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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스크랩] 칼빈주의는 복음과 일치할까?(1)

by 디클레어 2010. 5. 12.

 

 

이 글을 작성하면서...칼빈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거의 금기시 되는 분위기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치 칼빈 신학을 비판하면 그가 세운 교리들을 비판하면 기독교가 무너지기라도 하는듯 열을 내면서 칼빈 찬양을 하는 추종자들을 보면서 암담함을 느낀다.

 

이미 신학계에서는 성경을 비판하는지 오래다. 자유주의 진영과 진보진영에서는 성서가 편집되었으며 고대 문명지의 발상과함께 이미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 많은 나라의 신화적인 것을 편집 수용했다고 비평한다.

 

더구나 바울이 영지주의자였다는 설도 공공연히 제기되고 성경 저자가 후대 기독교추종자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첨가 되었다는 비평마저 자연스럽게 한다. 실례로 예수는 허구요 신화다는등 예수는 없다는 모 교수의 주장도 있었고...

 

이미 사도들의 신빙성마저 비평받는 시대속에서 과연 칼빈을 비평하면 기독교가 무너지기라도 할까? 개혁주의자들에게도 묻고싶다. 칼빈의 교리와 신학이 무너지면 기독교는 없는가? 바울도 비판당하는 시대에서 유독 칼빈만 비판당하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칼빈이 완전한가? 칼빈이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보다 더 완전한 복음을 증거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큰 중병에 걸렸다는 증거가 된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것이 복음의 증언이다. 이것보다 더 완벽한 교회의 본질이 또 있는가? 그에 반하여 칼빈이 세운 제도적 교회는 엉터리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 그의 입장에서 고무 찬양하며 기록된 칼빈의 신학과 생애를 중심으로 그의 주장이 얼마나 비 성경적이며 사도들의 복음과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왜  칼빈의 교리와 기독교 강요가 사단의 전략으로 활용되었을까?

 

그동안 필자가 살펴본바 로마가톨릭은 명백하게 그 정체가 폭로되었고...

아직도 그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과거 중세 암흑시대와 같은 절대권력의 희미한 그림자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고...

 

조금 다행인점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칼빈주의 개혁파 제도 교회가 적절하게 균형과 견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러한 가톨릭 교회와의 교회일치화가 무르익어간다는 것이다. 이미 칼빈의 사역기간 중에 교회일치에 대하여 공을 들인것을 여러 문서를 통하여 발견하였다. 

 

 

1) 칼빈은 교회를 ‘성도의 모임’으로 하나됨을 강조한다. “온 시대에 걸쳐 온 세계를 뻗쳐, 하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한 영(the one doctrine and the one Spirit of Christ)으로 결속된 믿음의 하나됨과 형제의 일치를 기르고 유지하는 모임이다. 이 교회 안에 불일치란 없다”(사돌레토에게 보낸 칼빈의 답신). 2) 칼빈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교리 즉 진리를 가장 중시한다.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이 사라진 곳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끊어지고, 신앙이 없어지고, 교회는 깨어지고, 구원에 대한 소망은 아주 뒤집어진다.”(사돌레토에게 보낸 칼빈의 답신

 

 

3) 칼빈은 순수한 교리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였다. “분열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가장 사악하고 가장 해로운 악이다…분열로 교회를 찢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지 않으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거룩에서 단절되는 것에 동의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낫다.”(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권)

 

4) 칼빈은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헌신적 열정을 가졌다. “우리 사이의 형제다운 우정을 강화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모든 기독교 교회가 참된 연합으로 일치 되는 것…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참된 사역자들과 연합과 친교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하나님이 전파되는 교회들이 신실하게 서로 일치되어야 합니다.”(볼링거에 보낸 편지)

 

 

5) 칼빈은 다음 세대에게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유산을 물려주고자 했다.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만나서 서로 다른 조항들에 대해 충분히 논의한 다음…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몇몇 특정한 규칙을 만들고자 합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 나 자신은 열 개의 바다를 건너는 것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분열된 교회들을 연합시키기 위해 성경의 권위와 무게로 작성하는 것이라면 나는 고초와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영국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에게 보낸 편지) - (칼빈 교회관 중심은 ‘연합과 일치’-정준모 목사 글 인용)

