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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계시록강해노트

일곱교회에 대한 총정리

by 디클레어 2011. 6. 22.

 

숫자로푸는 요한계시록강해 네 번째 시간

 

 

일곱교회에 사용된 숫자와 시기에 대한 분별

 

이번 강해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일곱교회가 왜 삼분의 일로 나누어져야 하는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계시록에 나와 있는 6장의 사분의 일이나 계시록8장, 또 9장의 삼분의 일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그런 숫자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基本的(기본적)으로 어떤 수가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12라는 숫자가 먼저 존재해야만 이분의 일이 나올 수 있고, 삼분의 일이 나올 수도 있으며 사분의 일도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기본이 되는 그런 수가 먼저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삼분의 일과 사분의 일을 말씀하신다면, 그건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독백이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세에 있을 구원의 후사들에 관한 것을 기록하셔서 복을 주시려고 했던 주님의 일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어서 불필요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저 허탄하고, 실체가 없는 그런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분의 일과 사분의 일에 관한 계시는 분명히 실체가 있을 거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래서 가장 먼저 등장한 일곱교회에 대해 연구하고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은 주의 백성인 성도들이지, 不信者(불신자)들은 아니라는 성경의 기준때문입니다. 항상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자들을 주체로 해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고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분의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을 일컫는가를 분별해 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계시록에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때로는 이들이 성도들을 이야기할 때가 있고 異邦人(이방인)들을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를 얘기하느냐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시기의 주체가 누구이고, 또 그 시기가 어느 때냐, 라는 것을 정확히 판별해 낼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계시록9장15절에 나와 있는 여섯 번째 나팔에 나오는 사람, 삼분의 일이 죽는다는 그 구절 때문입니다. 이 구절의 주체는 적그리스도이고 그가 사람을 죽인다고 했으니 이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아닐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계시록9장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때에 전세계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이상하다, 라고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 전세계인구가 60억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마흔두달시작에 20억이 죽는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은 영적인 전쟁을 치루어야 할 성도와 사탄간의 전쟁이, 물질로 치고 박고 싸우는 육적인 전쟁으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런 전쟁이 구원얻을 후사에게 복을 주시마고 남겨 놓으신 이 계시록에 記錄(기록)되어 있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과연 그런 일들을 계시록에 남기셨을까요, 여러분들도 깊이 생각해 보시면 그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뒤 18절에는, 또 삼분의 일이 죽습니다. 앞에 삼분의 일과 같은 삼분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영적인 전쟁이라면 주를 믿는 성도들이 40억이 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건 가히 생각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이 세계대전이라고 해도 일어나기 힘든 일일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40억이 죽는 전쟁이라는 것은 그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 사람들이 거의 존재할 수 없을 정도의 피폐한 땅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평균적으로 따져 세 사람중에 두사람이 죽는다고 한다면 내 가족 내 식구들은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는다는 결론이 됩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그 전쟁이후에 이 세상은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는 그런 땅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결론을 짓다 보면 너무나 많은 의문들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 죽은 시체들로 인해 전염병과 괴질들이 창궐할 것이구요, 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시체는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런 전쟁이후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남아있거나 혹은 농사를 짓는 것이 가능할까요, 삼년반이라는 기간내에 그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후에 살아남은 자들은 무슨 의미로 주님을 기다릴 것이며, 또 그런 처참한 상황 이후에도 왜 주님은 오시지 않고 굳이 삼년반을 채우셔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주님오시는 것이 복음적으로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따라서 사람 삼분의 일은 당시에 있을 세계인류의 삼분의 일이 아님을 이제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계시록을 잘 모르는 일단의 사람들은 그때 일어나는 전쟁이 아마겟돈전쟁이라고 얘기를 하고 마치 그게 옳은 것인 양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겟돈전쟁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아마겟돈에 모인 적그리스도와 짐승들을 심판하기위해 일어나는 전쟁이므로 후삼년반 초반에 일어나는 이 전쟁은 절대로 아마겟돈전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 전쟁은 성도 삼분의 일이 순교하는 그런 영적인 전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순교하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목숨도 아끼지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엉뚱한 해석은 그 때 나오는 이억의 군사를 중국의 군사들이라던가, 혹은 러시아의 연합군이라던가 하는 해석들도 난무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생각하는 방식대로 이해한다면, 마찬가지로 육적이고 물질적인 전쟁을 말하는 것이므로 구원얻을 