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태 교수(개혁신학연구원)
들어가면서
한 성도가 다른 성도 혹은 어떤 단체의 신앙과 신학을 평가한다는 것은 피해야만 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평가하는 그 자신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에 바로 서 있지 못할 때에는 평가를 받는 자나 단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필자가 이광복 목사의 신학을 평가하는 이 일에 있어서 수년 동안 조심했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물론 이 목사가 필자와 동일한 교단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란 점도 이런 필자의 태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미국에서 귀국하여 모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한 1996년 가을학기 때부터 필자를 사랑하는 많은 동역자들께서 "이 목사의 신학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의 신학을 교정시켜 사용한다면 우리 한국교회에 큰 공헌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특히 그가 이토록 활동하도록 배려한 분(?)의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를 비판하기 이전에 그를 교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자"란 말씀을 해 왔었다. 이런 조언의 말씀들을 들었던 필자는 이광복 목사의 신학이 개혁신학으로 변하기만을 기도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여러 목회자들에 의해서 신학의 문제점들을 지적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광복 목사는 자신의 신학을 교정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학만이 최선의 것인 양 가르쳐 왔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그의 가르침에 의해서 수많은 동역자들이 잘못된 신학에 물들어 교회를 병들도록 목회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위에 있는 많은 목회자들이 이 목사의 '상징의 해석'에 있는 잘못들을 보지 못하고 그 해석을 따라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설교하고 성도들을 양육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속한 교단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에 속한 많은 동역자들 역시 이 목사의 '상징의 해석'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듣고 있다. 특히 최근(3월 3일) 이광복 목사가 속한 교단에서 발행한 신문을 보면, 이광복 목사의 가르침이 개혁주의 신학에 합한 것이기 때문에 이광복 목사의 신학을 비판하는 자들을 "교단적으로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성명서가 나왔는데 이는 이광복 목사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그의 신학에 대한 성경적 평가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요청에 따라 필자는 그의 신학을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필자가 이광복 목사를 평가하는 것은 그가 저술한 책들을 통해서란 점을 먼저 밝히고 싶다. 필자의 평가가 객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필자가 인용한 이광복 목사의 저서들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인정하게 될 것이다. 먼저 필자는 그의 가르침이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면들을 품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1. 종말과 종말론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킴 이광복 목사의 공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의 공헌으로 종말에 대한 관심을 한국 목회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몰트만이 종말론적인 삶을 강조하여 세계교회가 성경적 종말론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광복 목사의 종말과 종말론에 대한 강조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도전이 되고 있다고 본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종말론적 성경해석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이광복, {해석학의 실제}, 흰돌선교회, 2000년 1월 25일, p.478)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종말론적 성경해석이 심각한 오류를 품고 있지만 말이다.
2. 계시록에 대한 관심을 일으킴 이광복 목사의 모든 가르침은 계시록과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는 모든 다른 성경보다 계시록을 보다 중요하게 취급한다. 계시록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다른 모든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계시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성경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감추어져 왔던 계시록이 이제 이 시대에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계시록이 은혜시대에는 완전히 열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계시록을 안 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보아야 할 때에도 못 보면 큰일입니다. 지금은 바뀌어져 계시록을 철저히 보아야 할 때입니다"(이광복,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도서출판 흰돌. 1992년, 7월 15일, p.144).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더 계시록에 대하여 더 철저하게 보아야 할 것을 이광복 목사는 강조한다. 이런 강조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계시록을 연구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다. 계시록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을 담고 있는 이광복 목사가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어느 시대보다 더 계시록을 바르게 보아야할 때라는 도전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광복 목사에게서 잘못된 주장들 중 심각한 것들을 대충 살펴보려고 한다.
I. 계시록을 은혜시대의 복음이 아니라 종말 재림시대의 복음이라는 주장
1. 3시대의 복음? 이 목사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비성경적인 부분은 계시록을 은혜시대의 복음이 아니라 종말 재림시대의 복음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이루는 성경은 (1) 구약 (2) 신약 (3) 계시록으로 구성된다(이광복, {감추어진 만나의 비밀}, 목양성경연구원, 1990.10.30, p.13). 그리고 또한 이것을 3시대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 3시대란 (1) 율법시대 (2) 초림시대 (3) 재림시대이다(위의 책, p.14). 여기서 초림시대는 주님 재림 직전의 대환난의 시대 이후와는 다른 '신약의 시대'이다(위와 같음). 이런 3시대의 가르침이 성경적이 아님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들을 살필 때 더욱 분명해 진다.
2. 신약의 은혜시대가 불행? 이 목사는 초림시대와 재림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문제는 초림시대를 '신약의 시대'로 '십자가의 은혜'를 강조하며 또한 주님의 초림과 부활 신앙을 강조한다는 점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혜에 도취되어서 행함 없는 죽은 신앙으로 부패되었다"(위와 같음). 저자에 의하면 주님의 초림으로 우리에게 온 '은혜'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그 크신 은혜는 저자처럼 계시록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불행'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성도들도 은혜시대에 초림 예수의 복음에만 도취되어서 재림 예수 그리스도의 환난 승리 복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에 있겠는가?"(위의 책, p.22). 과연 이런 주장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초림 복음과 재림 복음이 다르단 말인가? 과연 기독교 목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3. 은혜의 복음이 아닌 종말 재림시대의 복음이 영생? 이광복 목사는 참으로 사도들과는 먼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성경의 역사는 (1) 구약 율법시대 (2) 초림 은혜시대 (3) 재림 환난시대 이렇게 3시대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런 3시대 중에서도 마지막인 재림 환난시대의 복음을 알지 못한다면 궁극적으로 영생을 맛볼 수 없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 말씀의 깊은 진리 속에서 '만나' 즉 '말씀'의 3시대적 구원의 복음을 듣고, 깨닫고, 믿어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며, 궁극적으로는 '감추었던 만나'를 먹고 영생의 복락에 입성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바이다"(위의 책, p.24). 여기서 이광복 목사는 '감추었던 만나'가 이미 신약시대 즉 은혜의 시대에 주님의 초림으로 드러났다는 사도들의 해석과는 정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 대한 이광복 목사의 가르침은 개혁신학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이단적이란 평을 받기에 충분하다.