 

칼빈은 교황과 재세례파를 분파(Sects)로 단정한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를 교회의 절대유일한 토대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분파로 보았다. 그러나 참교회가 아닌 이단 집단, 이단 교리를 수용하거나 참된 핵심 교리를 부정하는 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을 결코 분리로 보지 않았다.(칼빈 교회관 중심은 ‘연합과 일치’-정준모 목사 글 인용) (필자 주:칼빈의 착각과 오류.... )

교황에 대한 분별은 옳았으나....재세례파(재침례파)를 분파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높임은 맞지만 재세례파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른것임에도 칼빈은 그것을 부정한 것이다.


루터는 예수그리스도를 집중해서 가르쳤고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강조한것인데...칼빈이 진짜 신앙인것 같지만 그는 거듭남에 대하여 착각한것이다.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하심고 구속하심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으며 하나님께 갈 사람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길이 없다. 칼빈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자기 확신과 자기 신념으로 복음을 가리운자일뿐이다.

칼빈이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리스도만을 절대 주로 믿고 따랐던 재세례파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거나 교황과 같이 비성경적인 자들과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며 교회일치에 대하여 열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에 대하여 세밀하게 분석하거나 관찰할 수 없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짧은 기간에 작성한 방대한 문서때문에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할지 대략 난감하기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버리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장로교단이 선점을 차린 터라 충분히 기득권을 누려왔었고 앞으로도 그런 기득권을 누리기 위하여 칼빈 추종자들은 열심히 칼빈에 대하여 과대포장과 이슈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칼빈에 대하여 교회들의 관심이 식어버리면 목사로서의 권한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들은 결사적으로 칼빈을 수호하려 할 것이며 고무 찬양하느라 여념이 없다.

 

혹시 이글을 익는 독자들 가운데 칼빈을 스승으로 모신 분들은 조금 인내심을 발휘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화를 내더라도 좀 참고 무식한 필자의 비 논리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할 것이다. 그래야 정확한 실체를 접하고 다시 새로운 결단과 회심에 대하여 주어지는 기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칼빈 만세만을 고집하다가 정말 후회막심할 때가 이르면 어쩔것인가?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현실적으로 교회 개혁에 대한 다양한 소리들과 관심의 중심에 "목사"가 있기때문이다. 필자는 복음을 가장 가리우고 방해하는  중심에 "목사" 의 설교권과 개신교회내의 막강한 "성역화된 권위주의" 라고 규정한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하실 분들을 위하여 필자가 없는 시간을 쪼개었다.

 

필자가 전문적인 글쓰기 공부를 하는 자도 아니고 필자의 글에서 논리적인것을 기대하지 말고 그저 뭔가 있을가 하는 호기심정도로 봐주기를 바라면서.... 

 

 들어가면서.

 

 아래 글은 "프랑스 신앙고백서(1559년)" 의 내용중 일부인데, 그 가운데서 목사의 기원을 찾았다.  놀랍게도 목사는 하나님이 세운것이 아니라 존 칼빈에 의하여 계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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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법/도덕법/율법의 제3용법/)
제23조.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율법의 명령들은 끝났으며 비록 그 의식들은 이제는 더 사용되지 않지만 그것들의 실체와 진리는 그것들을 완성시키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남아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더구나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다스리기 위함과 동시에 복음의 약속들의 확인을 위해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제24조.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변호자이시며, 또 그가 자기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기도하도록 명령하시므로,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범과 일치되는 기도가 아니면 올바른 것이 못되기 때문에 죽은 신도들을 대신하여 드리는 기도에 관한 착상은 불합리하며 예배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유도하는 사탄의 생각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구원하려고 하는 모든 다른 방법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을 해치는 것이므로 배격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연옥이 동일한 출처에서 나온 착각으로 생각하며, 거기에서 또한 수도원의 서약, 성지순례, 성직자의 결혼금지, 육식금지, 특정 제일(祭日)들(성일<聖日>들=부활절 및 성탄절 등)을 지키는 의식들, 고백제도, 면죄부 그리고 사죄와 구원을 얻는 공적을 세우려는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생겼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배격하는 까닭은 그것들에 부착되어 있는 공로사상만이 아니고 그것들이 사람들의 양심에다가 멍에를 메우는 인간의 발명이기 때문이다.

