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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계시록강해노트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 강해 열 다섯 번째 시간

by 디클레어 2011. 8. 4.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 강해 열 다섯 번째 시간 2021*10/04

 

 

 

계시록15장

 

 

 

 

강해에 들어가기 앞서 이 계시록을 보고 계신 여러분들께 한마디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사실 계시록에 관심을 가지신 분도 많지 않을 뿐더러, 설령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用語(용어)에 관한 全般的(전반적)인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계시록을 알려고 하는데 대해 어려움을 겪는 걸 보아 왔습니다. 그건 이 동영상을 보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한이레라는 말이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짐승, 열왕, 넷째 짐승등 자주 쓰지 않는 말들이 등장함으로 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용어쯤은 아시는 분들 가운데서도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이나 많은 그릇된 오역들로 인해 그동안 들어왔던 기존의 관념들도 打破(타파)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은 이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에 시간을 들이는 것에 대해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르는 용어가 있어도 자주 듣다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해석들도 이 계시록을 봄으로 해서 그 오류를 알 수 있게 될 테니 말입니다. 이 동영상을 보거나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을 읽는 그 시간들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 들인 수고였으므로, 혹시 이 계시록이 설령 틀렸다 하더라도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닐 것이며, 그러니 그 노력을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더불어 기왕이면 이번 기회에 계시록을 알고 그 의미를 깨닫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도 바랍니다.

 

 

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들중에는 히브리문학의 構造(구조)가 어떻느니, 그들의 傳統(전통)이 어떻느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들의 주장을 들어볼 필요는 있다고 하겠지만, 그런 것들에 마음이 흔들리면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히브리인들의 관습이나 생활양식, 정신세계, 그들의 문학구조와 깊숙이 연관이 되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메시아닉 쥬라 불리는 히브리인 교사중에서라도, 벌써 계시록을 푸는 사람이 나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됐다면 이 한국이란 나라에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아직도 다투고 있는 일은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계시록은 한 가지가 정답입니다.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같은 자에게 드러내 보이신다고 하는 주님 말씀을 생각해서라도 이름 있는 분의 강해만 찾지 마시고, 이름 없는 자들이 해석하는 계시록 풀이에 관심을 두시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고 적은 수에게만 아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그 분의 많은 비유들은 그것을 아는 것이 허락된 제자들에게만 풀이해 주셨음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 말을 듣는 대다수의 유대사람들은 그 말씀하신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라는 얘기입니다. 이 계시록은 히브리 문화권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계시된 것이 아니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찾으려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계시된 것이니만큼,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자에게 눈을 열어 보여 주실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니 본질은 외면하고 껍데기에만 치우치는 강해에도 눈을 돌리시고,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겠는가를 광대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맞춰 판단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계시록에 관련한 성경구절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잠깐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 어떤 민족은 사랑하시고 또 어떤 민족은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을 상고할 때 그런 견지에서 말씀을 본다면, 똑같은 글임에도 새로운 느낌들로 다가오고 또 깨달아짐을 느낄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표현방법을 알아내도록 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모세를 대적했던 이집트왕인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시겠다는 것 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의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내 버려 두시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을 말입니다. 같은 의미로, 도망하라 라는 말도 도망하는 主體(주체)인 내가 도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客體(객체)가 되어서 그 분께서 나를 도망시킬 것이다, 라고 풀이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는 秘密(비밀)유지의 관점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먼저 그 분의 비유로 말씀하신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계시록이 풀어질 수 있는 초기단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학설이나 연구, 관념들에서 먼저 벗어 나시고, 특히 먼저 자신의 시각을 변화시켜 보십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감추신 비밀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상 간단하게나마 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1) 또 내가 하늘에서 크고 놀라운 다른 표적을 보았는데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졌더라. 이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들 안에서 끝마치리로다.

 

이 1절중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들안에서 끝 마치리로다의 번역은 오역이므로 다시 번역해 보자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일곱 재앙안에 가득 차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영문번역에 따른 다른 오해는 없으시기 바랍니다. 사도요한은 도성밖에서 포도송이들인 칠천 명의 배도자들이 짓밟히는 것을 보고 나서 이 일곱 천사의 표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후 삼년 반, 마흔 두 달의 적그리스도의 때가 끝나고 나서, 모든 성도들이 승천하고 난 후에,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45일간 쏟아질 것에 대한 준비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진노는 계시록16장에서 쏟아지게 되므로 이 15장에서는 그동안의 순교성도들의 원한을 풀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豫備(예비) 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대접이 45일간 쏟아진다고 해석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서에는 날짜들이 특히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니엘12장에는 특별한 날짜가 있음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 날짜들은 11절과 12절에 있습니다.

