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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분별/세상-세계정부

[스크랩] 일본군 장교 김수환은 누구인가?

by 디클레어 2010. 4. 28.

로마 교황청 한국지부장 누가 되나?


 

<김 추기경 후임 어떻게 되나>

추기경 임명은 어떤 경우든 교황의 고유 권한이어서 고 김수환 추기경 후임이 한국 가톨릭에서 나올지는 전적으로 교황의 뜻에 달려있다.


천주교에서 추기경은 교황 다음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는 최고위 성직 계층으로 종종 '교황의 황태자'로 여겨진다. '교회의 원로원 의원'으로 불리는 이들은 전 세계 교회 운영에 있어서 교황의 주요 협조자로서 교황에 의해 선임돼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의 자문에 응한다.

또 추기경은 교황을 의장으로 하는 추기경 회의(Consistorium)를 구성하며, 교황의 사임이나 서거로 공석이 됐을 때 교황 선출권을 가진다.

추기경들은 교황 사후 15일 이내에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한다. 단 1971년 바오로 6세 때부터 연령 제한을 두어 80세 이상 추기경은 교황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없다.

우리나라는 김수환 추기경이 1969년 바티칸으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된 이후 2006년 정진석 대주교가 두번 째로 추기경 자리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그렇다면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현재 누가 진홍색 주케토(성직자들이 쓰는 작은 모자)와 비레타(주케토 위에 쓰는 3각 모자)를 교황으로부터 수여받을 수 있을까?

 

인간의 말과 행동은 반드시 역사에 기록된다

일본군 장교출신 김수환추기경은 누구인가?

학병시절 일본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옆에 앉은 이는 전석재 신부. 1944년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사관후보생으로 입대.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 받음.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에는 이 사진에 대해서

 

"1941 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해 4월에는 일본 동경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사실 그 무렵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 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1944년에 들어 모든 상황이 일변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되어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만 하였다." 라고 씌어있었다.

 

-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김수환 추기경 발자취' 중에서 - 

 

그런데

 

위 사진에서 화살표를 봐라.

아니 저것이 무엇인가? 지휘봉아닌가?

일본군복을 입은것이 자랑스러운가?

일본군복입고 기념사진 찍는 것도 모자라 지휘봉까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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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그는 진짜 민주화의 수호자 였을까?

 그의 회색분자같은 삶을 잘 보시라.

 

두루 알다시피 김 추기경은 원로가 드문 한국사회에서 노상 '원로'로 꼽혀왔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서울 명동성당이 지닌 상징성―언젠가부터 시나브로 빛바래가고 있지만―과 추기경이라는 '권위'가 이어졌기에 더욱 그랬다. 실제 민주화운동에서 김 추기경의 모습이 과대 평가된 대목이 많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알면서도 침묵해왔다. 그만큼 이 땅의 '영혼'이 가난해서였다. '낮은 데'로 임하는 종교인들이 적어서였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평가, 과장된 대목 많다
하지만 가톨릭 추기경의 말에 이제 더 침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슬이 퍼런 박정희 독재시절

1979년 4월9일 사형당한 인혁당사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당시 미국인 신부였던 시노트주교가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에게 구명요청을 했으나

















h21.hani.co.kr
  기사섹션 : 사람과 사람 등록 2004.10.06(수) 제529호






[사람과사람] [시노트] 미국인 신부, 인혁당을 기록하다


<1975년 4월9일> 발간한 제임스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 뒤의 ‘인혁당 사건 조작’ 기록 드디어 빛 봐


















무고한 시민 8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인혁당 사건. 유신정권의 사건 조작을 처음 폭로한 건 파란 눈의 신부였다. 그가 남긴 기록이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됐다.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지난 1974년 5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혐의로 도예종·서도원·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 등 8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197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19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인혁당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했던 시노트 신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선배들을 잊지말라"고 당부했다. (사진/ 류우종 기자)


