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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숫자로푸는계시록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에 관하여

by 디클레어 2021. 10. 9.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단상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싶어한다. 본인 또한 그런 사람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고 말이다. 예로부터 장래의 일에 관심을 쏟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중에 예언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본 미래의 일을 시로, 혹은 소설로 기록하였고,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쓴 글들을 보며 나름대로의 추측과 논리로 그들의 글을 해석하곤 한다.

 

그 글들중에는 과거, 노스트라다무스가 쓴 것도 있고 예수그리스도를 잉태했던 마리아가 썼다는 글들도, 한 때지만 유행하기도 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예언서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다. 카톨릭에서는 묵시록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쨌든 바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가 인류에게 준 마지막 책이기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요한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유일무이하게 내려주신 예언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기록한 글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인류를 창조하신 신께서 내려주신 글을 믿을 것인가는 각 사람의 선택이다.

 

본인은 어려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고, 믿었으며, 지금도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관심을 가졌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으나 어쩌다 한 번씩 읽어보는 계시록은 어렵고, 익숙하지 않은 말들로 가득찬 난해한 책일 뿐이었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아주 가끔씩 들여보다 보긴 했으나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당시 수준에 가당치 않은 일이었고, 성경을 연구한다는 사람들 얘기도 가지각색이어서 아주 장기간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2009년 경 다음의 한 카페에서 대단한 성경고수를 만나게되어 다시 계시록에 대해 흥미가 생겼고 믿음과 행위에 대한 구원관에 대해 많은 다툼을 벌이다 결국 해답은 요한계시록밖에 없겠다 싶어, 자그마한 단서하나를 가지고 계시록연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숫자로푸는 요한계시록으로 연결될 것이라고는 당시로써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단서란 계시록12장에 나오는 일천 이백 육십 일이 어떤 사람들의 연구에 의하면 바로 교회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는 고수의 멘트였다. 어떤 일의 결과는 아주 작은 단서에 의해 시작되기도 하고 또 풀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정도의 인식이었으나 그 12장의 주석을 읽어보고 분석하는 순간 확신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가 핍박을 피하여 보호와 훈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aird, Farrer, Ford, Johnson, Mounce).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 '일천 이백 육십 일'이라는 기간은 핍박의 기간으로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양육기간으로 나타난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성도들을 피난기켜 양육하며 핍박에 대항 할 수 있는 능력과 인내를 허락하신다(Mounce).

 

물론 모든 주석이 옳다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내게는 이 정도의 연구결과가 있다면 이젠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도전해 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구해서 얻은 결과가 한때와 두때와 반때는 전삼년반을 의미한다는 것이었고 마흔 두달은 후삼년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임을, 분석과 연구를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하기도 했고, 현재에도 모든 분들이 무시하고 있는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다니엘에서의 한때와 두때와 반때가 후삼년반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한때와 두때와 반때는 성도와 교회의 기간이며, 마흔두달은 적그리스도와 짐승등 이방인을 주체적으로 기록한 기간이라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각 기간들에 대한 주체를 분리하셔서 기록하신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기가 꽤나 힘들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은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결계를 쳐 놓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들이, 선민의식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이 계시록을 절대로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기간관련한 것 외에도 계시록은 곳곳에 함정과 방어장치가 숨겨져 있다. 어떤 성경을 보고 읽는 것이냐에 따라 해석이 갈리기도 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창세기3장이다.

 

[개역개정]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KJV]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it shall bruise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내가 또 여자와, 네 씨와 그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것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NIV]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you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offspring and hers; he will crush your head, and you will strike his heel."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네 자손과 여자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는 네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치리라."

 

후손이란 말과 씨란 말간에 서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런 사람은 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 기준미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재능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계시록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 보다 그의 재능에 맞는 다른 일을 찾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이 말은 그 사람을 무시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사람을 지으신 쓰임새에 맞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단순한 얘기일 뿐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그 중에는 할 수 있고 견딜만한 일이 있기도 했고, 단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할만한 일을 해 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해석도 같은 경우다. 어떤 이들은 계시록해석을 보고 단순히 공부하는게 나은 사람들도 있고, 또 연구를 통해 더 심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계시록연구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결코 자기 노력을 게을리 해서 그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