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가?
글/이인규 권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 :17]
바울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과연 이 두 가지의 주장이 서로 다른 주장일까? 야고보서는 반바울적인 내용으로 오해되어 오리겐 이전 3세기까지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던 때가 있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그의 초판에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이러한 말을 삭제하였다. 칼빈은 “이 서신서를 배척할 만한 정당하고 충분한 이유를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서신서의 내용을 온전히 안심하고 받아들인다”라고 평가하였다.
어느 고등학교에 열등반과 우등반이 있다고 가정하자. 한 선생님이 우등반에 가서, 공부하는 시간 틈틈이 적당한 휴식과 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얘기하였고, 열등반에서는 오직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할 때와 같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여야 한다는 본질은 부정할 수 없다. 열등반이나 우등반이나 동일하게 학생들은 공부를 잘해야만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본질적인 것이 된다.
다만 너무 공부에 치중하는 우등반의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즉 메시지를 전하는 대상이 누구이며,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서 그 내용이 조금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로서 "믿음"을 기록하고 있다. 야고보 역시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실천적인 행함을 강조하는 글을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실천적 믿음의 열매”라고 부른다. 즉 야고보는 일부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 행함을 부정하는 도덕폐기론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조건으로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가? 십계명은 유대인들도 지킨다. 그렇다면 불신자나 타종교인들도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선행을 하면 모두 구원을 받는가? 이 세상 어느 종교도 사이비집단이 아니라면 죄를 짓지 않도록 가르치며, 선행을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불신자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초등학교 도덕책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행함이 많은자는 로마카토릭이나 이단들을 따라갈 수 가없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단연코 “아니오”라는 답변을 하여야만 한다.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 오직 믿음이다.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야고보 역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건으로 행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믿는 자가 간음을 하고, 도둑질을 하며, 거짓말을 계속 한다고 가정하자.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악하고 반복적인 죄를 짓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과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는 거짓 믿음을 가진 자일 것이다.
다시 말하여 믿음으로 거듭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그 믿음의 결과로서 행함이 따르는 것이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믿는 자의 결과로서 그 행함이 있는 것이다. 믿는 자는 간음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러한 행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행함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산 믿음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행함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행함도 믿음과 동일한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도 행함이 필요하다고 해석하면 그것이 올바른 해석이 된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행위구원론자가 되고 만다. 야고보서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결과로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믿는 자도 알게 모르게 죄를 범할 수 있다. 거듭난 자도 죄성을 갖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바울과 같은 이도 죄가 있음을 고백하지 않았던가?(롬7:21-25)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하여 주시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된다. 다만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책을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어느 이단교회는 거듭난 자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죄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며, 반면에 어느 목사는 끊지 못한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모두 극단적인 주장이다.
만일 사람이 죄를 하나라도 끊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사람이 된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십자가 이전 율법주의로 복귀하는 주장이 된다. 만일 죄를 하나라도 회개하지 못해 구원을 잃게 된다면, 단 한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이 되고만다. 성경은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인하여 예수그리스도가 그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끊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곧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은 값없는 은혜가 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나무와 가지라는 유기체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5:5).
거듭난 성도는 주가 내안에 내가 주안에 있는 자이다. 주와 합한자가 죄인이냐? 그럴수없다. 죄인이지만 죄없음을 선언하셨기에 우리는 은혜로 용서받은자다. 우리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도덕폐기론에 빠지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행위구원을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극단적인 주장을 주의하여야 한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인간의 책임적인 측면은 필요하다. 믿는 자에게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의지와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믿는자는 상받기 위해, 주님께서 거룩하니 우리또한 구별된 생활을 하여서 주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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