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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계시록강해노트

요한계시록강해 여섯 번째 시간

by 디클레어 2011. 7. 13.

 

 

요한계시록강해 여섯 번째 시간 2021*10/03

 

 

 

 

계시록6장

 

 

앞선 4장과 5장은 바로 이 6장으로 오기위한 징검다리역할을 한 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비로소 이 6장에서부터 진정한 계시가 시작된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그 전에 일곱교회를 알아 봄으로 인해, 중요한 결론은 이미 내려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일곱교회의 해석이 옳은 결론이냐를 알아보는 것은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해석은 그것에 중점을 두고 과연 그 결론이 믿을 수 있는 바른 해석이냐에 主眼(주안)점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그 점을 유의하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1) 또 그 어린 양이 그 봉인 가운데 하나를 여실 때 내가 보고, 내가 들으니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로 말하기를 "와서 보라." 하기에

 

 

이제 하나님아버지에게서 책을 받아든 어린 양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책에 담긴 내용을 계시하시기 위해 준비단계로 일곱봉인가운데 하나를 여시게 됩니다. 그러자 네 생물중 하나가 천둥같은 소리로 와서 보라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와서 보라, 라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은 사도 요한에게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NIV와 그것을 번역한 개역성경에는 와서 보라가 아니고 단지 오라, 라고 표기되어 있어 그 오라는 명령이 말탄 자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사도요한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 때문에라도 다른 많은 해석들이 나오게 되는 端初(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결국 이것은, 과연 어떤 성경에 조금 더 권위를 두어야 하느냐 라는 문제가 발생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개역성경을 읽다보면 '없음'이라는 구절들이 많이 등장함으로 인해서라도 그 기록의 眞實性(진실성)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여러분들게 보여드리고 있고 해석하고 있는 이 한글킹제임스성경에는 삭제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역성경보다는 이 한글킹제임스를 조금 더 信賴(신뢰)합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도 직접 알아보고 연구하셔야 할 분야로써, 이 강해의 한계를 벗어나게 됨으로, 여기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알아보시고 또 어떤 성경이 믿을만한 것이냐 하는 것을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내가 보니, 보라,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가 활을 가졌더라. 그에게 한 면류관이 주어졌고 그는 나가서 정복하고 정복하려 하더라.

 

 

