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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분 휴거설은 성서적인가?

by 디클레어 2010. 1. 13.

부분 휴거설은 성서적인가?

 

박준형

사람이 자기의 마음과 양심을 함부로 할 때 믿음이 파산하고,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게 되며,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휴거”라는 낱말의 뜻부터 풀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휴거”라는 한자의 “끌 휴(携)”와 “들 거”(擧)의 표기로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의 “끌어올려”라고 한 말씀의 한자 번역입니다. 우리말로 “들림 받는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휴거”라는 말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의 “그 후의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한 진리를 약술한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무덤 속에서 살아있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들림 받아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하늘나라
(“아버지 집”)로 간다는 진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분 휴거라 하는 것은, 그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들만 데려가시고, 나머지 성도들은 마태복음 24장 51절의 말씀과 같이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는 마태복음 25장 1절부터 13절에 나오는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신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마 25:10-12절), 또한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30절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5:30)라고 하는 것이며, 또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에 나오는 왼편에 있는 자들과 같이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라고 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누가복음12장 35절부터 48절에 나오는 “신실치 아니한 자”와 같이 엄히 매를 맞게 되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1장 36절의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의 앞에 서도록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라고 한 말씀과 같이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만 “이 모든 일”, 즉 환난 때의 당할 모든 일을 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7장의 큰 환난에서의 흰옷 입은 자들을 교회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계 7:9-14절).
이 주장은 마치 “개신교의 연옥설”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께서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서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한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고 또 그 말씀을 그렇게 유지하는 데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딤전 1:5)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과 양심을 함부로 할 때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게 되고(딤전 1:19),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게 되며(딤전 4:1-2), “진리를 잃어버리게”(딤전 6:5) 된다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니엘도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다윗과 솔로몬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잠 14:6)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잠 14:33)

“온유한 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명철한 자”라야 지식 얻기가 쉬우며, 그 지식을 마음에 머물게 할 수 있으나, “거만한 자” 또는 “악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에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려고 할 때 누구나 유의하여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즉 그 세 가지 원칙은 1) 대상, 2) 시대, 3)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읽은 대목의 말씀이 1) [누구]에게 말씀하는 것이고, 2) [어느 시대]에 속하는 말씀이며, 3) 그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인류를 세 부류, 즉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고전 10:32), 우리가 상고하는 대목의 말씀이 유대인에게 말씀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방인,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게 말씀하는 것인지 먼저 그
대상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그 대목의 말씀이 오늘에 속하는 말씀인지, 이를테면 율법시대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은혜 시대에
속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환난 시대에 속하는 것인지, 그 시대를 파악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주제가 무엇인지, 즉 그 주제가 구원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상급에 관한 것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대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분 휴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하는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도 그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 이제부터 그 성경
말씀을 한 대목 한 대목씩 찾아서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악한 종에 대한 경고(마 24:48-51)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대목의 말씀을 앞에서 말씀한 세 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대상 :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아니면 교회(그리스도인)입니까? 유대인입니다. 마태복음 전체의 성격이 유대인과 관계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말씀들이 증거
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마 2:2).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그 때에 유대에 있던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6)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

(2) 이 말씀이 어느 시대에 속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율법시대? 은혜시대? 그렇지 않으면 환난시대 입니까? 환난시대입니다. 그것도 다음의 말씀들이 증명합니다.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8)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마 24:29)

(3) 주제 : 주제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시대의 영혼 구원이 아니고, 환난시대의 육체 구원(목숨이 살아남는)입니다. 이것도 다음의 말씀들로 증거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40)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마 24:22).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 24:40)

