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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성경교제관련

멜기세덱을 예수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가?

by 디클레어 2010. 9. 16.

멜기세덱을 예수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가?

 

멜기세덱에 관한 첫 번째 언급은 창세기 14장이다.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 올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이 구절은 모든 분들이 아시겠지만 롯이 소돔에 거할 때에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싯딤 골짜기에서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 네 왕과 접전할 때에 전쟁에 패함으로써 그들에게 탈취를 당하고 포로로 잡혀감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조카인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기른 삼백십팔인을 데리고 가서 그들의 손에서 롯과 다른 많은 사람들과 재물을 구출해 나올 당시에 살렘왕인 멜기세덱이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장면이다.

 

이 멜기세덱에 대해 히브리서기자는 뭐라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참고로 이 히브리서기자를 NIV측에서는 작자미상이라하고 KJV측에서는 바울이라 한다.

 

히브리서 첫 장을 살펴보면 당시에 이 히브리서기자가 왜 이 서신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읽어 보시길....- 아마도 당시에는 예수를 메시야로 볼 수 없다라는 유대인들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 들일 수 없었는가?

 

그 이유는 요한복음12장에 나와있다.

 

(34) 무리가 주께 대답하기를 "우리가 율법에서 듣기로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산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당신은'인자가 들리우리라'고 말씀하시나이까? 이 인자는 누구니이까?"라고 하니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는 이러해야한다라는 것에 대한 교육을 어떤식으로 받고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유용한 구절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당시에는 메시아가 오셔서 유대인들을 회복하고 이 땅을 그들이 정복하고 선민으로서 행복한 삶을 영원히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것이 이러할 진대 그들은 절대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아로써 받아 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사야서 53장만 읽고 깨달았더라도 그러지는 않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생기는 순간이다.

 

어쨌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은 아마도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가는 당시의 교회들의 모습에 자신들의 관점으로 그가 메시야가 아님을 강변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들에게 바울은 구약에 있는 여러 가지 사실들로 그가 메시아이며 또 영원한 대제사장임을 천명하는 이 글을 써서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히브리서 5장이다.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

 

여기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불리는 너는 누구를 말함인가?

 

시편 110편이다.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절은 예수그리스도께서도(마22:45,막12:37,눅20:44) 인용하셨던 만큼 너라고 불리는 이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것을 증명하는 구절이다

.

마 22장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

 

그리스도자신이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셨음을 증거하지 않는 말이라 할 수가 없겠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너는, 곧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말씀이다. 그럼 이 멜기세덱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찾아보자.

7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한다.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외에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의 출생이나 죽음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보자, 멜기세덱은 왜 이 당시에 살렘에서 왕이며 제사장으로 있었는가? 그건 이 당시의 상황이 노아의 홍수로부터 오륙백년정도 지났을 때라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 당시에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어떻게 섬기는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가르쳐야 했을 수 있다. 그래서 멜기세덱을 세우셨고, 그를 통해 당시의 백성들에게 제사법을 알려주셨을 것이라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바울은 사실 이 멜기세덱이 예수그리스도였음을 주장하고 싶어 했으나, 당시의 분위기로 그런 주장을 했다가는 굳건치 못한 자들로 인해 더욱 많은 이설들이 일어날 것임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것이 바로 5장 11절이다.

 

(11) 멜키세덱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할 말이 많아도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렵도다.

(12) 그 때로 보면 너희가 마땅히 선생들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이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원리들이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니, 젖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단단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되지 못하는도다.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가? 바로 히브리사람인 유대인들에게 하는 소리다. 그 때로부터 복음을 받은 너희 유대인들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선생들이 되어도 마땅한데 아직 기초원리조차 깨닫지도 못하고 있으니 너희들은 어린아이들이다,하는 말씀을 대놓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인가 알아보자 일단 멜기세덱이란 그 이름의 뜻은,

 

(2) 아브라함이 전체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더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화평의 왕이라.

 

멜기세덱'은 '나의 왕'을 의미하는 '말키'와 '의'(義)를 의미하는 '체뎌'이 결합된 형태로 문자적인의미는 '나의 왕은 의롭도다'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가리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로 부른 것과 연결된다.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 '살렘'이라는 지명(地名)은 '평강'을 의미하는'샬롬'과 동일한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 '평화'로 번역될 수 있다(Morris)-주석

 

일단 그 이름의 해석은 이렇단다. 아무래도 이 때부터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중보자역할을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인 멜기세덱이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지 않고는 결코 아버지앞으로 갈 수가 없다. 그분이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4절에

(4) 이 분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하여 보라. 심지어는 족장 아브라함까지도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느니라

 

'위대한가를-어떻게 높은가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펠리코스')는 영탄법(詠嘆法)으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일체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략물 중 좋은 것'의 헬라어 '아크로디니온'은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는 '아크로스'와 '무더기'를 뜻하는 '디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쌓인 것들 중에 가장높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것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것을 받은 멜기세덱의 권위를 알 수 있는 것이다.-주석

 

이렇듯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멜기세덱을 경배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당시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지도 않았고 레위도 아직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이었으므로 멜기세덱제사장이 직접 그 제사법을 시연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또 보자, 조금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있다. 이 멜기세덱은 분명히 아브라함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영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18절에 살렘 왕 멜기세덱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

 

왠지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 분은 이렇게 스스로 겸손하시고,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말씀을 한가지 더 하자면 같은 히브리서 2장에

 

(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으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우리 주의 백성된 자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신댄다.

이것도 황송한데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11)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

하시며 나사로를 친구로 부르시고,

 

 

15장에는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들이라 부르지 아니하리라. 이는 종은 자기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내가 너희를 친구들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기 때문이라.

 

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친구로까지 칭하신다.

그 분의 겸손하심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죄인된 백성을 구하시려 죽음도 마다 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시고, 창조주로써의 권위까지 버리시고 피조물인 우리도 참기 어려운 그 모욕과 수치를 감당하신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뉘라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분의 사랑은 우리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희생이다. 자기 희생,,,,,,

 

이제 결론을 내리자, 멜기세덱이 예수그리스도 되신다는 것은 사실 앞에서 이미 공개했다. 시편 110편에 이미 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멜기세덱이 사람인 피조물이라면 주라 불리시는 그 분이, 그분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일 수 밖에 없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좇을 수 있겠는가.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조물주가 피조물의 뒤를 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왕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불렀다면 살렘왕이라하는 멜기세덱도 그리스도를 주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바로 그분 자신이므로 그 반열을 좇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겸손함은 영원하시다라는 거다. 거기에 그 분의 사랑이 있다. 

 

마태복음 11장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그러하신  분을 우리가 대제사장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9장이다.

 

(11)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가올 선한 것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러한 건물이 아닌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을 통하여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피로 한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

 

이는 과거와 현재 우리의 죄를 속하신 대 제사장이시며

 

8장이다.

(1) 지금까지 말한 것들의 요점은 그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라. 그 분은 하늘들에 계신 위엄있는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그 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실 것이다.

 

바울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어린 아이같은 믿음을 가진 굳세지 못한 자들 때문이다. 이것을 거울삼아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장성한 믿음을 자랑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