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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스크랩] 마지막 흔들림이 다가온다!

by 디클레어 2010. 8. 5.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 데 이르러서 모두 다 구원받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과 축복이지, 심판과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불쌍하게 여기심과 부드러우심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태도와 불순종에 달린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말세에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의인과 악인을 갈라 놓으시는 것일까요?

 

가라지는 알곡들을 해칩니다. 함께 오래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흔들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단단히 박혀 있지 않은 사람들, 진리로 인하여 성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에 올바로 믿는 사람들까지도 넘어지게 합니다.

 

동반 자살을 꾀하는 것이지요. 함께 부둥켜안고 절벽으로 뛰어내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흔들림을 허락하십니다.

진리에 안착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걸러 내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교회 안에 그리고 개인 생활 속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시므로 그들의 진정한 실상을 폭로해 내십니다.

 

오류들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심으로 진리로 무장해 있지 않은 자들의 형편을 드러내십니다.

 

고통과 핍박이 오도록 하셔서 우리의 속내를 파헤쳐서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날카로운 증언들을 듣고 읽게 하심으로 우리들의 진정한 태도를 알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단계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바람 부는 곳에서 키질해 보셨습니까?

 

바람에 날려가는 쭉정이들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알곡만 있는 것 같은 곳에서, 크고 잘생긴 많은 교회 속에서, 매우 많은 쭉정이가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이제 곧 큰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많은 믿는 자들이 넘어질 것입니다.

 

흔들림이 옵니다.

 

매일매일 경험하는 작은 흔들림들 말고도 한 큰 폭풍이 오고 있습니다.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흔들림의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흔들림

 

성경에는 흔들림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그런데 그 흔들림에 대한 기록은 세상의 멸망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재림의 때와 연관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흔들림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 절을 보자.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5~29)

특별히 27절을 다른 성경의 번역으로 살펴보면 “진동”이라는 단어가 “흔들림”이라는 의미가 담긴 단어로 쓰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 흔들림이란 무엇인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예수께서는 그분의 오심과 마지막 때를 연관지어 말씀하시면서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는 물음을 던지셨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세상의 마지막 때인 예수 재림 전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며 남아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 심판과 멸망이 왔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항상 소수였다.

 

이 세상에 홍수의 심판이 왔을 때 구원받은 사람들은 노아의 가족뿐이었고, 영적인 구원의 상징이었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중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뿐이었으며, 소돔 성의 심판 때에 구원받은 사람도 롯의 가족뿐이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6~30절에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소돔에 멸망이 이르던 때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임했던 그 심판 때에 살아남은 사람이 그렇게 적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충성할 사람들이 적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흔들려서 진리에서 떨어져 나갈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27절에 언급되어 있듯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굳게 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에, 흔들려 떨어져 나갈 만한 것들이 다 흔들려 떨어져 나가는 일이 선재할 것이다.

 

그것을 “흔들림”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흔들고 시험하여 그 사람이 진리와 진리에 충실한 참된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시험이 될 것이다.

 

2) 흔들림에 관한 성경의 언급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에는 흔들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세상에 임할 심판과 그때에 구원을 받을 사람들과 흔들려 떨어져 나갈 사람들에 대하여 묘사되어 있다.

1.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이야기로서, 가라지인 쭉정이 신자들이 흔들려 떨어져 나가고, 알곡인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 곳간에 들여진다는 비유이다.

 

2.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밭(마 13:3~8, 19~23): 진리를 받은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유로서, 특히 돌밭이나 가시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환난이나 핍박, 또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흔들려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신실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3. “그물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의 비유(마 13:47~50): 세상 끝에 이르러오는 심판인 선한 자와 악한 자의 분리를 가리키는 비유이다.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 중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기고 나쁜 물고기들은 버림을 당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충성스럽고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구별되며, 나쁜 물고기들은 흔들려 떨어져 나가는 유형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4.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2~46): 이 비유는 인자이신 예수께서 오실 때,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는 것같이 구원 얻을 사람들과 멸망에 들어갈 사람들을 구분하시는 것을 가리키는데, 오른편 양의 무리는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고 진리의 편에 선 신실한 하나님의 참 백성을 대표하고, 왼편 염소의 무리는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서 떨어져 나간 불충실한 사람들을 대표한다.

 

5.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마 25:1~12): 이 비유는 예수님을 믿노라고 말하며 기다리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이야기이다. 모두 진리의 말씀인 등을 가졌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가지고 있는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는 힘, 기름으로 상징된 성령의 능력이 없었다. 결국, 말뿐의 그리스도인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흔들려 떨어져 나가 멸망을 받게 됨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비유는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참 백성이 아닌 쭉정이들을 신실한 참 백성으로부터 골라내시고 분리시키시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말씀하신 비유들이며,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여 떨어져 나가는 사람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비유 가운데 보면 흔들림과 분리는 세상 끝날에 있을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이 가까운 이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바로 전에 큰 흔들림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지금 그 흔들림 가운데 있다.

