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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숫자로푸는계시록

28. 들림과 승천과 휴거를 증거하는 말씀들

by 디클레어 2011. 2. 14.

 


28. 들림과 승천과 휴거를 증거하는 말씀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살아서나 혹은 죽어서나 하늘로 들림이나 승천받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거다. 사후에 또 다른 생이 있는데, 이 세상에서의 행위에 따라 영원한 삶을 사는데 행복한 삶을 사느냐, 혹은 끔찍한 삶을 사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 기준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말씀에 비추어 의롭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겠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림 받은 사람은 300년을 주님과 동행했다고 하는 에녹이다. 그는 어떻게 살았길래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 곁으로 들림 받을 수 있었을까, 거기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그리 많은 말씀을 남겨놓지는 않으셨다. 앞서 봤던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동행했느냐는 히브리서11장을 보면서 어느 정도 짐작만 할 수 있다.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지혜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으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14편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람은 다윗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윗은 영적인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그 사실을 시편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그런 無知(무지)는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도록 만드는데 까지 이르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렇게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고 그 분과 同行(동행)하므로 하나님앞에 의인으로 인정을 받아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보인다.

 

(21) ○ 에녹은 육십오 년을 살고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

(23) 에녹의 모든 날들이 삼백육십오 년이었으며

(24)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없어졌더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음이라.-창세기5장

 

그리고 다음은 엘리야다.

 

(9) ○ 그들이 건넌 후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나를 너로부터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해 줄 것을 구하라." 하니 엘리사가 말하기를 "내가 청하오니 당신 영의 두 배의 분량이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 엘리야가 말하기를 "네가 어려운 것을 구하였도다. 그렇지만 나를 네게서 취하여 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게 그렇게 되리라. 그러나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더라.

(11) 그들이 아직 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보라, 불병거 한 대와 불말들이 나타나서 그들 둘을 갈라 놓더니,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라.-열왕기하2장

 

엘리야는 담대한 사람이었다.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산에서 죽여 없애는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 말고도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것이 가장 크니 그것으로 마무리한다. 역시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할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큰 종이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가 일반 사람들과 다름없는 그런 성정을 가졌다고 증거한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 성질과 심정)에 속한 사람이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삼 년 육 개월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야고보서5장

 

시대적 상황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어쨌든 엘리야는 불의 종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런 선지자였다. 그런 그의 담대함으로 인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게 된다. 그리고...

 

(9) 주께서 이런 일들을 말씀하신 후에 그들이 보는 데서 위로 들려올라 가시니 구름이 그들의 시야에서 주를 가리더라.-사도행전1장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사십일 간 이 땅에 계시다가 하늘로 들려올라 가시는 장면이다. 다 아시는 유명한 사건이기에 첨부할 말씀이 없다. 그리고 두 가지만 더 보도록 하겠다.

 

(2) 내가 십사 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 사람이 셋째 하늘로 끌려올라 갔느니라.-고린도후서12장

 

바울 사도의 상황 또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만한 들림이나 승천이 있었음을 성경은 증명한다. 이 구절들은 누가 보아도 하늘로 들려 올렸다는 표현이기에 하니님을 믿고 말씀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도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계시록이다.

(12) 그들이 하늘로부터 나는 큰 음성을 들었는데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리 올라오라." 하므로, 그들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계시록11장

 

이 두증인도 사흘 반 동안 죽어 부활한 후에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간다. 그런데 성경은 하늘로 올라간다는 상황을 항상 이렇게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표현들로만 기록한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한 문자적인 표현으로도 들어 올리신다는 사실을 기술해 놓으신 것이다. 이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30) 그 후에 하늘에 있는 인자의 표적이 나타나리니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며 또 그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31) 또 주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시리니, 그들이 하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하신 사람들을 함께 모을 것이라.-마택복음24장

 

(26) 그 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세와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27) 그리고 나서 주께서 자기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함받은 사람들을 함께 모으시리라.-마가복음13장

 

이상 기술된 상황들은 모두 주님 재림 상황이다. 그 때에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주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주의 백성들을 당신이 계시는 곳으로 끌어 올리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후 주의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뜻이라고 제법 그럴듯한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해석은 바울사도의 이런 글 때문에 맥을 못 춘다.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 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4장

 

이 상황도 분명 주님 재림상황이기에 앞선 구절들에 대한 보충이며 휴거(하늘로 끌어 올려짐)가 일어난다, 라는 사실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풀이를 보고 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14만4천이 죽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앞인 시온산으로 들림 받는다는 주장을 필자가 하고 있음을 아실 것이다. 앞서 봤지만 다시 한 번 훑어 보시기 바란다.