 

(11) 날마다 드리는 희생제가 폐지되고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세워질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이 될 것이니라.

의 1,290일과

 

(12) 기다려서 일천삼백삼십오 일에 이르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 1,335일입니다.

 

일단 11절의 멸망케하는 가증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그 모두를 열거하는 일은 하지 않고 결론만 말씀드려서 그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라는 것은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4장15절과 연계해서 데살로니가후서2장3절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며 이미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드리는 희생제가 폐지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니엘9장 2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7) 그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 그는 가증함을 확산시킴으로 황폐케 하리니 진멸할 때까지 할 것이며, 정해진 것이 황폐케 한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더라.

 

이 절을 보면, 날마다 드리는 희생제가 폐지된다는 일은 한이레의 중간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폐지된다는 그 의미는 두증인을 죽이는 일, 즉 주의 성도를 그 해 그달 그날 그시에 죽이는 것이라고 설명드린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라고 했으니, 적그리스도가 서는 것 역시 한이레의 중간정도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이레는 아시다시피 7년이고 그 중간이면 4년째로 들어가는 때이니, 후 삼년반 기간은 달로 치면 마흔 두 달이며, 날로 계산하면 1,260일인데 여기서는 한달인 30일이 더해진 1,290일이므로 그 가증한 것이 서는 날은 마흔 두 달인 1,260일의 한달 전이 될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날짜를 합쳐 1,290일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 1,335일에 이르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으므로 그 복은 주님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이 때에는 어떠한 복도 있을 수 없으므로, 그 차이인 45일이 가리키는 것은, 마흔 두 달인 후 삼년반이 끝난 이후에 하나님의 진노대접이 쏟아지는 날들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주님의 진노가 끝난 45일후에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27절은 단 한절이지만 시간은 한이레하고도 진노의 기간 45일이 더해져 있어서 총 7년하고도 45일이란 기간이 됩니다. 이렇듯 단 한절에도 7년 이상을 담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으니 사람의 생각으로 그 분을 판단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짜들을 해석하려하는 수많은 시도들 중, 다니엘11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일들을 이것에 椄木(접목)시켜 해석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니엘11장은 역사적인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이 12장은 적그리스도의 한이레이므로 11장과 12장을 같은 線上(선상)에 놓고 해석하려 하다 보니 엉뚱한 해석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일인 11장의 사건을, 미래의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연관시키는 하나님의 표현방법을 안다면, 이제 그런 해석은 止揚(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를 알아보기 위해 11장과 연결되는 다니엘 12장 1절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1) "그때에 미카엘이 일어서리니, 이는 네 백성의 자손을 위하여 일어서는 위대한 통치자라. 또 고난의 때가 있으리니 그것은 민족이 생긴 이래로 그 때까지 결코 없었던 것이라. 그 때에 네 백성이 구제될 것이니, 곧 그 책에 기록되어 발견될 모든 자들이라.

 

이 미가엘이란 이름의 뜻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뇨, 라는 의미로써 그를 천사장중의 한 명으로 보기도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로 보는 해석가들도 적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미가엘은 계시록12장에서는 붉은 용인 사탄과 전쟁을 해서 그를 땅으로 내 쫓은 천사이기도 한 것을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다니엘12장 1절에서의 미가엘은 구절안에 들어있는 그 이름의 의미로 보아서 예수그리스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고난의 때가 있을 거라고 하는데, 그것은 민족이 생긴 이래로 그 때까지 결코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 이 민족이란 것은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던 무렵에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하신 이후에 생긴 것이니, 거의 창세때로 봐도 무방할 것이며,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24장21절에서 적그리스도의 마흔두달기간에 일어나는 일을 예언하신,

 