후사를 위해 기록한 이 계시록의 취지에는 맞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계시록을 남기신 이유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따라서 이 이억의 군사는 적그리스도에 속한 군대여야 하며, 조금 깊게 들어간다면 사탄의 영적 軍隊(군대)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이억의 군사들이 그 해 그 달 그 날 그 시에, 즉 동시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인다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순교하는 성도의 숫자 역시 이억명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성도들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곳곳에 퍼져 있으므로 그 이억명을 죽이기 위해 이억의 군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으로 이 때 죽는 성도의 수가 모두 이억명이 된다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계시록9장이나 11장 강해에서 다시 한번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계시록9장의 여섯 번째나팔은 후삼년반의 기간중에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상황을 기록하신 것이고, 거기에 반해 두증인이 죽는다고하는 계시록 11장의 기록은 역시 같은 후삼년반기간에 성도의 입장에서 기록된 장이라는 것임을 알야야 할 것입니다. 이 결론은 계시록이 어떤 구성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이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는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합하여 또 다른 기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별, 즉 이 시기의 주체가 성도인가, 혹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적그리스도를 주체로 해서 쓰여졌는가, 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소설처럼 과거를 회상한다던가 미래의 일을 상상한다던가 하는 식의 기록이 아니고, 그 당시에 있을 일들을 주체별로 나누어, 각각 기록을 하셨기 때문에 시기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기술되어있는 그 나팔들의 순서가 어느 시기에 속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 시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별해 내는 것 또한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중 다니엘과 계시록에서 사용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이라는 세 번째 단원에서 말씀드린 바 있지만, 한때와 두때와 반때는 성도들이 주체가 되는 전삼년반을 뜻하는 것이고, 거기에 반해 마흔두달은 적그리스도와 이방인의 때인 후삼년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풀어드린 것을 각자 연구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바로 그런 규칙을 가지고 이 계시록을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후삼년반의 주체가 될 적그리스도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면, 여섯번째 나팔은 그에게 주어진 한이레중, 즉 7년의 기간중 후삼년반이고 적그리스도가 가혹한 통치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도 이미 말씀하셨듯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이라고 하시면서 그의 등장이 있을 것임을 미리 豫告(예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거룩한 곳에 서게 되는 때는 과연 언제가 되겠느냐가 문제인데 그것은 바로 후삼년반 시작하기 한달 전이라고 다니엘12장의 1290일을 언급하면서 풀이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렇듯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드러내고 난 후인 한달 후, 즉 후삼년반초반에 그의 마성을 드러내고 성도와의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구절이 바로 계시록11장7절에 짐승이 올라와 전쟁을 일으켜 두증인을 죽인다고 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이 짐승이 드러나는 때가 바로 후삼년반 시작이라면 이 두증인이 죽는 때 역시 후삼년반 시작때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9장 15절에 그 해, 그 달, 그 일, 그 시를 언급하며 사람 삼분의 일이 같은 시간에 죽는다고 합니다. 같은 시간에 죽는 다는 것은 그 시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구요, 그리고 또 그들이 동시에 죽어야만 하는 이유는 11장의 두 증인이 무조건 사흘반동안 죽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사흘반은 삼년반을 뜻하는 것이므로 후삼년반초반에 무조건 죽어야 삼년반동안 죽어있어야 하는 그 기간에 오류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장을 통해서 봤을 때, 이 때 죽는 사람 삼분의 일은 두증인임을 알 수 있고 또 그 두증인은 결국 일곱교회중 두 교회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반이 삼년반인 이유는 많이 증거를 했으나 잠깐 설명을 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하루를 일년으로 하신적이 민수기나 에스겔서등을 보면 이미 나와 있고, 또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두 증인이 살아나는 것을 표현하실 바에는 차라리 사흘이라는 기간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타당하며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흘반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기간이 단지 삼일반의 날짜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삼년반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라도 이들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은 성도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증거할 것도 많고 이해하기도 쉬운 사흘이라는 시간을 버리시고 굳이 반이라는 기간을 끼워 놓으신 의도는 삼년반이란 기간이 아니면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나절이라는 시간은 차라리 사흘이나 나흘로 기술하신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흘하고도 반이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조금 어색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삼일반이 곧 삼년반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삼일이나 사일을 버리고 삼일반이라고 기록하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사흘반의 이 반이라는 표현이 삼년반인 것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삼년반이 지난 후에 이들이 일어나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볼 때에 이들은 순교성도이며 그 시기는 삼일반의 끝인 후삼년반 끝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되는 구절이 11장14절에 보면 일곱 번째 나팔인 하나님의 진노 나팔이 불리기 전인 두 번째 화, 즉 여섯 번째 나팔기간이 두 번째 화이며 후삼년반기간이었음을 또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전삼년반 끝무렵에 들림받는 십사만사천과 