(교회) 
제25조. 이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권위로 세워진 교회의 제도는 신성한 것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교훈을 주기 위한 목사가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가 정식으로 초청되고 그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때 우리가 그를 존경하며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이러한 도움과 종속적인 방편을 꼭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러한 제약으로 그가 우리를 다스리시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자기들의 세력이 미치는 한도에서 말씀의 설교와 성례전을 파괴하고자 하는 모든 공상가들을 배척하는 바이다.

제26조. 우리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유리시켜서 혼자 만족할 것이 아니고 오직 모두가 합동하여 교회의 연합(공동체)을 유지해야 하며, 하나님이 교회의 참된 제도를 세우신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또 비록 집정관들과 그들의 법령이 이 제도에 역행한다 할지라도 공적인 교훈과 예수그리스도의 멍에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교회제도에 참여하지 않거나 혹은 거기서 분리해 나가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제27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것이 참된 교회인지를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데 참된 교회라는 명칭이 악용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그의 말씀과 그 말씀이 가르치는 순수한 종교에 순종하는 일에 하나가 된 신실한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 성도들은 그 말씀 안에서 생애를 이끌어 전진해 가며 성장과 전진이 있어야 하겠다고 느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각으로 더 성장해 간다. 그들이 비록 계속적으로 노력하지만 자기들의 죄의 용서 밖에는 다른 아무 희망을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도들 가운데는 위선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의 사악이 교회의 이름을 파괴할 수 없음을 믿는다.

제28조. 우리는 이 신앙을 가지고 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또는 신앙고백이 그 말씀에 종속하지 않거나 또는 성례전을 사용하지 않는 교회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황의 집회들을 정죄하는 까닭은 거기서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 추방되었고 그들의 성례전은 부패되었거나 거짓된 것으로 변했거나 혹은 파괴되었으며 모든 미신과 우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행사에 참여하여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고 절단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어떤 흔적이 교황의 교회에도 남아 있고 세례의식의 효과와 실체가 남아 있으며 또 세례의 효과가 집례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기에우리는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세례의 부패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이 계속해서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된다면 아이들은 반드시 오염되게 될 것이다.

(교회정치
제29조. 우리는 참된 교회는 우리의 주 예수그리스도가 세우신 질서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즉 교회에는 목사들,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이 있는 까닭은 순전한 교훈이 유지되며 악덕이 시정되고 억제되며, 또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구제를 받기 위함이다. 또 집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며 거기서 성인이나 아이들이나 다 경건의 훈련을 받기 위함이다.

제30조. 우리는 모든 참된 목사는 어떠한 곳에서든지 단 한 분의 머리, 단 한 분의 군주, 전체교회의 감독이신 예수그리스도 아래서 동일한 권위와 평등한 권세를(동등권)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교회도 다른 교회를 통치하거나 지배할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고 믿는다.

제31조. 우리는 누구도 자기 자신의 권위에 따라 교회의 통치에 간여할 수 없고 다만 가능한 한, 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 선거를 통하여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여기에 예외적인 조건을 만든 까닭은 때에 따라서는 또는(교회의 지위가 방해를 받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 하나님은 황폐되고 부패한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실 필요가 있다.

