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모임에서 지키는 몇가지들
형제모임은 기본교리에 있어서 흔히 한국에 많이 있는 주류 교회들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천에 있어서는 그들과 달리합니다. 즉, 삼위일체, 그리스도관, 구속과 죄사함등에 관하여 같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세례가 아닌 침례, 성만찬의 자주 시행, 여자가 수건을 쓰는 것, 호칭을 형제 자매로만 부르는 점, 일인 목회를 인정하지 않고 다수의 장로 형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점등이 다른 점입니다.
성만찬 또한 장로들이나 일부의 사람들만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가 감사기도에 일일이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참여합니다.
형제모임에서 지키는 분별중에는 이러한 믿음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을 새로이 인간들이 개발해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고 다시 어느 인간이 그것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모임에 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모임의 방법들에 관하여 하나님이 인간들의 자유 의지나, 재량에 맡기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가르칠 수는 없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해주신 것을 인간이 개선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를 통해서나 진리입니다.
1) 예수님께서 침례에 순종하셨고 승천하시기전에 침례를 부탁하셨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침례의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침례는 거듭난 이후 믿음을 공표하는, 성화의 중요한 단계이자 신앙생활의 큰 선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헬라어 에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세례는 전혀 근거가 없고, 침례가 옳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받으시고 물속에서부터 나오셨습니다.
사도행전 8장
38 그가 병거가 서도록 명하고, 필립과 내시가 물속으로 둘이서 내려가, 저가 그를 침례하니라. 39 그러나 그들이 물속으로부터 올라왔을 때에, 주의 영이 필립을 취하여 가시니,
세례는 이교도들의 풍습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정식 화폐가 아닌 위조지폐와 같습니다.
2) 성경은 성만찬에 관하여 매우 소상하게 교훈을 주시며(고전11:23-31, 마태 26:26-) 그것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오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3) 킹제임스 성경은 as often as 로서 헬라어의 호사키스(11장 25절과 26절에) 가 두번 나오는 것을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자주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은 빼먹었지만.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만찬은 매주 한번씩 거행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4)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 라는 말씀에서와 다른 모든 서신서를 통해 교회가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되었지, 구원얻지도 않은 자들과 구원 얻은 자들이 뒤범벅이 되어있는 교회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등록했다하면, 거듭난 것으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자칫 구원의 확신 없이 거듭남없이 일생을 마치는 교회인들의 집단 양산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5) 그러므로 거듭나고 침례에 순종하였으며 모임에 영접된 자들이 매주일 베풀어지는 성만찬에 참여합니다. 초대교회가 " 제자들이 떡을 떼려하여 안식후 첫날에 모였던” 것처럼 행20:7 (한글성경: 우리가 떡을 떼려..)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다시 오심을 기념하는 성만찬은 일요 예배의 중요한 목적이며 핵심입니다.
떡을 떼기 위함이 일요일 집회의 목적이었습니다. (행20:7)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이었으며, 부활하신 이후에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부탁하셨습니다. (고전11:23-30) 예수께서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다시 당부한 이유는 (고전11:23) 성만찬이 그만큼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고, 다시 사심과 다시 오심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 또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은 (고전 11장1-16) 성경을 분별해보면 명백합니다. 만일 쓰지 않으면 깎을 것이요, 머리를 빡빡 밀어야 한다는 것이 가르침입니다.(6절) 이러한 말씀을 문화적 차이니, 시대적 상황이니(노예 문화시대) 변명하고 교묘히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두루치기, 둘러치기 변명들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저희는 그 말씀에 순종하며 이곳 캐나다에서나 제가 나갔던 독일 모임에서나 싱가폴 모임에서나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19세기 말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것을 지켰습니다. 교회가 아닌 일상, 공공관서에서도 여자들은 모자나 수건을 쓰고 다녔습니다. (1차대전까지)
6) 성경어디에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사라는 칭호가 에베소서 4장11절에 유일하게 나오면서도 그 자격요건에 대한 언급도 없고 그가 교회를 전횡으로 다스리는 현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 직책이 인간이 만든 것임을 보여줍니다.