후삼년반 끝에 승천한 이 두증인 때문에라도 벌써 들림받고 승천하여 두 번에 걸쳐 휴거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계시록7장에서는 이들이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것을 미리 기록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구원받은 이들이 11장 이후에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보다 앞선 7장에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고 의문을 표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기에, 또 이미 받아 본 경험도 있기에 말씀을 드리는데, 7장에 앞서 기록된 계시록6장은 주님의 사역의 시작과 구원받을 성도, 사탄의 방해와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어떻게 성도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시놉시스라고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줄거리를 보여주신 후에 그런 역사 가운데 구원받는 후사들에 관한 것을 7장에 미리 기록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본격적으로 8장에서부터 반시간, 즉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시작인 삼년반을 언급하심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의 복음과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를 첫 번째 나팔부터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9장 다섯 번째 나팔인 전 삼년반, 여섯 번째 나팔인 후삼년반을 기록하심으로 그 분이 예정하신 일들을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계시록의 구성을 앞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잘 알고 있으면 계시록을 연구하고 이해해 나가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앞서 알아본 바가 있지만 두 증인은 곧 두 교회라는 것이 성경의 풀이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교회는 앞서 나온 에베소교회에서부터 라오디게아교회까지, 그 일곱교회안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있는 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주님의 백성인 성도라는 것을 안다면 일곱교회의 일곱이란 숫자가 그 기본이 될 거라는 것은 이치적으로도 합당하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교회에서 삼분의 일이 나오고 사분의 일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7이란 숫자를 가지고 어떻게 삼분의 일과 사분의 일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겁니다. 그건 앞서 해석하는 가운데 알아본 바가 있듯이 빌라델비아교회가 문제입니다. 이 교회는 적그리스도와 이방인의 때인 마흔 두달, 즉 후삼년반의 환란에는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환란기간동안의 숫자에서 빠져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간전에 즉 전삼년반 끝무렵에 들림을 받아 시온산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 시온산은 계시록14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앞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그들이 들림받고 나면 여섯교회가 남게 되는데 앞서 동시에 죽는다는 것을 봤을 때, 그렇다면 여섯교회중에 두증인인 두 교회가 먼저 순교를 당하게 된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므로 여섯중에 두 교회이므로 삼분의 일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네 교회중에 두교회는 또 삼분의 일이 되고 그 두 교회가 또 다시 순교를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同時(동시)에 순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후삼년반기간중에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9장 18절에 기록된 삼분의 일이고 그것을 증명하는 11장에서는 두 증인이 죽은 이후에 그들의 屍體(시체)를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더라, 라는 표현으로 持續的(지속적)인 순교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시고 있는 겁니다. 왜 그 표현이 그런 식의 해석이 되어야 하느냐라고 의문을 제기하신다면, 이들 순교성도들은 원래는 하나된 敎會(교회)이고, 그러므로 그 이후에 죽는 성도들 또한 두증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몸이라는 뜻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바로 이 네 교회가 순교하는 교회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교회중에 순교하지 않고 남은 두 교회는 주님재림시에 휴거되는 교회를 말하는 것임은 마태복음24장이나 데살로니가전서4장을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재림하시면서 남은 성도들이 휴거되는 장면은 스가랴14장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그 해석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므로 11장 강해때에  따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듯 순교하는 교회는 모두 네교회가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계시록6장의 청황색말을 탄자가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분들이라면 그가 땅의 사분의 일을 죽인다고 하는 것이 이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 순교하는 네 교회중에 한 교회에 속하는 사분의 일의 사람들, 즉 한 교회를 죽인다고 하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분의 삼은 누가 죽이는 것이냐 라는 문제가 나올텐데 그것은 계시록9장 강해때 集中的(집중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해석은 한구절 한구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알고 있는 가운데, 그 안에서 구절들의 의미가 하나씩 깨달아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짜임새나 계시록의 기록방식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이 계시록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지막에 주신 계시록의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속지 말아야 하는 것 두 가지중 한 가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첫 번째는 앞서 말씀드렸듯 휴거는 한번 뿐이라는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계시록은 보지 않는게 낫다, 라고 하는 주위사람들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계시록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염소들에 속한 자들이 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 사람의 말을 듣고 사람의 말을 따르는 자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 의롭다 인정받지 못할 것은 당연합니다. 판단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자신의 생각으로 하지 마시고 주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하십시오.