 

자료인용: http://kcm.kr/dic_view.php?nid=20034 

 

이상 살펴본바에 의하면 교회정치라는 대목에서 (제29조) 작금의 개혁주의 목사들이 열광하고 지지할만한 칼빈의 책략을 엿 볼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의 주장과 또한 로마가톨릭에 의하여 이단자로 고소당했던 재침례주의자들의 주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나밥티스트의 역사 - 교회와 국가(1) (클릭) 

 

아나밥티스트들은 기능을 발휘하는 가시적인 지역교회를 다른 어느 개념보다도 중요시하여 강조했다. 따라서 벤더(Bender)도 그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최초의 아나밥티스트 운동은 루터가 고안한 불가시적 교회의 개념을 거부했다. 그리고 어떠한 특정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가시적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특성도 반드시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나밥티스트들이 불가시적 교회의 개념을 완전히 거부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그들은 쉬벵크펠트와 프랑크가 가르친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16세기 아나밥티스트들은 신약성경이 중요시 하는 다시 태어난 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를 강조하였다.
 
반면에 후터파(Hutterites)에 관한 연구의 권위자인 프리트만(Friedmann)은 아나밥티슴의 본질을 “두 세상의 개념”에서 찾는다.

프리드만은 아나밥티스트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이 세상의 질서와 불가피하게 충돌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다는 사실을 이 “두 세상의 개념”으로 강조한다. 아나밥티스트는하나님의 왕국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태어난 자의 삶 가운데서 현재적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미래의 소망으로 보았다.

모든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 가운데 나타난(또는 주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 나타난) 왕국과, 어느 때든지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며 적절한 준비가 필요한 새로운 질서로서의 왕국이라는 이들 두 견해는 마치 이 두 개념이 복음서의 가르침의 근원인 것같이 아나밥티스트의 사상 가운데 혼합되어 있다.”
 
 
교회의 타락에 대한 아나밥티스트의 해석은 개혁주의자들의 해석과 매우 달랐다.개혁주의자들은 콘스탄틴 시대를 교회가 승리한 시대로 보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의 제식(祭式) 사회를 부지중에 채택한 콘스탄틴과 공생(共生)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식(祭式) 사회의 이교도들을 쉽게 간과했거나 기독교도로 만들려고 했으며, 통제하려고 애썼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있어서 개혁주의는 교황권에 대한 반동이었지, 제도로서 교회에 관한 로마카톨릭의 개념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개혁주의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여러 가지 단체적인 견고한 전통에서 잘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로마카톨릭과 조직에서 완전히 분리된 후 조차도 여전히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개혁주의자들은 교회가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아나밥티스트들이 개혁주의자들을 반쪽 개혁주의자로 보았던 이유이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개혁주의자들은 타락한 교회 안에 남아 있었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로마카톨릭은 완전히 타락한 교회였다. 콘스탄틴의 통치하에 시작된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온갖 종류의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로 유아세례를 들 수 있다. 메노는 “유아세례를 강제적으로 시행하도록 한 인노센트 1세의 칙령(A.D. 407)을 타락의 절정”으로 보았다. 휘브마이어는 자신이 저술한 침례 서약에 관한 소책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침례받기 전에 알아야할 사항”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침례 서약이다. 사탄이 수도(修道) 서원(誓願)과 사제(司祭)의 서약(誓約)으로 밀고 들어가 거룩한 자리를 강제로 차지한 이후로 천년 동안 침례 서약은 상실되었다.”

유아 세례가 널리 행해졌을 때, 다시 태어난 자들의 교제로서 교회의 특성은 심각하게 변화되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연합과, 이에 수반하여 강제로 국가 교회를 신봉하게 하려고 무력을 사용함으로써 교회는 완전히 타락하였다. 베르두인(Verduin)의 말을 빌리면, “교회의 타락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용모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시켰다. 이전에 치유하고 돕는 사명을 띠고 보냄 받은 교회는 이제 경찰국가의 모습을 취했다.”
 
 

마이클 샤틀러(Michael Sattler)의 순교 (클릭)

 

이 글을 읽고도 만일 가톨릭과 칼빈이 주장한 교리와 사상으로 이단이 되어 죽임당한 그들이 이단이라고 판단한다면 필자역시 이단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단으로 고소당해 무참하게 죽임 당했던 그들이 주장하는 신앙고백이 정확하게 사도들의 복음과 일치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칼빈의 주장은 엉터리라고 본다. 칼빈은 전혀 교회의 본질도 모르고 거듭남도 모르며 복음을 모르는자이기 때문이다.