이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처형된 8명은 국가전복 기도는커녕 ‘인혁당’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박 정권은 살인적인 고문으로 이들한테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완벽한 공안사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박 정권은 이 사건으로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됐다. 조작 사실이 드러나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게 됐고 결국 5년 뒤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간첩조작 폭로 뒤 한국서 쫓겨나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조작 사실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의 미국인 신부였다. 사건 당시 천주교 인천교구 총대리로 활동했던 제임스 시노트(76)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시노트 신부는 최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될 예정인 <1975년 4월9일>에서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밝혔다. 1975년 4월9일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된 날이다. 시노트 신부는 같은 해 4월30일 한국에서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자신이 인혁당 사건 발생 무렵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은 지난 2001년 함세웅 신부에 의해 ‘발굴’돼 최근 빛을 보게 됐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발표 한달 전인 1974년 4월 한 미국 대사관 직원한테서 “곧 대규모 간첩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박 정권이 긴급조치를 막 발표한 시점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 직원을 평소 알고 지내던 미 군무원의 집에서 만났는데, 그가 그런 충격적인 얘기를 한 겁니다. 당시 미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의 정보요원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가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며 ‘얼마나 잘 꾸며내는지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날 술을 많이 마셨는데, 당시 미 대사관이 한국 정부의 못된 짓을 수수방관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그 직원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달 뒤 그 직원의 말은 사실로 입증됐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는데, 어찌나 잘 꾸며대는지 나도 속을 뻔했어요. 그 신직수라는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를 계기로 국내 천주교 신부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에 나설 수 있도록 힘썼다. 그때는 천주교보다는 개신교 목사들이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수환 추기경께 편지를 써서 불의에 저항하도록 촉구해달라고 말씀드렸죠. 박형규 목사 등 개신교 사람들은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했지만 당시 천주교는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지학순 주교 외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분들이 별로 없었죠.”

 

시노트 신부의 외침은 함세웅 신부 등 젊은 사제들의 호응을 받았다. 시노트 신부와 뜻을 같이한 외국인 신부들은 함 신부 등 국내 젊은 사제들과 함께 기도회 등을 열며 인혁당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과 영국의 기자들도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우리말 실력이 뛰어난 시노트 신부는 이들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유신정권 지원한 미 정부 상대로 투쟁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1년 뒤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 선고를 직접 지켜봤는데, 사형 확정을 선고하는 민복기 대법관의 목소리가 개미 목소리처럼 작았습니다. 자기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던 거죠. 법대에 앉아 있는 대법관들의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사형은 대법원 선고 뒤 19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집행됐다. “그날은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죠. 박정희 정권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투사가 됐다. 1961년 인천 영종도 성당의 주임 신부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전까지는 목회활동에만 전념했던 평범한 신부였다. 그는 인혁당 사건 이후 각종 민주화 집회에 참석해 당시 외신에 보도된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폭정을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전했다. 그의 반독재 투쟁은 결국 박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된 지 20여일 만에 강제추방을 당했다. “추방당하고 나서 미국의 교회와 학교, 기타 여러 모임에서 박 정권의 폭정을 고발했습니다. 미국 정부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박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반응은 냉랭했다. “박 정권의 비리를 얘기해도 미국 정부 책임자들은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박 정권이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박 정권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결국은 미국 정부가 문제였던 겁니다.” 그 뒤 시노트 신부의 투쟁 대상은 미국으로 바뀌었다. 각종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다 10번이나 구속당했다.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던 1979년 어느 날 박정희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의 마음의 고향인 한국에서 드디어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들떴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http://h21.hani.co.kr/section-021077000/2004/10/0210770002004100605290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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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일화

 

직선제 개헌투쟁때 적전분열을 야기하고 전두환 정권에 유착했던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를 두고 김 추기경은 “참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이런 사람이 돼야 나라가 편해진다”고 상찬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지극한 애정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없는 비판정신을 보였다. 최근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때 이회창씨를 열심히 지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93년 4월,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초기 종교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수구세력이 지금은 여론에 밀려 잠복중이지만 김 대통령이 실수라도 할 경우 거센 반격을 가할 것....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이 나타날 때는 나라를 위해 언론과 국민들이 이를 저지해야 한다."(93년 4월)

94년 9월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도산기념사업회 월례간친회에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평화통일을 추구해야 하며, 진정한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북한을 적으로 보다는 같은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생각하고 남북간의 용서와 화해를 이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조선, "시간이 많이 걸려도 평화통일 추구해야"/김수환추기경, 1994.9.15)

국민의 정부 출범 3년 째인 2001년 2월, 김수환 추기경이 부패방지법과 인권위원회법 제정,
국가보안법 폐지 등 3대 개혁입법의 조속한 제·개정을 요구하는 '1만인 시국선언'행사에 직접 참여해서 힘을 보탠 것도 그러한 소신과 신념에 따른 것이었을 게다. 그런 그가 지금 와서 돌연 '국가보안법 폐지 불가'를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는 것.