이 흰말 탄자를 구분함에 있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보는 측과 또 하나는 적그리스도로 분별하는 사람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계시록의 기록이 7년환란동안만에 대한 기록이냐, 아니면 예수그리스도승천이후의 복음전개의 역사와 한이레와 대환란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냐가 결정이 됩니다. 이 흰말탄자를 적그리스도로 분별을 한다면 이 일곱봉인의 시작은 7년환란부터의 기록이 되는 것이며, 반대로 예수그리스도로 해석한다면 이 계시록과 일곱봉인의 출발점은 그 분의 부활 승천이후부터 시작되는 복음의 시간적, 그리고 역사적 기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흰말탄자를 적그리스도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언제쯤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전혀 분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 부분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다니엘서의 날짜들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들은 이미 앞서 알아보고 넘어온 바가 있으나, 한이레인 7년시작에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환란이 시작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니엘12장11절의 1290일이란 날짜에 대해 무슨 날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는 날짜의 해석은 다니엘 9장27절과 12장11절, 그리고 마태복음 24장 15절 또 데살로니가후서 2장3절 4절말씀들에 비추어 풀이를 했을 때, 7년의 기간 중 대환란기간인 후삼년반 한달 전이라고 해석했고 여러분들은 이제 그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 흰말탄자를 적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그들의 풀이는 誤謬(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 흰말탄자를 적그리스도로 분별을 하는 사람들은 7년 시작부터 환란이 시작된다고 함으로써, 거기서부터 오류를 가지고 출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해석대로라면 이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재앙과 환란들이 7년동안에 모두 일어나야 하는 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대환란의 시대가 전삼년반시작부터 발생되어야만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 그것을 증거해 준다는 구절은 성경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므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해석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한이레, 즉 적그리스도에게 주어진 7년동안의 기간중 전삼년반은 한때와 두때와 반때로서 성도들의 순교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는 전삼년반기간동안에는 몇몇 이방인들이나 열왕외에는 세상에 그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합니다.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전삼년반동안의 整地作業(정지작업)을 거쳐, 결국 후삼년반시작 한달전에나 거룩한 곳에 서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고, 그 한달후인 마흔두달인 후삼년반이 시작되는 시간에 두증인을 죽임으로 그의 본격적인 鐵券統治(철권통치)를 시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흰말탄자를 적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어떤 구절과 근거를 들이댄다 해도 그가 세상에 드러나는 時期(시기)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공허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시록을 해석하시는 분의 주장중에 6장의 흰말탄자가 쓴 冕旒冠(면류관)과, 주님 재림하실때의 계시록19장에 흰말탄자가 쓴 면류관을 비교함으로써 그 두 면류관의 종류가 틀리기 때문에 이 흰말탄자를 적그리스도라고 분별하는 분이 있는데, 그런 분들의 해석은 수긍할만한 부분이 많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분별만은 옳지 않으므로 그것에 대한 反論(반론)을 해 보겠습니다.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준결승전에서 승리하는 것이냐 ,혹은 결승전에서 승리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처음 출발점에 선 이 흰말을 탄 예수그리스도의 면류관은 십자가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면류관이고 계시록19장에서 흰말을 타고 재림하시는 예수그리스도는 이제 복음적인 완전한 승리를 거두시고 그 승리한 주의 백성들과 함께 왕들의 왕이 되신 하나님으로써의 재림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다른 뜻의 면류관으로 기술하셨던 것입니다. 이 면류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6장의 면류관은 스테파노스이며, 19장의 면류관은 디아데마타로써 한글성경에는 같은 면류관으로 번역이 돠어 있지만 그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스테파노스는 경기에 승리한 월계관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디아데마타는 왕들이 쓰는 왕관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 둘의 차이점도 앞선 설명을 들으셨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처음 6장의 스테파노스 면류관을 쓴 흰말을 탄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부활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이제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19장의 면류관을 쓴 재림하시는 예수께서는 심판주로써 再臨(재림)하시기에 승리한 왕이 써야하는 디아데마타면류관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흰말탄자를 예수그리스도로 보는 것은 말씀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 해석에 수긍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복하고 정복하려고 하더라, 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땅 끝까지 그 복음을 전파하시려는 사역을 바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복하고 정복하려고 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종들의 복음전파를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써 ,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칼을 받은 사탄과 그 무리들이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福音(복음)의 역사가 가르쳐준 일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순교와, 믿음에 있어 암흑기였던 중세시대의 모든 역사들과, 현대에 들어서서 너무나 많은 그릇된 해석들과 말씀의 曲解(곡해)등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3) 어린 양이 둘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기를 "와서 보라." 하더라.

 

 

(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앉은 자에게 땅에서 평화를 제거하는 권세가 주어졌으니 그들이 서로 죽이더라. 또 그에게 큰 칼도 주어졌더라.

 

 

흰말을 타고 복음의 전파를 시작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정복사역을 방해하기 위해 드디어 옛 뱀, 마귀, 사탄이라고 불리는 그가 칼을 받고 등장을 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고자하는 모든 주의 종들을 방해하고, 주의 성도들을 핍박하며, 심지어는 말로 할 수 없는 고문으로 생명을 蹂躪(유린)하는 그런 일들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지금도 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벌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그가 맡은 역할을 감당해 나가려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칼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이고, 그는 그 맡은 역할에 걸맞게 교회를 변질시키고, 교리를 변개함으로써 성도들이 올바른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지속적인 방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사탄의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겠느냐 혹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겠느냐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肉身(육신)이 죽는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이해하신다면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 못하는 많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은 재산과 명예를 가져야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닙니다. 육은 얼마든지 다시 살릴 수 있으시고 또 살리시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남들이 봤을 때, 행복하고 부유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분의 나라, 곧 그분의 왕국에서의 삶은 그 모든 고생과 슬픔들을 相殺(상쇄)하고도 남을 엄청난 큰 복이기 때문에 그 분께서는 육신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의 명예롭고 부한 삶은 오히려 하나님께 버려진 자들에게나 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 중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거나 또는 부정하는 자들이 많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갈 곳은 한 곳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 세상에서의 삶도 그리 부유하지 못하면서 예수그리스도까지 부정하는 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불쌍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찌들어 산다 할 지라도, 하나님을 알고 그 분 말씀대로 살고 있는 성도들은 그런 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생명이고 구원이니, 그 분을 아는 자들은 설령 이 세상에서 굶어죽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복 받은 자들이라는 얘깁니다.

