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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성경교제관련

내가 지금 교회(예배당)라고 불리는 곳에 나가지 않는 이유

by 디클레어 2024. 9. 5.

  너무 파격적인 제목을 단 것 같아 조심스러워 지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이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 설명을 잠깐 해 보자면, 교회에서 주는 가르침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소간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인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사실 본인도 처음에 하나님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그들이 전하는  말씀들은 너무 당연한 사실일 것이라 생각했고, 조건없이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배운대로 가르쳤으니 그렇게 우리도 아무 의심없이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고 배웠는지 보면,

가장 기본적으로 밑바탕에 깔려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녀야만 하는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으니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니 겁이 많은 나 같은 순진한 사람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어머니를 포함한 가스라이팅? 혹은 세뇌?에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의심중에 하나는, 그럼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고 믿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지옥에 가는가? 였다. 당시에 그들은 모두 지옥행이었다. 이것을 설명하는 목사들의 설명도, 그들은 죄를 지었고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곁으로 갈 수 없다. 그러니까 인간자체의  행위로는 죄를 용서 받지 못하니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그리고 그  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면, 사람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거였다. 고로 그 분의 선물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만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함받아 그 분의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이것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 이해를 위해 첨부하자면, 먼저 믿음과 행위에 대한 한심한 토론을 했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나의 나 된것은 결국 그것이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음에 있어 행위는 필요없다는 자들이, 바울의 서신(특히 로마서)으로 자신들 논리의 근거를 삼는 것을 보고는,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으니, 전체적인 측면에서 바울의 글들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나아가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 가를 통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어느 한 곳에 매몰된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 였다.  하기사 칼빈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쯤으로 취급했다고 하니 이쯤에서 그들의 한계성를 엿볼 수 있었다. 토론은 쳇바퀴였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들과 토론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사람은 너무나 다양하게 창조되었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다 할 지라도, 느끼는 바와 생각하는 바와 받아 들이는 것이 모두 다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섭리라면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은게 되어 버렸다. 그들의 이론은 나를 설득시킬 수 없었고, 결국 나만의 하나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찾아야만 한다는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동안 구약을 읽으며 이해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과 또 도륙을 명하셨던 그 말씀의 핵심을 알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당시 아무도 해석하지 못할거라고 하던 계시록해석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다른 성경 말씀들로는 서로 의견차이만 확인할수 있었고, 서로의  감정이 상해야만 하는 대화가 부질없게 느껴지며, 그래서 시간낭비처럼만 보이는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말씀의 마지막인 계시록의 미스테리를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해석을 했었고 또 하고 있으나, 이것이 나를 감동시키지도 못하고 설득시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는 것은, 모두를 각각 다른 사람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알아내겠다는 욕망? 혹은 정열이 더 강하게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글을 봐도 이해하는게 다르고, 그러므로 생각이 다르고 말하는 것이 다르니 이 다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의문도 당시 나를 괴롭히는 문제였을 것이었다.  이렇게 다르면 어떻게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들은 계시록을 해석하면 모두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연구와 검토를 해서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을 생성해 냈고, 그러고 나니 그들과 나의 사이에 괴리가 생겼고,  그들 틈에 끼어들어 분란을 만드느니 혼자 지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지금 예배당이라는 곳에 나가지 않고 있는 이유이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이다,  예배당은 예배당이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 당시로 치면 회당이나 마찬가지다.  주님말씀 중 너희들은 다 같은 양이며,  선생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씀을 묵상하더라도 나는 내 자신에게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을 갖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라 어우러질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가 낫다라는 생각은 지금도 하고 있고, 별로 변하지 않았기에 혼자 지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식구들이 예배당에 나가는 것을 반대한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사람은 다르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교회에 다니면서 오히려 믿음을 지켜가는 것에 대해 찬성을 하는 편이다. 믿음을 잃고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뛰쳐 나가는 것 보다는 순종적인 자세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내가 예배당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드려 보았다. 결론은 사람은 믿음을 가지는 것과 지키는 과정이 모두 다르다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