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계시록관련/성경교제관련

계시록을 통해 본 비유의 의미.

by 디클레어 2012. 2. 14.

 

계시록을 통해 본 비유의 의미.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수많은 比喩(비유)들 중 어떤 비유들은 친히 풀어주신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는 항상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임을 풀이하신 해석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비유를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신 비유에는 그것에 맞는 특정한 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8장입니다.

 

  (4) ○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모든 성읍으로부터 주께 나아왔을 때,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렸더니,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니 밟히기도 하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또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지니 습기가 없으므로 싹이 나자마자 말라 버렸더라.

(7) 또 어떤 씨는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지니, 가시가 그것과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아 버리더라.

(8) 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지니 싹이 나와서 백 배의 열매를 맺더라." 하시더라. 이 말씀을 하신 후 외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니라.

(9) 그때 제자들이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이 비유가 무엇을 뜻하니이까?"라고 하니

 

  이 비유의 해석은 바로 이런 뜻이라고 풀이해 주십니다.

 

  (11) 이제 그 비유는 이것이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씨가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들이 들으나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 버리므로 믿지도 구원받지도 못하는 자들이요

(13) 씨가 바위 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면 변절하는 자들이라.

(14) 씨가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가서 이생의 염려와 부와 쾌락에 억눌려 온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요

(15)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서 인내로 열매를 맺는 자들이라."

 

  이렇듯이 베푸신 비유에는 그에 걸맞는 해석과 풀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베푸신 비유들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모두 풀이해 두신 것만은 아닙니다. 비유만 하시고 그 비유의 풀이를 하지 않으신 채 남겨 놓으신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가장 간단한 예가 바로 누가복음16장 불의한 청지기 비유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비유의 해석을 보이지 않으신 관계로 인해 지금도 그 비유는 난해하다며 여러 해석들이 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해답을 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풀이하고 저렇게도 풀이하며 서로 자신의 해석이 옳은 것 일거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은 여러 가지 해석들이 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미 올려놓은 상태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렇듯 해석이 붙어 있지 않은 비유들은 항상 그 의미에 대해 의견들이 紛紛(분분)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리고 이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그런 비유들 중 해석해 놓지 않으신 것들에 대해 살펴보니 너무 여러 가지 풀이들과 주장들이 있는데 -더군다나 어떤 비유들의 해석은 옳지 않은 것들도 보이기에- 계시록을 풀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그 의미는 이런 것이다, 라는 선에서 저 또한 주장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계시록을 해석하고 나자 그 동안 알 수 없었던 비유들의 해석들이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알고 언젠가는 그 비유를 풀어야겠다! 라는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말씀 때문에라도 반드시 풀려야만 할 비밀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17) 비밀로 간직된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도 알려지고 공개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누가복음8장

 

 주님 말씀하신 이 비밀을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저는 특별히 그 분께서 보이신 비유들이 (물론 계시록을 포함해서) 풀리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 비유를 들려 주셨으나 풀이가 없는 세 가지 비유의 해석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것에 들어가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를 먼저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 (읽는 자는 깨달으라.)

(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마태복음24장

 

  (14) ○ 그러나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했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는 것을 볼 때면 (읽는 자는 깨달으라.)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마가복음13장

 

  어떤 학자들은 이 깨달으라는 말씀을 후대에 첨가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보고 있지 않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들 중에는 이 깨달으라는 말씀을 다니엘과 연계해서 다니엘을 읽는 자들은 깨달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을 깨달으라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 등 여러 주장들과 이해들이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1) 혹자는 로마의 통치자 가이우스 갈리 굴라(Caligula) 황제(A.D.37-41년)가 그의 像(상)과 旗(기)를 성전에 세우려 했던 계획을 본 예언과 연관시키고 있다.