4. 계시록만이 영생의 복음? 저자에게 있어서 '영생의 만나'인 '감추었던 만나'는 바로 계시록이다. 저자는 이 사실의 증거 구절로 계 2:17을 제시한다(위의 책, pp.23-24). 다시 말해서 저자에 의하면 오직 계시록만이 구원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종말의 복음이다. "이제 종말 재림의 만나 예수 재림의 복음인 계시록도 말세의 환난 재림신앙 구원 성도들에게는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절대 복음으로서 최고 최대의 중요 가치성이 확고하게 증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의 종말 사건 계시가 작은 책 계시록에 숨겨져 있고 장차 다가올 대환난 시대를 대비하여 죽고 사는 영생과 형벌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신실한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말씀이기 때문이다"(위의 책, p.207).
우리는 이런 주장에서 심각한 오류를 발견한다. 과연 계시록만이 영생에 이르는 최종적인 복음인가? 다른 성경은 최종적인 복음이 아니라 과도기적 복음이란 말인가? 계시록를 기록할 때와 비슷한 때에 동일한 저자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 역시 과도기적인 복음이란 말인가?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사랑의 아들을 우리에게 그 영원한 사랑의 표시로 주셨다고 강조한 요한일서 역시 영생의 복음에는 미치지 못하는가? 이광복 목사의 이런 주장을 어찌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5. 3가지 양식? 저자에 의하면 양식도 3종류다. 구약 광야 율법시대의 만나는 '육적 양식'이고 초림 예수 은혜시대에는 '믿는 자들의 영적 양식'이다. 그리고 '감추었던 만나'인 계시록만이 '믿음의 승리가 구원 성도들의 생명 양식'이다(위의 책, p.23). 이런 주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영적 양식'과 '생명 양식'을 분리시키고 있다. 영적 양식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생명 양식만이 영생이 될 수 있다는 이런 주장은 이단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영적 양식'인데 이 양식으로도 영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주장이 결론으로 나오기 때문이다(위의 책, pp.23-24). 사도 요한에 의하면 '감추었던 만나'란 바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초림을 의미한다.
즉 구약에서는 '감추었던 만나'인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신의 초림으로 밝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요 6장 속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배경을 이해할 때 사도 요한을 통하여 계 2:17 속에서 교회를 향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바로 주님의 교회답게 살도록 촉구하며 그렇게 사는 교회에게 구약에서부터 약속해 오신 그 약속은 변함없다는 점을 계 2:17의 말씀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는 초림 예수 안에서 감추어진 만나가 밝히 드러났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사도의 강조를 따르지 않고 있다.
II. 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문제점들
이광복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계시록을 신약의 다른 성경들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심각한 문제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그가 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는 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 계시록은 미래만을 예언하는가? 이광복 목사는 계시록의 내용을 미래적으로만 이해한다. "루이스 벌콥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상징은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어떤 것에 관련된 것이고, 모형은 언제나 미래적인 어떤 실제를 예시하여 준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계시록은 모형이지 상징이 될 수가 없다. 상징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상징의 표현을 통한 미래역사의 종말에 있을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이광복, {해석학의 실제}, 흰돌선교회, 2000년 1월 25일, pp.428-429). 이광복 목사에 의하면 계시록 4장 이하에서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계 1장이 과거의 사건을 보여주고, 계 2-3장이 현재의 사건을 보여준다면 계 4장 이하는 모두 미래의 사건만을 보여준다고 이 목사는 확신하면서 주장한다(위의 책, pp.438-439). 여기서 우리는 이광복 목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상징이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라면 '상징의 표현'을 쓰고 있는 계 4장 이하 속에서도 과거와 현재에 대한 내용들을 찾으려고 노력해야만 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전혀 없다. 그에 의하면 계 4장 이하의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일어날 대환난 때에 점진적이고도 병행적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기록한 것" 뿐이다(위의 책, p.439).
2. 12장의 한 아이 = 대환난 때 참 교회? 계 4장 이하를 우리 주님 재림에 앞서 일어날 대환난 때에 점진적이고도 병행적으로 이루어질 일들로만 이해한 이광복 목사는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의 해석조차도 따르지 않고 있다. 사실 이광복 목사는 자신이 세대주의가 아니라 역사적 전천론자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해 왔다. 그러나 그의 해석은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계 12장에 나오는 '한 아이'에 대한 해석이다. 전통적으로 래드 교수를 포함한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은 이 아이를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하늘로 간 사건을 초림 때 승천과 연결한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는 이런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이 아이의 출생의 시기를 미래의 '대환난'의 때로 보고 이 아이는 "대환난 때에 참 교회가 배출할 추수의 일꾼들"로 본다. 따라서 '아이가 가진 철장권세'를 환난의 때 "교회가 배출한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철장권세를 무기로 삼아 적그리스도와 싸울 것을 예표한다"고 해석한다(위의 책, pp.448-449). 그리고 '철장권세'란 바로 "말씀의 철장으로 다스림의 역사"를 의미한다(이광복 {계시록 난해 해설}, 흰돌, 1996년 8월 14일, 367). 이런 해석은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이 계 12장에서 아이의 탄생과 승천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광복 목사는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조차도 주님의 초림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것도 미래로만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를 역사적 전천년론자들 속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 대신 '극단적 미래론자들' 속에 속한다고 평가한 최삼경 목사의 주장은 적절하다.
3. 일곱 교회에 대한 해석의 문제점 이광복 목사는 계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예언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며 각 교회가 '특징'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일곱 교회가 차례대로 "사도시대, 속사도시대, 국교시대, 암흑시대, 개혁시대, 선교시대, 종말시대"란 예언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위의 책, p.101). 이런 시대적 구분은 자신이 배척한다는 세대론자들의 주장을 약간 변형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세대론자들을 제외한 다른 학자들은 일곱교회를 시대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신약시대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오직 세대론자들만이 시대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이광복 목사도 잘 알고 있다(위의 책, pp. 95-96). 이렇게 일곱교회를 시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세대론을 따른 것이란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여기에서 이광복 목사는 자신이 비난한 세대론에 빠져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가 일곱 교회를 시대적으로 이해하게 된 배경에서 볼 수 있다. 계시록을 연구해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런 시대적 구분이 나왔다는 것이다. " '...영국 선교사 죠지 브레스 웨드 목사는 화폐 수집의 취미를 가지고 세계의 화폐를 모으고 있던 중 소아시아 각 도시의 화폐가 수집되어 그로 인하여 놀라게 되었다. 그것은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편지와 그 도시의 화폐가 모두 관련이 지어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는 모리야마 사도시의 주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위의 책, p.101).