 

"2. 수많은 대적자들에게 둘러싸임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두 개의 전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소종파 집단들이었다. 칼빈도 항상 이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한 갈등에 시달렸다. 칼빈은 1539년, ‘사돌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로 다른 두 집단, 즉 교황과 재세례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비난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칼빈의 생애와 신앙개혁(2)에서 인용)- 칼빈입장에서 보는 시각의 한계...

 

 

이제 다음 글에서 목사조직을 구체적으로 세운 것을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목사는 있었지만 루터의 영향때문에 지금과같은 절대 성역과 권위적이지 못했다. 가톨릭의 세력이 여전할 때였으니 말이다. ---

 

1541~55년까지 칼뱅은 이 교회제도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많은 정력을 쏟았다. 그는 이 제도에 대한 제네바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 이 제도의 일상적인 운영을 감독하기 위해 애썼다. 같은 기간에 그의 교리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도 싸워야 했는데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제롬 볼세크와 미카일 세르베투스의 반론이었다.

과거에 가톨릭 신학자였던 볼세크는 1551년 칼뱅의 예정론이 하느님을 악의 장본인으로 본다고 주장하며 칼뱅의 예정론을 공공연하게 공격했다. 이에 격분한 칼뱅은 다른 도시에서 활동하는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 비판을 반박했고, 볼세크는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스페인의 박사였던 세르베투스는 핵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인 삼위일체론(한 분이신 하느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된다는 믿음)을 공격하는 책들을 출판했다. 1553년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왔을 때, 칼뱅은 그를 체포하고 외국 신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그를 이단으로 고발했다. 그뒤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해졌다. 이 2가지 경우 또는 이와 비슷한 경우에도 제네바 정부는 칼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신학적 적대자들에 대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뒤, 칼뱅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른 나라들에 개혁파 프로테스탄트를 전파하는 데 더 많은 정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이전에 그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츠빙글리가 이끌던 프로테스탄트(이 시기에는 취리히의 하인리히 불링거가 이끌었음)와 이미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1549년 공동신앙고백(Consensus Tigurinus)이 채택되면서 결성되었고, 1552년 이후 칼뱅과 츠빙글리 진영에 속한 보수주의적인 루터파 신학자들, 특히 함부르크의 요아킴 베스트팔과 하이델베르크의 틸레만 헤스후지우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면서 한층 강화되었다.

1555~64년 프로테스탄트 확산에 대한 칼뱅의 관심은 대부분 조국인 프랑스에 집중되었다. 그의 감독 아래 수십 명의 프랑스 망명자들이 개혁교회 목사로 훈련받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어권 스위스에서 교사나 시골 목사가 되기 위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았다.

그뒤 그들은 프랑스로 잠입했다. 1562년 프랑스 왕이 칼뱅주의에 대한 관용 조칙을 내릴 때까지 그들의 프랑스 체류는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동을 공고히 하기 위해 칼뱅은 프랑스 전역에 걸친 지하 교회 조직망을 결성하도록 지원했다.

지역교회는 제네바 교회의 모델에 따라 세웠고, 지역 차원에서는 목사들과 장로들이 참여하는 대의기구('교무회'라고도 함)를 세웠다.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 생겨난 이와 비슷한 기구가 바로 스코틀랜드와 아메리카의 장로회 및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클래스이며 이들은 칼뱅파 프로테스탄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지방 차원에서는 교무회 위에 대의기구적 성격을 갖는 노회가 생겨났다. 이렇듯 다양한 체계를 통일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교회회의가 만들어졌는데, 전국 교회회의는 1년에 1번씩 모이도록 되어 있었다.