나아가 부패의 온상이랄 수 있는 사학법개정에 반대의 뜻을 표하고,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강정구 교수 파문과 관련해서도 "강 교수를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정부가 '인권' 운운하며 그것을 막는 것이 참으로 혼란스럽다"는 식으로 발언하여 수구세력을 들뜨게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동아, 김수환 추기경 특별회견, 2005.10.21)


서울대 박효종 교수는 26일자 '동아광장' 코너에 올린 < '변신의 철학' 감상법 > 이란 제하의 칼럼에서, "시대가 변했다"는 말로 자신의 입장변화를 강변한
천정배 장관을 일러 "상황이 변했다는 상황론자, 시대가 변했다는 시대론자는 권력에 취한 소피스트일 가능성이 크다"고 조소했다. 검찰독립문제로 말을 바꾼 천 장관이 '권력에 취한 소피스트'라면, 국가보안법 등을 놓고 말을 뒤집은 김 추기경은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김 추기경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인들이 말과 소신을 바꾸는)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있다. 그런 위정자나 공직자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고 한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말 그대로 되묻는다. 말과 소신을 바꾸는 김 추기경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언어와 논리의 일관성을 사랑하는 동아일보는 부디 답해주기 바란다.

 

다음은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한다고 주장하다가 갑자기 말을 바꾸는 김수환 추기경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2001년 2월 22일자 기사

국민의 정부 출범 3년을 맞아 각계 인사 1만3,610명이 3대 개혁입법 이행을 촉구했다. 교육, 노동, 농민, 종교, 예술, 법조 등 각계 인사들은 21일 서울 중구 성공회 대성당에서 '개혁쟁취를 위한 1만인 시국선언'행사를 갖고 부패방지법과 인권위원회법 제정, 국가보안법 폐지 등 3대 개혁입법의 조속한 제·개정을 요구했다. 홍근수(洪根秀) 목사는 시국선언문을 통해 "당리당략에만 매달리는 야당과 소수정권의 한계만 내세우는 여당은 비생산적인 정쟁을 중단하고 개혁입법을 2월 국회 회기 내에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내년 지자체선거와 대선 등에서 총선연대 활동에 버금가는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국선언에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참여연대 김중배(金重培) 공동대표와 민주노총 단병호(段炳浩) 위원장, 한국 YMCA전국연맹 이남주(李南柱) 사무총장, 한국여성단체연합 지은희(池銀熙) 대표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박록삼 기자>

 

이랬던 김수환 추기경 , 자 이제 말바꾸기 하는 모습을 봐라.

 

<2004년 9월 14일 서울신문 기사>

김수환 추기경,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한다

서울신문 | 기사입력 2004.09.14 11:34

[서울신문]김수환 추기경과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부정적인 뜻을 밝혔다. 김 추기경은 13일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으로 찾아온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면담한 자리에서 “국가보안법은 개정이 필요하고,폐기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국보법 폐지를 반대했다고 박 대표를 수행한 당 관계자가 전했다. 김 추기경은 “북한이 원하는 게 남남분열 아니냐.”면서 “모든 문제를 갈라서 생각하는 남남분열이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을 아직 믿을 수 없다.”며 “지금 상황을 볼 때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안되는 상황으로 본다.”고 밝혔다. 김 추기경은 ‘국보법 폐지를 위한 천주교 연대’의 고문으로 알려진데 대해 “젊은 신부들이 국보법 폐지에 힘이 돼 달라고 할 때 폐지는 시기상조라고 말했고,명단에 고문으로 넣겠다고 했을 때 빼라고 했는데 의지와는 달리 그대로 뒀다.”면서 “조만간 적절한 기회에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이부영 의장의 방문을 받은 법장 스님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대중이 부정하면 좋은 것이 못된다.”며 “무엇보다 국민 불안을 해소하는 입법작업이 되도록 노력해 달라.”고 언급,전면적인 국보법 폐지 반대의 뜻을 피력했다. 법장 스님은 또 “칼도 식도로 쓰느냐,살인에 쓰느냐에 따라 다르듯 법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라며 “국민 대표자라고 해서 충분한 홍보도 없이 한다면 국민들이 불안해 할 것”이라며 여론수렴을 당부했다. 박지연 김준석 기자 anne02@seoul.co.kr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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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0079268