(21) 이는 그 때에 대환란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와 같은 때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다니엘12장1절은 11장과는 그 주체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니엘12장1절의 미가엘과 그 고난의 날 이후에 나오는 말씀들이 모두 구원의 후사인 말세의 성도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며, 그런 시각에서 분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에 네 백성이라 하시는 중에 네 백성이 가진 의미는 육적이고 혈통적인 그리고 민족적인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곱 교회에 속해있는 세상열방의 구원 얻을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너무 비약하는거 아니냐 하는 분들도 있고 대체신학이란 말을 만들어 신학의 일종으로 몰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성도들은 이런 미혹들에 흔들려선 안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이 다니엘서를 유대인들만을 위한 계시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둘을 분리해서 해석하는 강해는 그 시작부터 틀렸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한이레의 일을 계시하신 마태복음 24장에서 다니엘을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에 기록되어 발견될 모든 자들의 그 책이라는 것은 마흔 두 달의 대환란을 이겨내고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으로 그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이름과 창세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의 이름이 녹명된 생명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보았던 이 다니엘12장 11절과 12절의 날짜들이 단지 역사적으로 과거에 지나간 날들이 아니며, 적그리스도의 한이레에 관련한 날짜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다니엘서는 주님 초림하시기 약 5, 6백년전에 쓰여진 선지서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오셨을 때는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으며, 말세라고 불리는 적그리스도의 한 이레에 대해 모두 알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니엘서를 계시하시기 전인 천년 전에는 이것을 모르셨을까요, 아니면 그 이전인 이천 년 전에는 이런 적그리스도의 한이레의 일들을 모르셨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이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오백년 전일을 알고 계신분이, 아니 지금으로 치면 이천 오백년 전에 이천 오백년후에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시는 분이, 창세적에는 그러니까 그 보다 조금 길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삼천 오백년 정도후에 있을 일을 모르셨을까 하는 겁니다. 그것을 모르셨다면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그 분의 말씀이 스스로 부끄럽게 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 참이요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 분의 말씀이 거짓말이 된다는 것이며, 자신의 말에 책임도 못지는 그저 사람의 위치정도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분은 변할 수 없는 신 중의 신이시며, 절대적이라는 그분의 전능하신 속성을 이제는 성도들이 깨달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좁고 어둡고 캄캄하고 답답한 자신의 관념속에 가두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모두 豫定(예정)하신 이런 일들을 시작하셔야만 하셨는가가 궁금할 것이며, 제 말을 이해했다면 그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아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에 대해 제가 드릴 대답은 여러 가지 정답중 한 가지에 불과할 것입니다만, 일단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분께서는 동료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대화가 통해야 가능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저 애완동물에 불과하게 되거나, 어린아이처럼 보살펴만 주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며, 아예 대화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비슷해야 하고, 또 더욱 마음이 맞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감정을 나도 생각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에게는 참으로 많은 감정들이 있고, 그 감정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담아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기쁨이나 슬픔, 화냄, 즐거움, 동질감, 이질감, 애착심, 열등감, 자부심, 자만, 반성, 책임감, 교만, 기대감, 증오, 명예욕, 욕심, 질투, 무시, 우애, 사랑, 애증, 분노, 자애, 멋쩍음, 무시당함, 수치, 우울함, 창피함, 황당함, 부끄러움, 안타까움, 자괴감, 성취감, 실패, 성공, 자랑, 과시욕, 겸손, 이해심, 동경심, 동정심, 소유욕, 아첨, 부탁, 배려심, 부러움, 아쉬움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런 감정들을 알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분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니, 바로 그런 것들을 알게 하시려고, 그 분의 택하신 자녀들을 이 세상에서 연단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주는 스가랴13장9절에 보겠습니다. 사실 이 때의 시기는 천년왕국이후에 있을 곡과 마곡전쟁이 일어날 때의 일이긴 하지만, 택하신 성도들을 연단(煉丹)시키고 鍛鍊(단련)시키시겠다는 그 분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로 통과하게 해서 은을 정련하듯이 그들을 정련할 것이며, 금을 단련하는 것처럼 그들을 단련하리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할 것이라.

 

여기서도 삼분의 일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 때의 삼분의 일은 천년왕국에 참여한 일곱교회의 성도들과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중의 삼분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이 때의 인류의 수를 짐작해 본다는 것은 감히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할 만큼의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중에 그런 말씀이 있으니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5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5)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시기를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다면 그 별들을 세어 보아라." 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씨가 이와 같으리라." 하시더라.