여기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들은, 노아시대에 홍수로 목숨을 잃어버렸듯이 인자의 심판으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을 가리킨 것이고, 버려둠을 당할 사람들은 육체의 구원, 즉 큰 환난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천년왕국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24장과 25장은 은혜시대 (오순절 날부터 주님의 공중 재림 시까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환난시대(주님의 공중 재림으로부터 주님의 지상 재림 시까지의 7년)의 유대인에게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본문 자체를 살펴보아도 “그 악한 종”은 참 믿는 사람이 아님을 그 사람 생활의 열매와 그에 대한 주님의 심판내용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마셨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노아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던 것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고(마 24:38), 또 마태복음 7:15-23절에 나오는 거짓선지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엡 5:5, 요일 3:10 참조).
그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심판하신 내용에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마 24:51)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참 신자가 아니고 외식자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린 심판이 그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5:51)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 은혜시대의 성도들을 대하시는 모습과는 너무나 맞지 않은 장면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주님에 대하여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요 13:1)라고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태복음 24:48-51의 “악한 종”이 현재의 은혜시대의 성도, 환난시대의 성도가 아님을 깨닫게 되며,
따라서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휴거와 관련해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천국 비유인 [1] 열 처녀의 비유와 [2]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3] 양과 염소의 비유는 맥락상 공통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한데 묶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세 비유는 다 주님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때 있을 일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시간상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한, 이 세 비유는 “그때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에 공통점도 갖고 있으며,
또한 이 세 비유는 주님께서 거짓에 속한 자에게 내리시는 심판이 장차 불신자들에게 내리실 심판과 같아서 그 운명 상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 비유는 7년 대 환난에 종지부를 찍는 우리 주님의 지상 재림 시의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보다 7년 전에 일어날 그리스도인들의 휴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세 비유는 주님의 지상 재림 시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데, 즉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참된 신자(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거짓된 신자(미련한 다섯 처녀),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참된 종(착하고 충성된 종)과 거짓된 종(악하고 게으른 종),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참된 민족(오른편이 있는 자들)과 거짓된 민족(왼편에 있는 자들)이 드러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기에 때문에 우리는 이 미련한 다섯 처녀와 한 달란트 받은 자와 염소로 상징되는 “왼편에 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즉 열 처녀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 25:2-4)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우열을 가리셨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 근거는 그들이 처녀였는지 아닌지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열 사람이 다 처녀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등이 있나, 없나 하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깨어있었느냐, 졸며 잠자고 있었느냐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 졸며 잘새”(마 25:5)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신랑이 오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잠에서 깨어 일어났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마 25:7)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무엇을 근거로 한쪽은 슬기 있고, 다른 한쪽은 미련하다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5:2에
그 확실한 답이 있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기독교의 외형, 곧 형식은 갖추고 있으되) 기름(성령)을 가지지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기름은 등속에 있는 것으로 등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을 받지 아니한, 즉 성령님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라는 말씀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또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셔서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님을 증거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요 10:14, 10:27, 13:18, 딤후 2:19, 마 7:23, 눅 13:25-27 참조)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처녀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그가 주님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지 확실히 알고 있지를 못했습니다(마 25:24-26).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영생 얻은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에게 아무런 열매가 없었습니다(마 25:25).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13:3-23, 골1:6 참조)

 

셋째로 주님께서 이 사람에 대해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5:30)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이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18)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염소로 상징되는 “왼편에 있는 자들도”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형제의 사랑이 없음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 25:41-45).왜냐하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 대해서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리라.”(마 25:41)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임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의 세 천국의 비유가 은혜시대의 성도들에 관한 말씀이 아님을 깨닫게 되며, 따라서
그 비유를 어느 면으로도 현시대 성도들의 휴거와 관련시켜서 누구는 휴거되고, 누구는 휴거되지 못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5]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눅 12:35-48)
이 대목의 말씀도 부분휴거를 믿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44절부터 48절까지에 나오는 “신실치
아니한 자”를 구원받은 자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예로 들면서 휴거 시 들림 받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해석일까요?
이 대목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주님께서 때에 대하여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36절에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혼인집에서 돌아오시는 때는 교회가 이미 휴거된 지 7년이 지난 후로 주님께서 지상 재림하시는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의 말씀이 휴거와 관계된 말씀이 아님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또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종은 구원받지 아니한 사람임을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그 행위로 보아 즉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눅 12:45) 것으로 보아 구원받은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나니”(요일 3:10)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2:4, 엡 5:5 참조). 