한겨레

“김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기사입력 2004-09-22






[한겨레] 호인수 신부, 보안법 필요성 주장한

김수환 추기경 비판
 

“그리스도교인이 성경과 신학의 관점에서 말해야지 정치적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라고 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형제를 적으로 삼아 박멸하라고 했습니까. 온땅에 평화를 증거하라고 했지 갈등과 전쟁을 부추기라고 했습니까. 하느님이 주신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라고 했지, 인권을 능멸하고 유린하라고 했습니까.

 

성직자라면 북한이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았다느니 하는 견강부회식 정치적인 요인들을 앞세울 게 아니라 성경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화통일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교계 지도자들을 생각하면 호인수 신부(우리신학연구소 소장·57)는 한숨부터 나온다. 성직자 옷만 걸쳤지 정치인이나 다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지도자들 속에는 김수환 추기경이나 존폐 논란 속에서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며 내심 보안법 존치에 힘을 실어주는 가톨릭 지도부는 물론이고 기독교감리회 예장통합 한기총 등 개신교 단체들도 포함돼 있는 듯하다.

“인권유린을 허용하는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는 신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법은 싸워서라도 없애야 한다는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성직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지 정치적 판단에 따라 살아선 안됩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이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하셨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쥐고 세상을 호령하는 자들과 함께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들은 지금 가진 자들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이 성경과 신학의 관점에서 말해야지 정치적 입자에서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라고 했습니까”

호 신부는 국가보안법 필요성을 앞장서 주장하는 김 추기경이 안쓰럽다.

“김 추기경이 바뀌었다고들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김 추기경은 옛날부터 매우 귀족적이었요. 정치적이기도 하고요. 독재정권과 싸울 때도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과 이돈명 유현석 변호사 등 원로 평신도들이 잘 이끌었기에 본래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추기경의 ‘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는 적지않다. 직선제 개헌투쟁때 적전분열을 야기하고 전두환 정권에 유착했던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를 두고 김 추기경은 “참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이런 사람이 돼야 나라가 편해진다”고 상찬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지극한 애정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없는 비판정신을 보였다. 최근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때 이회창씨를 열심히 지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인들처럼 언론에 거론되지 않으면 심심한가 봅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발언도 그런 차원 같아요. 김 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김 추기경은 1988년 서경원 의원이 밀입북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을 범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단 며칠간이라도 감옥 생활을 했다면 요즘처럼 엉뚱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신부도 있다. 호 신부는 성직자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평신도의 책임도 크다고 말한다. 성직자를 똑바로 세우는 것은 평신도의 몫인데, 평신도들이 ‘어리석은 백성’으로 남아 성직자의 말에 충실히 따르기 때문이다. 호 신부가 10년째 우리신학연구소에 공을 들이는 것도 평신도 운동 차원이다. 평신도가 신학을 제대로 알아야 성직자가 엉뚱한 소리나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 신부는 믿는다.
곽병찬 기자 chankb@hani.co.kr

 

 

아래는가톨릭 성모병원의 부당행위를 보도하는 KBS뉴스

 









KBS > 뉴스 >뉴스 9






























2003.02.26
[뉴스 9]노동부, 사측 부당행위 조사 확대


⊙앵커: 노동부가 특별근로감독을 통해서 장기 파업을 겪은 대형 사업장의 부당노동행위를 잇따라 적발해내고 있습니다. 이근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 결과 노사분규를 겪은 대형병원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부당행위가 저질러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가톨릭 성모병원은 정기적으로 개최하도록 돼 있는 노사협의회를 거부한데다 근로계약서에 근로조건을 명시하지 않고 초과근로수당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같은 법위반 사항은 강남, 여의도, 의정부 성모병원에서 모두 99건에 이릅니다.