포이멘은 다른 곳에서 목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것은 목양의 은사를 가르치는 것으로 분별합니다. 딤전 3장은 교회 안에서 약 20가지의 자격요건들을 갖고 실제 생활들을 통해 검증해보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감독을 세우도록 말합니다. 이 감독은 장로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7)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내어 (행 20:17) 말씀전하면서 "성령께서 너희를 감독들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게 하셨으니"(행 20:28)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라는 단수의 교회에서 여러명의 장로들이 왔는데, 그들을 감독들이라는 복수의 감독들을 세웠음을 알수 있게 됩니다. 즉 감독은 여러교회를 다스리는 카톨릭의 주교와 같은 것이 아니라, 단일 교회안에서 섬기는 여러명의 장로들을 감독들로도 불렀다는 뜻입니다.
8)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격요건을 못갖추었어도 신학교 나오면 성경에 따른 검증없이 목사 안수받고 목사되어 일인목회 하며 교회 안에서 군림합니다. 이것의 결과는 수많은 범죄와 성경진리에서의 일탈을 가져옵니다. 집사의 직분 또한 성경에 따라서 부여하지 않습니다.(딤전 3:8-13) 성경 어디에서도 장로들이 언급될 때마다 복수인 것으로 보아 일인 목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목사가 반대하는데 이루어지는 것 볼 수 없고, 목사가 하려하는데 안되는 일 없는 현대교회와는 다른 것을 볼 수있습니다.
9).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호칭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으로 우리는 성도들이라는 신분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서로의 호칭은 주님께서 랍비라든가, 지도자라든가, 아비(신부)라든가 하는 호칭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 너희 선생은 단 한분 그리스도 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니라"(마태23:8)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형제 또는 자매로 부릅니다. 장로일 때에는 장로의 일을 맡고 계시는 형제로 부릅니다. 어느날 제가 웨슬레안 교회에서 목사에게 형제라고 부르고 여전도사에게 자매라고 불렀을 때 엄청난 비난을 당하고 펄쩍 펄쩍 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교역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교만의 깊은 잠에 빠져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신약에 형제호칭은 약 330번 나옵니다. 베드로가 바울을 부를 때에도(벧후3:15) 바울이 두기고, 디모데, 디도를 지칭할 때에도 형제로 불렀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함을 받은 자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10) 우리는 교회 강단의 사용권이 성령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거듭난 형제로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싶으면 강단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전 14:29-33) 이것으로 말미암아 무질서가 야기 되는 것은 한번도 못보앗습니다.
성경에 있지도 않은 직책인 목사라는 사람이 강단을 독점하는 관행은 성경상의 초대교회에는 없었습니다.
11) 우리는 총회본부도, 총회장도, 교리책도, 헌법이나 헌장도 없습니다. 우리의 총회본부는 하늘나라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총회장이시며, 교리책과 교리 교본은 성경책이며, 우리의 헌장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친히 기록해주신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많은 교파들이 총회장, 성가총회장, 증경총회장, 세계복음화 총본부장, 총감독, 감독회장,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 등등 무시무시한 벼슬들을 만들어내어 갖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성경에 전혀 없는 직책명이며 인간들이 인간들에게서 높임을 받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시면 총회장들 소집하고 교황과 정상회담 하실까요? 그것들은 인간들이 인간들에게서 영광을 취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벼슬들입니다.
12) 우리는 성경에서 로마 장로교회나, 에베소 감리교회나, 빌립보 침례교회를 찾아볼수 없음같이 아무런 교파이름도 없이 모입니다. 단지 지역의 이름에 교회 혹은 예배당이라는 말을 붙일 뿐입니다. 한 도시에 한 교회라는 것은 근거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구 천만인 도시에나, 인구 5천명인 마을에 다같이 한 교회만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만큼 하나님은 미련하시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교파의 이름을 금하고 있습니다. (고전 1장 12-1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모이는 형제자매들의 모임을 형제교회다 형제회다 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형제모임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원하여서 그렇게 불리우는 것이 아니고, 외부인들의 편의상 구분하기 위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모여야 정상입니다.
13) 성경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칩니다.(고전 14:34) 소위 형제 모임이라고 불리우는 곳들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들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과도 관련있습니다. 여자가 목사가 되어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교회안에서는 금하신 사항입니다. (디모데 전서 2:12)
14) 초대교회는 성도들의 이동이나 방문에 천거서를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고후3:1, 롬 16:1) 형제모임은 성도들의 이사나 방문등에 그것을 사용하며 때로는 전화로 천거하기도 합니다. 일반교회에서는 너왔느냐 나간다식의 집회가 많지만 형제모임에서는 그보다 훨씬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으며,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국제간의 교류에도 그러하고 있습니다.