 

앞선 교회에 대한 강해와 이 시기에 대한 분별을 바탕으로 이제 결론을 내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신 하늘로 들림 받는다고 하는 휴거라는 것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열매는 십사만사천인 빌라델비아교회, 그리고 두 번째 열매는 순교성도이기도 하고 두증인에 속하기도 하는 에베소, 라오디게아, 서머나, 버가모교회이고 마지막 세 번째열매는 는 주님재림때 휴거되는 두아디라와 사데교회입니다.

 

첫 번째 열매인 빌라델비아교회는 시험의 때에 지켜주신다는 약속대로 후삼년반의 대환란에 들어가지 않으며 따라서 순교하지도 않고 전삼년반 끝에 살아서 들림을 받아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그들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흔두달의 환란에는 나머지 여섯 교회만이 참여하게 됩니다. 그들 중에 두교회는 후삼년반 초반에 순교하게 되고, 또 두 교회는 그 기간중에 차례로 순교하게 되며 남은 두교회는 주님 오실 때 휴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다시 말씀드려보겠으니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오실 때 휴거되는 교회는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고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두아디라교회와, 도둑같이 임하실 것이라고 하셨던 사데교회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흔두달 기간중에 순교하는 교회는 서머나교회와 버가모교회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이유가 서머나교회에 하신 말씀중에 십일동안 환란을 당할 것이며,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2장10절의 말씀을 보고 그렇다고 했고, 버가모교회는 신실한 순교자 안디바가 나왔다는 것과 그것이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고 현재도 그 어려움은 지속되고 있는 듯 말씀하신 13절의 말씀을 보아 그렇게 분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이 버가모교회는 마태복음 10장17절이하에서 볼 수 있는 관원들 앞으로 끌려가서 매질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열흘동안의 완전한 환란을 당하는 서머나교회와 함께 힘든 시련의 나날들을 보내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 순교 교회인 에베소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계시록9장 15절에 나와 있는대로 그 해 그 달 그 일 그 시에,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계시록11장 7절에 나와 있는 대로 깊은 구렁에서 올라온 짐승과의 전쟁에 패해 동시간대에 죽음을 맞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들이 동시에 죽지 않는다면 사흘 반, 즉 삼년반이란 기간에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고 앞서 말씀드린 바도 있습니다. 무오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실수를 하실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교회는 계시록9장 15절에 나와 있는 대로 동시간대에 죽어야만 비로소 삼년반기간이 끝난 후에 살아나 하늘로 승천한다는 계시록11장12절의 말씀도 충족시킬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시록6장에 청황색말을 탄 적그리스도가 일으키는 대환란중에 사분의 일에 속하는 교회는 서머나교회와 버가모교회중 남아 있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버가모교회는 신실한 순교자 안디바 이후에 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고 서머나교회도 10절의 말씀을 보아 마찬가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서머나교회와 버가모교회는 둘다 모진 시련을 견뎌야 하는 교회들입니다. 따라서 이것에서 얻을 수 있는 해답은, 들림받는 십사만사천에 속하는 빌라델비아교회가 가장 높은 믿음의 후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다음에는 대환란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다행히 그 환란을 시작됨과 동시에 순교하게 되는 에베소, 라오디케아교회이며, 그리고 대환란중에 주님을 발견하고 자신의 생명으로 그 신앙을 증거해야하는 서머나, 버가모교회의 순서로 믿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말을 첨언하자면 주님오실 때 휴거되는 두아디라와 사데교회가 있는데, 바로 주님재림하시는 이 때에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대언자들, 제자들과, 그리고 초대교회순교자들을 포함해서, 주님의 뜻에 합당한 자들이 모두 같이 일어나 휴거와 천년왕국에 참여할 것으로 분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재림시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마흔두달간의 대환란도 견뎠을 뿐만 아니라 45일간의 하나님의 일곱 대접진노까지 모두 겪어야 하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나날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다니엘12장12절의 말씀처럼 복있는 자들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또한 마태복음 24장 31절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실 것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구원에 참여한 자들이니 역시 복받은 자들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이들은 마태복음22장의 왕의 잔치비유중 왕이 그 잔치자리를 채우려고 종들에게 대로로 나가서 그 만나는 자들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하신 