⊙조재정(노동부 근로기준과장): 법 위반사항에 대해서는 즉시 시정조치하도록 하고 여타의 법 위반사항에 대해서는 즉시 입건 수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자: 파업 당시 노조원 해산을 위해 용역 업체를 동원했던 제주 한라병원도 단체협약 불이행 등 47건이 지적됐습니다. 노동부는 이번 특별근로감독이 분규 타결 이후에도 사측의 경직된 태도로 분쟁의 소지가 사라지지 않아 실시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나순자(보건의료노조 사무처장): 노사관계 악화와 장기파업의 원인이 바로 이런 병원측의 광범위한 법위반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기자: 노동부는 특히 파업에 적극 참여한 노조원을 부당전직시킨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들 병원이 노조의 정당한 활동을 방해했는지에 대해서도 현재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향후 파장은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KBS뉴스 이근우입니다.

 

 

가톨릭 성모병원의 부당행위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김수환추기경은 이랬다.

 







기사 분야 : 사회
등록 일자 : 2002/11/05(화) 23:11

김수환 추기경 "명동성당 공권력투입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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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가톨릭 성모병원 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과 관련해 명동성당에 경찰을 투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추기경이 명동성당의 경찰 투입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 추기경은 4일 발행된 ‘고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000여명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이제 내전 현관문까지 봉쇄해서 출입하는 사람들은 자기 집에 살면서도 숨어살듯 지낸다”며 “예배와 미사는 물론 교무처 일도 거의 볼 수 없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물리적인 힘을 일절 사용할 수 없는 명동성당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지를 사유물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 공권력에 호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밝혔다.

김 추기경은 가톨릭 성모병원 파업에 대해서도 “노조측은 모든 잘못을 병원 탓으로 돌리고 있다”며 “처음에 노조가 중재를 요청했을 때 병원측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노조는 돌연 태도를 바꿔 파업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노조가 병원측의 벽보를 모두 뜯어내는 등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하며 성당측의 경찰 투입요청 등에 대해서는 “선임자는 후임자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후임자의 결정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손효림기자 3Daryssong@donga.com">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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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의 상징성을 왜곡하는 명동성당과 김추기경.

요즘 한국천주교회의 실질적인 수장이시며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 김추기경님의 정치적 발언 하나 하나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 착잡함과 더불어 카톨릭 성직자들의 정치적 판단의 가치중립성을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에 우려하지 않을수가 없다. 김수환추기경께서는 현 정치권 전체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 참여정부와 노대통령에게만 촛점을 맞춘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은 과연 편향적이지 않다라고 할수 있을까 하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다. 참여정부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과 변혁의 희망을 꿈꾸는 국민들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당 경선과정과 대선과정에서 보여준 김추기경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것 부터 잘못되었다는 식의 우리 사회구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가 없다. 정교일치사회가 아님에도 정교일치 사회보다 더 엄격하게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우리사회의 종교계 자체가 폐쇄성과 배타성에 매몰되어 있고 종교인에 대한 비판을 불경시하는 자체가 "종교의 자유", "믿음의 자유"와는 관계없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흔히들 "낮은데로 임하소서"라는 경구처럼 과연 종교계의 성직자들과 종교인들은 낮은데로 임하고 있는지 되새겨 보지 않을수 없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손석춘씨의 김추기경에 관한 칼럼중 "실제 민주화운동에서 김 추기경의 모습이 과대 평가된 대목이 많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알면서도 침묵해왔다"는 지적은 "낮은 데"로 임하는 종교인들이 적어서였다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지난 70년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김추기경의 역할은 상식이 있는 성직자라면 당연히 독재의 총칼에 식음하는 국민들속에서 부대껴야 하는 것이 성직자들과 종교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김추기경의 역할이 돋보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서슬이 퍼런 시대에 성직자로서의 자기 희생적 모습으로 시대와 이 땅의 고통받는 수많은 어린 양들을 위한 목자의 길을 걸어간 종교계 지도자들이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정의구현 사제단"의 눈물겨운 자기희생적 노력은 가히 존경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의구현 사제단"의 활동을 탐탐치 여기지 않는 천주교회의 주교단에 의해서 수많은 제재와 간섭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활동한 많은 일반 사제들이 천주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주교단에 의해서 보복성의 인사조치나 불이익을 당할때 김추기경께서는 외면하고 주교단의 보수적 판단에 손을 들어준 것은 결코 잊을수 없는 일이었다.