 

흔들림을 통하여 누가 최종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들인지 확실하게 구분되고 시험 될 것이다.

 

진동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3) 흔들리지 말라는 부탁

 

믿음의 선조들은 후세를 사는 사람들, 곧 말세에 사는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라는 부탁들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8)라고 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3장 3절에는 “여러분 중의 그 어느 누구도 고난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쉬운성경)라고 쓰여 있다.

 

골로새서 1장 23절에도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 계십시오.”(쉬운성경)라고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12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그 은혜 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십시오.”(쉬운성경)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의 마지막 저서인 베드로후서 3장 10, 11, 17절에 흔들려 떨어지지 말 것을 이렇게 부탁하고 있다.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그렇다면 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나름대로 열심히 믿고 있는데 마지막에 흔들려 떨어져 나가는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로 하자.

 

흔들림의 첫 번째 이유

 

하나님의 백성을 체질하여 누가 참된 그분의 자녀인지를 구별하게 하는 첫 번째 흔들림은 오류와 이설이다.

 

오류와 이설은 그 사람의 신앙을 드러낸다. 믿기가 훨씬 쉽고, 진리를 위해 아무 희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넓은 길을 좋아하는 신자들은 이설과 오류를 쉽게 받아들인다.

 

명목상의 가라지 신자들은 편안한 복음, 주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자아를 굴복시키지 않아도 되는 편하고 넓은 길을 택한다.

 

요즈음 기독교를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을 흔들리게 하는 이설과 오류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교회의 전통이 된 비성서적 교리들

 

현재 기독교 안에는 원래의 성서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난 비성서적인 가르침들이 편만하게 퍼져 있다.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복음과 교리가 인간의 가르침으로 대체되고 바뀐 채 교회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값싼 은혜”와 “반쪽 복음” 그리고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가르침,

 

“원죄설”, “영혼 불멸설”, “지옥설” 등은 성서적이지 않은 이설이며 오류이다.

 

그러나 더 점진적으로 수행되었어야 할 종교 개혁 운동의 중단으로 인해 이 비성서적인 교리들이 교회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오랜 교회의 전통이 되어 사람들이 이 오류를 믿도록 강요되고 있다.

 

2) 흔들리게 하는 오류들

 

옛날 고대 바벨론 시대에 시작된 이방 종교의 가르침들은 중세기에 1,200여 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서 교황권에 서서히 흘러들어 가게 되었고, 그리하여 초대 그리스도교회가 가지고 있던 순결한 진리에 이방 종교의 가르침들을 섞은 혼합된 교리들, 즉 바벨론의 포도주인 여러 가지 오류와 이설들이 개신교회들 속에 남아 흘러 내려오게 되었다.

 

이 바벨론의 포도주는 사람들을 취하게 하여 하나님의 참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짓 교리들이며, 이 잘못된 교리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영적인 경험을 올바로 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구원이 확정되었다는 기만 속에 빠지게 되어 구원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만다.

원죄설:

 

원죄설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 아담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의 영향을 받고 태어난 본성 자체를 죄라고 믿는 설이다.

 

원죄설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죄라고 여기기 때문에,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또 죄를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또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반사하는 성화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므로, 그냥 “죄짓고 사는” 방식의 변화 없는 신앙생활을 살게 되며,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사상이 꼴 지어지고 진리에서 흔들려 떨어져 나가게 된다.

영혼 불멸설과 영원한 지옥설:

 

이 오류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게 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실패하게 하여 하나님을 순수한 사랑과 애정으로 믿지 못하게 만든다.

 

지옥설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게 하고, 지옥에 갈까 봐 공포에 떠는 동기에서 하나님을 믿게 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교리가 영원한 지옥설이다.

예정설:

 

예정설을 믿으면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기만적인 확신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어떤 행동을 해도 결국에는 구원과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위험한 사상에 빠지게 된다.

 

이 교리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는 성경적 진리에 어긋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원을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에 협력해야 하는 우리의 할 일과 올바른 영적인 경험을 흐리게 한다.

 

예정론을 믿게 되면, 택하심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 있게 되는 공정하지 못한 운명론 때문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되고, 거짓 안전감 속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참된 신앙에서 흔들려 떨어져 나가게 되고 마지막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일에 실패하게 된다.

값싼 은혜:

 

요즘 교회 안에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편만하다.