(2)또 다른 학자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 군대와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눅 21:21, Bengel, Bruce). 사실 로마 황제의 가슴 위에는 은이나 청동으로 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새겨져 있으며, 로마 군대는 바로 그 같은 독수리 깃발을 앞세우고 전선에 나아갔고, 그의 경배와 동일한 차원의 경의를 그 기에 표해야 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Josephus, B.F., . A.D.70년. 예루살렘을 훼파(毁破)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로마 군기를 성전 동편 문 쪽을 향해 세우고 거기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3) 그리고 어떤 학자는 A.D.70년 이전 열심 당원들(Zealots)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다

(4) 다니엘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읽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나, 즉 예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과 역사에 대한 당신의 자의적 해석을 조화시키고자 하셨으며, 더불어 당신이 예언한 바를 어떤 영적긴장과 분별력이 없이는 도무지 감지(感知)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렇듯 몇 가지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은 말세에 한이레의 약속을 받고 올라오는 적그리스도임을 피력한 바 있었고 이 마태복음24장 전체가 계시록과 연관되어 있는 부분임도 설명 드린 바 이 모든 주장들은 오류임을 알 수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은 데살로니가후서2장3절에서 보듯 죄의 아들, 즉 멸망의 아들로 보는 것이 말세적인 상황을 보았을 때 훨씬 합당한 해석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근래의 해석가들 중 그것을 분별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상당히 鼓舞的(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깨달으라는 것이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인지 정확히 풀이해 주시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 깨달으라는 말씀을 멸망의 가증한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보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깨달으라는 말씀자체가 倒置(도치)되어 있는 것이고 바로 그 뒤에 있는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를 가리키고 있는 것임을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이렇듯 계시록을 해석한 이후에서야 비로소 이 모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아직도 이런 구절들에 대한 해석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비유가 완전히 틀렸다고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저는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비유의 말씀이라는 일종의 주장을 하려는 것이니 받으실 분은 받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로 볼 것은 누가복음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비유라 굳이 그 구절들을 다시 가져오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비유의 해석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보겠습니다.

 

  이 비유의 첫 번째 부분(11-24절)은 앞의 두 비유와 같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데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25-32절)대조적으로 맏아들의 냉혹한 태도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앞부분은 하나님이 인생의 죄악을 사하기 원하시되 신속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사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어 뒷부분은 이기적 탐욕으로 가득한 입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의 왜곡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두 비유가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여기 등장하는 두 아들 모두가 소위 '잃어버린' 자들이라 할 수 있다. 호색과 방탕으로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 하고서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가 하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함은 분명한 사실이거니와, 큰아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자'였던 것이다.

 

