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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스크랩] 이사야서는 신구약의 축소판

by 디클레어 2010. 6. 4.



성경은 모두 66권, 이사야서도 66장이다.

성경이 구약39권,신약27권으로 구성되어 있듯,

이사야서 역시 전반39장(1-19장),후반27장(40-66장)으로 되어 있다


구약의 첫 부분이 인간의 타락으로 시작되듯

이사야서의 시작도 죄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되고 있다(사1:18).


구약의 마지막 부분이 메시야 대망으로 끝나고 있는데

이사야 전반부의 끝부분 역시 메시야 왕국이 임할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사34-35장)


신약성경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되는데

이사야서의 후반부(40장이후)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역사에 대하여 외치고 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끝나고 있는데

이사야서 마지막도 의인들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으로 끝나고 있다.

(사66:22 과 계21:1을 비교하라)


한편 이사야서 제1부(1-39장)가 죄에 대한 준엄한 심판으로 가득차 있는 것과는 지극히 대조적으로

제2부(40-66장)에는 축복과 소망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이사야강해 


저자  정회현 목사

참고사항  생명의 등불감리교회 pastopia@bcline.com



설교내용  

 

이사야서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 4대에 걸쳐 활약한 남유다의 대선지자인 이사야에 의해 쓰여진 책이다.


이사야서는 성경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성경 전체와 흡사하다. 위치상으로도 성경의 가운데쯤 있고, 구조상으로도 전체가 66장으로 되어 있어서 성경 전체 66권과 일치한다. 또 66장은 전반부 39장과 후반부 27장으로 명확히 구분되는데 이것은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구분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이사야서는 형식만 이와 같이 닮은 것이 아니라 내용을 보아도 성경 전체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 우선 전반부 39장은 구약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주로 심판의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후반 27장은 신약의 은혜의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주류를 이룬다. 더구나 신약이 세례 요한의 외침으로 시작되는데 후반부의 시작인 40장은 세례 요한의 등장을 예언하는 말씀이 나온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이 말씀은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배제한 마가복음에서는 1장 3절에 인용되어서 3절까지도 일치한다.(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 탄생이야기인 1장과 2장을 빼면 3장 3절에서 이 말씀이 인용되고 있으므로 역시 절까지도 일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의 맨 끝 부분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오는데 신약의 끝 부분인 요한계시록도 새 하늘과 새 땅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는 이런 이사야서를 보고서 성경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인지를 알 수가 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에서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라고 했는데 우리가 이사야서를 살펴볼 때 이것이 실감이 난다. 즉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여지지 않고는 이와 같이 성경 전체를 축소해 놓은 듯한 구조 및 내용으로 이사야서를 만들 수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사야서가 주전 740년경에 쓰여진 책인데 예언된 내용이 신약시대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의해서 정확히 실현되었음에 놀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인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물론 메시야의 예언이 담겨있는 7장, 9장, 11장, 그리고 53의 내용은 너무나 생생하다. 먼저 7장에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했는데 이 본문이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그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9장에서는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공사역을 시작할 것을 예언한 것으로 실제 그대로 실현되었다. 마태복음 4장 16-17절에서 역시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11장에서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올 것이며,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새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을 예언하고 있는 53장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뿐만 아니라 61장 1절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의 내용을 예언한 것인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그 예언을 실현하고 있슴을 말씀하셨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우리는 이런 말씀을 확인하면서 또한 앞으로 될 일들을 예언하신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말씀이 우연이 아니라면 앞으로 이루어질 말씀들도 우연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상의 흐름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자. 이사야서 전반부가 끝나는 37-39장까지는 앗수르와 관련돼 있다. 이들 장은 히스기야 이야기인데 이사야 전체로 볼 때 간주곡처럼 역사서가 예언서에 끼어 있다. 이것은 앗수르의 몰락을 나타내기 위하여 넣은 것이다. 앗수르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바벨론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앗수르는 역사적으로 무신론의 철학과 관련돼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으므로 인간은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사상인데, 인류 역사에서 물질주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공산주의도 이 사상의 흐름에서 온 것이라 하겠다.


