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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관련/성경교제관련

하나님의 公義(공의)

by 디클레어 2011. 11. 25.


하나님의 公義(공의)





이 글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더불어 상고해 본 선교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모두 불못에 들어가는가, 와 연결선상에 있는 글임을 미리 밝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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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주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13) 인자야, 그 땅이 심하게 범법함으로써 나를 거슬러 죄를 지으면 내가 내 손을 그 땅 위에 펴서 식량봉을 꺾을 것이요, 기근을 그 위에 보낼 것이며, 사람과 짐승을 그 땅으로부터 끊으리라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땅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의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혼들만을 구해 낼 뿐이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15) ○ 만일 내가 악한 짐승들로 그 땅을 지나가게 한다면 그들이 그 땅을 망쳐서 황폐하게 하리니 그 짐승들 때문에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리라.

(16) 비록 이 세 사람이 그 땅에 있을지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아들들이나 딸들도 구해 내지 못하고 자신들만 구해 내며 그 땅은 황폐하게 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17) ○ 또한 만일 내가 칼을 그 땅 위에 가져와서 말하기를 "칼아, 그 땅을 지나가라." 하여 사람과 짐승을 그 땅으로부터 끊으려고 한다면

(18) 비록 이 세 사람이 그 땅에 있었을지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아들들이나 딸들도 구해 내지 못하고 자신들만 구해 내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19) ○ 또한 만일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보내고 피로 내 진노를 그 위에 부어 사람과 짐승을 그 땅으로부터 끊으려고 한다면

(20) 비록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그 땅에 있다 할지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구해 내지 못하고 그들의 의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혼들만 구해 내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에스겔14장.


에스겔14장의 이 말씀은 마태복음10장의 말씀과 오버랩되어 그 분에게 택함을 받았다 할 지라도 자기 식구 한사람도 자기 뜻대로나 마음대로 구원받게 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느낄 수 밖에 없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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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생명을 찾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라. -마태복음10장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큼은 하나님앞에 특별한 존재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싶어 하게 되며, 이내 성경을 보고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는 말씀들을 찾게 되고 결국은 찾아내어 거기에 기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방해가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요사이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명제는 간단합니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확한 진리의 말씀인가요, 그런데 성경에는 단순히 그것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 나의 형제들아, 만일 누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야고보서2장


이렇듯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설파(說破)합니다. 마음으로만 믿어서는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술 더 떠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구원받았다고 단정지을 수 만은 없다. 라는 것을 로마서를 쓴 바울은 말년이 되어 깨닫게 됩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씀은 신실하며,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죄인들 중에서 내가 우두머리라. -딤전1장


죄인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이가 하나님보시기에 의로운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가 죄인들 중 우두머리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의 직책을 감당하고 있었음에도, 또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행위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역을 끝마쳐갈 즈음에 이르러서는 자신은 죄인의 우두머리일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봤던 에스겔14장의 말씀에 비추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깨달은 사람의 자기고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앞서 봤던 간단한 명제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모조리 불못행이다.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또 그들은 이 생각을 合理化(합리화)하고자 아브라함도 예수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알았으므로 구원받았고, 이방인인 욥도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구원받았다는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正統(정통)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敎理(교리)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神學(신학)을 했다는 自稱(자칭) 聖職者(성직자)들이 말하는 救援(구원)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예수그리스도 以前(이전) 異邦(이방)에 태어났던 모든 사람들과 또 그 후에 태어나긴 했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地獄(지옥)에 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聖經(성경)을 曲解(곡해)하는 자들에게서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저 또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게 될 곳이라고 가볍게, 정말 아무 생각없이 말하고 있는 지옥, 즉 불못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가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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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5) 네 발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발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46)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7) 네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뽑아 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48)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모든 사람이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이며, 모든 제물이 소금으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마가복음9장