 

 

얘기가 잠깐 다른 곳으로 빠졌는데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 붉은 말을 탄자는 사탄이라는 것이고, 하나님께 받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 제거하는 권세를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또는 칼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명까지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흐름을 보았을 때, 지속적인 순교와 박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런 맥락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봉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기를 "와서 보라." 하더라. 그리하여 내가 보니, 보라,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가 그의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그때 네 짐승들의 한가운데서 한 음성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밀 한 되가 한 데나리온이요, 보리 석 되가 한 데나리온이라." 하고 또 "너는 기름과 포도주는 손상시키지 말라." 하더라.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중에서 여러분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검은 말을 탄 자의 해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검은 말을 탄 자를 그동안 기아나 굶주림으로 해석하는 것이 너무 普遍化(보편화) 되어버렸고, 또 거의 定型(정형)화된 것처럼 그렇게 아무 의심없이 많은 해석가들과 성도들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식량이 부족해서 굶어죽는 그런 시대가 없었다거나 또는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들은 고대에나 중세때나 또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어찌 보면 흔하고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록에 특별히 기록하셨다는 것은 쉽게 納得(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이 계시록은 그런 굶어죽는 자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후사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후 네 번째 봉인을 떼었을 때 나타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분별을 하고 있는 해석가들 가운데서도, 이 검은말을 탄자를 기아로 해석한다는데에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인 그가 사람을 죽이는 네 가지 무기중에 하나가 바로 이 기아이며 굶주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네 번째 봉인을 떼었을 때, 분명히 그곳에 굶주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굶주림을 그 앞에 기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동안의 행사를 보거나 기록을 보았을 때 앞 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꺼림칙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검은 말을 탄 자는 결코 굶주림이나 기아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검은 말을 탄자는 어떻게 해석해야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이 검은말을 탄 자의 검다, 라는 의미는, 숨겨져 있는 자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가 들고 있는 저울은 다니엘 5장27절의 의미로 보아 성도로써의 자격이 있는가를 달아보는 그 역할을 맡은 하나님의 명을 받은 하늘의 天使(천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밀과 보리를 재어보는 한 데나리온의 의미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성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핏 값인 것이고, 그들 성도들은 쭉정이가 아닌 밀과 보리로써의 곡식인 것이니, 따라서 그 검은 말을 탄 자의 역할은 성도들의 믿음의 輕重(경중)을 재어 구원의 자격을 알아보는 그런 使役(사역)을 담당하는 천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검은 말을 탄 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네 짐승의 한 가운데서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계시록5장에서 알아본 바대로 네 짐승들 한가운데는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 보좌에는 하나님께서 앉아계시니, 결국 그 명령은 하나님께서 내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굶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신다는 것은,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기아나 굶주림은 평화를 제하는 사탄의 영역으로 넘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검은 말을 탄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구원얻을 성도들을 위한 천사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에서 기름은 그동안의 성경에 쓰여 있는 그 의미대로 기름부음받은 성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또 포도주는 계시록 14장 18절이하에 기록된 대로 악의 축을 맡은 자들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천사가 실수할까하여 기름부음받은 성도들이나 진노에 이를 쭉정이들은 추수때까지 그 심판을 유보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이 해석의 증명은 마태복음13장24절이하 가라지비유를 보시면 이해가 되실 수 있으실 것이니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역성경입니다.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렇듯 기름부음을 받은 성도들과 사탄이 뿌린 가라지는 함께 지내게 되며 또 하나님께서는 추수때까지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두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검은말을 탄자의 역할은 다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바로 기아나 굶주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성도를 결정짓는 하나님의 명을 받은 천사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처음 흰말을 타고 예수그리스도의 정복사역이 시작이 되고 이어 사탄의 출현으로 그 땅 끝까지 전파되어져야 하는 그 복음의 사역이 방해를 받게 되고 그런 渦中(와중)에서 올바른 믿음을 소유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區別(구별)하고 分別(분별)하는 역할을 이 검은말을 탄 천사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으로 검은 말을 탄자의 해석은 마치고 7절로 넘어 가겠습니다.