제1차 전국 교회회의 모임은 1559년 박해를 일삼던 왕립 정부의 바로 코앞인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그곳에서 전국 교회회의는 전국적인 차원의 신앙고백과 훈련장전을 채택했다. 칼뱅이 살아 있는 동안 제네바의 목사동우회는 전반적인 체계를 관장하는 최고법정 역할을 했다. 목사동우회는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고, 장로회의나 장로회가 해결할 수 없는 논쟁을 해결해 주었다.
(브리태니커사전-신학 논쟁과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인용함
 

 

 칼뱅과 제네바 목사동우회는 다른 나라의 개혁파 운동을 위해서도 온건한 형태이지만 비슷한 지원활동을 벌였다. 이탈리아·잉글랜드·스페인 망명자 집단들은 제네바에서 환영받았고, 그들 나름의 지역 교회를 설립하도록 허락받았다. 네덜란드와 여러 독일 영지, 폴란드, 그밖의 나라에서 온 개인들도 환영을 받았다.

이들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칼뱅은 서신을 통해 이들과 계속 접촉을 가졌다.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 프로테스탄트 복음전도 활동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부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책을 헌정했다.

또한 새로운 개혁교회들이 조직되고 다른 프로테스탄트 집단과 가톨릭 집단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칼뱅의 이러한 활동으로 제네바는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중요한 국제본부가 되었다.

제네바가 때로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라고 불리기도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1560년대에 칼뱅은 심각한 건강문제에 직면했다. 제네바와 국제 개혁파 운동과 관련해 맡고 있던 칼뱅의 직무는 후임자로 유력시되었던 베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점차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1564년초까지 설교·강의·집필 등을 계속하다가 그해 5월 27일 죽었다. (브리태니커사전-신학 논쟁과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인용함)

 

이제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를 말한다.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비교 (클릭) ← 원문보기

 

루터의 교회관이 그래도 칼빈의 교회관보다 성경적이다. 그럼에도 루터의 교회인식 역시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과 일치하지 못한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칼빈의 교회관의 중대한 착각과 오류를 볼 수 있다. 아래의 칼빈의 주장...

칼빈은 교회를 먼저 하나님이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기 위하여 세우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목적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로 부르시고 그 일치를 계속 유지시키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칼빈의 주장과 전혀 맞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 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과 구속으로 거듭난 자들을 새 사람이라고 하며 이들이 바로 교회이며 성령을 모신 성전이기 때문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취하여 창녀의 지체로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6:15)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몸이며 각 지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사울이 율법에 열심으로 거듭나기전에 예수 믿는자들을 핍박하였을때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의 음성을 들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주여 뉘시니이까?> 이것이 사울의 외침이었다. 그때 주께서는 분명...
"나는 내가 핍박하는 예수다" 고 하셨다.

사울은 결코 예수를 핍박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예수를 믿는 신자들, 그리스도인들만을 핍박한것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 당할 때 그가 당연히 죽을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왜 나를 믿는 신자들을 핍박하느냐>고 하시지 않고... 주님 자신을 가리키면서 "나를 핍박하느냐" 고 하셨다. 주님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주님자신을 동일하게 인정하신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몸에 연합된 지체들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실체요 본질이다. 그럼에도 루터나 칼빈은 이것을 알지 못하여서 착각한것이고 이 사실을 알았던 신약교회들 즉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성경대로 신앙하던 아나밥티스트를(재세례주의자=재침례주의자들) 핍박하였고 이단자라고 교황주의자들과 함께 거짓으로 고소하였던 것이다.

 

종교재판관 규칙서 <클릭!

 

로마가톨릭이 이단기준 삼은 것들과 칼빈주의가 기준삼는것의 다른점이 어디 있을까? 상식적으로만 봐도 분별가능할 것이다.

 

 

누가 목사를 세웠을까?

성경은 전혀 목사를 세운 적이 없다는것을 혹시 아는가?

칼빈이 세운것이 목사요 설교권을 강화시킨 주범이다.
그러니 칼빈에 의하여 목사가 된 자들과 교리주의자들이

열열하게 칼빈을 추앙할 수 밖에...
명백하게 복음의 진리에 의하여 엉터리로 밝혀졌건만...
이를 말하는 자들을 그들은 자기들이 세운 교단 교파 조직교회를 반대하거나 이탈한다고 하며 이단자로 몰아서 지금도 마녀사냥식 종교재판을 조장한다.