 

 

둘째로 이 사람이 구원받지 아니한 것을 주님께서 친히 이 사람에 대해서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눅 12:46)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 사람이 구원받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그를 가리켜 “신실치 아니한 자의 율에” 처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를 믿지 않는 자로 취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휴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깨닫게 되며, 이 말씀을 어느 면이라도 현 은혜시대 성도들의 휴거와 관련시켜서 누구는 휴거가 되고 누구는 휴거가 안 될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깨어 있으라”(눅 21:36) 여기 이 말씀도 얼핏 보면 성도가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만(물론 그래야 하지만) 환난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휴거 되는 것처럼(“인자 앞에 서도록”)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34절의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네게 임하리라.”라고 한 “그날”과 또 35절의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라고 한 “이날”은 주님의 지상 재림하시는 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한 말씀은 환난을 면하고 휴거 되어 하늘에서 주님을 뵙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모든 환난 중에서 죽음을 피하고 살아남아 지상에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5:31, 32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과 같은 사건으로 느껴집니다. 즉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그러나 이때에 “염소”로 상징되는 “왼편에 있는 자”들은 인자 앞에 서지 못하고 주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봅니다.
즉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왜냐하면, 그들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오심에 관심이 없어서 주님의 일{형제들}을 돌아보지 아니 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휴거와 연관시켜서 성도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지 아니하면 들림을 받지 못할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7] “흰 옷 입은 자들”(계 7:9-17)
여기 이 흰 옷 입은 자들에 대해서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4)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보고 교회가 7년 환난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환난 후 휴거'를 가르칩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1장 19절에 말씀하신 대로 아주 명확하게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억하라”(계 1:19)라고 하셨습니다.

(1) “네 본 것”- 1장(영광 중의 그리스도 )
(2) “이제 있는 일”- 2장과 3장(교회시대)
(3) “장차 될 일”- 4장-22장(환난, 천년시대, 신천지 등)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현 교회시대를 가리키고, 4장-19장까지는 7년 환난시대를 가리킵니다. 시대적으로 2장, 3장의 시대(교회시대)와 4장-19장의 시대(환난시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두 시대는 “휴거”라는 사건에 의해서 분리됩니다. 즉 2장, 3장의 교회시대는 교회가 하늘로 휴거 될 때 끝나게 되고, 4장-19장의 환난시대는  교회의 휴거와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시대가 서로 다른 것을 다음의 네 가지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

{1} 2장과 3장은 교회가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6장 이후 19장까지에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미 휴거되어 지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2} 2장과 3장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되어 있지 않은데 6장 이후로부터 19장까지에는 구별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3} 2장과 3장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13:9)라고 하는데 6장부터 19장까지에는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계 13:9)라고 하여 교회가 빠져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미 하늘로 휴거되어 지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4} 2장과 3장의 교회는, 4장에서 보면 이미 하늘로 휴거되어 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4장 4절의 이십사 장로가 바로 그 교회입니다. 4장 4절에 보면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라고 이십사 장로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교회를 상징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것입니다. 여기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있는 “보좌들”과 그들이 입은 “흰옷”과 그들이 쓴 “금 면류관”은 주님께서 교회시대의 이기는 자들에게 상급으로 약속하신 것인데, 이것은 이미 그들이 휴거가 되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상급을 받아서 세상을 심판할 태세를 갖추는 모습입니다.(“보좌”에 대해서는 계 3:21을,

“흰 옷”에 대해서는 계 3:5를, 그리고 “면류관”에 대해서는 계 3:11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4장은 하늘이 주님의 심판 보좌가 베풀어져 있는 하늘의 법정인데(4:5), 교회가 그 안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을 심판할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고전 6:2). 그러므로 우리는 7장의 큰 환난에서 나온 흰 옷 입은 “큰 무리”가 교회가 아니고 7년 대환난 중에 구원받은 이방인 성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외에도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의심할 여지없이 거듭난 성도는 그의 상태와 관계없이 다 들림 받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매우 육적이고 불건전한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씌어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 52, 살전 1:10 참조)

 

이 말씀을 보고도 부분 휴거를 말할 수 있는 건지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에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할렐루야!!!!

출처 : 분별하라
글쓴이 : 단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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