김추기경께서 자신의 정치적 관점이나 인식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막을수 없으며 이를 비난할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나 인식이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을 정확히 집어내고 이를 비판하는 비판의 가치중립성이 지켜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선 비판하지 않을수가 없다. 조선을 비롯한 수구언론들이 김추기경의 말씀을 얼씨구나 좋구나 하면서 대서특필하면서 위기에 처한 보수를 가장한 수구세력들에게 기사회생할 기회로서 삼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김추기경은 과연 낮은데로 임함에 있어서 누굴 위해 낮은데로 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한국천주교회내의 권위주의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권위주의적 시스템보다 더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컨데, 추기경의 본말이 전도된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과 편향적이고 왜곡된 인식은 이율배반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한국천주교회가 그 어느 나라의 카톨릭 교회보다 수구보수적이라는 것은 우리 국민들은 모르고 있다. 독재정권시절 정의구현사제단과 일단의 양심적이고 진보적 성향의 사제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서 한국천주교회가 국민들로부터 과도한 찬사와 존경을 받거나, 민주화의 크나큰 공헌을 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한국천주교회 차원에서 한 일은 없다. 한국천주교회와 정의구현 사제단은 분리를 해서 봐야 한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천주교회내에선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한국천주교회의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관인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이 군사정권의 압력에 순수히 동조하여 정의구현 사제단을 해체시키기 위한 공작을 수없이 자행되었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알턱이 없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서울, 광주, 대구 3개 대교구와 돌아가신 지학순 주교가 교구장으로 있던 원주교구를 비롯한 12개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0년대에 연평균 7.54%의 높은 신자 증가율을 지속해 오고 있다. 그리하여 1981년 140여 만 명이던 신자수가 1986년 초에 200만 명, 1992년에 300만 명을 넘어섰고 현재 약 4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1980년대의 우리 사회는 고착화된 남북 분단 체제 아래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 소외의 현상이 심화되고 인간 존엄성이 말살되는 상황에서 반독재와 민주화 쟁취를 위한 의지와 노력이 다른 종교 집단보다 상대적으로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한 참여와 지원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7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민주 개헌’ 촉구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른바 6월 항쟁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또한 이 해에는 ‘민주쟁취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88년 ‘정의구현전국연합’이 발족하게 되었다.1980년대 전반에 걸친 노동 운동 탄압 과정에서 교회의 노동 운동도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교회의 노동 운동가들은 ‘노동법 개정 청원 운동’(1985) 등 대중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노동상담소 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 신장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반면에, 이 시기 농민 운동은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전국농민회의 결성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지향하며 이 시기에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이른바 ‘통일 열사’ 조성만 군의 죽음(1988), 임수경 양과 문규현 신부의 북한 방문(1989)은 한국천주교교회내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주교단과 사제들에게 거센 반발을 하였다. 이 당시 한국천주교 주교단회의는 문규현신부에 대해 강한 비판과 사문난적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한국천주교회의 사회참여 운동은 일반 사제와 수도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현실참여 운동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지만, 한국천주교회의 보수성과 폐쇄성을 깨뜨릴순 없었다. 교회내부의 문제보다는 교회외부의 사회참여 운동이 우선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군사독재시절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교회내부의 보수성과 폐쇄성, 이로 인한 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는 논의될 계재가 되지 못한 것이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김수환추기경이라는 한국천주교회의 수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암울한 시대의 횃불을 밝히고자 한 수많은 평사제들가 수도자, 신도들이 이 땅의 민중들과 함께 낮은 곳에 임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던 것이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서울대교구청의 대주교였던 김수환추기경의 상징성이 계속 존속되고 이어지기 위해선 과거와 같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상징적인 노력들이 계속 될때에 존중되어지고 존경받을수 있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성직자들과 신자들 양 축으로 움직여지고 있다. 성직자들의 최고의사 결정기관은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이고 신자들의 의사결정의 대표적 기관은 한국천주교회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있다. 주교회의는 사실상 한국천주교회의 모든 정책과 활동에 대해 결정하는 최고위 결정기관으로서 한국천주교회는 바로 주교회의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잘 알고 있는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천주교회내에서 공인되지 않는 비공식 단체이다.