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진영 내에서도 완전한 의견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줄 압니다. 참고자료로 올립니다.
출처 http://bibleistrue.com.ne.kr/public_html/index.htm
성경의 종말예언에 대해 교단간에, 성경학자간에 현저한 견해차이가 존재합니다. 각각의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심각하게 대립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있는지. 성도가 대환란을 통과하는지. 천년왕국이 언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 견해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크게 성경예언을 문자적인 것으로 보는지,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지의 차이에서 오며 또한 교회와 이스라엘을 구분해서 보는지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 대환란전에 공중재림하시고 이때 성도의 휴거가 일어나며 대환란 이후 예수님의 지상재림과 함께 지상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믿는 소위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적 해석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해석을 지지하는 많은 저명한 성경학자들이 있습니다.
left behind 시리즈로 유명하신 팀 라헤이(Tim Lahaye), 죤 맥아더, 홀 린세이(Hal Lindsey), 챨스 라이리(Charles Ryrie), 죤 왈브르드(John Walvoord), C.I. Scofield 등등..
그리고, 1600년경부터 1900년대 초기까지 일어난 복음 전도자들이나 설교자들의 대다수(스펄젼, 무디, 빌리 선데이, 엠 알 디한, 알 에이 토레이, 스코필드, 죤 라이스, 클레어런스 라킨, 펨버, 벌링거, 아이런 사이드, 프랭크 노리스, 빌리 그래함, 루이스 탈봇, 밥 죤스 1세, 챨스 퓰러, 에릭 샤우어 등등)가 전천년주의를 지지했습니다.
자기가 속한 교단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신앙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종말론, 즉 주 예수님의 공중재림(휴거)와 지상재림(재림), 그리고 이 땅에 세워질 천년왕국에 관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계에는 많은 이론들이 존재하는데 이를 크게 나눈다면,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 그리고 전천년주의가 있습니다. 또 후천년주의 안에서도 인본주의적 후천년주의와 복음주의적 후천년주의가 있고, 전천년주의 안에서도 역사적 전천년주의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로 나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론들이 나오게 된 원인은 성경해석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인데, 그 중 가장 큰 요인이 있다면 성경을 영적으로 풀이하느냐 아니면 문자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문제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합니다. 지금 충실히 잘 살면 되지 종말론 같은 것을 어떻게 믿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현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농부가 가을에 수확할 것을 알기 때문에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 빛 아래에서도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후천년주의
"후천년주의"의 의미는 "주 예수님의 재림은 이 땅에 천년왕국이 있은 후에 이뤄질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먼저 왕국을 세우고 천년 동안 다스리고 나면 왕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왕이 없는 왕국이 천년 동안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 말 자체에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론은 과거에 어거스틴이 기록한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존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 이론을 실제로 실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군대와 권력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세워보려 했는데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후천년주의는 16,17세기 계몽운동과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교육이 발달하면서 더욱 크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경제가 발전하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고무되었으며 이제 이 땅에 낙원에 세워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힘으로 이 땅에 "천국"을 가져오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이 천년간 지속되면 이제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론을 "인본주의적 후천년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아울러서 성경으로 이러한 가르침을 뒷받침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복음주의적 후천년주의"라고 부릅니다. 이 이론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이 왕국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가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합니다. 복음주의적 후천년주의자들은 물질문명이 발달하는 이 시대에의 흐름에 발맞춰 아직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오지까지 복음을 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 구절에서 말하는 "왕국의 복음"과 사도바울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구분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러한 후천년주의적 사상은 다른 말로 하면 "진화론적" 사상인데, 왜냐하면 사람이 문명과 교육의 발달을 통하여 더 선하고 완전해져서 결국엔 의와 화평이 다스리는 낙원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후천년주의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습니다. 잘 건설되어가던 "낙원"이 두 번의 전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후천년주의자들은 "여기서의 천년은 문자적으로 천년의 기간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얼마 정도의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말하거나 무천년주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 이 세상은 UN을 세워서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해보고자 하였으나 UN이 세워진 이래로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났으며 세계는 지금도 긴장 가운데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UN 회의장에 걸려있는 이사야 2장 4절과 미가서 4장 3절의 후반부 말씀은 전반부의 말씀처럼 오직 참된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야 완벽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시며 많은 백성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자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고 다시는 그들이 싸움을 배우지 아니하리라"(사 2:4).