즉 아시아에서 수집한 각 화폐의 디자인이 일곱교회와 관련되어 기록된 말씀들의 내용과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화폐의 디자인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일곱 교회는 교회의 시대별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따라서 ...역사의 성취에 비추어 볼 때에 일곱 교회의 특성은 교회사의 일곱 시대를 예표하는 것으로 본다"(위의 책, pp.101-102).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그 도시의 화폐가 그런 디자인을 갖고 있는 것과 시대적인 구분과 어떤 연결점이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 라오디게아 지방에서 '닫혀진 문짝'의 화폐 디자인이 나왔다는 것으로 그 교회가 '종말시대'의 특징을 상징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런 화폐의 디자인이 성경보다 더 우월한 어떤 계시의 방법인가?
4. 상징적 해석법은 추방되어야 하는가? 이광복 목사는 상징적 해석법에 대하여 "올바른 해석 방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구동성으로 모두 배격하는 방법으로서 교계에서 완전히 추방되어야 할 이론이다"(위의 책, p.31)란 주장을 펼친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칼빈의 성경해석방법도 추방되어야 할 방법인가?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상징적 해석법을 따라 천년왕국이 이 땅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칼빈은 배격했다. 그리고 한국의 장로교회가 조직신학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던 헤르만 바빙크 교수와 루이스 뻘코프 교수도 이런 상징적 해석법을 성경해석에 적용하여 일생 동안 가르쳤다. 성경신학에 있어서 보스 역시 이 해석법을 적용했고 머레이 교수 역시 이 해석법을 따라 성경을 가르쳤다. 이런 교수들의 영향을 받아 현재 필자가 자라난 한국 장로교회(합동측과 개혁측)의 성경해석의 주류는 상징적 해석법이다. 그렇다면 한국 장로교회의 성경 해석법을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인가?
그런데 이광복 목사는 자신이 추방해야 한다는 상징적 해석법을 계시록을 해석할 때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계 8장을 해석할 때 그는 8절의 '불붙는 큰 산'이 "적 그리스도의 세력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여 13절까지 온통 상징적 해석법을 적용하고 있다({계시록 설교노트}, 흰돌, 2000, pp.121-122). 심지어 계시록 내에서 명백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까지도 그는 상징적 해석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계 17:15에서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고 '음녀가 앉은 물'에 대하여 설명을 분명하게 해 주고 있는데도 이광복 목사는 이것이 "신분, 단체, 여러 나라, 언어를 초월한 혼합 사상, 혼합 종교"라고 상징적 해석법으로 설명하고 있다(위의 책, pp.231-232). 이처럼 자가당착에 빠진 면을 그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한다. 그렇다면 진짜 추방되어야할 상징적 해석법은 그가 주장한 '상징의 해석법'은 아닐까?
5. 상징의 해석법이 최선인가? 이광복 목사는 자신의 해석법인 '상징의 해석법'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교회와신앙> 지난 호(2001년 3월호)에서 그가 최선의 해석법이라고 주장한 '상징의 해석법'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오광만 교수의 평가를 통해서 밝히 알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가 계시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해 나가고 있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먼저 그는 어떤 구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문자적 해석법'을 따른다. 가장 좋은 예가 계 20장에 나오는 '천년'이란 숫자에 대한 해석이다. 그 천년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상징이 아니라 여자적으로 이루어질 복락원이다"({계시록 설교 노트}, p.262). 그리고 계시록을 해석할 때 자주 사용하고 있는 '7년 대환난'에 대한 기간 계산이 이광복 목사의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명백하게 기록된 숫자를 변경하면서 의도적으로 '상징의 해석'을 시도하는 곳을 많이 발견한다. 대표적인 예가 14장에 나오는 '144,000'의 수다. 그는 이 수를 "환난을 딛고 선 두 증인(주의 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위의 책, p.193). 동일한 책에서 어떤 숫자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어떤 숫자는 '상징의 해석'을 적용해야 하는가? 이런 해석이 '상징의 해석법'인가? 참으로 그에게서 해석의 일관성을 찾기란 너무나 어렵다.
6. 일관성을 상실한 상징의 해석법 이광복 목사의 상징의 해석법이 자의적이며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그의 해석을 보면 잘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는 계 7:2의 '해 돋는 데로부터'는 "뜨거운 복음운동"을 상징하고(위의 책, p.107), 계시록 8장 9절에 나오는 '배들'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주장하면서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란 말씀을 "교회들이 무너짐"으로 해석한다(위의 책, p.121). 과연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가? 그리고 계 8:10-11을 해석할 때 '물'을 "말씀" 혹은 '복음'을 상징한다고 한다(위의 책, pp.121-122).
또한 8장 12절에 나오는 '해'='진리' '달'='교회' '별들'='주의 종'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위의 책, p.122). 더 나아가 11:15의 '세상 나라'가 '천년왕국'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근거로 이런 해석을 하고 있는가? 이처럼 자의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해석의 일관성 또한 11:11-12을 해석하는 곳에서 볼 수 있다. 11절에서는 '별'을 '비진리를 상징'한다고 하고 12절에서는 '별들'을 '주의 종'을 상징한다고 한다(위의 책, p.122). 그리고 8:12에서는 '진리'를 상징한다는 '해'가 16:8에서는 달리 해석되고 있다(위의 책, p.215).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해서 동일한 단어가 이처럼 다른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7. 헬라어 시제 해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이광복 목사는 계시록 4장 이하를 미래에 대한 것으로만 해석한다. 그런 해석의 근거를 1:19을 제시한다. 즉 '네 본 것'은 과거로 '이제 있는 일'은 현재로 그리고 '장차 될 일'은 과거로 보고 4장 이후는 바로 '장차 있을 있는 일'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 '네 본 것'(과거), '이제 있는 일'(현재) '장차 될 일'(미래)이라는 분명한 시제의 구분은 본문이 역사의 연대순을 지지하기 때문이다"(위의 책, p.16). 이처럼 '시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그가 계 5:6을 해석할 때에는 시제를 무시하고 있다.
