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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성경교제관련

메시아닉 쥬에 대하여, 두 번째

by 디클레어 2012. 3. 9.


메시아닉 쥬에 대하여, 두 번째





먼저 한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사람이고 유대인입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과연 어떤 사람이 자기 민족이 버림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역하는 이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은혜를 베푸신 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쓴 로마서11장의 글은 당시에 하나님을 믿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마지막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은 호세아서에서부터 보겠습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써 주전 720년경에 쓰여 졌고 약 60년간의 기록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그는 예레미야가 남 왕국 유다를 향해 책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과 마찬가지 사역을 담당했음을 글들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굳이 분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7절에서 다시 한 번 설명 드리겠고 먼저 1장3절부터 보겠습니다.


(3) 그러므로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그에게 아들을 낳았더라

(4) 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있다가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을 것이며, 이스라엘 집의 왕국을 그치게 할 것이요,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이스르엘이라고 지으라고 하십니다. 이스르엘의 뜻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 란 뜻입니다.


(6) ○ 그녀가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녀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이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집에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을 완전히 제하여 버릴 것이기 때문이라.


그리고 다시 딸을 낳았는데 이번에는 로루하마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로루하마의 뜻은 문자적으로 '은총을 입지 못하다', 또는 '동정을 받지 못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더 이상 애정 어린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7) 그러나 내가 유다 집에는 자비를 베풀고 주 그들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 활이나 칼이나 전쟁이나 말이나 기병으로 그들을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더라.


성경해석가들 중에는 이 7절의 이스라엘과 유다를 분리해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멸망 받았고 남유다는 그렇지 않다고 풀이를 합니다. 그러나 여기 기록된 유다는 앞선 예레미야30장에서 보았던 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영적인 유다를 말씀하시는 것이지 민족적인 유다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막론하고 모두 멸망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기록된 구원하실 것이라는 유다는 혈통적인 유다가 아니고 미래적 시점으로 주의 백성들인 은혜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9)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이는 너희가 내 백성이 아니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을 것임이라.


로암미, 이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버림받았습니다. 그리고 역시 다음 절들을 읽어 보면 미래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천년왕국 때에 주시는 축복을 기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10) ○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정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게 되리라. 전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했던 그 곳에서 그들이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리라.

(11) 그때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자기들에게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오리니, 이는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이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이라는 것은 마지막 대환란을 이기고 사탄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주의 백성들이 결국 승리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호세아서와 더불어 한 가지 더 마가복음11장에 있는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보겠습니다.


(12) ○ 그 다음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주께서 시장하신지라

(13) 저쪽에 잎이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거기에 무언가 있을까 하여 가 보셨으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으니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직 아니기 때문이라.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시기를 "이후로는 영원히 네게서 아무도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을 듣더라.


이 무화과나무는 때가 아니어서 열매를 맺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 열매를 맺고 있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므로 그 뿌리까지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것은 마치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것 하고 비슷한 경우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무화과열매가 열리는 때를 모르셨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무언가를 알리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숨은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무화과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고 그러므로 14절에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시리라는 것은 이제 민족적인 이스라엘과 만군의 주 하나님이 영원히 단절되었음을 호세아서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선포하시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든, 혹은 믿지 않던 간에 구별 없이 민족적인 이스라엘을 모두 지옥에 던져 넣어 버리신다는 것은 아니고, 이후로는 민족적인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라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택함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로마서11장에 써진 바울의 글은 앞서 말씀드린 이런 말씀들과 병행해서 해석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소망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보고 연구한다는 이들 중에는 어느 한 가지만 보고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정론이라고 한다면 그 분께서는 예정하신 부분도 있고 또 예정하지 않으신 부분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예정하셨느니라. 라는 말씀 하나만 보고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또 4대 복음에 나와 있는 주님의 말씀과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서 서로 모순되는 것이 발견되면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옳다고 우겨대는 식입니다. 그런 식의 해석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오류가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이므로 止揚(지양)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성경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으신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생각에 모순되는 것 같은 말씀이 발견이 되면 이것이 어찌하여 그런 것인고! 하며 자신의 머리를 싸매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만 주구장창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협한 시야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니 自重(자중)해야 할 것입니다. 각설하고 이제 로마서11장을 보겠습니다.


(1) 그렇다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으며,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느니라. 너희는 성경이 엘리야에 관하여 말한 것을 모르느냐? 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하여 중보하여 말씀드리기를


여기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는 이제 없어졌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상태가 되었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지면관계상 11장 모두 옮기지는 않고 군데군데 보도록 하겠습니다.