...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41) 두 여인이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마태복음24장

(34)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그 밤에는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35) 두 여인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36)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 하시니라.-누가복음17장

 

바로 이 구절들이 십사만사천의 들림에 대한 구절들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다. 그런데 제위께서는 이러한 분별에 아마도 시기적인 면에서 혼동을 일으키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재림하시는 날이 먼저 기술되어 있고(마태복음24장 30절,31절) 재림 전에 일어나야 할 십사만사천에 대한 들림 사건이 그 후에 (마태복음24장 40절,41절) 기록될 수 있느냐 하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앞으로 증명하겠지만 하나님의 기술방식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에스겔38장, 39장도 시간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39장은 주님 재림상황과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때이고 그 후에 곧 천년왕국이후에 일어날 곡과 마곡전쟁이 그 앞장인 38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가랴서 13장과 14장도 마찬가지다. 13장은 천년왕국 들어가서의 상황이고, 14장은 천년왕국전 주님 재림상황과 아마겟돈전쟁상황을 기술해 놓은 것이다. 바로 이런 기술방식이 마태복음24장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조금 다르게 장의 구분이 아니라 절로 구분하셨다는 것 뿐이고, 이런 방식은 계시록의 작성에서도 사용되었는데 형식이 조금 다를 뿐 내용면에서는 같은 방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마태복음24장의 구절들을 옮겨 기간을 표시해 가면서 풀이를 해 보도록 하겠다.

 

(3) ○ 주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조용히 나아와서 말씀드리기를 "언제 이런 일이 있겠으며 주께서 오실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소서."라고 하니

(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이상 후 삼년반 말경의 상황

 

(6) 또 너희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들을 것이라.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이는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겠지만 아직 끝은 아니기 때문이라.

(7)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으며, 기근과 역병과 지진이 여러 곳에서 있을 것이니

(8) 이 모든 것들이 고통의 시작이니라.

후 삼년반의 초반 상황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고난받도록 넘겨주며 죽이리라. 또 너희는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될 것이며, 서로 잡아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후 삼년반 중반의 상황

 

(11) 또 많은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12)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

이상 후 삼년반 말경의 상황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 (읽는 자는 깨달으라.)

(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17)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18) 들에 있는 사람은 자기 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라.

이상 전 삼년반 말경의 상황이고 14만4천이 시온산으로 들림받을 것임을 암시한디.

 

(19) 그 날들에는 아이를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20) 너희는 피난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대 환란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22) 만일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택함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될 것이라.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후 삼년반 초, 중반의 상황.

 

(23) 그때에 만일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주어 할 수만 있다면 그 택함받은 자들도 미혹하리라.

후 삼년반 말 상황

 

(25) 보라,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26)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라, 그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마치 번개가 동편에서 치면 서편에까지 비치는 것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주님 재림상황.

 

(28)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함께 모이리라.

주님 재림시에 아마겟돈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29) ○ 그 날들의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또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라.

(30) 그 후에 하늘에 있는 인자의 표적이 나타나리니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며 또 그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31) 또 주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시리니, 그들이 하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하신 사람들을 함께 모을 것이라.

이상 주님 재림하시면서 성도의 휴거상황이다.

 

(32) 무화과나무의 한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유연해지고 잎이 나오면 여름이 가까운 줄 너희가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보면 그 일이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 알라.

(34)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리라.

(35)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 그러나 그 날과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나니 심지어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나의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나 그 시기가 언제쯤 일 런지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으라고 주님께서 권고하시는 말씀이다.

 

(37) 그러나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의 날들에 그들이 먹고 마시며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기를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던 날까지 하다가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다 쓸어버릴 때까지 그들이 알지 못하였던 것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41) 두 여인이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노아의 때는 후 삼년반의 환란이 시작되기 전이며 십사만사천이 들림받아 시온산으로 대피하는 때이다. 따라서 이 상황은 전 삼년반 말경에 일어날 일이다.

 

(42)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떤 시간에 너희 주께서 오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전 삼년반 말경의 일을 주님 재림시기에 맟춰 말씀하시는 주님의 계시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다니엘11장과 12장이 연결되는 부분에서도 본 적이 있으실 것이다. 따라서 이때는 처음오시는 시기와 재림하시는 시기를 연결하여 통틀어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겠다.

