리도 질러야 하지 않는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수 6:2~5).
땅밟기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그 땅밟기가 주술적인 효과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며 그 행위는 일회성의 상징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나무 십자가를 땅에 묻어야만 저주가 풀린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한마디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는 다른 복음이며 거짓복음이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감리교의 A목사에게 한 교인이 아파트에서는 어떻게 나무십자가를 묻어야 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A목사는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묻으라는 코미디 같은 답변을 필자는 직접 들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물체가 어떤 주술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며 십자가는 예수님의 대속이 그 본질적인 의미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십자가 자체를 신앙적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십자가 자체가 어떤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된다. 땅에 십자가를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오히려 비기독교적인 행위다.
저주를 풀기 위해 십자가를 땅에 묻어야 하는가? 벽을 잡고 기도해야 하는가? 소금을 땅에 뿌려야 하는가? 땅밟기를 해야 하는가? 성수를 뿌려야 하는가? 저주를 풀기 위하여 어떤 정형화된 대적기도문이 특별히 필요한가?
이러한 것들에 집착하게 되면 주술적이거나 무속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 모든 저주와 권세는 예수의 이름으로 온전히 이길 수 있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만 해결된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충분하다.
성경적인 실제적인 사건을 살펴보자. 광야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뱀에 물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8-9).
이 사건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속사적인 사건이 된다.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의미로 비유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광야의 놋뱀의 사건을 직접 설명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우리는 이 예표적인 의미를 잘못 오해하면 안된다. 이 장대에 달렸던 놋뱀 자체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이 놋으로 만든 뱀을 어떤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놋뱀은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일부는 그 놋뱀을 보관하고 있었고, 그것에 분향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느후스단”이라는 히브리어는 “구리로 만든”이라는 뜻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리라고 하셨고,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다. 그러나 놋뱀 자체는 구리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적 대상이 아니며, 놋뱀 자체에서 어떤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놋뱀은 상징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 본질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제외된 모형은 우상이 되어 버린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땅에 묻으면 저주가 풀린다는 주장이 구리로 만든 놋뱀의 우상과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인은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 승리할 수 있으며, 모든 저주를 풀 수 있다. 예수 외에 다른 중보자가 필요없으며, 은혜와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없으며,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이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님이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의 이름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거나, 그 이름의 가치를 약화시킨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예수의 이름으로 부족하여 땅밟기를 하고, 십자가를 땅에 묻으며, 성수와 소금을 뿌리고, 기둥과 벽에 기름을 발라야 하는가? 더 이상 유치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지 말자. 제자들이 귀신을 쫓지 못하였을 때에, 제자들이 왜 귀신을 쫓지 못하였는지를 질문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은 유일한 방법,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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