15)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친히 가르치시며(요일2:27),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벧전2:5, 2:9).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셔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내려와야 됩니다.
16) 교회는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모입니다.(마18:20) 이것이 수많은 형제단들이 믿음을 지켜왔던 방법입니다.
17) 교회에서는 반드시 징계가 행해져야 합니다. 징계는 성도를 거룩히 보전하기 위해 고통스럽지만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의 징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보다는 교권주의에 반대했다거나, 일인목회자의 권위에 반대했거나 자기들의 이해에 안맞았을 때에 행해지고 반대로 음행이나, 악행들에 관해서는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비추어 옳지 않습니다.
18) 성령님께서는 역사상 저희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며, 성경대로 모이고 성경대로 실천했던 모임들을 지구상에 항상 유지하여 오셨습니다.
바울파, 몬타누스, 알비, 왈도, 보고밀파, 서부독일 형제단, 프로방스 형제단, 보헤미아 형제단, 재침례파, 모라비아 형제단, 플리머스 형제단등 수많은 형제단들이 하나님에 의해 보호되어지고 지켜져왔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왈도파 형제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을 들었습니다.
19)그밖에 형제 모임이 옳다고 분별해놓은 바들에 관해서는 전도출판사에서 발행된 수백종류의 책들, 소책자들이 매우 쉽게, 모두 성경에 근거하여 제시해놓고 있습니다.
그 책자들은 대부분 작고 쉽기 때문에 전철에서나 어디서나 틈틈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 순례하는 교회사라는 책이 독일인 브로드벤트에의해 저술된 것으로 형제단들의 2천년 역사를 잘 서술해놓았습니다. 전국 교회들중의 엄청나게 수많은 교회들이 전도출판사의 전도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0) 작은 일들에 충실함으로 (계3:8) 필라델피아(형제사랑) 모임이 주께로부터 칭찬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동안 많은 축복을 모임의 형제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죤 넬슨 다비는 형제운동을 1827년경 처음 시작하여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죠지뮐러는 고아들의 아버지, 5만번의 응답받은 기도등으로 알려졌으며,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륙 선교회로, 매킨토쉬는 모세 오경강해로, 죠셉 스크리븐은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구인지”로 알려졌습니다. 그외에도, 에드워드 크로닌, 로버트 앤더슨, 로버트 채프만, 에릭 사우어, 해리 아이언사이드, 찬송가들의 제임스 데크등은 형제모임에 참여하였던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또 앞으로도 하나님은 계속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21) 교회 안에 있는 두 가지 직책명********************
교회 안에는 오직 두 직책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장로이며 다른 하나는 집사입니다.
장로는 그 역할과 기능을 말할 때 감독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교회 안에 감독이 있고 장로와 집사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행 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행 20: 28
성령이 저들 가운데서 너희를 감독들로 세우고...
에서 바울은 장로들을 감독들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로와 감독이 다른 것이며 장로들중에 감독 아닌 자가 있었다든지 감독 중에 장로 아닌 자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1:1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및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빌립보에는 장로들이 없었을까요? 왜 장로들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감독들이 복수인 사실은 주목할 일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이라는 부류로 분류되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디모데 전서 3장1절-13 여기서 감독과 집사의 자격요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만일 감독외에 감독 아닌 장로가 있었다면 장로의 자격요건 또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또 장로들 중에서 감독을 뽑아야 한다면 이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 그러므로 감독은 장로된지 수년이 경과한 자들로서...."
감독에 대하여 딤전 3장에서 기록하신 다음, 다시 5장17-20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 장로의 자격요건은 왜 안나왔을까요?