즉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는 말씀 중에 '보내심을 입은'(헬:아페스탈메노이 apestalmenoi)이란 단어의 시제가 분명 현재나 미래 시제가 아님을 이광복 목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마지막 때에 강하게 역사할 성령의 완전한 역사"로 해석하면서({계시록 난해 해설}, p.179) "마지막 대환난을 앞두고 주의 종들에게도 동일하게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계 5:6)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게 될 것을 위로로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위의 책, p.180).
이미 '보내심을 입은' 성령님께서 이 땅에서 주님의 교회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것이 바로 사도 요한을 통하여 주신 계시록의 강조점이다. 이미 교회 속에 내주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는 점을 사도 요한은 2-장에서 다음과 같이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11,17,29, 3:6,13,22).
이처럼 계시록이 이미 일곱 영으로 묘사된 성령께서 교회 속에서 주님의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가르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광복 목사는 "임박한 재림을 앞두고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위와 같음)고 미래 환난의 시점으로만 이해하며 주장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보여주고 있는 계 19:6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는 말씀 중 '통치하시도다'가 현재 시제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적 사건을 현실적으로 묘사"한다고 해석하고 있다({계시록 설교노트}, p.253). 이처럼 헬라어 시제도 깡그리 무시한 채 과거와 현재 시제를 '임박한 재림론'에 입각해서 미래로만 해석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III. 계시록에서 도출한 신학의 문제점 = 천년왕국
1. 천년왕국이 목표인가? 이광복 목사의 모든 신학 체계는 결국 천년왕국과 연결되어 있다. 계 20장에 나오는 '천년'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천년왕국설'이 나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이 주장한 '천년왕국'은 학계에서 하나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무천년론자들도 이런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의 신학적 체계를 잘 알고 있기에 무천년론을 따르는 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계 20장에 나오는 '사단의 완전한 결박'에 대한 그 본문의 상징성을 무천년의 해석으로는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는 이단이란 소릴 들을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담고 있다. 아니면 적어도 세대주의자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그는 천년왕국이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2. 천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첫째로 이광복 목사는 20장에 나오는 '천년'이란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상징이 아니라 여자적으로 이루어질 복락원이다"({계시록 설교 노트}, p.262). 바로 이 해석이 그를 적어도 세대주의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사실 계 20장에 나온 '천년'을 역사적 전천년론의 대표자인 래드 교수도 그 기간은 '일정한 기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석하였다.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주석학자로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주장했던 박윤선 목사님도 이것을 과도하게 '여자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을 피하셨다. 이런 사실을 이광복 목사도 잘 알고 있었다({계시록 난해 해설}, p.547). 이런 점을 알고 있는 그가 천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대주의자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계 21-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과 '새예루살렘'을 천년왕국으로만 해석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그가 분명 세대주의자이며 더 나아가 이단적인 요소가 있다는 평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새 하늘과 새 땅 = 천년왕국? 이광복 목사는 ".... '새 하늘과 새 땅'은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므로 에덴 동산의 축복을 상실하여 실락원이 된 것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질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복락원의 기쁨을 만끽하게 될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천년왕국의 내용을 구체적이고도 세분화하여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본다"({계시록 난해 해설}, p.575). 이광복 목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러 곳에서 천년왕국과 동일시한다(이광복, {계시록 설교노트}, 흰돌, 2000년 6월 30일도 참고하라).
그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천년왕국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위의 책, p. 288 참고). 그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천년왕국으로 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천국에 대한 모습을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천국은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그러므로 21장에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황은 천년왕국의 구체적인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위의 책, p.285).
그러나 이런 그의 해석은 전통적인 역사적 전천년론자들의 해석과는 전혀 다르다. 그의 {계시록 난해 해설}, p. 573에 요약되어 있는 것처럼 무천년론자는 물론 역사적 전천년론자들 중 어느 누구도 21장의 내용을 천년왕국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광복 목사에 의하면 구약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과 모든 성도들이 이 천년왕국을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목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롬 8:19에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 역시 이런 "장차 나타날 영광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있을 천년왕국을 상징한다"({계시록 난해 해설}, pp. 573, 576)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벧후 3:13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는 말씀 역시 천년왕국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취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그는 주장한다(이광복, {계시록 설교노트}, 흰돌, 2000년 6월 30일, p.271). 이런 그의 주장은 이미 주님의 초림에 의해서 시작된 천국이 영원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정통교회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4. 새 예루살렘=천년왕국? 이광복 목사에 의하면 계 22장의 새 예루살렘 역시 천년왕국일 뿐이다. "22장은 20장의 천년왕국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보충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별히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좌우에 열두 가지의 실과를 맺는 광경은 바로 잃어버렸던 에덴 동산의 축복을 회복한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다"(위의 책, p.298). 다른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우리 주님이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부활하고 살아 남은 자들은 휴거되어 천년왕국에 입성할 영화롭게 된 성도의 변화체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한다"({계시록 난해 해설}, p.578). 한 마디로 말해서 새 예루살렘은 "흠 없고 티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으로 단장한 교회다 천년왕국의 축복에 동참하게 될 것을 예표하는 것으로 본다"(위의 책, p.582).