그런 자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마흔두달의 환란중에 주님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고 차라리 순교하는 것이 더욱 높은 믿음을 증거한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해석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유는 많은 잘못된 해석들이 돌고 있는데 그런 해석들이, 이름이 알려진 智慧(지혜)롭고 賢明(현명)하다는 사람들에 의해 전파가 되고 있고, 그래서 성도들이 그런 해석들에 의해 洗腦(세뇌)가 되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계시록의 말씀들은 이해하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 점 때문에 계시록은 보지 않는게 낫다라고 하는 무책임한 얘기들도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성도들이 계시록에 관심이 없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구원은 사람들의 말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있음을 알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이 계시록연구를 게을리 하는 것을 볼 때에 안타깝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계시록도 주님 주신 책이 분명하니, 그것을 안다면 이번 기회에 硏究(연구)를 해보시고 세 번의 들림과 승천과 휴거시기에 대한 오류가 있다면 그것도 발견하셔서 상금도 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기에 대한 해석에 오류가 있다, 라고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저 무작정, 이건 아닌것 같다. 라는 말은 그만큼 세뇌가 깊이 되어 있다는 뜻이니 이제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여지껏 들어왔던 말들도 버리고, 성경을 근거로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이 나온 김에 잠깐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여러분께서는 계시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동안 사실 이 질문 아닌 질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에 정말  해석할 수 없다, 라고 한다면 이 계시록은 그야말로 不必要(불필요)한 啓示(계시)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그런 疑問(의문)까지 가지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사람들이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이 있어서, 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계시록은 반드시 풀려야만 한다, 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만일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람들의 생각들이 사실로 굳어져 버린다면 성도들은 더 이상 계시록에 대해 호기심이나, 또는 꼭 봐야한다는 성도들의 의무를 저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글을 보는 여러분가운데서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적은 없으셨습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교회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고자 하셨던 하나님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배려가 모두 불필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낳게 되는 것이니 이제 그 생각을 再考(재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계시록은 앞서 1장에서 보았던 대로 이 글을 보고 듣고 그 기록된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했던 그런 말들에 현혹되어서 이 계시록을 멀리한다면, 혹은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보지 않는 것이 낫다, 라고 하는 그러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특히나 가장 최종적으로 주신 이 생명의 말씀들을 스스로 외면하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이 계시록을 완벽하게 해석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동안 긴 세월동안 많은 분들이 이 계시록을 해석하고자 노력을 했고, 그 동안 많은 결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 분들이 해석해 놓은 것을 보면서 때로는 동의할 수 없을 때, 자신의 의견도 말씀들에 비추어 생각하며 해석에 매진하다보면, 가까운 시일내에 완성된 계시록해석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누가 이 숫자로 푸는 계시록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제가 이만큼 계시록해석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 분들이 닦아놓은 터위에서 가능했다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점에 대해 말씀드릴 때 항상 인용하는 것이, 다니엘도 이스라엘백성들의 포로생활이 70년만에 끝마칠 것이라는 것을 예레미야의 글을 보고 알았듯이, 저 또한 그동안까지 쌓여져 있었던 많은 분들의 朱錫(주석)과 또 創造(창조)과학자들의 도움, 그리고 여러 先輩(선배)님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여서 가능했음을 알기에 더욱 더 감사드립니다. 성도여러분들께서도 이제 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마고 하신, 그 복된 약속들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