 

값싼 은혜를 가르치면 사람들은 은혜를 단순히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 은혜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능력 그리고 죄를 승리하는 생활, 성화와 순종의 생애를 간과하게 하므로 참된 회개나 죄에 대한 포기가 없이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값싼 은혜”의 가르침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이도, 또한 죄의 고백과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나 거듭남 없이도, 그리고 생애의 진정한 개혁 없이도 구원의 확신을 얻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은혜, 자아의 죽음이 없는 감정적이기만 한 은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떨어뜨리는 값싼 은혜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나 행위의 열매에는 무관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가르침은 죄를 값싼 은혜로 덮어씌우기 때문에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하고, 점점 더 안이하고 편안한 신앙생활에 젖어 타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리하여 구원과는 먼, 흔들려 떨어지는 쭉정이 신자가 되게 한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가르침:

 

예정론의 오류는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once saved, always saved)는 개념이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를 만들어 내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거짓 안전감에 빠지게 되며,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죄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깊은 자기기만 속에 빠진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오류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죄악을 승리하고 거듭난 생애를 사는 일의 중요성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흔들려 떨어져 나가게 한다.

 

 

흔들림의 두 번째 이유

 

신실하게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곧바른 진리와 성서적인 참된 복음이 제시될 때,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에 따라 흔들림이 온다.

 

흔들림이 오는 두 번째 이유는 곧바른 진리 때문이다.

 

진리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진정한 신앙 상태가 드러난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음과 진리는 무엇인가?

 

1) 성서적인 참 복음

 

1. 죄에 대한 정의

 

성경은 태어난 본성 자체를 죄이며 죄인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죄란 인간의 자유 의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마음의 선택으로 정의한다.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기로 선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어린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 본인의 의지로 어떤 선택도 하지 않았고,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으므로 죄인으로 정죄할 수 없다.

 

2. 예수님의 본성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알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성서적인 교리도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인성)를 취하셨다.

 

죄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으므로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 되신다.

 

3. 성화의 필요성

 

현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반쪽 복음은 “칭의”만을 강조하지만, 성서적인 온전한 복음은 칭의와 성화 두 가지 모두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용서하심과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칭의)하실 때 의롭지 않은 사람을 그냥 덮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할 마음이 없는 참된 회개를 하는 것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신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용서하실 때 그 죄인의 마음도 동시에 변화시켜 주시므로 그 사람은 이제 예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성화의 생애, 영적으로 자라나는 생애를 살게 되는 것이다.

 

칭의를 받은 사람의 생애 가운데는 반드시 거룩한 열매(성화)가 나타난다.

 

4. 순종의 생애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심판은 행위로 받는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성화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행위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며 그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요 5:3).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5. 승리하는 생애와 열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힘을 얻어 우리의 의지를 올바른 편에 두고 주님의 편을 선택할 때, 우리는 죄를 승리한다.

성경은 우리가 죄를 승리할 수 있으며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죄는 우리 의지의 선택 여부라는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살며 능력을 받아 매 순간 의지를 굴복하여 주님의 편에 서므로 죄를 이기며 승리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된다.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로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사단은 억지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게 할 수 없다.

 

우리의 의지가 먼저 승낙하고 우리의 믿음의 손이 그리스도를 놓기 전에 사단은 자기의 세력을 우리에게 행사할 수 없다.

 “완전”이란 “하나님의 뜻과 계명 그리고 진리에 굴복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의미한다.

 

완전은 본성의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중단이 없는 영적인 성장이 따르며, 그리하여 품성의 장성한 분량인 “완전한 성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장성한 성품의 생애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일이 결과로 나타난다.


2) 흔드는 진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자신이 진리라고 과신하던 교리가 성경의 진리와 대치됨을 발견할 때, 사람들의 상태가 드러난다.

 

진리가 올 때, 겸손하고 심령이 하나님 앞에 굴복된 사람은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영적인 교만과 종교적인 아집과 편견에 빠진 사람은 분노하며 진리를 거절한다.

 

진리는 모든 것을 흔들면서 진리가 아닌 것은 버리라고 냉정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의견이나 교회의 권위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기보다는 기존의 지식과 교리에 안주하기를 원한다.

 

진리를 위해 희생하기에는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교적인 열심으로 가장했지만, 사실 심령에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마 3:12)는 진리의 체질을 당하였다.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 쭉정이는 알곡과 분리되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너무나 허영심이 많고 독선적이어서 견책을 받을 수가 없었고, 겸비의 생애를 감수하기에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였으므로 대부분이 예수님에게서 떠나갔다.