그럼 바벨론 시대의 도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적으로 바벨론 시대는 배교, 즉 종교적 오류, 기만을 상징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는가? 범람하는 사이비 이단들, 온갖 종교들,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망한다. 앗수르도 망했고 바벨론도 망했듯이 말이다. 오늘날은 물질주의를 주장하는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종교적 배교가 극심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이 말씀이 더욱 실감난다. 그러나 바벨론의 멸망과 같이 종교적 배교도 결국엔 모두 끝나고 말 것이다.


다음 새 하늘과 새 땅 이야기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사66:22)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요한계시록 21장 말씀을 생각하는데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이 있은 후의 새 세상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의 심판은 물론 심판 후의 새 세상도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예언은 일점 일획도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모든 예언이 죄인된 인간의 죄용서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이사야서 전반부가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고 했는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은 이사야 1장 15절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려도 헛된 제물을 드리고 성회를 지켜도 악을 행하는 인간의 가증스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인간을 평가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외면하실 정도로 인간은 죄인이다.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6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 앞에서 이사야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시다. 그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을 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죄인인줄 몰랐던 이사야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이것은 욥의 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욥, 그래서 친구들이 그토록 죄를 고백하라고 다그쳐도 고백할 죄가 없다고 했던 욥,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본 후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누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겠는가? 욥과 같이 평생을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도,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을 거룩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 앞에서는 한낮 죄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세상사람들과 부대끼며 세파에 찌들린 우리 인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사야서 전체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죄목을 보면 너무나 많다.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사28:7), 선지자라 하면서 이상을 그릇되게 푸는 모습, 재판관이라 하면서 판결을 그릇되게 하는 모습, 관리라 하면서 뇌물을 일삼는 모습,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멀리 떠나 있는 모습(사29:13). 어찌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다 나열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이사야 53장에서는 "다 양 같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양은 어떤 동물인가? 그냥 내버려두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동물이다. 그것이 위험하건, 그릇되건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동물이다. 우리 인간의 모습이 바로 양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들은 다 양과 같이 제 길로 간다. 그래서 인간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인간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가? 먼저 이사야 1장 18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얼마나 희망적인 말인가? 죄로 짓눌린 인간에게 이보다 더 위로의 말이 어디 있는가? 주홍같이 붉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주홍글씨'라는 책을 읽거나 TV에서 드라마로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여주인공이 남편 몰래 카돌릭 신부와 간음을 하여 임신을 하였는데 자기와 누구와 간음했는지 밝히지 않아서 그냥 주홍글씨로 A라고 쓴 옷을 입혀놨다. A는 Adulteration(간음)의 약어다. 주홍글씨는 이 여인이 간음죄를 저지른 죄인임을 나타낸다. 아무도 이것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지우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지우실까? 그것이 이사야 6장에서는 제단 숯불로 지우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사야가 스스로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니까 천사가 화저로 제단에서 숯불을 취하여 이사야의 입술에 대니 악이 제하여 졌고 죄가 사하여졌다. 숯불이 죄를 제하는 도구로 쓰인 것이다.


또 이것은 이사야 53장에서는 어린양 예수의 피로 나타났다. 어린양이 찔리고 상하여 피를 흘린 것이 우리 인간의 허물과 죄악을 인함이다. 그가 찔림으로 우리의 허물이 제하여지고 그가 상함으로 우리의 죄악이 씻겨졌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사야는 이 비밀을 우리에게 말하고 잇는 것이다. 이 비밀은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53장 이후의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한다. 죄악에 짓눌려 있는 인간이 이제 죄사함을 받을 길이 열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지금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이제 희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사54:2)


뿐만 아니라 이제 삶도 성전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할 수 있는 곳, 기도할 수 있는 곳,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65:7)


우리가 이와 같이 성전 중심으로 생활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우리에게 어떤 혜택이 있는 것인가? 물론 이 땅에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사57:13)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신약에서 예수님이 땅을 기업으로 얻는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보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3-5)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사야서에 그대로 나와 있지 않은가? 그 땅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바로 새 땅을 말한다. 이사야에서 우리에게 이런 소망을 주고 끝나듯 성경 전체도 이런 소망을 주고 끝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이런 은혜의 말씀을 알고 신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실감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고 은혜 가운데 진취적이고 소망적인 삶을 사시길 축원한다.




출처 : 설교은행 (http://www.sermonbank.net)

출처 : 분별하라 (MYSTERY, BABYLON THE GREAT)
글쓴이 : 모래시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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