이런 이광복 목사의 가르침은 역사적 전천년론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책 {계시록 난해 해설}, p.578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세대론자인 '왈부르드' 외에는 어느 누구도 새 예루살렘을 천년왕국 안에 있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관점은 적어도 역사적 전천년론의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대주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천년왕국으로 가는 길 = 인간의 공로? 이광복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은혜시대의 구원과 환난시대의 구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천년왕국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믿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천년왕국인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천년왕국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김'이 필수적인 것으로 계시록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다음을 주장한다. "천국은 인간의 공로로 가는 곳이 아니라 은혜의 부르심으로 가는 것임을 감안할 때에 천년왕국과 천국을 동일시 할 수가 없음이 분명하다"({계시록 난해 해설}, p.108). 그러나 이런 해석은 계시록에서 '이김'이란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못 이해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계시록에서 말한 '이김'이란 인간의 공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히브리인의 사고 속에 있는 믿음의 다른 면인 '삶'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을 이목사는 '인간의 공로'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말한 '이기는 자'란 주님만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고 그분만을 끝까지 따라 사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계 17:14은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과 동거하는 삶' 자체가 바로 승리인 것이다. 이런 동거가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며 순교를 각오하는 삶임을 계 12: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6. 이광복 목사의 종말의 복음 = 성경과 다른 복음! 우리는 이광복 목사가 강조한 종말의 복음은 사도들과는 다른 '또 다른 복음'임을 알 수 있다. 그 분명한 사실은 그가 '성전의 재건'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밝히 드러난다. 이광복 목사는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오마르 사원의 자리에 성전이 재건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유대교인 제사장들이 기다리는 제사와 예물을 드리게 될 그날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임박한 징조로서 필연적으로 재림에 앞서 먼저 등장할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을 것이며, 마지막 대환난이 시작될 것을 알아야 한다"(이광복, {무화과나무로 본 재림징조}, 도서출판 흰돌, 1999년 6월 23일, p.138), "그러나 그 시기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세워질 것으로 본다.
그리할 때 우리의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경의 예언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며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위의 책, p.139),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꼭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위의 책, p.140). 그런데 그가 이런 확신을 갖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구약의 다니엘서의 예언 때문이다. "이를 볼 때에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앞두고 이루어질 70번째 이레에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될 것을 다니엘은 예언하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을진대 다니엘이 이렇게 예언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위의 책, p.141). 더 나아가 마 24:15과 살후 2:3-4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은 어느 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다니엘, 예수님, 바울을 통한 종말의 예언에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언을 좇아 증거할 뿐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위의 책, p.143).
그러나 우리는 마 24:15과 살후 2:3-4이 예루살렘의 물질적 성전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마 24:15의 말씀은 초대교회시대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과 연결되어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 성전'도 반드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런 물질적인 성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이 적용될 수 있는 곳은 오직 주님의 몸인 교회뿐이라고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3:16, 고후 6:16 참고). 이광복 목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피제사가 다시 행해질 성전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신약 성경은 오직 주님의 몸인 교회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주님의 몸된 교회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광복 목사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광복 목사는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모든 자들을 자유주의 학자들로 취급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예언들을 완전히 영적인 것으로 해석한다"(위의 책, p.144). 그에 의하면 초대교회 교부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될 것을 주장한다(위의 책, 143).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예루살렘에 피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회복된다는 주장은 세대주의자들 이외에는 주장되지 않는 학설이기 때문이다. 설혹 성전이 재건되고 피제사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사단의 전'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광복 목사가 그 성전이 천년왕국에서도 여전히 있다고 주장한다면 세대주의자란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7. 성령으로 난 자가 타락할 수 있다? 이광복 목사는 '의가 거하는' 천년왕국 기간에도 계속적인 탄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천년왕국 기간에는 "죄인된 부부의 관계는 없어진다"({성경종말론}, p.158)는 점을 먼저 밝히면서 창 1:28의 복이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위와 같음)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탄생이 가능할 것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적인 개념과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역사로 잉태하셨음을 볼 때 천년왕국에서도 과학과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성령의 어떤 역사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볼뿐이다"(위의 책, p.159). 천년왕국 후에 다시 사탄의 미혹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박형룡 교수의 견해와 비슷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로 삼고 싶지는 않다.
사실 전천년주의자들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해석상 난문제들 중 하나가 천년왕국 기간 다음에 사단의 미혹이 다시 있다는 것을 해석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이광복 목사의 해석에 있어서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잉태와 비슷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출생한 자들까지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말 그대로 출생의 "그 방법은 모른다"(위와 같음)고 계속 주장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 탄생된 자들에게 타락이 있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전체의 강조점이 '성령의 특별한 역사'로 태어난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변하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그는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이광복 목사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부분까지도 너무 많은 곳에서 '확대해석'하려다가 해석의 오류에 침몰하고 있음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해석상의 오류에 대해서는 지난 3월호에 있었던 오광만 교수의 글을 보라).
8. 천년왕국설이 교회의 정통 가르침인가? 이광복 목사에 의하면 천년왕국설이 예수님과 초대교회부터 시작된 기독교 정통 가르침이다. 즉 "예수님 -> 요한 -> 폴리갑 -> 이레니우스"까지는 천년왕국설을 가르쳤다고 그는 주장한다({계시록 난해해설}, p. 553).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천년왕국을 단 한 번도 사도들에게 가르치신 적이 없다는 점은 학자들의 공통적인 일치이다. 그리고 주후 2세기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바나바(Barnabas)가 무천년론자란 사실은 그의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의 4장과 11장에서 우리는 잘 알 수 있다(The Ante-Nicence Fathers, I. p. 1465).
또한 주후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이 천년기를 반대했다는 것은 학자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교회사에서 천년왕국과 종말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정일웅 편, {천년왕국과 종말},솔로몬, 1993, 제 2장을 참고하라). 이광복 목사가 교회의 정통 가르침이 천년왕국설이란 주장은 이런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천년왕국을 단 한 번도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이광복 목사가 자주 거론하고 있는 마 24장에서도 성전의 재건이나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주님께서 요 5:28-29에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말씀하실 때 그 두 부활 사이에 천년이 있을 것이라는 이광복 목사의 주장은({계시록 난해해설} pp.561-562) 성경에 없는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 5:28-29의 말씀은 부활의 '종류'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간격 있는' 부활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광복 목사의 주장 속에서 교회사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이 많음을 발견한다. 이런 예의 또 다른 하나는 이광복 목사의 어거스틴의 인용이다.