 

그 당시의 많은 사람이 시험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진리로 시험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가 마음속에 들어올 때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죄가 발각될 때 성을 내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투덜거리면서 예수님을 떠난 것처럼 진리를 거절하고 떠난다.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가르침을 버리는 일은 엄청난 희생과 용기를 요구한다.

 

특히 교회 안에서 신실하다는 평판을 얻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자존심이 강하고 대중의 지지와 교회의 명망과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뚜렷하므로 쉽게 진리에 굴복하는 일이 어렵다.

 

예수님 당시에도 교회의 가르침과 지도자들의 교훈을 맹신하고 열렬히 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중의 인기와 대다수 의견을 더 중요시하였으며, 하나님의 진리보다 그들의 유전과 인간의 교훈을 더 사랑하여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진리를 싫어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요 12:43)다.

 

진리는 교회의 권위나 인간의 가르침보다 하나님의 목소리와 뜻을 더 높일 것을 요구한다.

 

회개한 베드로는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히 외쳤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에 더 중점을 두는 사람은 진리를 따를 수 없다.

 

이 세상의 어느 것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진리를 따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그를 흔들지 못한다.

 

흔들림의 세번째 이유

 

세속주의와 거짓 성령 운동

 

현대 기독교회들은 성령의 결핍을 세속적인 흥미와 세상의 오락으로 채우고 있다.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참된 영적인 경험을 주는 대신 숫자를 늘리려는 방편으로 세속적인 재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1) 교회에 들어온 세속주의

 

오늘날 예배에서 사라진 성령 역사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복음주의적 예배 형식’인 ‘축제 예배’가 기독교를 침투하게 되었다.

 

요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경건한 예배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올바른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는 그 공백을 메우려고 교회 안으로 신나는 빠른 템포의 음악과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의 노래들을 불러들여 성령의 조용하고 엄숙한 임재 대신에,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음악으로 신자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건물과 종교 기관의 건물들이 크게 지어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 신자의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앞지른다.

 

그리고 종교가 사회의 각계각층과 각 연령층의 사람 중에서 개종자를 얻으려고 애쓴다.

 

기독교는 이제 큰 사업이 되어 버렸다.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영적이고 진지한 프로그램 대신 오락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영적인 분위기로 신도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진 듯이 보인다.

 

교회에 들어온 세속주의는 점점 심각한 현상을 교회 안에 빚어내고 있는데,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 참된 회개를 촉구하지 못하는 감정적인 신앙, 예배에 섞이는 세속적인 음악, 축제식 예배 형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형식에만 치우치는 종교 행위들, 사교 활동과 친교 회의, 세상적 판촉 활동과 매매 등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피상적인 신앙이 교회를 물들이고 있다.

진리를 위해 희생하고 극기하며 자아를 하나님께 진정으로 굴복하기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육적인 사람들에게 이런 세속주의와 감정적인 예배 형태는 매우 호감을 사고 있다.

 

그리하여 참된 거듭남을 갈구하는 대신 거짓 평안과 위로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영적인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심한 흔들림이 되고 있다.

 

육적이고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 침투해 온 세속주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에서 흔들려 점점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2) 거짓 성령 운동

 

현대 기독교는 전에 없었던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으며, 이런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기독교의 사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집착하여 이것을 참된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 있다.

 

피상적인 신앙의 교인들과 올바른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신자들 그리고 진리를 알지 못하고 연구해 본 적이 없는 신자들, 깊이 있는 신앙과 말씀의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현시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많은 기독교인이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려고 모든 것을 희생하며 말씀을 깊이 연구하며 깊은 영적 경험을 하는 대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과 같은 흥분적이고 광적인 것에 몰두하고 있고 또한 이를 성령의 역사라고 열광하며 따르는 것이다.

거짓 성령 운동은 참된 성령의 역사를 막는다.

 

사단은 마지막 때에 거짓 이적과 표적들을 이용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려고 할 것이다.

 

기독교를 휩쓰는 이 거짓 성령 운동은 마지막 때에 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미혹할 것이다.

 

기독교인이 기적이나 이적, 또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믿으면, 참 성령의 역사, 곧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애를 개혁하게 하며, 극기하고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하게 하며, 다가오는 심판과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깨닫지도 못하게 되기가 쉽다.

사단은 진리 아닌 오류를 믿게 하며 그것에 확신을 주려고 거짓 기적을 일으킨다.

 

마귀의 역사에도 기사와 표적이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리인지 살피지 않고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거짓 성령의 역사를 따르게 되어 있다.

 

거짓 성령 운동에 빠지게 되면, 생애의 진정한 변화가 없이도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 같고, 열광적이고 흥분적인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구원받았다.”라는 거짓 안전감에 젖어들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진리에서 흔들려 떨어져 나가게 된다.

