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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관련/신앙관련

죄의 유전 두번째 반론

by 디클레어 2010. 2. 4.

 

(2) 죄의 유전을 부정하기 위한 전제와 부정의 결과

 

죄의 유전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혼이 다음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실제 혼의 형성은 두뇌세포의 형성에 크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은 비록 무형의 비가시적 실체이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할 것입니다. 혼이 인간의 운영체계라면 죄는 그 운영체계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들입니다. 그 운영체계는 다음 세대의 육체에로 기본 형태가 전이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늑대처럼 행동하지 않고 인간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운영체계인 것입니다. 그 운영체계가 바이러스에 오염된 채 다음세대에 전이된다는 것이 로마서 3-8장 특히 5장의 가르침이라고 저는 해석 분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거의 같은 생각을 해야만 지기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 올바르다는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 할 지라도 생각하는것 행동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또한 상대방을 이해하는것이나 배려하는것 등 사람만의 특성이나 성질이 다 틀리게 나타나는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늑대의 젖을 먹고 야생에서 자랐던 아이는 자신이 늑대인줄 알고 삽니다. 자라면서 자신이 그 짐승들과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수는 있겠지만 깨닫기 전까지 그의 본능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전까지 오히려 늑대처럼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텅빈 도화지에 본능과 배워 나가는 것들을 채워나가고 그려나가는 것이라고 오히려 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죄의 유전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앞선 세대의 혼과 차후 세대의 혼이 전혀 별개로 형성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인간이 태어나는데 육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육체를 기반으로 그 육체를 지휘하는 혼 또한 부모를 떠나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늑대나 어린양의 혼을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그 부모 세대의 혼들에 의해 조합되어진 혼의 체계를 갖고 태어난다고 보아야 하며 그 혼안에 바이러스처럼 기생하는 죄 또한 전이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의 시각입니다.

 

죄의 유전을 부정하기 위해서 앞선 세대의 혼과 차후 세대의 혼이 전혀 별개로 형성되었다고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니 그의 모양과 같은 비어있는 하드디스크를 물려 받은것일 뿐입니다. 그와 같은 하드디스크를 갖고 있다고 해서 어떻게 그의 소프트웨어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환경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성격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부모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마치 지신의 보는 시각이 성경의 보는 시각인양 말씀하는데 오히려 원죄론은 하나님말씀을 부정하는 시각일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분이 태아가 태어날 때 혼 없이 태어난 다음, 하나님이 매번 태아가 생길 때마다 찾아가 혼을 불어 넣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간의 혼의 단절을 위해 새생명이 태어날 때 혼없이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이므로 죽은 채로 태어난 다음 하나님이 아담에게 혼을 불어넣어 주셨듯이 매번 엠브리오가 태어날 때마다 혼을 불어넣는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수정란 (엠브리오)가 혼이 없는 육체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점입니다. 즉 흙으로 빚어 만든 아담처럼, 아직 혼을 받지 못한 아담의 몸이 진흙(흙먼지) 상태였던 것처럼, 무생물의 죽은 상태로 태아들이 태어난다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매 인간마다 혼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면 혼없는 육체는 죽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담의 경우 혼을 불어넣기 전에는 그 육체는 살아있지 않았으니까요. 세대간의 혼의 단절을 위해서는 이런 이론을 부득이 주장해야 하는 측은함이 있습니다! 세대와 세대간에 혼은 단절되지 않습니다. 자식 세대의 혼은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요소들의 결합, 조합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또한 다음세대에 전이되는 것입니다!

 

원죄론을 주장하는 모든사람이 그런 류의 주장을 하는것은 아닙니다. 세대와 세대간에 혼이 단절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비어있는 하드디스크를 물려받는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죄는 전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결과는 인간이 죄없이 태어나며, 다만 죄의 권세 아래 있다든가, 죄아래 있다는 말로 대신하여 죄가 세상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죄가 마치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없이 태어나지만 공기중에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죄의 지배 원리가 세상에 (어디에 있다고 명확히 말하지않지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인간안에 있다면 그것 또한 원죄와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인간안에 있지않다면 그것은 마치 공기 중에 있어서 공기전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런 종류도 있을 수 있으나, 인간의 마음은 이기적이고 자의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바와 어긋나지 않는다k는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음을 아시기 된다라고 말하게 될지 모르나, 그 근본은 세상이 사탄의 지배하에 놓여져있고 사람또한 연약하여 그 지배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혹은 벗어나서는 생활자체가 불가능하다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며 따라서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것은 인간의 나약함?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을 보는 저같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죄의 유전의 부정은 인간이 조금만 노력하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것처럼 믿게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의를 행할 수 없으며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수없이 가르칩니다. 인간이 조금만 노력을 더하면 의인될 수 있고 의를 이룰수 있다면 구원자가 필요없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기님께서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죄의 유전을 부인함으로써 핑계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음을 아셔야 하며, 인간은 말씀하신대로 절대로 자신의 의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원죄론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성을 합당하게 할 수 있는 소지를 던져주게됨을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것이 하나님앞에서 핑계할 수 없는가를,,, 그건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그야말로 유구무언의 상태가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회개할 수 있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되는 말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의 유전의 부정은 구원얻은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가진 원래부터 있던 죄의 뿌리, 원죄가 없으므로 우리가 죄를 안짓기만 하면, 조금만 노력하면 의를 이룰 수 있을 것처럼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계속 열심히 노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노력하게 만들며 그리하여 행위노력에 의한 성화를 추구하고, 성령님을 좇아감으로 성화를 이루는 것을 가르치기를 약화시킵니다.