이광복 목사는 무천년설을 주장했던 어거스틴까지 인류 역사를 6천년을 가르치면서 6천년이 끝나면 역사의 끝맺음인 종말이 되어 7천 년째(천년왕국) 안식 세계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가르쳤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6일 창조 후 7일째 안식과 6천년 역사 후 천년왕국이 임할 것을 역설한다(이광복, {절기로 본 초림과 재림}, 도서출판 그리인, 1989, p.213). 그러나 사실은 어거스틴이 "한때 나 자신도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 다음 이 7일째라는 안식을 천년기를 규정하지 않고 영원한 기간으로 해석했다는 점을(The Ante-Nicence Fathers, I. pp.425-432) 종말론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이광복 목사는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자신의 종말관으로 변형시켰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9. 이광복 목사의 천년왕국설 평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천년왕국을 고대하라고 역설했단 말인가? 특히 사도 베드로가 모든 성도들에게 바라보라고 강조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반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인가! 이미 주님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모습으로 온 것이 다시 반역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모순을 갖고 있는 이광복 목사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올바른 종말론은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주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된다"({무화과나무로 본 재림징조}, p.157)라고 이광복 목사가 아무리 '올바른 종말론'을 역설하고 있지만 그의 종말론은 성경의 종말론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라보라고 역설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오직 물리적인 힘으로 다스리는 유대적인 '천년왕국'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을 사모하라고 역설하기 때문이다({계시록 난해 해석}, p. 588에서 이런 점을 분명히 주장한다). 이런 이광복 목사의 강조점은 사도들의 강조점과는 전혀 다르다.
IV. 계시록으로부터 확장된 가르침의 문제점들
이미 앞에서 언급된 부분들도 있겠지만 이광복 목사의 계시록을 근거로 해서 확장된 가르침에서 발견된 심각한 문제들 몇 가지를 잠시 살펴보자.
1. 주님의 재림의 임박성을 지나치게 강조함 이광복 목사는 주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 점을 2월호에서 최삼경 목사도 제시했지만 여기에서도 잠시 살펴보자. 사실 이광복 목사가 속한 교단에서 그를 '시한부 종말론자'라고 평가하는 것이 잘못된 평가란 성명서가 나 있기 때문에 이 점을 좀더 살피는 것은 의미 있을 것이다.
"이 시대가 바로 이런 현상입니다. 주님이 뿌리는 시기는 지나갔고 주의 종들을 통해서 농사짓는 시기가 마감되어지는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이광복,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도서출판 흰돌. 1992년 7월 15일, p.12), "지금은 말세 중에서도 그 끝인 말세지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우리는 알 길이 없지만, 개신교 최고 신학자 어거스킨과 초대교회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역사 6,000년 설을 주장하는데, 오늘 이 시대 자유주의 사상으로 인해서 종말론 사상은 사라지고 두뇌 속에서 잊혀져 가는 하나의 신학이론으로까지 전락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몇 년에 주님이 오실지, 어떻게 주님이 오실는지 성경 이외에 언급해 본적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목자로서 이렇게 예언되고 실현되고 있는 것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악한 종이기에 이 귀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까?"(위의 책, p.13), "우리는 이 시대, 어쩌면 살아서 변화되어 주님을 영접할지도 모르는 이 놀라운 시대에"(위의 책 p.14) 살고 있다란 표현 속에서도 성도들로 하여금 살아서 주님을 영접할 것처럼 이끌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목사는 지금 이 시대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란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데 "노아시대에도 마지막 때를 알렸건만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보여주시는데, 그러나 성경을 믿지 않고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는 자는 종말을 도외시 해버립니다. 77일분밖에 식량재고가 없는 이 시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마지막 때의 징조입니다"(위의 책, p.20)란 그의 주장 속에서도 이런 점을 잘 알 수 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역설하는 점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시대마다 표징을 주셨습니다"(위의 책, p.22)란 표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결론 속에서 더욱 밝히 보여지고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노아시대에도 소동과 고모라 때에도 그 시대를 볼 수 있었던 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시대를 봐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문밖에까지 오신 줄을 알아야 합니다"(위의 책, 23).
물론 성경에서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 때를 분별하는 '합당한 삶'을 사도도 역설한다(벧전 4:7-10). 그러면 이 목사의 가르침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의 '신약의 전체 기간'을 의미하고 있으나 이 목사는 이 마지막 때를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로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문밖에까지 오신 것, 즉 '임박한 재림'을 볼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사실상 이런 지나친 촉구는 시한부종말론자들이 너무나 자주 썼던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이단이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목사의 가르침에 의하면 '종말'이란 단어는 사도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도들과 사도들을 따라 복음을 전파하는 그 시대는 오직 '은혜의 시대'일 뿐이다. 그 은혜시대는 계절로 말하자면 씨를 뿌리며 가꾸는 봄과 여름에 해당된다. 그리고 오늘 이 목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마지막 환난시대이며 추수의 시대인 가을과 연결되어 있다. 그가 "은혜시대는 열두 사도들을 계승한 종들의 교회를 통해 농사를 짓지만 마지막 환난시대에는 강력하게 추수하는 종들을 주께서 모으셔서 그들을 통해 추수를 하게 합니다"(위의 책, p.31)라고 주장한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 목사가 주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처럼 역설하고 있다는 점을 다음의 한 부분만 보더라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를 바라보는 주의 종들은 이제 주님오실 때가 가까운 마지막 때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이 한가지씩 그림 맞추기와 같이 그 자리를 메워가고 있고, 거의 다 에워져 있음을 주지하시길 바랍니다" (위의 책, p. 35).
이 목사가 주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은 주장들 속에서도 분명 잘 알 수 있다. ".... 나타난 표적을 통해서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종말의 시대는 분별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위의 책, p.54), "노아시대에는 노아를 통해서 싸인을 주셨고 소돔과 고모라 때는 두 천사를 통해서, 초림 때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마지막 때는 주의 신실한 종들을 통해서 싸인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징조들을 보고 깨어서 주님 오실 것을 준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위의 책, p.55).