거짓 성령 운동의 자극적인 요소들은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일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하며, 진정한 영적인 경험과 영적 성장을 방해한다.

 

사단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거짓 성령 운동으로 끌어들여 주님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지 못하도록 기만하고, 또한 거짓 성령 운동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모든 종교를 하나로 연합시킨 후,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그에게 경배하도록 강제령을 내리려는 의도로 역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짓 성령 운동은 피상적인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가라지 신자들을 흔들려 나가게 하는 것이다.

 

흔들림의 네 번째 이유

 

흔들림의 네 번째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성경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경고하고 있다.

 

1) 영적 무관심

 

세상을 사랑하고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흔들려 떨어져 나갈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마 13:19)

 

진리에 관심이 없고 영적인 사물에 무관심한 사람,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열망하지 않고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길가”와 같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말씀에 관심도 없고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낸다.

 

마치 사람이나 짐승의 발에 밟혀 단단해진 길과 같이 그런 마음은 세상적인 관심과 쾌락과 죄가 난무하는 큰 대로이다.

 

세상의 이기적인 목적과 죄악적인 방종에 몰두된,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히 3:13) 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영적 기능은 마비되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그들은 영적인 난쟁이이다.

 

그들의 관심은 늘 다른 데 있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얻는 영리적인 이익, 교회 내에서의 사교생활, 인간 사회에서의 인정, 인간적인 권위와 세력 다툼, 교회에서 주는 세상적인 오락 등에만 관심이 있다.

마치 새가 길가에 떨어진 씨를 재빨리 주워 먹는 것처럼 사단도 우리 심령에서 진리의 씨를 빼앗아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갈아지지 않고 기경되지 못한 마음, 곧 거듭난 적이 없는 마음에는 진리가 자리 잡을 수 없고 싹을 틔울 수 없다.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감명을 주지 못하고, 진리가 올 때 오히려 그 말씀을 비평하며 의심과 불신을 나타낸다.

 

그런 밭은 새롭게 갈아엎어지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의 쾌락이나 세속적인 재미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비록 오랜 교회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영생과 구원의 소망과는 먼 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흔들림의 바람이 불 때 어김없이 세상으로 불려나갈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2) 세상적인 마음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사람 또한 흔들릴 가능성이 많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위태롭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 주의를 주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많은 그리스도인이 재물과 세상이라는 덫에 걸려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자신의 재물이나 사업에 손해를 가져올 때, 그리고 세상적인 이익을 얻는 일을 제지할 때,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편을 택하기보다는 세상을 택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이나 영적인 사물은 부수적인 것이 되고 세속적인 사물이 으뜸이 된다.

 

이러한 상태의 마음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밭 같은 마음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고 싹이 트는 것을 방해하는 가시 떨기를, 마가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욕심”과 “다른 모든 물욕”이라고 말했고, 누가는 “ 세상의 염려”와 “부와 쾌락”이라고 열거하고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막고 영적 씨의 성장을 방해하여 결국 진정한 신앙과 영성을 사멸시킨다.

 

가시는 언제나 빨리 자라므로 제초하는 일이 늘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지배 밑에 두지 않고 성령이 끊임없이 품성을 거룩하게 형성시키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이 비록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해지지 않으면 그 고백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상과 죄를 이기지 않으면 그것이 사람을 이기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업에 너무 열중하여 기도할 시간도, 성경을 연구할 시간도, 하나님을 찾아 섬길 시간도 없다.

 

때때로 그들의 심령이 성결해지기를 사모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소음을 떠나 조용하고 세밀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시간이 없다.

 

가시 떨기를 잘라 버렸을지라도 뿌리가 뽑히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것이 다시 자라 덩굴이 또다시 밭을 덮게 되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세상의 이기가 마음속을 덮어 결국 하나님의 진리 편에 서기보다 편하고 좋은 세상의 편을 택하게 되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3) 자아 사랑

 

많은 그리스도인이 깊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다.

 

그 우상 숭배는 다름이 아닌 자아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만큼 큰 우상은 없다.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사이 자아 숭배에 깊이 빠져들어 가 있는데, 곧 자신의 생각, 자신의 의견, 자신의 주장, 자신의 감정, 자신의 생애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 어떤 것도 자아를 제지하지 못하도록 교만의 성을 높이 쌓고, 자아만을 사랑하고 높이는 것이다.

 

자아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포기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 편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항상 자아를 건드리며, 자아를 버릴 것을 종용하고, 또한 자신을 숭배하는 일을 그치고 최고의 관심의 대상을 자아가 아닌 하나님으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와 명목상의 신앙은 좋은 소일거리가 되고 있다.