 

 

(7)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와서 보라." 하더라.

 

 

(8) 이에 내가 보니, 보라, 창백한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요 지옥이 그 뒤를 따르니, 그들에게 칼과 굶주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땅의 사분의 일을 죽일 권세가 주어졌더라.

 

 

소수의 해석가들이 개역성경에는 청황색말이라고 쓰여진 이 말을 탄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분별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분별하고 있으나, 또 다른 측의 해석하는 사람들은 첫봉인을 여실 때, 흰말을 탄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므로 이제 붉은 말을 탄자는 전쟁을 상징하고 검은 말을 탄자는 기아를 상징함으로써 이제 이 창백한 말을 탄자가 사망으로 땅을 멸망시킬 것이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과 해석은 이 첫째봉인부터 잘못 이해함으로 그런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시기부터 틀리다는 것을 앞서서 말씀드린 바가 있으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이 창백한 말을 탄 적그리스도는 그가 가진 네 가지 무기 즉, 죽음과 전쟁을 상징하는 칼과, 기아를 상징하는 굶주림과, 사망이라 표현된 온역 즉 전염병, 그리고 땅의 짐승들로 표현된 사람들, 이 사람들은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나오는 넷째짐승의 열 뿔, 즉 열왕들을 가지고 땅의 사분의 일을 죽이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이라 함은 믿는 자들의 세계, 곧 교회인 성도들을 의미하고 앞으로 나오게 될 바다는 이방인의 세계인 세상열방을 의미하고 있음을 주지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이 땅의 사분의 일은 앞서 일곱 교회에서 알아본 바가 있듯이 네 순교교회중 사분의 일인 한 교회를 죽이는 권세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앞선 세가지 재앙중에서 전인구의 사분의 삼이 죽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땅에 살아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들을 설명한 성경구절들이 오류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니 그런 해석들에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이 적그리스도가 성도를 죽일 수 있는 시기는 후삼년반임을 알 수 있으므로 이 넷째봉인의 시기도 역시 후삼년반임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증명해 나가겠지만 한이레 중 한때와 두때와 반때, 즉 전삼년반에는 성도가 순교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죽음으로 순교하여 승리하는 기간은 마흔두달로 표현된 후삼년반이라는 것도 역시 기억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창백한 말을 탄자의 이름이 사망인 것은 그가 적그리스도임을 알려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땅의 사분의 일을 죽일 수 있는 권세를 가졌으니 그 이름은 당연히 사망일 것이요, 그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니 지옥에 갈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사망이요, 그 뒤를 지옥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9)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보니, 제단 아래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10) 그들이 큰 음성으로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여,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을 심판하시어 우리의 피를 갚아 주실 날이 얼마나 남았나이까?" 하더라.

 

 

다섯째 봉인을 여시니 제단 아래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인해 죽임 당한 자들의 혼들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앞서 설명드린 대로 이 시기는 성도가 죽지 않는다고 했던 전삼년반은 아닐 것입니다. 이 때의 시간적상황은 순교가 일어나는 후삼년반기간중에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이제 여러분들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토록 아무 죄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성도들의 혼이 주의 제단아래서 그들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주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때문인데, 이 말씀과 증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또 영원토록 살아계심과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 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은 그런 증거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외에는 그 누구도 따르지 않는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한 종들임을 알 수 있고, 결국 그 증거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빼앗긴 순교성도들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1) 그러자 그들 각자에게 긴 흰 옷을 주시면서, 그들의 동료 종과 형제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가득 채워질 때까지 잠시만 더 쉬라고 말씀하시더라.