 

제가 위에 올린 율법 중 과연 누가 한 가지도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기님께서는 그것이 가능하십니까? 대단하십니다. 그렇다면 정말 의인되시겠습 니다.

 

그러나 원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자아가 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랴(롬 7:24) 처럼 더 이상 자아를 바라보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성령님을 좇아 행하게 합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5장 16-24절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죄의 유전의 부정이 행위구원, 행위 성화에 이르게할 가능성은 많이 있다 하겠습니다.

 

너무 한가지만 보고 있는 편협한 시각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오히려 주 예수그리스도를 바라고 성령님을 좇아 행하려 하는것이고,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며, 내가 의롭게 행동하거나 생각하려 할 지라도 내가 생각하는 것은 죄악이고, 행동하는것은 의롭다 인정받기 힘든 일 뿐임을 고백하는 감탄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이치에 합당한 해석입니다.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인간이 죄를 깨닫기 시작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죄를 한번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원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범죄한 이후에 다윗은 자기의 간음과 살인에 대하여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범죄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은 날때부터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시편 51편). 그가 날때부터 살인했을까요? 그가 날때부터 간음했을까요? 그는 스스로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중에 자기를 잉태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원천적인 죄를 갖고 태어났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인의 생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럴것이다라는 말로 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초보자가 아닙니다. 죄를 한번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믿음에 입문했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다윗의 고백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내 뱉는 자기 고백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 보죠 내가 그릇을 하나 깼다고 칩시다. 그전에도 그런 그릇을 깼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애고 내가 그렇지 머, 어째 하는 짓이 칠칠치못하게 항상 이 모양이다냐, 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죄 말고도 그 때까지 살아오는 중에 하나님앞에 죄라고 하는것을 짓지 않았다고 혹시 생각하시는 겁니까? 다윗은 위대한 종이기에 그 죄 밖에 다른죄는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지기님의 말씀이 옳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는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차츰 생각해보면 그러한 범죄행위는 수많은 일들과 삶의 연속으로 연결되고 얽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었던 범죄행위는 우리가 갖고 있던 전체 죄덩어리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깨닫고 자아가 죽는 것밖에는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 하게 되며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사망의 몸이 생명을 얻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몸은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고 못박혔음을 재확인하며, 이제는 새생명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사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죽노라(고전 15장 31절)를 날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좋으신 말씀입니다, 다만 죄의 유전을 주장하지 않고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원죄라는 것이 없고 자범죄만 있다고 생각하면 항상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됩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죄를 안 짓는데, 만일 실수하여 죄를 지었다면 회개하고 다시 노력합니다. 이것은 유교나 도덕에서도 가능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깊이도 다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생명인지에 대해서는 주님이 판단하실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끝까지 견디는 믿음인가? (마 24:13) 에 대해서는 의문시됩니다. 회개의 깊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범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항상 노력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얼굴을 들지 못하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를 안짓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앞에 죄인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으니, 에라 죄를 짓자,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 끝에 다달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금도 죄를 다스리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거듭나고 구원받았다라고 한다면 이런 노력도 하면 안되는 겁니까? 회개의 깊이가 어느것이 깊은지는 주님이 판단하실 일이겠지요,

 

이러한 믿음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곧 잡힐 듯하고 이룰 듯한 의를 향해 자유의지를 사용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노력을 끝없이 하도록 오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거듭난자는 어떻게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생명책에 이름이 적혀있는것을 보셨습니까? 거듭났다고 믿고 살았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 혹시 그 이름도 지워질 수 있음을 아시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자만하지 말아야합니다. 아버지앞에서 심판을 받아 의롭다 인정받는 그날까지 우리는 의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라는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은 죄를 안고 태어나서 죄인나무와 같으며 죄인나무가 죄를 열매맺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 죄인나무가 행할 수 있는 최초의 선행은 바로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로 접붙임 받는 것입니다. (롬11:17-24)

 

지기님께서는 마지막에 실수를 하셨습니다. 마치 모든 사람은 죄를 짓는것이 당연하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깊은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진리를 뒤에 둠으로 앞에 것까지 같이 진리인양 끌고 가시는데 대단한 실력을 보이고 계십니다. 아직도 차이점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 말씀은 허공에 메아리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