디도서 1장5-9
5절에서 바울은 디도를 남겨둔 이유는 그로 하여금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함이었다 하고, 장로들의 조건들을 열거한 다음 단어를 바꾸어서 감독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문맥을 잘 살펴보시면 두 종류의 직책의 요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직책에 관하여 설명하는 도중에 갑자기 바꾸어서 호칭을 다르게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7절에는 한글 성경에는 없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붙여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문을 번역해보겠습니다:
5 이를 인하여 내가 너를 크레테에 남겨둔 것은, 내가 네게 지시한 바와 같이, 네가 부족한 일들을 바로잡고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도록 하려함이니, 6 만일 누가 흠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방탕하다거나 불복종한다는 비난이 없는, 믿는 자녀들을 가졌으면 이니라. 7 왜냐하면 감독은 마땅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며, 쉽게 화내지 않으며, 술취하지 않으며, 구타하지 않으며, 더러운 이를 탐내지 않으며,
위에서 장로의 자격요건중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고, 믿는 자녀들을 두어야 하고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딤전3장에서 감독의 자격요건으로 언급한 바입니다. 킹제임스는 FOR 를(그리스어 GAR) 살렸음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이 디도로 하여금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라고 하였으니까 디도나 디모데는 사도이거나 속사도였으며 따라서 특별한 지위에 있었고 장로 아닌 감독이었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들이 속사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사도, 선지자, 속사도 이러한 것들은 직책명이 아닌 은사나 사역의 특징을 말합니다. 교회 안의 직책을 그렇게 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로가 장로를 세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데 있습니다.카톨릭들이 초대 교황이라 부르는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장로라고 불렀습니다.(벧전 5:1) 그러면서 장로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벧전5:1-4) 그리고 그 장로들에게 양무리들을 감독하라고 말합니다. 제가 번역해보았습니다.
너희중의 장로들을 내가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들의 증인이며, 장차 나타날 영광에의 참여자라. 2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목양하며,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하며,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유업으로 맡겨진 자들 위에 군림함같이 말고, 양떼의 본이 되어라.
장로들에게 감독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디모데나 디도가 장로는 아니었겠습니까?
디도나 디모데 역시 감독이었으며 동시에 장로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에서 사도와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왜 감독들은 언급되지 않았을까요?
요한도 스스로를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요한2서 1절, 요한 3서 1절)
왜 목사라는 직책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장로들을 언급할 때 왜 감독들은 언급되지 않았을까요?
빌립보 교회에는 감독들과 집사들만 있고 장로들은 없었을까요? 왜 빌립보 교회에는 목사라는 직책이 언급되지 않았습니까? 에베소 교회에는 반대로 장로들만 있고 감독들은 없었을까요? 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감독들로 세웠다고 말했을까요?( 행 20:17, 28)
사도 요한은 스스로를 장로로 불렀습니다(요한 2서 1절, 요한 3서 1절). 사도 요한위에 감독을 맡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 위에 목사직책가진 사람이 있었을까요? 오늘날 장로들은 신학교를 안나왔다는 이유로 축도도 못하고, 설교도 못하며, 침례(혹은 세례) 베풀기도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침례도 못베풀고 성만찬도 집례하지 못했을까요? 오늘날의 장로들은 초대교회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직책으로 하락했습니까?
호칭에 관한 한 소스데네, 디모데, 디도, 에바브라, 바울 모두를 형제라고 불렀음은 주목할 일입니다. 사도, 선지자, 속사도는 직책이 아닌 은사로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오직 장로와 집사의 두 가지 직책이 있을 뿐이며 장로는 감독으로도 불리었습니다.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역할 범위를 가졌으며 그것이 다른 것처럼 하여 장로들 위에 감독이 있다든지 감독들 위에 장로들이 있다든지 하여 조직을 만들고 그것으로 총회본부를 세우며, 노회를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기 위한 구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총회본부는 없었으며, 노회도 총회도 총회장도, 교황이나 추기경도 그 용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성경에 기록한 말씀은 지키지 않으면서 성경에 없는 직책과 호칭과 명칭이며, 새로운 계명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총회장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총회본부는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2절에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 직접 지시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오늘날 총회조직을 생각하면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 지시하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에게 수없이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지시하실 때에 예루살렘 교회 통해서 지시하셨겠습니까? 성령께서는 개교회에 개인에게 나타나십니다.
교회에는 오직 두 종류의 직책이 있으며 오늘날의 목사제도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바벨탑입니다. 그 바벨탑은 반드시 붕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나 사도 바울이 오늘날 오셔서 교회들을 세우신다면 오늘날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교회 모임들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며 교회 생활을 그와같이 가르칠 것입니다. 그분들은 총회장으로 취임하려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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