 

 

해석가들이 무심코 넘기거나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 수가 가득 채워질 때까지 잠시만 더 쉬라고 말씀하시더라, 라는 이 구절입니다. 그 수가 가득 채워질 때까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순교하는 성도의 수를 정해 놓으셨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이 수가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더 많은 순교를 각오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함을 示唆(시사)한다, 라고 해석해서 그 주장이 일견 틀리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해석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앞선 해석에서 잠깐 말씀드렸듯이 앞으로 나올 9장에 나타나는 이억의 군사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이억의 성도들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가득 채우신다는 이 수가 그 때 죽는 2억명을 포함해서 그 후에 삼분의 일인 두 교회가 또 순교하므로 총 순교숫자는 네 교회인 4억명이 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제단앞에 있는 이 순교성도들은 교회에 속한 계시록11장7절의 두 증인들이며 그 수는 이억이고 그리고 그 수가 가득 채워질 때 까지라는 것은 두 교회가 더 순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11절, 이 구절 자체가 그 해 그 월 그 일 그 시에 동시에 죽는 두 증인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그 수가 가득 채워 질 때까지의 성도들이라 함은 그 이후 후삼년반 기간중에 순교성도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은, 이 6장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가상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象徵(상징)장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있으면 이 해석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미진하다면 이 순교성도에 대한 설명은 계시록9장과 11장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2)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여섯째 봉인을 여실 때, 보라, 큰 지진이 나며 해가 머리털로 짠 천같이 검어지고 달은 피처럼 되었으며

 

 

(13) 하늘의 별들이 마치 무화과나무가 강한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무화과가 떨어지듯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같이 말려서 쓸려가고 모든 산과 섬도 각기 제자리에서 옮겨졌으니

 

 

이 장면은 구약과 신약에서 볼 수 있는 주의 날, 즉 크고 두려운 날을 敍述(서술)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엘 2장31절입니다.

 

(31) 위대하고 무서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흑암으로, 달이 피로 변하리라.

 

 

바로 이 구절은 계시록6장11절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베드로는 그의 서신서중 베드로후서3장에 이 주의 날에 관한 것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10)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 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이렇듯 주의 날에는 땅덩어리는 물론 온 우주가 몸살을 겪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가 떨어지듯이 떨어지고, 하늘은 두루마리같이 말려서 쓸려가고 산과 섬도 제자리에서 옮겨지는 계시록16장18절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대 지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상황을 모두어서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일곱 번째 진노와 재림상황이 겹쳐져서 계시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자

 

 

(15) 땅의 왕들과 위대한 자들과 부자들과 대장들과 힘 있는 자들과 모든 종과 모든 자유인이 각자 토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서

 

 

(16) 산들과 바위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위에 떨어져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기라.

 

 

(17) 이는 그 분의 진노의 큰 날이 임하였으니 누가 감히 설 수 있으리요?" 하더라.

 

 

이상 15, 16, 17절에 서술된 상황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이 임하였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상황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 6장은 큰 줄거리를 미리 보여주는 豫示(예시)재앙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 계시록6장은 앞으로 계시될 상황들을 미리 보여주는 시놉시스(synopsis)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계시록6장은 앞으로의 해석을 이해하는데 있어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장이니만큼 여러분들도 이 장을 몇 번 정도 읽어 보면서 이 해석이 맞는가를 스스로 分析(분석)도 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풀어놓은 해석은 결국 그 사람의 것일 뿐이며, 잘 알아 듣고 이해했다 할지라도, 또 따른 그럴듯한 해석을 들으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직접 해석한다, 라는 기분으로 연구를 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例(예)로 드는 성경구절들을 한번이라도 더 읽어보고 확인하게 됨으로써 쉽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상 계시록6장해석을 마치도록 하겠으며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들은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과 쉽게읽기버젼등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