이렇듯 끔찍한 곳이 불못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는데 태어나자 마자 굶어죽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매스컴을 통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또 생명과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듣기도 전에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는 이슬람권의 아이들, 특히 이스라엘의 총탄에 스러져가는 팔레스타인의 가엾은 어린아이들을 매체를 통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과연 그들이 고통 받아 마땅할 죄인으로써 구더기도 죽지 않고 사람들이 불로 소금 치듯 하는 이 불못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그 아이들은 自意(자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땅에 태어났고, 단지 이슬람이 國敎(국교)인 나라에 태어났으며, 자신의 의지와도 아무 상관없이 믿음을 강요당해야 했고, 더군다나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종교의 삶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런 그들이 사람을 불로 소금치듯 하는 불못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서야 저도 고백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정말 잔인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앞에서 차마 낯을 들지 못하고,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불못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계시록의 해석에 목메달았다고 자부하는 저도 그들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예수그리스도를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고, 또 듣는다 하더라도 내 나라의 適(적)인 이스라엘에서 파생된 종교는 거절했을 것이며,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쩜 내 나라, 내 조국, 내 종교를 위해 오히려 민족의 적인 이스라엘에 자살 폭탄을 감행하는 특공대원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아무 생각없이 지옥불에 던져 넣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잔인하고 불합리한 것인지 이제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 여기서 다시 앞선 에스겔14장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셨을 때, 그나마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는 세 사람, 즉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라 할 지라도 자신외에는 아들이나 딸이나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말씀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사이에 자신은 이미 노아나 다니엘이나 욥처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넘치고 있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영역인 다른 사람의 구원여부까지 판단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단지 일부에게서 이단이라고 공격받는 구원파를 얘기하는 것만이 아니며 기독교계에 널리 퍼져있는 救援(구원)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또 믿고 있으니 자신은 하나님께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생각은 지극히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 가는 그들이 모두 불못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혹시 본인은 자신의 의가 노아나 다니엘이나 욥처럼 하나님앞에 의롭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혹시 “그렇다”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교만한 사람이고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를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그 분은 그런 교만함을 결코 보지 못하시니 말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사탄이 불못에 들어가게 될 것을 몰라서 그를 비난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너를 꾸짖는다고만 했단 말입니까?


(9) 그러나 천사장 미카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더불어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그를 모독하는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느니라."고 말하였느니라.-유다서1장


이처럼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떠벌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혹여 그 마음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믿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변질되기 쉽고 따라서 신실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예 맹세같은 것은 하지도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죄를 불러오게 되는 것이니 말이지요. 혹시 그 상황을 못 이겨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보다 자신의 믿음이 더 출중하다고 여기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호! 그리스도인들이여 자만하지 마십시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기 쉽고 변하기도 쉬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여기서 다시 처음 명제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자만하지 않고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직위는 그 분께서 신으로 인정해 주실 만큼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주님께서도 공생애중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귀가 굴복하는 것에 기뻐하지 말고 생명책에 이름이 녹명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을 만큼 이 구원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겸손해야만 할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굽어보며 스스로 큰 체하고, 나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라며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흡사 세리보다 의롭다고 自高(자고)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했던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이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이미 친아들이 있고, 그 후에 양자로 데려온 아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 삼아주어서 고맙다고만 하던 그 양아들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당당하게 마치 자신이 재산을 모은 것 마냥, “당신의 재산중에 당신의 친아들에게 줄 것을 뺀 재산의 나머지 절반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물론 당신이 데려온 아들이고 당신이 그 양아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면 거절하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마음이 河海(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다지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입니다. 어쩜 그 녀석이 너무 뻔뻔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바라는 양아들의 상은 그저 주면 주는 대로, 적으나 많으나 오직 고마움만을 느끼는 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바로 지금 당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생각과 감정들을 넣어 주셨을테니 말입니다. 당신은 그 분께 선택받긴 했지만 양아들입니다. 혹시 친아들이어서 재산을 당연히 분할받아야 할 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양아들이면 양아들답게 그저 그 분께서 바라시는 이쁨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 비유를 든 이유는 구원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얘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