무천년주의
"무천년주의"는 후천년주의가 여러 가지 전쟁과 사고로 타격을 입으면서 변형된 이론인데 "문자적인 천년왕국은 존재하지 않고, 영적인 것으로서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졌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교회가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 통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 배부르고 이제 부유하며 우리 없이도 왕처럼 군림하였도다. 너희가 군림하기를 내가 바라노니 이것은 우리도 너희와 함께 군림하려 함이라"(고전 4:8). 성도들이 군림하는 때는 지금이 아니라 장차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세워질 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자신이 지금 고난을 받고 핍박을 당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휴거와 재림에 대한 신앙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과거 우리나라의 훌륭한 신앙인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다미선교회 사건의 영향으로 많은 교단과 교회들이 "우리는 휴거를 믿지 않는다"라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이제 한국의 거의 모든 교단은 "무천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전천년주의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기본적으로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면 친히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다."라고 믿는 면에서 아주 건전하고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온건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이제 신약의 교회가 그 자리를 대치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22절의 "택하신 자들"을 교회라고 해석하는데 이로써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하므로 대비해야 한다"는 교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 날들을 짧게 하지 아니하시면 어떤 육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로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짧게 하시리라."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하는 가운데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가장 극렬한 상황이 오면 정결하게 기름을 예비한 택하신 자들이 휴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이광복 목사님이 계시고, 우리나라에서 펴내는 종말론에 관한 책들 가운데 전천년주의에 대한 책은 거의가 역사적 전천년주의입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신앙"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받아들이고, 성경에 나타난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을 받아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9,10,11장은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잠시 옆으로 밀려났으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돌 올리브 나무와 참 올리브 나무의 비유를 볼 때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대환란은 교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거부했던 이스라엘을 위해서 필요한 기간이며 교회는 그 전에 휴거되어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어린 양의 혼인식을 치를 것입니다. 대환란이 끝나게 될 때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는 샘이 터지고 그들은 자기들이 찔렀던 메시야를 보며 애곡하고 회개하며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 예수님은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재림하여 아마겟돈에 모인 이방의 왕국들을 쳐부수고 이제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실 것입니다.
환란통과 중간휴거설
지방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휴거에 대해 살펴보면 열매가 익어서 성숙케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성도들은 휴거가 되고 그렇지 못한 성도들은 남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말씀들을 교회시대에 적용하는데 그로 말미암아 역시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이기는 자들" 곧 열매가 익어서 성숙케 된 자들은 환란 중간에 계속해서 휴거되어 올라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땅의 환란과 고난을 받으며 성숙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대환란이 끝났는데도 성숙되지 못하면 천년 동안 바깥 흑암에 던저져 울며 이를 갈며 회개하고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교를 하든지 이기는 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과 휴거의 근거가 사람의 영적 성숙도나 어떠함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주의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첫 열매가 되시며 부활의 근거가 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가장 육신적인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며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믿는이는 그분의 부활과 추수(휴거)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며 나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성숙한 사람들만 나온 것이 아니라 장성한 자로부터 가장 어린 아기까지 모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올리실 때 모든 믿는이가 올라갈 것밉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바로 이러한 보증이 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신음하시고 억눌림을 당하실지라도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고 함께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 인하여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영을 가진 모든 자가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양무리에 있는 모든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올라갈 것입니다.
성경적 교리의 중요성
때로는 어떠한 교리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고 깨어있게 만들지라도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대로의 교리를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육신을 따라 함부로 살면 구원을 잃어버리고 지옥에 간다라는 가르침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만들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라면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종말을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은 종말을 말하는데도 성경을 연구한다는 기독교는 종말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탄의 강력한 속임수 중 하나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은 나의 현재를 바꿉니다. 우리가 오늘 길을 가는데 있어서 격려와 위로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장차 임할 왕국이며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을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영광"이 훨씬 더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장차 임할 영광을 조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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