  이 해석과 똑같이 이해하고 있지 않으신 분들도 물론 있으시겠지만 큰 관점에서 보면 모두 大同小異(대동소이)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탕자의 비유가 어떤 비유인지 계시록을 통해서 본 관점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은 아들은 지금 이 물질적인 세상에서 연단과 단련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즉 하나님께로부터 난 아담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과 계시록15장 강해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그들에게 선한 것과 또 악한 것과 감사와 기쁨과 슬픔과 비통함을 아는 그리스도와 같은 온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키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데 있어 사탄의 유혹에 승리하지 못했던 아담처럼 악한 자의 꾐에 쉽게 넘어가지 않을 만큼의 분별력과 의지를 키우시기 위한 목적 말입니다. 적어도 그 정도의 분량에 도달해야만 친구로서 또 영원토록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로써,  아들로써, 백성으로써, 또 신 같은 존재들로써 하나님보시기에 흡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별력이 없다면 그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어리광만 부리고 버릇만 나빠질 것이기 때문에 그런 아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만을 안겨줄 뿐 기쁨은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것들을 알려주시고자 한 것이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세상에 나가 호기도 부려보고 물질도 써보고 또 고생도 겪어 봄으로 인해 아버지의 소중함을 알았으며 그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행복임을 알게 되었으니 이 둘째 아들이야말로 다시는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을 이 땅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는 선택받은 주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큰 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큰 아들은 하늘에서 나서 그 분 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보다 먼저 하늘에서 만드셨고 오직 아버지의 명령만을 받들며 살아 왔습니다. 물론 사탄과 그를 따르는 타락한 천사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큰 아들이 불만을 터뜨린 이유는 자신보다 둘째 아들을 아버지께서 더 사랑하시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질투가 났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간단히 예를 들면 천사들은 하늘에서 먹을 것이 만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음식들을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각종 향신료와 재료들을 이 땅에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사람들이 생긴 이후에나 이런 음식들을 구경할 수 있었기에 어쩌면 지금 천사들은 사람들을 부러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갖은 죄를 짓고 돌아온 작은 아들 즉 이 세상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또 다시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아버지 말씀에 한번이라도 “아니오” 라고 한 적이 없었던 자신을 몰라주는 그 분께 야속한 마음이 들어 투정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큰 아들을 다독이시는 것입니다. “몰랐느냐, 내 모든 것이 바로 네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또 다른  비유를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마태복음25장의 열 처녀비유입니다. 이 열 처녀 비유에는 세대주의자들이 해석해 놓은 풀이도 있고 개혁주의측의 해석도 있고, 또 각자 나름대로 이해하는 바 대로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열 처녀를 유대결혼식에 비유하는 세대주의 해석이 있는데 열 처녀를 처녀와 들러리들이라고 해석을 함으로써 1절부터 4절까지 봤을 때 이들 모두 처녀라고 하는 부분과 상충이 됨으로 인해, 그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들임을 깨닫지 못한 해석이므로 그 해석에는 기본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니 접어놓고,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해석 중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해석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한다. 여기서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절) '기름'은 그 신앙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다. 6절에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상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될 만한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도 이 해석에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앞서 주님이 주신 비유에는 한 가지 정확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앞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보았듯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처럼 여기에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도 성령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믿음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면 성령, 믿음이면 믿음, 행위면 행위 이렇게 딱 부러지게 뜻하신 바가 있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처럼 기름을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그리고 믿음으로 해석하는 등 인용한 여러 가지 중에 하나만 걸려라 하고 그물을 던지는 것은 틀리지 않으려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선 탕자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한 의미, 즉 말세적인 견지에서 그 기름의 의미를 찾아보려 하는 것입니다.

 

이 열 처녀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 많은 성도들이 열 명이라는 것이 아니고 열이라는 숫자로 주님의 백성들을 표현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열 명의 처녀들 중 다섯은 등 안의 기름과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고 또 다른 다섯 명의 처녀는 등 안의 기름만 준비했을 뿐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지 못한 채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속히 오신다는 주님을 기다리다가 오시는 것이 조금 늦어지는 고로 잠시 잊어버리고 세상에 젖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잠이 들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5절까지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잠깐 진행을 멈추고 13절을 보겠습니다.

 

  (1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인자가 오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라.

 

  이 13절은 이 비유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이 결론의 의미를 알고 나서 나머지를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 먼저 설명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깨어있으라고 하신 때는 전 삼년 반 말에 들림 받는 14만4천(빌라델비아교회)에게 하신 말씀가운데에도 있고,(혹시 모르시는 분들은 마태복음24장의 구조를 보시기 바랍니다)

 

  (42)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떤 시간에 너희 주께서 오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마태복음24장

 

  그리고 주님 재림 때 휴거되는 사데교회에 하신 말씀가운데에도 있습니다.

 

  (2) 깨어 있으라. 그리고 남아 있으나 죽어가는 것들에게 힘을 돋우어 주라. 나는 네 행위가 하나님 앞에 온전함을 발견치 못하였노니 -계시록3장

 