(5)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로 이런 말씀들도 바울당시에 구원을 받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도 어느 정도는 그랬겠지만 열 두 사도들 모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14) 이는 아무쪼록 내가 나의 동족을 시기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 얼마라도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된다면 그들을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역시 이 말씀들도 당시의 이스라엘민족도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앞선 선지자들의 글들과 또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들과 모순을 일으키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16) 첫 열매가 거룩하면 빵 덩어리도 거룩하고, 또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거룩하니라.

(17) 그러나 만일 가지들 가운데 얼마가 꺾여지고 돌올리브 나무인 네가 그들 가운데 접붙여져서 올리브 나무의 뿌리와 기름진 것을 함께 받게 되었다면

(18) 그 가지들에게 자랑하지 말라. 네가 자랑하여도 네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지탱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가 말하기를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한 것이라." 하리라.


처음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나님께서는 순전함으로 선택하셨고 그리고 이후에 접붙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그 순전함에 의해 그들과 똑같은 온전한 주의 백성들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후 절들에서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꺾여졌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아지려는 생각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까 주의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입으로는 말하나 그 행위로는 부정하는 자들 말입니다. 특히 이 구절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주장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시니, 만일 네가 그 분의 선하심에 머물면 그 선하심이 너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아니하면 너도 꺾이리라.

(23) 또 그들도 믿지 않는 가운데 계속 머물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을 것이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이라.

(24) 네가 본래의 돌올리브 나무에서 꺾여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는데, 하물며 본래의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본래의 올리브 나무에 얼마나 더 잘 접붙여지겠느냐?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민족도 다시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수 있을 것에 대한 강조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바울의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잘 믿을 수 있는 기초가 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나, 또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唯一神(유일신)을 믿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고 설상가상 자신과 아버지를 同一(동일)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을 믿는 메시아닉 쥬들의 구원도 교회에 소속된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 질 뿐이며, 특별히 다른 방법과 그들에게 주어질 특혜도 없습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높은 상급을 받지도 못할 뿐 아니라 더 높은 깨달음이 있지도 않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여기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습니다.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와 같이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리라.

(27) 이는 내가 그들의 죄들을 없앨 때 그들에 대한 나의 언약이 이것임이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글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구절입니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바울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줄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종들의 하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그 증명을 위해 마가복음10장입니다.


(2) ○ 그때 바리새인들이 와서 주께 묻기를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타당하니이까?"라고 하며 주를 시험하더라.

(3)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였느냐?"라고 하시니

(4) 그들이 말하기를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주고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나이다."라고 하더라.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너희에게 이런 명령을 기록하였으나


그리고 그 이하 절들을 보면 원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 이 말씀은 모세가 임의로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19장을 보면 보다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8)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는 너희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종들에게 어느 정도 권한을 위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종들의 이성과 양심에 맞게 판단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25절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때를 끝내고 교회로 이어지는 영적인 이스라엘을 시작하려고 하시는데, 그 종인 바울은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이기에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바울사도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민족적인 이스라엘에 대해 아직까지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계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분도 人子(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큰 테두리에서 봤을 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특권은 이제 없어졌다고 봐야 하고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로 향해 졌다고 보는 것이 그 분의 큰 뜻을 보다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26절의 온 이스라엘과 야곱의 모든 구원은 메시아닉 쥬가 포함되어 있는 일곱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체로 볼 수 있고 또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28) 복음에 관하여는 그들이 너희로 인하여 원수가 되었으나 선택에 있어서는 그들의 조상으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

(29) 이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심이니라.

(30) 너희도 지나간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더니, 이제는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자비를 얻었느니라.

(31) 이와 같이 이제 이들이 믿지 아니하였던 것은 너희의 자비를 통하여 그들도 자비를 얻게 하려 함이라.

(32)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 하심이니라.

…….


이제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민족들을 사랑하실 뿐, 특별히 어느 한 민족만을 偏愛(편애)하지는 않으십니다. 그 분을 계시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 분을 알리시기 위해 유다를 지키신 것이지 결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훗날을 계시하신 계시록7장에서 말씀하신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고 14만4천 또한 민족적인 유대인들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납니다. 그것은 결국 가증한 세대주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이어서 계시록 2장, 3장외에는 그 존재를 찾아보기 어려운 교회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근거를 찾기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들 말대로 계시록4장에서 요한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교회가 휴거되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7년 환란 전 휴거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 되는데, 사실 7년 환란 전 휴거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번기회에 교회와 이스라엘을 무조건 분리해야 한다는 세대주의 누룩에 물들지 마시기 바라고 -물론 분리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의 가증한 교리에도 속지 마시고 온전한 의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헤아리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