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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사도, 그 의미

by 디클레어 2010. 5. 26.

일단 사도라는 단어의 사전적의미를 찾아보자.

 

사도 (그리스도교)  [Apostle]
출처: 브리태니커
 

(그리스어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의 'apostolos'에서 유래)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한 12제자.
 
바울로는 자신이 사도 칭호를 사용할 수 있음을 정식으로 주장했으며, 이는 그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그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았음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이것은 새로 임명된 사도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도행전〉의 전제조건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의 문헌에 따르면 신약시대 이후에도 사도라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사도라는 단어는 고위직 교회 행정가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단다. 또보자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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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使徒, Apostolus)라는 말은 '파견된 자',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리아(shaliach)에서 유래하고 그리스어의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동의어이다. 사도의 자격은 성육신하여 역사인물로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역사적 예수를 만났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직제자 12명을 사도라고 부른다.(마르코 3:16-19) 하지만 가리옷 사람 유다가 자살하여 사도직을 버리자, 사도들은 '예수께서 활동하실때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중 하나인 마티아에게 사도직을 맡겼다.(사도행전 1:21-26) 이후 성령강림주일에 탄생한 교회(사도행전 2:1-47)를 탄압하던 바울로(사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여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였다.(1고린토 15:10)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성 바울로를 사도로 인정하며, 그의 회심을 교회력을 통해 사도 바울로의 회심일로 기념한다.

 

그렇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도는 누가누가 있는가?

 

마10장

...

2)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일단 12명이 당첨됐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이다.

 

그리고 또 누구를 사도라 말씀하시는가?

 

행1장

...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보다시피 맛디아도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고,,,

여기서 문제, 맛디아는 예수그리스도를 보았을까?

본것은 물론 예수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셨던 수 많은 제자들중 한명이었을 것이다가 올바른 시각이다.

 

다음은 또 누가 사도로 인정을 받았을까,

아시겠지만 역시 바울밖에 없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강력하게 피력했던 사람이었으나 . 모든 사람들이 의심했다,  다른 열두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다녔고 , 먹었고, 기적을 체험했고, 그 분의 얼굴을 보며 면담했던 자들이었으며, 부활을 목격했으나, 다른 이들이 봤을 때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핍박까지 했던 인물이었으니, 말이 많았을건 당연하지 않은가?

그가  변심할때의  일을 소상하게 구체적으로 밝힌것은 자신의 사도됨을 믿지 않던 자들때문이었다는것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9장에 그는 힘주어 말하지 않는가,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

 

이렇듯 바울사도는 자신은 주님이 직접보내신 이방인의 사도가 맞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고, 그가 이렇게 강조하는것은  당시에 그를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자들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또 엡1장에서도 그는 자신의 사도됨을 다시한번 주장한다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

 

이렇듯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직접보았음은 물론 기적을 행하기도 했으며 특히 예수그리스도의 직접계시를 받은자외에는 사도란 호칭을 붙이는데 지극히 조심했고, 주의했음을 알 수 있다.

 

근데 시방 사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령님과 대화하고,

자신들이 아니면 구원받기 어렵다고 하고,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들이라고 하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갈 길을 인도해주시고...

또한 ,

세상물질을 버려서 자신이 가진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부르신 종으로서 대접해줘야 되고 인정해줘야하는 것이다.

 

너무 길어지니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 뿐만이 아니고 많은 믿음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부정하는 것이거나, 제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직통으로 하나님께 계시를 받는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그 사람을 의심해 봐야 하는것이 정상적인 믿음의 소유자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떤 사람이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듣겠는가?

 

이제 나의 신앙수준은,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그런식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혹시 그런식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의 신앙수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는가? 성경을 정독한 사람으로서 그건 할 짓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건 도마의 신앙이다.  꼭 손에 집어줘야 믿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수준이라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한다면 왜 기독교라고 고집하는가?  


( 우리는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믿는다. 그런 측면에서 한 얘기다,오해는 금물)

 

혹여

성경에 나와 있는 기적이 지금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컨대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


마17장

 ...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말씀하신 이것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일이 있어날 수 있을때는 주님과 같이 있을때로 국한해야 한다는게 필자의 주장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보자 근거를 대보겠다,

 

마10장

...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이 때는 주님이 제자들과 같이 계셨을 때 였으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라고 하신다.

왜?

주님이 채워주실테니까...

주님은 조물주시니까, 그런건 일도 아니니까,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십자가 달리신 이후다.

그런일이 생기실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하신말씀을 돌아보라,

 

눅22장

...

(35)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다락방에서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제는 준바하라고 하신다. 왜? 주님이 가시니까,

그들곁을 떠나시니까,

 

이제 떠나시니 채워주시는것을 못하셔서, 준비하라고 하는 것일까?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자들이 분명하다.

그 뜻은,

이제 너희에게 가르칠만큼 가르쳤으니 준비해서 헤쳐 나가보라는 말씀인 것이다. 언제까지 아이들처럼 주님이 지켜주시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제 커져야한다라는 무언의 암시인것이다.

지켜주기만 바라지 말고 어른처럼 이제는 성숙해져야 한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1장22절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표적을 찾지 않는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안에 살기를 기도할 뿐이다.

또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여호와를 앙망하는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안다. 그것만 알면 더 바라지 않는다.

이미 우리안에 천국이 임했으니 더 무엇을 바라는가?


짧은 이 생은 영원한 삶의 디딤돌이 되는것 뿐임을 알기에  이 생이 조금 힘들어도 기쁨으로 이겨낸다. 

또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그저 의지하는것은 성경뿐이다. 그 말씀이 하나님말씀임을 믿기에..

그 말씀외에는 다른 어떤것도 나를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말이다.

 

주의 말씀을 보며 내 스스로 깨달아나가는 그 재미와 기쁨은 누구와도 공유못하는 일일 것이다.

너무 기뻐 가끔 글로 내 마음을 표현해보기는하지만 그건 일테면 점잖지 못하지만,

조족지혈-새발의 피다.

 

지금의 이 사태에 고민이 많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통하여 성숙해짐으로 가기위한 단계라고 생각하면, 다행스럽기도하다.

많은 염려의 글들을 본다. 좋은 쪽으로 해석해볼려고 노력은 하지만,

주님의 또다른 방법이라고 생각도 해보려 하지만 어렵다.

 

앞에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꼭 사도들이 아니더라도,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일어났음을 알아보았다.  사도는 필요없다라는 식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제한을 두는 것이 될 수 있겠지만, 성숙하여 성경을 묵독하는 이들에겐 사도는 잉여생산물과 똑같다. 

최근 듣는 말처럼  꼭 사도여야한다는 식은 정말 곤란하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사도를 보내시는가?   다시 한번 질문해보며 마칠까 한다.  

왜 보내시는가?  

보내신다면 성경말씀이 틀리거나 부족해서 더 하실 말씀이 있어서 일게다. 


그런가? 정말 그런가? 

우리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우리는 얼마나 성경을 정독했는가? 


작금의 사태에 우려를 금하기 어렵다는 것을 밝히며 이만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