  그런데 저는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을 모두 세 번에 걸쳐 그 분에게로 취하신다고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에서 증명해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이렇게 풀이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첫 번째 들림 받는 빌라델비아교회에게도 적용될 수 있고 주님 재림 시 휴거되는 두아디라와 사데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비유라고 말입니다. 먼저 첫 번째 들림 받는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에게의 적용은 계시록3장11절에서 보듯 이미 승리하여 면류관을 가지고 있었고 또 14장5절에서도 보듯 그 입에 교활함이 없다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주님께서 언제 오셔도 당황하지 않을 만큼의 믿음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은 환란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의 믿음을 이미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마흔 두 달 순교성도들보다도 높은 신앙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비견될만한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믿음의 후사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음 두 번째로 주님 오실 때 휴거되는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이 문을 두드리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열 처녀 모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知識(지식)에 이르려 하지 않고 세상에서의 삶과 그 만족만을 최고로 알고 살았으므로 미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에 비교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열 처녀비유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모두 이 비유 한 가지에 담으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주님 오실 때가 언제가 될는지 모르니 하나님을 아는 것에 힘쓰라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가지고 있었던 기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풀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자들이라면 결코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베푸신 비유들 중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25장의 달란트비유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주님 주신 비유는 이렇게도 풀이될 수 있고 저렇게도 풀이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숙지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 달란트를 사람들이 가진 재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하나님을 높여드리는데 사용하라는 비유라고 풀이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주님께서 말세의 계시를 하고 있는 24장 이후에 등장하는 비유이고 또 열 처녀 이후에 등장하는 비유이므로 이 비유는 주님재림하시는 때에 관련한 말씀이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삶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생활에 관한 비유가 아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달란트비유는 말세를 살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선생님 되십니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불림을 받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한 분, 곧 그리스도시요, 너희는 모두 형제이기 때문이라. -마태복음23장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다보면 그 분께서 가르쳐 주신 것 중에 실로 본인이 스스로 깨우쳤다고 하기에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높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계시록을 이해하는 것도 그 중 한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리는 것에 열심인 종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소홀한 종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종들에게 하신 비유가 이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자들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이고,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리는데 소홀하거나 경히 여기는 자들, 그 진리를 본인만 알고 있는 자들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깨달음은 그 분으로부터 말미암았고 곧 그분께서 각 사람의 분량에 맞게 나눠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이 뜻하는 바를 알아 그대로 행하는 종들은 칭찬을 받을 것이며 그 분의 뜻하신 바를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종들은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될 것을 비유한 말씀이 바로 이 세 종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달란트비유는 재주나 재능에 관련한 비유가 아님을 아셨으면 하는 바램에서 설명 드렸고 보다 더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썩히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더 진리에 이를 수 있도록 힘써라, 라는 것을 알리시려고 베푸신 비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종들은 결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 않고 대우받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사람들이 추켜세워도 다시 낮은 자세에 임하는 겸손함이 배어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시느니라. 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이니라."고 하시더라. -누가복음16장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는 것이나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함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교만함 때문에 사탄도 멸망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온 우주에 비하면 티끌보다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정확히 아는 자들은 결코 교만한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사탄이 자신의 지혜를 뽐내며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물리치고 하나님자리에 앉으려 했던 것은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가 그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아름다움과 높은 지혜와 현명함을 뽐냈을지 모르지만 그는 가장 기초적인 것을 몰랐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머리와 계획이 있어서 세상을 쥐락펴락 한다고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지혜는 無知(무지)가 되고 가장 어리석은 탑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현명함을 믿고 높은 곳에 앉으려 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임에 분명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인 그 분을 敬畏(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린아이보다 못한 가장 어리석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제  마치겠습니다. 이 비유를 받아들이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비유를 받아들이던 그렇지 않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을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기에 그런 분 들 중에 혹시라도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습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아무리 옳은 진리를 보여도 그것을 옳다고 분별할 수 있는 성경에 기초한 판단력이 없다면 그 진리는 돼지 앞에 진주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쪼록 성경을 많이 보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는 우리 대한민국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관련 > 성경교제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시아닉 쥬에 대하여, 두 번째  (0) 2012.03.09
메시아닉 쥬에 대하여  (0) 2012.03.08
그리스도인의 상급  (0) 2012.01.17
하나님의 눈물  (0) 2012.01.13
공평한 잣대  (0) 201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