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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성경교제관련

安息日(안식일)은 主日(주일)로 대체될 수 있는가,

by 디클레어 2011. 6. 24.

 

安息日(안식일)은 主日(주일)로 대체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왜 주셨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안식일의 기원은 태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조주하나님께서 6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쉬시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내가 이날 일을 마치고 쉬었으니 너희도 이 날을 지켜, 너희의 지친 몸과 마음을 쉬라고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2장

(2)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시던 일을 끝내시고, 자신의 하시던 자신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으신 그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음이라.

 

이 후 이 날은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잘 지켜져 왔다.

 

출애굽기16장

(2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내일은 주께 거룩한 안식일의 휴식이라. 너희가 오늘 구울 것은 굽고, 끓일 것은 끓이고, 남는 것은 남겨서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니라.

...

(29) 보라, 주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었노라. 그러므로 주가 여섯째 날에 이틀의 빵을 너희에게 주나니 너희 각인은 자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자기 처소에서 아무도 나가지 말지니라." 하시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칠일째에 쉬니라.

 

그리고 이 후 이 날은 결국 율법으로까지 확립되어 십계명안에 포함되어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어진다.

 

출애굽기20장

(8) 안식일 날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 네가 일할지니 네 모든 일을 할지니라.

(10) 그러나 일곱째 날은 주 너의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그 날에는 너와,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있는 네 타국인까지도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라.

(11) 이는 엿새 동안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는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 날을 복 주고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31장

(12) ○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13) "너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들을 참으로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 대대에 걸쳐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임이라. 이로써 내가 너희를 거룩케 하는 주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에게 거룩함이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그 혼이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께 거룩히 쉬는 안식일이니, 안식일 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안식일을 지킬지니, 그들 대대에 걸쳐 안식일을 지켜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며

(17) 그것이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히 표적이 되리라. 이는 엿새 동안에 주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 쉬시어 숨을 돌리셨음이라.' 하라." 하시니라.

 

선지서와 계시록을 같이 보고 읽으면서 그 정신을 이해하다 보면, 지금의 이스라엘민족은 육적이고 혈통적인 것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닌 주님을 믿는 모든 기독인들이 바로 영적인 이스라엘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16절의 말씀은 현재까지도 그침없이 이어지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그 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것을 묵상해 본다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23장

(3) 육 일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쉼의 안식일이니 거룩한 모임이 있느니라. 너희는 그 날에는 일하지 말라. 이것이 너의 모든 거처에서 주의 안식일이니라.

(3) Six days shall work be done: but the seventh day [is] the sabbath of rest, an holy convocation; ye shall do no work [therein]: it [is] the sabbath of the LORD in all your dwellings.

 

이 말씀을 보면서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곧 그 날만큼은 일을 하지 말고 지친 몸과 마음을 쉬라는 것이 그 주된 목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임을 알 수 있고 태초에 안식일을 세우신 목적에도 부합한다.

 

마가복음2장

(27) 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라.

(28)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의 주니라."고 하시더라.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사람은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몸이 쉬이 망가지고 따라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쉬는 날을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쉬는 날이 없었다면 가진 자인 富者(부자)들은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죽음이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들은 안식일과 더불어 어느샌가 사도들과 초대교인들은 예수그리스도 부활하신 주의 첫날에도 모이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20장

(19) ○ 그리하여 그 주의 첫날, 그 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그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시니라.

 

그리고 이후에도 안식일의 모임은 지속된다.

 

사도행전 13장

(44) ○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읍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이더라.

 

사도행전15

(21) 이는 예로부터 여러 성읍에서 모세를 전파하는 자들이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이 읽혔음이라."고 하더라.

 

사도행전18장

(4) 그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변론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시키니라.

 

이렇듯 주님께서 사십일동안 이 땅에서 제자들에게 보이고 나신 후에도 이스라엘민족들은 안식일에 모여 말씀을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 날이 그들에게 쉬는 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20장부터는 조금 달라진다.

 

사도행전 20

(7) 그 주의 첫날 제자들이 빵을 떼고자 함께 모였을 때,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하되 다음날 떠날 준비를 하고 한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더라.

 

주석-

안식 후 첫날에 '엔 데 테 미아 톤삽바톤'은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 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진다(E. Haenchen,).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날은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의 날이 되었다. 이 날을 지킴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것이 확실하게 세상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떡을 떼려 - '클라사이'는 '클라오'의 제 1부정과거능동 부정사이며 목적을 나타낸다. 즉 안식 후 첫 날에 모인 목적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떡을 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애찬을 가리킨다는 견해. 떡'의 헬라어 '아르톤'에 정관사 '톤'이 없는 것은 일반적인 식사를 말한다(R.C.H. Lenski). 초기 기독교의 풍습대로 성도들이 성례전(聖禮典)의 필수적인 순서로서 가졌던 애찬겸 성찬이었다고 보는 견해(F.F. Bruce, Pulpit,Alford). 그런데 이것은 교회 내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켜(고전 11:20-22) 후에 애찬은 없어지고 성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본문의 '아르톤'에는 정관사 '톤'이 없는 반면에 11절의 '아르톤'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떡을 뗀다는 것이 애찬겸 성찬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1절의 '톤 아르톤'은 단지 7절의 '아르톤'을 가리킨다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고전 10:16, 18과 11:17-34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주의 거룩한 만찬(theLord's Supper)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 의해 뒷받침된다.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개인집에 모여서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만찬을 나누기란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다. 저녁 시간이 아니고 한밤중에 떡을 뗀 것을 생각해 보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모였다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밤중에 떡을 뗀 것은 단지 그것을 맛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Jonh Calvin). 와 의 주장이 보다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한편 떡을 떼는 횟수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기에 각 교회는 임의로 그 횟수를 정했으나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주일 회집(會集)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던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매주일 성찬을 행하는 것이 사도들에 의해 정해진 관습임을알 수 있다(McGarvey). 그리고 떡을 떼는 일은 반드시 말씀을 강론한 후에 실시되었음이 성경(20:7-11)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유스틴 마터의 둘째 해명서(Apology)에 나타나 있다(pulpit).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 바울은 의식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를 것을 계획했다. 이는 바울이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된 날로서 중요시한 데 그 이유가 있다(R.C.H. Lenski).