 

(43) 그러나 이것을 알라. 만일 그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간에 올 것인지 알았더라면 그가 깨어 있어 자기 집을 뚫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역시 도둑같이 오시는 때는 하나님의 일곱 진노대접까지 끝나고 오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므로 주님 재림하시는 때이다.

 

이상 24장 전체를 보았을 때, 주님께서 시간적인 순서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받아 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力量(역량)이기도 하겠지만 충분히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분별임을 말씀드리고 싶다. 한 구절 한 구절 그 의미를 되새기시면서 계시록과의 연관성을 한 번 살펴보신다면 이 분별에 동의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16절의 유대에 있는 자를 14만4천으로 분별한 것에 대해 의문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문제는 앞서 많이 언급했었고, 그럼에도 동의하지 않으실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이번에는 그 부분만 따로 드러내서 다뤄 보도록 하겠다.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 (읽는 자는 깨달으라.)

(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17)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18) 들에 있는 사람은 자기 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라.-마태복음24장

 

그리고 같은 선상에 있는 마가복음13장이다.

 

(14) ○ 그러나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했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는 것을 볼 때면 (읽는 자는 깨달으라.)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15)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으로 내려오지 말고, 집에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라.

(16) 또 들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집으려고 뒤로 다시 돌아서지 말라.

 

그리고 이번에는 누가복음21장인데 약간 뉘앙스는 다르지만 가져와 보겠다.

 

(20)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는 것을 보거든 그때는 그 패망이 가까운 줄 알라.

(21) 그때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피하고, 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시골로 가되,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누가복음21장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유대에 있는 자들보고 도망하라고 명하시는 것이 확실하고 명확해서 이 글 자체의 의미만 보시는 분들은 전혀 이것이 들림받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라,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데 왜 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도망해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지붕에 있다가 그냥 산으로 가야하고, 그리고 집안에 있는 물건들도 가지러 가지 말고 도망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씀이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선에서 이해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급박한 것을 표현했다 해도 그렇지 않은가, 차라리 그런 상황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씀하심이 오히려 더욱 확실하지 않겠는가,

 

그때에는 너희에게 환란의 때가 될 터이니, 신발을 신고 두벌 옷을 챙겨 급히 먹을 것을 가지고 산들로 도망하라, 혹은,

지붕에 있는 자는 급히 내려와 필요한 몇 가지만을 챙겨서 산들로 도망하라. 그 때는 유다의 고난의 때이니 그러한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날들이니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바로 도망하라는 것이다. 마치 롯의 아내가 소돔성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듯이, 너희도 무엇을 가지고 가려하면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상황은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 정체를 알았다는 것일 뿐이다. 그 정체를 알았으니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도망하라? 이것은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다. 또 다른 어떤 분의 해석을 보자면 적그리스도가 거룩한 곳, 곧 성전에 앉아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는 살후2장의 말씀을 빌어 성전에 그가 앉는 순간, 핍박이 시작되기 때문에 도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괜한 말씀을 함부로 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성품으로 봐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도망하라는 말씀을 볼 때에도 그렇고 그 해석도 고려해 볼만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많이 미흡하다.

 

그렇다면 바로 이 때 상황의 유대인을 환란의 때에 지켜주신다고 했던 빌라델비아교회로 분별을 하고, 그 교회가 바로 십사만사천중 가장 먼저 언급된 유대지파, 즉 유대에 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이고, 이것은 곧 순교하지 않고 시온산으로 들림을 받아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14만4천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온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먼저 이 도망한다, 라는 표현을 사용한 또 다른 주님 재림시기라고 분별하는 스가랴14장으로 가보자.

 

(1) 보라, 주의 날이 오나니, 네 약탈물이 네 가운데서 나뉘리라.

(2) 내가 모든 민족들을 모아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싸우게 하리라. 성읍은 함락되고 집들은 강탈당하며 여자들이 욕을 당하고, 성읍의 절반이 사로잡혀 갈 것이나 백성의 나머지는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상 후 삼년반의 환란상황이다.

 

(3) 그 때에 주께서 나가 그 민족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리니, 전쟁의 날에 싸우셨을 때처럼 하시리라.