 

또 그것을 확인해 주는 22장17절에 보면

 

(17) 복으로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번성으로 내가 너의 씨를 하늘의 별들처럼, 또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케 하리니 네 씨가 그의 원수들의 문을 차지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듯 이렇게 하늘의 별만큼 많은 수와, 바닷가의 모래숫자만큼 셀 수 없는 수가 바로 이 천년왕국때에 완성되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다시 그 가운데서 삼분의 일을 택하시고 그들을 연단시킨다고 하십니다. 그 의미는 바로 이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인해 그들을 연단시키실 것이고, 또 그 연단이 끝난 후에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다고 하는 계시록22장5절을 이루실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동료와 친구들로 삼으시려고 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말씀들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누가복음12장4절에서는 그 제자들을 친히 친구라고 부르셨으며, 14장12절에서는 그 비유 말씀중에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호칭에도 친구를 사용하셨고, 죽음을 당한 나사로에게도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으며, 요한복음15장 13절로15절까지는 너희는 종이 아니고 친구라고 하셨으며, 그 분 자신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라고 볼 수 있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것이나, 그리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해 아흔 아홉마리를 버려두고 그 양을 찾으려 한다는 것 등, 이 모든 비유와 말씀들이 결국 성도들을 친구로 만드시려고 한다는 그분의 속마음을 알려주려 했던 말씀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創造主(창조주)이신 그 분께서 굳이 十字架(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나 그 아들을 치욕스런 죽음에 처하게 하셨던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렇게 단련시킨 그 분의 자녀들을 결국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마치고 난 이후에는 역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는 것이며, 연단받고 택함 받은 모든 성도들도 그 안식에 같이 참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는 감히 상상을 불허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를 시작하신 이유라고 볼 수 있으며, 또 근원적인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던 이사야43장7절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 그 분의 얼굴을 뵙기전까지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고,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나팔을 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마음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남긴 말 중, 오직 표적을 보고 달려가노라가 가진 말의 의미임을 알아야 하고, 택함 받은 자라면 당연히 영적인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말이지요. 하나님의 全知全能(전지전능)성을 설명하려다 보니 조금 길어졌지만 부디 이 계시록강해를 보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기를 간구합니다. 다음 2절,

 

(2) 내가 보니, 불로 뒤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그 짐승과 그의 형상과 그의 표와 그의 이름의 숫자에 대하여 이긴 자들이 하나님의 하프들을 가지고 유리 바다 위에 섰더라.

 

계시록4장을 해석할 때, 이 15장의 유리바다를 비교분석하면서 이 불로 뒤섞인 유리바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라고 풀이했음을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고, 이 유리바다위에 서 있다는 것은 14만4천명이 하나님의 보좌앞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이 순교성도들이 위로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순교성도들도 승리하였으므로 십 사만 사천과 같은 하프를 들고 찬양함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3절과 4절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 노래보다 먼저 하는 소리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라고 하는 계시록7장 10절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14만4천 이후에 나오는, 수를 셀 수 없이 많다고 했던 그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순교했으며, 그럼으로 해서 지금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資格(자격)이 생긴 것입니다. 이들은 둘째사망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땅에는 순교를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으면서 피해 다니는 나머지 성도가 주님 재림을 기다리며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음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그들도 주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이기에 다니엘12장12절의 말씀처럼 복이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찾아 보자면, 누가복음18장8절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한을 속히 갚아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시더라.

 

라는 말씀중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했을 만큼 혼란한 시기에도 믿음을 지켰으며, 소망을 잃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들이기도 하기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중에서 그들의 원한을 속히 갚아 주시리라는 것은 마흔 두 달 기간에 적그리스도에게 죽임당한 순교성도의 원한을 갚아 주신다는 것을, 불의한 제판관의 비유에 맟춰 암시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세대에 대해 하시는 말씀이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하시더라, 의 그 의미인 것입니다. 또 이 휴거성도들에 대한 것은 스가랴서14장2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구절중에서 백성의 나머지는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이 나머지 백성들도 주님 재림시 휴거될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그 구절하나에 담긴 뜻이 실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너무 많고 또 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말씀의 의미를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다음 3절,

 

(3) 그들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며 말하기를 "전능하신 주 하나님, 주의 행하신 일이 위대하고 놀라우니, 성도들의 왕이여, 주의 길은 의롭고도 진실하나이다.