 

이 주석을 믿거나 모두 옳다고 믿는 분들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단 반 정도 만이라도 받아 들인다면 좋을 성 싶다. 그리고,

 

고린도전서16장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자가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 따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는 모금하는 일이 없게 하라.

 

이 말씀을 봤을 때 바울사도는 아예 주의 첫날을 교회가 모이는 날로 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주의 첫날을 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것이다. 쉬는 날 모여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 그날 아니면 생계에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날은 콘스탄틴이 일요일을 쉬는 날로 하기 이전부터 모인 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쯤되서 육적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분은 전능하신 분임을 같이 묵상해 보시라. 全能(전능)은 全知(전지)를 포함한다. 믿음안에 행위가 포함되어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계시록1장

(10)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으며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내 뒤에서 들었는데

(10) I was in the Spirit on the Lord's day, and heard behind me a great voice, as of a trumpet,

 

이 날을 주의 첫 날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간단히 알아보려면 주의 날이 언제 쓰였는가를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 함은 구약의 선지서에는 대부분 초림과 재림하시는 날에 쓰였음을 알 수 있고, 신약역시 대부분 재림하는 날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2장12절

(12) 이는 만군의 주의 날이 교만하고 거만한 모든 자들 위에와 자고한 자들 위에 임하여 그들을 낮추실 것임이니

 

에스겔30장3절

(3) 이는 그 날이 가까웠으니, 즉 주의 날이 가까웠음이요 구름낀 날이라. 그 날은 이방의 날이 되리라.

 

요엘1장15절,2장11절, 2장31절,

(15) 슬프도다, 그 날이여! 이는 주의 날이 가까웠으며,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오는 멸망처럼 그 날이 올 것임이라.

 

(11) 주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그의 음성을 발하시리니, 이는 그의 진영이 매우 크고 그의 말씀을 실행하는 분은 강하심이라. 주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으리요?

 

(31) 위대하고 무서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흑암으로, 달이 피로 변하리라.

 

스바냐1장7절

(7) 주 하나님의 임재에서 조용하라. 이는 주의 날이 가까움이요, 이는 주가 한 희생을 예비하고 그가 그의 손님들을 청하였음이라.

 

스가랴14장1절

(1) 보라, 주의 날이 오나니, 네 약탈물이 네 가운데서 나뉘리라.

 

데살로니가전서5장2절

(2) 이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니라.

 

베드로후서3장10절

(10)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 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왜 이 글들을 찾아서 옮겼는지는 아실 것이라 믿는다. 요한이 계시록1장10절에서 언급한 주의 날은 분명 주님 재림하시는 날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날이라고 쓴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오십퍼센트만 양보해도 이 날은 주님께서 요한앞에 나타나 있는 날임을 가리킬 수 있고, 또 주의 첫날을 말할 수도 있다. 교회를 이끈 바 있는 요한이 주의 첫날을 모를 리가 없고, 더불어 주님 재림하시는 날이 주의 날임을 모를 리 없다. 어느 쪽으로 생각한다 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또 이 날을 주의 첫날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혹시 주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날에 성도들이 모일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2장

(46)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하나가 되어 꾸준히 성전에 모이며, 또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떼고, 즐거움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히브리서10장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도행전2장46절처럼 매일 모일 수도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를 보듯이 자꾸 모이는 것이 좋을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시대에 매일 가정집에 모이는 것은 민폐다. 이 당시 상황은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지금은 껄끄럽고 또 부담스럽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니 일주일중 한 날을 정하고 모여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권장해야 하는 사항인 것이다. 형제모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교회도 부정하지 않는다. 성도라면 누구나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더 이해해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느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예배당에 참석하는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해야 하고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던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의사라는 것이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다. 십일조를 하던 하지 않던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신앙이다. 제 삼자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말씀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택한 자들을 위해 많은 은혜를 내리실 것이다.

 

주님께서도 그들의 말은 듣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마태복음23장

(2) 말씀하시기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3)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한 모든 것을 지키고 행하라.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않음이라.

 

잘못 가르친 자에 대한 형벌은 하나님께서 관여하실 일이므로, 먼저 깨어 있는 성도들은 권면에 그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구원을 결정짓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힘들다. 따라서 그런 것에 능한 은사가 충만한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많아 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