 

진리에 온전히 굴복하고 자신이 완전히 죽는 경험 없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다.

 

그것 중 하나는 교회에서 권력을 얻으려고 신자들이 서로 쟁투하고 싸우는 일이다.

 

교회는 인간 사회에서의 인정과 권위를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자아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알맞은 장소가 되고 있다.

 

유행과 부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그들의 사치와 재물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며, 인간의 평판과 명예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종교적인 행위와 교회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인정과 명망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

 

자아 숭배에 빠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현상은, 인기 있는 목사의 말, 즉 자신을 안위시키는 거짓 평안의 말과 자신을 바치고 포기하는 일을 강조하지 않는 가짜 복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함과 교만과 자아 숭배와 올바르지 못한 동기에서 나오는 모든 행실과 말을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마지막에 하나님을 위하여 설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마찰을 일으킨다. 자아 만족의 사상은 시야에서 그리스도를 가려 버린다.

 

교만한 정신은 온유와 겸손의 정신으로 예수님을 따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며, 따라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함을 받기 위한 열망으로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정신, 곧 자신의 주장이나 자신의 뜻이나 자신이 좋은 대로 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 자기를 단장하고 과시하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라는 말씀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흔들림

 

짐승의 표 환난과 핍박

 

흔들림 중에 마지막 가장 큰 시험이 되는 것은 핍박이다.

 

우리의 눈앞에는 짐승의 표 환난,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공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짐승의 표 환난과 핍박은 하나님의 참 백성과 거짓 자녀를 구별하는 마지막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금은 깨어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안일함과 편안함을 더 사랑하고 어려움과 시련을 이길 꾸준한 인내와 극기와 강한 믿음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다가올 핍박을 견딜 준비가 되지 못함으로 인해 흔들릴 것이다.


1) 핍박

핍박에 흔들리는 사람

 

피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어려움이나 핍박이 올 때 흔들려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돌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대표되어 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 13:20)

 

돌밭은 흙이 깊지 못하다.

 

뜨거운 햇볕은, 튼튼한 곡식을 강하게 하고 잘 익게 하지만, 뿌리가 깊지 못한 곡식은 시들게 한다.

 

이처럼 “뿌리가 없”는 자는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

 

생활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진리로 말미암아 핍박이 오고 풀무 불의 연단과 같은 어려운 시험을 받게 될 때에는 엎드러지고 만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능욕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품고 있는 어떤 죄를 지적하거나 극기와 희생을 요구하게 될 때 감정이 매우 상하게 되며, 눈앞에 있는 불편과 시련만을 보고 영원한 사물을 잊어버린다.

 

이렇게 시련이나 고난으로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천적인 이기심이 땅속에 깔린 바위나 돌처럼 그들의 선한 욕망과 포부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런 사람들은 쉽사리 진리를 받아들이고 확신하는, 겉으로는 유망한 신자처럼 보이지만 피상적인 믿음을 가진 흔들려 떨어져 나가기 쉬운 거짓 신앙 고백자들일 뿐이다.

 

또한, 돌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받기는 하지만, 거기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의 진리를 높이고 보존하기 위하여 생명이라도 버릴 용기와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마지막 큰 흔들림이 될 핍박에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핍박을 받는 신실한 신자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는 예가 많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씀처럼, 성경적인 정확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핍박과 따돌림을 받는다.

 

인간이 만든 유전과 교리를 신봉하며 종교적인 교만과 아집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눈을 떠서 진리를 식별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참된 성령의 역사와 진리에 대하여 대항하고 일어서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가인이 아벨에 대하여 가졌던 정신과 같은 것으로, 경건한 자들이 깨달은 진리가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따돌림과 외로움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핍박이란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들에게 가하는 괴롭힘이기보다는 믿는 자들이 같은 믿는 자들에게 자기들의 교리나 신앙을 달리하거나 반대하기 때문에 가하는 괴롭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믿고 있다고 하여서 그를 괴롭히거나 핍박하는 것은 사단의 정신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핍박과 환난이 와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자 결심한 굳센 믿음의 소유자들은, 그리고 진정으로 자아를 굴복하고 버린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편에서 흔들려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어떤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신실한 사람들이 이 마지막 때에 필요하다.

 

2) 가까이 다가온 짐승의 표 환난과 핍박

마지막 흔들림과 핍박을 가져올 짐승의 표 환난이 가까워 오고 있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 13:15)

 

요한계시록 13장 전체를 읽어 보면, 마지막 때에 짐승이 권세를 얻게 되는 장면과 또 권세를 다시 얻게 된 짐승이 “짐승의 표”를 강요하여 그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이 세상 역사가 마지막에 이를 때 짐승의 세력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 각 개인의 사생활을 지배하고 강요하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짐승의 표를 강요하려면 먼저 짐승의 우상을 만들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게 하는 일이 선재한다.