 

이 3절을 해석한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존중하여, 그들의 해석을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Ladd는 두 가지의 노래 즉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서로 다른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을 배경으로 하여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한 것이며, 어린 양의 노래는 짐승의 핍박과 위협으로부터 구원된 자들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많은 학자들이 이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는 한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하고, 두 가지의 노래가 하나로 합쳐져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양의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거나 또는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이 어린 양의 구원을 豫表(예표)하는 모형이라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하나의 찬양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 두 주장이나 해석은 大同小異(대동소이)합니다. 어떠한 것이 되었든 문제가 없다는 얘깁니다. 이런 류들의 해석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사실 어떻게 해석되어도 큰 줄기에는 영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명삼아 말씀드리는데 혹시라도 제 해석을 들으시면서 여러분들의 생각과 조금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또 해석중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나, 큰 見地(견지)에서 생각을 하시고, 자질구레한 오류들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실 벌써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과 비교해 오류가 발견된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작은 오류들로 인해 큰 줄기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제 해석은 가장 최근에 해석한 것이 가장 오류가 적다는 것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그런 점을 참고하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4) 오 주여, 누가 주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나이다. 모든 민족들이 주 앞에 나와 경배하리니 이는 주의 심판이 나타났기 때문이니이다." 라고 하더라.

 

 

앞선 계시록14장에서의 해석 중 진정한 경외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 분을 두려워해야 하는 마음도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구절들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앞에 흠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죄악을 가리워 주는 자들이기도 하고, 또 정죄를 당하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하기에, 지금 이토록 기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는 자들이 과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그 이름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자신들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그들이였기에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 또 이 후에 내가 보니, 보라, 하늘에 있는 증거의 성막의 성전이 열리며

 

 

이 5절에 나와 있는 하늘의 성전을 비교분석하기 위해, 역시 같은 성전이 나오는 요한계시록11장에서 마지막절인 19절을 보겠습니다.

 

 

(19)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성전 안에 있는 그의 언약궤가 보이더라. 또 거기에는 번개들과 음성들과 천둥들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이 11장은 아시겠지만 두 증인이 적그리스도의 마흔 두달, 즉 후 삼년 반 말경에 다시 살아나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그런데 그 삼년반인 사흘반이 지나고 난 후에 일곱 번째 나팔인 하나님의 일곱 대접진노를 이어가지 않고, 이런 상징적인 말씀들을 기록하심으로 시간을 초대교회의 탄생으로 돌리시고, 계시록 12장의 기록을, 해를 입은 여인으로 시작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11장 14절에 보면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오리라. 의 이 셋째 화가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쏟으시는 일곱 번째 나팔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이제 다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11장 마지막 절인 19절의 기록을 다시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성전이 지금 보고 있는 15장 5절에 나와 있는 하늘에 있는 증거의 성막의 성전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계시록의 장들이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된 것만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 하시는 결과가 되었고, 그렇다면 계시록11장19절에서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장은 이 15장이라는 것을 아시게 된 것이며, 또 15장중에서도 더 정확히 이어지는 절은 이 5절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앞서 보여드린다고 했던 시기에 대한 증명을 다시 한번 해 드렸는데, 그러나 역시 여전히 미심쩍어 하시는 분들은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는데 이 계시록은 한번 듣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니 만큼, 성경과 숫자로 푸는 요한계시록과 이 계시록 강해를 비교하며 서로 분석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6)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는데 일곱 재앙을 가졌으며,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고 그들의 가슴에는 금띠를 둘렀더라.

 

여러분께서는 앞서 계시록1장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요한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 외모를 설명하는 13절에서 그 분의 가슴에 금으로 만든 띠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같은 장 1절에 있는 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명을 받아 그 일을 천사를 보내 요한에게 알게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아버지의 명을 받아 그 일을 행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의미로 이 일곱 천사들이 세마포위에 금띠를 둘렀다는 것도 하나님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성전에서 나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일곱 천사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하나님의 일곱 진노 대접을 쏟아 붓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른다는 것은 제사장의 의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명한 출애굽기28장을 연상시키는데,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심에 있어 어떤 원칙을 가지고 처리하심도 알 수 있습니다.

 

 

(7) 그때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영원 무궁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찬 일곱 금호리병을 일곱 천사에게 주니

 

 

이 7절에서는 이 일곱 천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며, 그들이 할 일은 앞으로 16장 실행 장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8절,

 

 

(8)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권세로부터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차서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끝나기까지는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더라.

 

성전에 연기가 가득찼다 라는 것은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때, 하나님의 성막에 차있던 연기처럼 그리고 구름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재앙이 끝나기까지는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더라, 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이루기까지는, 아직 모든 일이 마무리 되지 않은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도 보시고 판단하셨듯 이 15장은 진노가 쏟아지는 것을 예비하는 진노의 준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그 진노가 땅으로 쏟아지는 실행장인 16장 강해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