주님 재림하시는 것을 말하며 아마겟돈에서 악의 무리들과 벌이시는 전쟁이다. 그리고 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시라.

 

(4) ○ 그의 발이 그 날에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시리니, 올리브 산은 그 중간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산의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지리라.

(5) 너희는 산들의 골짜기로 도망하리니, 이는 산들의 골짜기가 아살까지 미칠 것임이라. 정녕 너희가 도망하리니, 마치 유다의 웃시아왕의 시대에 너희가 지진 앞에서 도망했던 것과 같으리라. 주 나의 하나님께서 오시리니 모든 성도들이 주와 함께하리라.

 

이상 4, 5절을 보시라. 사실 이것은 앞서서도 한 번 보여드렸던 해석인데, 문맥과 상황을 자세히 보시면 4절에 주님 재림시 지진으로 인해 골짜기가 생긴다는 것이고, 제위께서 눈여겨 봐야할 도망한다는 표현이 나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망한다, 라는 표현은 바로 휴거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지진이다. 이 지진을 요한계시록12장의 해석 중에도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16) 그 땅이 그 여인을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이 그 입에서 쏟은 홍수를 삼켜 버리더라.

-계시록12장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땅이 입을 벌린다는 것도 역시 지진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가랴14장의 지진과 도망하라는 표현을 보았고, 그 해석이 확실하다는 분별과 자신감만 가진다면 演繹的(연역적)인 방법으로 유대인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그리고 땅이 입을 벌린다, 는 표현은 모두 들림, 휴거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으실 것이다. 스가랴14장5절에 웃시야왕의 시대에 지진에 도망하는 것 같이 도망한다, 라는 구절은 트릭과 같다. 역사적으로 웃시아왕의 시대에 地震(지진)이 있었을 거라고 확신은 하지만, 주님 재림 상황에 주님 오시는 것을 기뻐해야 할 성도들이 도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진과 정녕 도망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모든 성도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는 결론에 비추어 바로 휴거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누가복음에 나온 예루살렘이 군대에 포위된다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예루살렘이 군대에 포위된다고 하는 영적인 의미는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고 하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로부터 적그리스도의 마흔 두달, 즉 후삼년반의 대 환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루살렘도 이스라엘에 있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전 세계의 성도요 교회를 의미하는 것임은 너무 당연한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민족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各別(각별)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많은 성도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세상 모든 열방이 복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그렇기에 지금은 육적인 이스라엘의 때가 아니오, 영적인 이스라엘의 때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성경 말씀들의 숨은 의미와 문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선 말들과 같은 말이 되겠지만 전쟁 중의 피난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도망가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렇게 숨는다고 해봐야 굶어죽거나 얼어 죽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말세의 전쟁에서는 산으로 도망하는 것이 아무 소용도 없다. 위성이 있어서 어디에 숨든지 찾으려고 하면 쉽게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봄이나 여름, 가을에는 그럭저럭 산다고 해도 겨울을 나기가 보통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 그 도망하는 기간이 무려 삼년반이나 된다. 아무리 잘 숨어 있는다, 고 해도 그 긴 시간을 도망다니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실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의 해석을 그 만큼 급박하게 피해야 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現代戰(현대전)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요즘 전쟁은 陸軍(육군)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空軍(공군)을 동원해서 주요시설을 파괴해 놓고 시작을 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산으로 도망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오히려 전쟁중에는 군사시설이 있는 산들보다는 民間人(민간인)들이 사는 市內(시내)쪽이 더 안전할 것이다. 따라서 그때에 유대인들은 산으로 피하라는 이 구절도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견주어 생각해 봤을 때, 십사만사천이 들림 받는 것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문맥의 구성 상, 그리고 그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뜻을 파악했을 때 오류가 없을 것이다.

 

이상은 14만4천에 대한 욕심을 드리고자 그리고 승천과 휴거등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것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너무도 큰 복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작성했습니다. 사실 들림과 승천과 휴거중 어느 때라 해도 성도들은 행복하며, 기쁨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을 믿어 의심ㅎ지 않습니다. 너무 그 날이 그리워 상사병에 걸릴 지경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은 세상 멸망의 때가 아니고 새롭게 시작되는 육신의 부활, 믿음의 성공, 에덴의 회복이 될 꿈과 같은 나날들이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한시라도 놓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도에게는 살아 갈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세상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때에 믿음가운데 굳건히 서서 주님 재림을 기다리시는 대한민국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