 

“짐승의 우상”이란 타락한 개신교가 자기의 교리와 신조를 강요하기 위하여 정치와 국권의 도움을 구하여, 중세기에 있던 종교적인 핍박을 다시 가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 재강림의 마지막 예언 성취이기도 한 이 짐승의 표 환난과 핍박은 여러 가지 요인들을 통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종교 연합을 통하여

근래에 들어와서 종교 연합 운동이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본다. 물론 종교적인 연합을 통해 영적인 부흥을 꾀한다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이 종교 연합 운동이 짐승의 우상을 세우는 배후의 세력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를 주시해 보아야 한다.

 

벌써 미국의 개신교회들은 선조들의 종교 개혁 정신을 버리고 타협하여, 교황권의 제도가 기독교에 들여온 오류들을 받아들이고 교리와 복음의 타협을 통해 함께 손을 잡았다.

 

교황권의 세력은 벌써 오래전부터 개신교회의 활동의 배후에 서서 그들의 하는 일을 조절하고 있었으며,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연합은, 거짓 성령 운동과 방언 그리고 교리의 차이를 없애자고 강조하는 사랑과 연합, 또 오류의 가르침들을 통해 벌써 이루어졌다.

개신교 국가인 미국은 곧 용처럼 말하며, 교황권을 위하여 짐승의 우상을 세우게 될 것이다.

 

종교 연합 운동은 겉으로는 영적인 신앙과 도덕성을 회복하여 국가의 기강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좋은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결국 이 종교 연합 운동은 인간의 힘과 권력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을 통제하고 강압하여 신앙을 강요하게 될 것인데, 그 강요하는 신앙과 법이 하나님의 불변하는 참된 법과 계명이 아니라, 인간이 세운 인간의 유전과 교리에 따라 세운 법이 될 것이므로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순종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압박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도덕적인 타락을 막고 원래의 미국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보수파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세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더 나아가 헌법을 수정하며 어느 정도의 자유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통제 정치를 감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일어나는 종교 통합의 정신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한다.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나, 나라의 도덕을 되살리기 위한 일이나, 교회를 부흥시키고 개혁시키는 일은 국가적인 강제 법령을 통하여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강제로 하늘에 데려가지는 않으실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마음속의 개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국가나 교회의 강압적인 법령을 통하여 사람들을 바꾸어 놓으려 하는 시도는 오히려 핍박을 낳는 수단이 된다.

 

짐승의 표 핍박은 잘못 믿는 자들이 자기들의 믿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여 올바로 믿는 자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 위기를 통하여

 

짐승의 표 환난은 경제적인 문제와 중요한 연관이 있다.

 

요한계시록 13장 16, 17절에는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 하게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못 하게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사고파는 일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되려면 미국과 세계의 경제가 교황권의 재력에 의존하는 일이 생길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요즈음 전 세계 각국들이 당면한 경제 문제들을 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과 위기로 인한 짐승의 표 환난을 불러올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2010년에 접어들면서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금융 위기 이후에 생겨난 국제 공조하의 경제 위기 대응에 따라 막대한 적자 재정의 늪에 빠져 있다.

 

특별히 2010년을 맞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경제 전문가들은 세계 각국이 당면한 경제 위기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과 염려를 나타냈다.

 

고실업률, 경기 부양책이 빚어낸 경기 회복 불균형 등의 문제들이 경기 회복을 어렵게 만드는 복병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출구 전략” 조기 시행을 반대하는 의견들이 회의 포럼장을 지배했다.

“출구 전략”이란 경기 침체를 막고자 국가가 시장에 풀어놓은 돈을 다시 거둬들이고 흡수하는 정책을 말하는데, 그러나 이 “출구 전략”을 서둘러 취할 경우 “더불딥 공황”(double dip recession)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므로 전문가들은 정부와 중앙은행의 출구 정책 실시 시기에 신경과민이 된 상태이다.

 

여기에 두바이 경제 위기 그리스 국가의 파산, 일본의 디플레이션 재현 등의 사태는 세계 경제 파산의 일보 직전의 상황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하여 각국에 산재하는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 인플레이션 압력 고조, 휴먼 리세션으로 불리는 고실업률, 저성장세가 2010년의 경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와 계획을 모르며, 어떤 경제적인 문제로 짐승의 표 환난이 올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짐승의 표가 경제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재림과 환난 준비를 위해 기도하면서 경제 상황을 주의해서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3) 천연 재해와 위기 상황이 불러올 짐승의 표 환난

 

최근에 들어 기상 이변과 천연 재해가 점점 더 심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실현되어 가는 것 같다.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12)

 

2010년 들어 연달아 일어난 지진들과 해일과 기상의 이변들은 마지막이 가까움을 경고해 주고 있다.