2. 이스라엘의 해방을 과도하게 강조함 이 목사는 주님의 재림의 때를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 때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독립이다. 그 독립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그는 자신 있게 역설한다. "그러나 모르기 때문에 막연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종말의 징조를 통해 그 시대를 알고 믿음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분명히 말세요,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앞둔 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이광복, {성경종말론}, 흰돌, 1999년 6월 23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다는 사실"을 "주님이 다시 재림주로 오신다는 싸인이 아닐 수 없다"고 역설한다({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p.56). 이 목사는 "주님이 오실 때가 되었는데도" 교회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바로 교회의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영접치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입니다"(위의 책, p. 60).
이 목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독립은 주님 재림의 '긴박함'을 알리는 징표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볼 때 이스라엘의 독립은 우리 시대에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최대의 징표로 본다"(이광복, {무화과나무로 본 재림징조}, 도서출판 흰돌, 1999년 6월 23일, p.70). 이스라엘 독립이 주님 재림의 임박성을 보여주는 징표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위의 책, pp.79, 99, 122)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본 저자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곧 이스라엘의 회복(독립)을 통하여 임박한 주님의 재림 징조로 예언하신 것으로 보며, 이 시대가 마지막 때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 기차와 같음을 고려하여… 이 시대가 마지막 때임을 증거하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났음을 깨달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는 성경적 종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위의 책, pp.148-149).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목사는 사도들이 강조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말씀을 한 걸음 더 나아가 '깰 때가 벌써 지났음'을 역설한다(위의 책, p.122에도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보면 '이미 이 깨어난 자들'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이 보장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강조는 재림 임박성을 강조하기 위한 인위적인 성경해석이다.
3. 종말의 '흰떡'만이 유일한 복음인가? 이광복 목사는 종말의 복음을 강조하여 구원관을 혼란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깨어난 자들만이 구원에 동참할 수 있다. 과연 누가 깨어난 자들인가? 그의 가르침을 보면 이 '이미 깨어난 자들'이 누구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의 가르침에 의해서 새롭게 된 자들만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이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구원이 보장된 자들인 것이다.
이 목사에 의하면 은혜시대와 종말시대가 다르다. 그는 구약을 율법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은 은혜시대와 종말시대 혹은 환난시대로 구성된다. 이런 3시대에 대해서는 이미 2월호에서 자세히 다루어졌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지면상 더 개진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 목사가 종말의 영원한 말씀인 '흰떡'을 받지 않으면 무기력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는 점이다({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p.166). 그리고 그 복음이 자신을 통해서 열리고 있으며 그 흰떡이 자신에 의해서 주어질 때에만 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는 점이다. ".... 하나님께서는 흰떡 같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지 아니하면 무기력해집니다. 이젠 전 세계 주의 참 종을 통해서 이 말씀이 열리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이 공부를 하신 분들은 살아나고 참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체험하고 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고 흰떡의 역사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위의 책, pp.166-167).
이런 이광복 목사의 주장은 다른 교회가 가르치는 복음은 살릴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계시록을 자신처럼 아는 '참 종들'에 의해서 가르치지 않거나 강조하지 않는 교회들 속에서는 '흰떡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살아나는 체험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주장은 얼마나 독설적인가! 이런 주장이 과연 올바른 목회자의 주장일까? 계시록을 모른다고 고백하면서도 다른 성경들을 가르치는 겸손한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역사를 성취해 오셨던가! 계시록을 주석하지도 않았던 칼빈을 통해서 역사하신 분이 오늘날도 그렇게 역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4. 이제서야 열린 계시록만이 구원의 복음인가? 이 목사는 종말의 복음이 열리고 있다는 점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 복음은 계시록을 의미한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위의 책, pp.144,166). 그가 은혜복음의 대치로써 종말복음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임을 이미 지적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의 문제는 그 종말의 복음인 계시록이 다른 때가 아니라 바로 '이 시기에' 자신 혹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에 의해서 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닫혀있던 종말의 복음인 계시록이 이제 이스라엘이 독립한 현 시점에서 열리기 시작했고 한국의 목회자들에 의해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 주의 종들을 통해서 이제는 열리기 시작하고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이 복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위의 책, p.196). 이렇게 전해지는 종말의 복음인 계시록을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계시록이 은혜시대에는 완전히 열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계시록을 안 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보아야 할 때에도 못 보면 큰일입니다. 지금은 바뀌어져 계시록을 철저히 보아야 할 때입니다"(위의 책, p.144).
이런 이광복 목사의 주장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주의 종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계시록을 오늘 우리 시대에 와서야 열리고 있다는 것은 이전의 성도들은 계시록을 몰랐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전의 성도들 역시 계시록이 강조한 '그리스도의 영원한 승리와 교회의 영원한 안전'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계시록을 받았던 초대성도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더 계시록의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잘 알았다고 말해야만 한다. 따라서 계시록이 지금 이 시대에 열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부활과 승천의 시점에서 열리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했어야만 했다.
5. 지금이 최대 축복의 시대인가? 사도들은 주님께서 오신 그 날 이후를 복된 시대라고 정의한다.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이제 영원 전부터 준비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기 시작했다고 사도들은 가르친다. 신약 시대 즉 은혜시대에 사는 자들은 어느 누구나 이런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차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서 주님을 영접하여 죽음을 보지 아니하는 최대의 축복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깨닫는 자는 가장 복된 시대에 살고 있고 깨닫지 못한 자는 가장 불행한 시대에, 엄청난 재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님 맞을 준비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믿음의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주님 맞이할 때입니다. ....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푯대를 주님께만 향하여 사탄에 미혹당하지 말고 우리에게 예비된 생명의 길로 달려 나아가 주님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위의 책, p. 63-64).
이런 주장은 두 측면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첫째는 성도들로 하여금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인 양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런 생각을 과도하게 가졌던 집단들 속에서 보여졌던 잘못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두번째의 문제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만이 최고의 복인 양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계시록과 다른 모든 신약 성경은 주님 안에서 '잠자는 것'(육체의 죽음) 역시 동일하게 복되다고 주장한다. 특히 계시록에서 말하는 최고의 복은 '살아서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는 오히려 '순교자의 반열에 서는 것'이다. 이광복 목사는 계시록에서 강조한 최고의 복이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최고의 복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6. 임박한 재림신앙만이 종말신앙이며 구원에 이르는가? 이광복 목사는 자신의 책 어느 곳에서나 '재림 신앙'을 강조한다. 그는 '오직 예수 재림신앙'이란 구호를 항상 사용한다. 그가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측면에서 이미 살폈다. 주목해야 할 다른 한 부분은 이것이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때에 교회의 배도하는 역사가 대폭 증가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오직 상상 속에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현실인 것입니다"(위의 책, p.68).