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참여 활동과 운동의 정신은 바로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주도해 왔고 형성해 온 것이지 한국천주교회의 공식대표기구인 주교회의에서 이끌어 온 것이 아니다. 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사수하는데 양축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주교단과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이들 양날개로 날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정의구현 사제단이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기구로서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오해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죄송한 애기이지만 아직도 정의구현 사제단은 주교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평신도사도직 협의회등 각 교구청 산하의 성당에서 활동하는 사목위원회등 신도들의 사목활동은 대다수가 사회적 약자들이 아니라 사회적 강자들내지 이들 사회적 강자들이 인정한 신심이 강한 신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한국천주교회의 수구보수성에 불구하고도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저 낮은곳으로 임하려는 깨어 있는 평사제들과 신도들에 의해서 한국천주교회는 필요이상으로 과대평가 받고있고 사회적 강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논리를 수용하면서 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재촉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며 각 교구청의 교구장인 대주교나 주교들, 그리고 각 교구청에서 목자의 길보다는 행정관료성에 젖어 있는 권력지향적인 사제들이 한국천주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재촉하는 핵심들로서 이들의 각 교구청의 경제적 정치적 힘을 가진 신도들과의 밀월관계는 새로운 사회를 나아가는데 걸림돌로서 작용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최대표가 국회 대표연설에서 "대통령 한 사람이 바로서면 다른 것은 저절로 된다라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상징성이 가득한 성직자와 신자로서 사회적 강자를 대표하는 최병렬로 대변되는 한국천주교회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라 하지 않을수 없다. 폭압적인 인권유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민주적 정치구조, 부패와 부정의 먹이사슬구조, 민주적 절차를 파괴시키고 민주적 정치소양을 억압하는 권위주의 사회구조를 공고하게 만들어 온 군사정권에서 기생해온 수구세력들에 대해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화해와 관용을 베푸는 아량을 한껏 보여주었다. 그러나 저들이 저질러온 온갖 사회부조리와 부패구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이들과 이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을 나라를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몰아가는 현실인식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임해야 할 성직자로서의 기본 역할을 스스로 내던짐으로써 자신에게 가지게 된 시대의 양심이라는 상징성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땅의 주류는 해방후 친일세력들이 사라지지 않고 부정,부패, 타락, 억압을 일삼은 이승만, 박정희정권,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정권, 김영삼 정권까지 단한번도 권력의 쓴맛을 모른채 권력에 기생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온 "친미-반북"세력들이. 이들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주류이며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겐 면죄부를 그렇게 쉽사리 주면서 온갖 사회의 쓰레기와 권력의 부패물을 청소하려는 정부와 그 지지세력을 도리어 우리사회의 총체적 부패구조와 사회악을 만들어 낸 주범으로 몰고가는 지난날 민주화의 등불로 상징된 종교지도자 김추기경의 모습은 볼수가 없다. 이젠 그분에게서 과거의 등불을 보고자 하는 것은 일찍감치 접고 새로운 사회에 맞는 사회의 등불을 찾아야 하는 것이 시대의 소명이자 과제일 것이다. 무릇 세상의 모든 만물의 그 쓰임은 시기에 달라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에 희망의 불꽃이었다고 하더라도 바뀌어 가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희망의 불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명성을 통해 이루어진 상징성의 권위가 영원하기 위해선 부단한 자기 성찰과 자기 노력을 통해 올바른 시대의 눈과 귀를 갖고서 진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낮은 곳으로 임할려고 할때에 우리 사회의 원로로서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을수 있는 것이다. 이라크파병에 찬성을 표한 김추기경의 모습에서 결코 평화주의자의 모습을 볼수 없음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이루어진 성스러운 기독교의 십자군이 자행한 다른 종교민족의 살륙, 다른 종교문명의 파괴와 그들의 재물을 약탈한 중세의 교황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게 비애감만이 남겨질 뿐이다.



종교는 영혼을 구한다면서도 영혼이 깃들어져 있는 수많은 육체를 파괴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을 반대하고 이라크 파병반대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영혼을 멍들게 하는 것인가. 적어도 종교지도자라면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타 종교국가의 국민들의 육체를 파괴하여 영혼을 죽게 하는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는 것에 반대를 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김추기경의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성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바뀌어 가는 사회에 맞지 않은 종교관과 현실인식이기에 김추기경의 시대적 역할의 소임은 더 이상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전쟁에 대한 고찰이란 글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면에 있는 적만이 진정한 적이 아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다면서 우리를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는 자가 바로 진짜 적인 것이다."

출처 : 한국사랑
글쓴이 : 무궁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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