아이티 지진

 

2010년 새해가 밝자마자 발생한 아이티와 칠레의 지진은 이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2010년 1월 12일, 아이티 “포트로프랭스”에서 일어난 지진은 세계 대참사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심한 지진이었다.

 

리히터 규모 7.0의 강도의 지진으로 일어난 아이티 대참사는 세계에서 일어난 7.0 강도의 지진 중에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었는데, 세계 적십자사 보고에 의하면, 사망자 35만 명, 부상자 및 이재민 300만 명을 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엔리케 단층이 움직여 일어난 아이티 지진은, 첫 지진 이후 여진이 2시간 동안 6차례, 9시간 동안 26차례나 발생하여 더 많은 공포와 피해를 주었고, 2004년에 일어난 인도네시아 쓰나미의 사망자 162,000여 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망자를 내었다.

칠레 지진

 

2010년 2월 27일, 칠레 콘셉시온(Concepcion)에서 규모 8.8의 강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약 1,500여 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와 이재민을 내었다.

 

또한, 6도 이상의 여진이 계속되어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사상자 중에 많은 사람이 쓰나미 때문에 피해를 봤다.

 

그런데 이 칠레의 서부 해안을 강타한 진도 8.8의 지진이 칠레 중남부 도시인 콘셉시온 전체를 최소 10피트가량 서쪽으로 이동시켰으며, 포클랜드 제도(Falkland Islands), 브라질의 포르탈레자(Fortaleza) 등과 같은 남아메리카 도시 일부들도 이동시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지축이 기울어졌다는 보고가 나왔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지각 변동에 대한 측정은 아르헨티나 연구진을 포함한 네 개 대학과 몇 개의 연구 기관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Santiago)는 남서쪽으로 약 11인치가량 이동했고, 발파라이소(Valparaiso), 멘도사(Mendoza), 아르헨티나, 콘셉시온 동북부 역시 상당히 이동했다는 것이다.

 

환태평양 화산대를 따라 대륙의 표층인 텍토닉 플레이트(tectonic plate)들이 단층대에서 흔들리며 서로 밀어낸 것이다.

2010년 들어 연달아 천연 재해가 일어났는데, 칠레 지진 후 일본 쓰나미에 이어 필리핀과대만에도 지진이 일어났다.

 

필리핀 지진은 규모 6.1의 강진이었고,

 

3월 4일 대만에도 6.4도의 지진이 왔으며,

 

우간다에는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많은 사망자가 속출했다.

 

두 달 동안 대규모 지진들이 속속히 일어나고, 세계 각 도시에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으며, 하와이와 러시아에는 쓰나미 경보가 내렸고, 일본 북부 미야기현에는 쓰나미가 닥쳐 200만 명이 대피하기도 했다.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세상에 큰 지진이 발생하는 것은 지구의 지축의 큰 흔들림과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며, 또한 지구 지축의 각도 변경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기후의 변화도 예수님의 재림과 환난의 가까움을 알려 주는 요인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이다.

 

천연 재해나 위기 상황이 발생할 때, 특히 이런 위급 상황이 미국에 발생할 때, 이에 대한 온 세계를 제어하는 통제 시스템의 수단으로서 짐승의 표 강제령이 내려질 수 있음을 우리는 감안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면서

 

다니엘은 마지막 때가 오기 바로 직전에 일어날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은 예수님의 중보 사업이 끝마쳐지면서 은혜의 시간이 끝나고 오는 환난이다.

 

짐승의 표 환난이 있고 큰 핍박이 온다.

 

각 영혼에게 흔들리는 시험이 이미 다가왔다.

 

우리는 영적으로 알게 모르게 흔들리는 과정에 들어가 있다.

 

세상과 거짓 복음과 오류와 안일함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고 넓은 길로 가든가, 아니면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편에 서며 좁을 길을 걸어가든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매일의 생애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세상의 요구에 양보하고 세상의 습관에 순응해 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조소와 모욕과 위협적인 투옥과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에 굴복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편안할 때에 신실하게 보이고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도 핍박이 일어날 때에 많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진리를 위해 받는 핍박과 어려움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그들의 충성을 흐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분리와 연합이 계속되고 있다.

 

세상을 본받고 세상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은 점점 악의 형상으로 꼴 지워져 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에 온전히 굴복한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주의 진리로 점점 무장되어 갈 것이다.

 

이 흔들림의 시기에 하나님의 진리 편에 굳게 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 . .

출처 : peace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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