그에 의하면 교회의 배도가 주님의 재림의 임박함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주님 재림의 긴박성을 강조한 이 목사는 "마지막 때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은 새로워져야"(위의 책, p.119)한다는 점을 극구 강조한다. 그리고 그 새로움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해 주는 자신의 가르침 즉 '흰떡'인 것이다.
이처럼 주님의 재림만이 재림 환난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유일한 신앙으로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모든 성도는 주님의 초림에서 있었던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요소이다. 그런 '초림신앙'의 바탕에서만 '재림신앙'은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초림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초림신앙과 재림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런 두 면을 강조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앙은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림신앙'이란 용어보다는 '재림소망'이란 용어가 더 성경적이다. 따라서 '초림신앙 재림소망'이 되어야 한다. 이런 '초림신앙과 재림소망'은 '영원한 사랑'과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모든 사도들이 강조했기에 오늘의 한국 목회자들 역시 강조해야 한다. 이런 사도들의 강조점을 이광복 목사는 따르지 않고 있다.
7. 환난시대를 과도하게 강조함 이광복 목사 신학의 문제에 있어서 또 하나는 '대환난'을 과도하게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의 '3시대 복음'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는 종말의 환난시대가 가장 중요한 시대이다. 이 목사에 의하면 지금 이 시대는 7년 환난시대의 시작이다. 그에 의하면 '환난의 시대로 들어감'을 지금 보는 자들만이 구원이 보장된다. 따라서 계 3:18에 있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곧 7년 환난시대로 들어감을 알고 빨리 눈을 떠서 진리를 분별하여야 산다"(위의 책, p.66)고 해석한다. 그 문맥에서는 전혀 7년 환난시대란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자신의 신학적인 구조를 본문에 집어넣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역시 미래의 대환난의 통과에 초점을 두면서 해석되고 있다. "미래의 대환난을 이길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뿐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위의 책, p.204). 참으로 그의 가르침을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미(already)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신령한 복에 대한 것들이 강조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환난시대'에 역설을 둠으로써 주님 안에서 누리는 '현재의 신령한 복'이 너무나 약화되고 있다.
이 목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환난이 닥칠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사실 목사인 저도 이 환난을 생각하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과연 이 환난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짐승통치에서 승리할 것인가? 내 당대에 환난이 온다면 내 믿음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가끔 염려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위의 책, p. 256). 이런 고백을 들은 성도들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오늘 저녁이라도 그런 대환난이 닥치지 않을 것인가?"하여 그 환난을 준비하는 믿음이 장성한 분량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장성하지 못한 사람은 염려를 하게 될 것이 뻔하지 않을까?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즐거움이 어떤 환경에서도 변할 수 없다는 사도들의 가르침과는 너무 먼 이광복 목사의 가르침을 본다.
마감하면서
이광복 목사의 계시록에 대한 해석과 그 해석에 바탕을 둔 신학들은 필자가 그의 서적을 살피면서 제시한 것처럼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위에서 살폈던 문제들 중 덜 심각한 문제들은 이단이란 비판은 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세대주의자란 비난은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 중 심각한 부분들 때문에 이광복 목사는 이단이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 같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제외한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시대'와 '환난 종말 시대'를 구분하고 '계시록만이 종말의 복음이다'고 가르친 것 때문에 '이광복 목사는 이단'이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 같다. 필자는 이광복 목사가 지금이라도 은혜의 복음으로 돌아와 그 복음에만 사로잡혀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제안을 한 가지만 하고 말을 마감하려고 한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외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삼중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계시록을 다시 보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이광복 목사처럼 천년왕국이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자들은 계 5:10의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란 말씀 중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란 말씀을 미래 시제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도 알고 있는 것처럼({계시록 난해 해설}, p.182) 이 말씀은 미래 시제로만 아니라 현재 시제로도 기록된 사본들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원칙에 의해서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그 원리는 신약 성경 전체가 제시하는 '그리스도인 삼중직'의 원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선지자직, 왕직, 그리고 제사장직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현재도 적용되고 있다는 원칙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주님처럼 말씀으로 바르게 해석하여 주님의 삶처럼 섬김으로 통치하고 나아가 그렇게 섬김으로 통치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직이 수행된다'는 원리를 적용해 볼 때 이미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통치하는 사역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의 삼중직의 삶'을 신약의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5:10에서 제사장이 된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때에 변화된 '새 땅'이 아니라 아직 변화되지 않는 '이 땅'에서 왕노릇 하고 있다고 기록된 것을 보아야 한다. 사실 계시록은 두 종류의 땅을 묘사하고 있다. 그냥 '땅'은 주님의 재림이 있기 전, 아직 새로움을 입기 이전의 땅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 땅'은 주님 재림 이후 변화되어 '질적으로 새롭게 된 땅'이다. 성도들이 주님의 피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된 장소가 바로 변화되지 않는 이 '땅'이며 이 '땅'에서 주님처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증거자로 사는 것이 '왕노릇 하는 것'임을 모든 성도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왕노릇 하는 것'이 바로 '승리하는 삶'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처한 학문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선교지에서 이런 '왕노릇 하는 삶'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지금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 즉 '왕노릇 하는 것'은 비록 순교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계 20:4-6).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질 영원한 나라, 완성된 그리스도의 왕국, 즉 완성된 하나님 나라(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현재의 이 '땅에서 왕노릇 하는 자들의 영원한 기업'임을 우리는 강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왕노릇에 참여한 자들만이 진정 이런 화답을 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전남대(B.A) 개혁신학연구원(M.Div) 개혁신학대학원수학(Th.M) Calvin Theological Seminary in U.S.A.(Th.M) International Graduate Theological Seminary in Taiwan(Ph.D) 현) 개혁신학연구원 외래교수(조직신학) 지구촌은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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