소위 교회법과 칼빈의 5대교리를 성경의 충실한 증인들인 사도들의 복음보다 더 앞세우면서... 세상에서 환영받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인본주의이며 사단의 누룩사상일 뿐이다.

세상은 온통 로마 가톨릭과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의 누룩을 지지한다. 법으로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기득권자들이 환영한다. 칼빈이 법학도임을 그냥 흘려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는 법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종교를 다스리고 신앙을 통재하려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 왕의 왕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친히 자기를 비어 종의 몸으로 오셨고 죄인들과 같이 되셔서 그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 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으나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느니라. 그리하여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 (빌2:5-8)  

 

열두 영도 더 되는 하늘의 천사들을 명하셔서 불의한 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는 자들을 처단하시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라 하고 광분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나이다(눅23:34)흠정역.--- 이렇게 기도하셨던 우리 예수 그리스도...

 

 

칼빈의 계속되는 오류를 보자.
다음은 그의 주장인데 역시 교회에 대하여 착각한것이다.


칼빈은 교회를 먼저 하나님이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기 위하여 세우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목적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로 부르시고 그 일치를 계속 유지시키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미 교회는 거듭난 자들이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임에도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로 부르시고 그 일치를 계속 유지시키기위함이라고 망발을 하고 있다.

첫 단추가 틀리니 결과도 틀릴 수 밖에...

이는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이 바로 신약 교회의 출현이며 하나님이 세운 교회임을 망각한 무지함이다. 교회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세워진 것이다.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거듭난 자들을 찾으시고 따로 분리시킨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정한 때가 차매 이룩하신 신약교회를 칼빈이 자기가 눈에 보이는 국가교회로 만들겠다는 야망인것이다.

어거스틴의 오류가 만든 비극이다.

어거스틴의 교회관 (클릭)←

 

I. 기억해야할 사람들
1. 오리겐(184-254) - 부패한 성경의 아버지
2. 키프리안(200-258) -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
3. 유세비우스(260-339) - 부패한 사학의 아버지
4. 어거스틴(354-430) - 부패한 신학의 아버지
 
교회는 이미 성령으로부터 사도행전에서 출발되었고 지금까지 보존하였고 사도들을 통하여서 이어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조직과 건물과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재정하고 법을 부여하고 권한을 주어서 만들어지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서신서 곳곳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참된 성령의 전이며 교회임을 누누히 밝히고 있는데....

어찌하여 세상 종교집단들은 그것을 거부하려는가?

 

칼빈은 그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교회법을 치밀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자기의 신념이 좌절되자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 다시 이곳 저곳을 유랑하다가...
 
또 한번의 기회가 왔다. 제네바시에서 칼빈을 초청한것이고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칼빈의 권한을 보장 받기에 이르러서 재 입성하였으며 단단한 구조와 방편을 구축하기 위하여 교회헌법을 만들어서 시행한것이었다. 
 
 
종교개혁은 1535년에 제네바에 소개되었고 파렐은 이미 많은 일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의회가 주교들에 관하여 제네바 시의 독립을 역설하기 위하여 특히 종교개혁을 강제한 것이기 때문에,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내용에서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당원이 아직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고 파렐은 혼자 그 일을 행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칼빈은 제네바에 남았다. 그런데 목사나 설교자로서가 아니라 “제네바 교회의 성경 교사”로서 남았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고 교회의 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1537년 칼빈은 교회의 새로운 조직에 관하여 도시의 의회에 제안을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 신학의 근본 사상을 찾아낸다: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언제나 교회를 이루는 형식, 그것이 살아가는 양식이다. 그러나 그는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재세례파의 개념이었다.

칼빈에게 이상적인 교회는 오히려 자신들의 의사로 거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 때문에 칼빈과 파렐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복음을 따르는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보다는 교황의 왕국에 속하는 것을 더 원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하여” 모든 제네바 사람들에게 서명하도록 하였다(칼빈, 시편주석 서문).

그가 도입한 다른 변화들 가운데 하나의 특징은 예배시에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아직도 전세계 개혁교회를 구별하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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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5-11 ⓒ 사랑그리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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